본 연구는 오늘날 회화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고,회화의 본질은 무엇인지,모더니즘 미술의 강령이었던 매체나 평면성에 대한 한계가 드러난 오늘날에도 회화가 존립 가능한가에 대한 방법과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있다.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는 회화의 표현 양상들과 미술의 화두인 중심의 상실, 즉?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 회화의 본질은, 감각의 표현으로서의 회화가 그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는데 목적이 있다.
모더니즘 미술은 매체의 순수성과 회화의 평면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에서 매체와 평면성은 절정에 다다르는 듯 했다. 그러나 작품에서 재현적 일루전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한,1960년대 등장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이러한 추진력에 난제를 불러 왔다.
미술은 모든 일루전과 추상표현주의에 남아 있던 작가의 표현적 정서마저도 제거하여, 결국 아무런 재현 없이 사물성을 현전화 하는 연극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미술의 자율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더니즘 미술의 강령이 되어버린 매체의 순수성과 평면성 개념은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재현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에서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지만 회화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 추구해온 과정들에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본 논문은 회화의 본질이 재현, 또는 모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차원에서,플라톤 이래 지속되어온 리얼리즘(realism)적 세계관과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구조주의적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하나의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모더니즘 회화의 본질 개념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감각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이론이 회화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새로운 의의를 갖는가를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예술 작품은 무언가가 지각될 때 발생하는 변화들을 표현해야 하고,그 변화들이란 사물의 개념적 동일성, 주체로서 예술가의 정체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지각들과 감각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한 방향에서, 예술이 근본적으로 주체의 정체성과 사물의 상태들의 재현을 거슬러 변화와 차이 그리고 강도에 입각한 잠재적 운동과 생성을 포착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예술론을 근거로 논의를 전개해 나아갔다.
들뢰즈의 예술론의 바탕이 되는 감각론은?거울?이라는 사유의 이미지로 구축된 근대의 재현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함께 현대 회화에서 구상의 파괴로써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909-1992)의 작품에서 이 재현적 모델의 파괴를 보았다.
구상을 포기함으로써 재현적 대상성을 극복하되 추상의 길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화가의 주관성마저 극복하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직접적인 신경시스템을 통해 작용하는 형상의 감각론이다.
회화는 구상적인 것으로부터 형상을 끌어내야 하고, 형상은 감각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이며 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인데, 그것은 형상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하기 위해 신체를 변형시킨다.
재현의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각의 고유한 힘을 포착하고, 시각적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촉지적 기능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발견해낸 감각의 논리이며 회화의 본질이다.
제 1장에서는 들뢰즈의 회화론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유 체계와, 감각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그리고 들뢰즈가 보는 회화론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들뢰즈의 감각적 회화론의 배경이 되는 이론들이 리좀모델, 유목 사상, 기관 없는 신체 등을 통해 사유의 비자발적인 기호들에 의한 진리 인식과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는 탈위계적인 체계임을 밝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아무런 중심 없이 중첩되어서 가변적인 형태의 노마드적 분산을 이루는 차이의 사유를 발전시켜, 우리의 현실에 무한히 개입하고, 현대 예술의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으며 새로운 연결접속들을 발명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은 자연의 일부인 신체의 유기체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신체란 결국 살아있는 것이지만 유기체적인 것은 아니고,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구성적인 유기적 조직체가 없는 것으로 조직적 원리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의 신체를 자연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자연에서 벗어나 영혼숭배에 빠져있는 인간이 ?몸?을 중심으로 탈영토화하고?리좀?화 할 수 있는 ?탈주의 선?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이론을 배경으로 들뢰즈의 비재현적 감각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로서, 예술작품은 감각의 집적인 지각과 정서의 복합물로 주?객 이분법을 넘어서서, 느끼고 느껴짐의 일체성을 나타내며 감각적 집합체들을 창조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감각론을 바탕으로 들뢰즈는 회화의 본질을 추상을 넘어선 형상의 감각론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음을, 추상 회화론과 형상의 감각론, 그리고 힘으로서의 표현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모더니즘회화에서 그린버그의 간판이 되었던 추상표현주의의 한계와 난점을 들뢰즈의 유목적인 선과 비교함으로써,새로운 제3의 방법인 형상적인 것,즉 신경 시스템 위에 직접 작용하고 감각자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밝혔다.
감각은 체험된 신체 속에 있고 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은 형상의 고립을 통해서이며,형상은 감각의 조건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은 리듬,긴장,힘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동적인?힘?으로서 히스테리의 발작을 창조하며 신체의 변형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장에서는 들뢰즈의 감각론으로서의 회화를 표현하는 방법이 베이컨의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베이컨의 작품을 사례로 분석하여 제시함으로써 감각론으로서의 회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고자 하였다.
들뢰즈의 감각론으로서의 회화의 방법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구상적이고, 판에 박힌 것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동그라미,입방체,트랙을 이용하여 형상을 고립시킨다.
회화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하는 것인데,그것은 형태를 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것, 즉 신체를 변형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상을 고립시키고, 신체를 변형시켜도 남아 있는 판에 박힌 잔재들을 디아그람- 돌발흔적으로 재빨리 벗어나, 회화적인 형상을 구성해 내는 것이 베이컨의 회화의 전략임을 확인하여 주었다.
그리고 비의지적인 돌발흔적으로서의 디아그람을 통해, 회화는 혼돈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리듬의 싹을 구성해 내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제3장에는 들뢰즈의 회화론이 갖는 의의를 첫째로, 모더니즘 회화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해온 회화의 본질이 순수한 매체로의 환원과 평면성 개념이었고, 모더니즘 회화가 자신의 자율성을 성취하기 위해 재현적 일루전을 제거하려 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재현 없이 사물성을 직접 현전화 하는 미니멀리즘을 탄생하게 하였다.
또한 미니멀리즘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작가인 저드(D. Judd)는 작품들이 하나의 사물적 성격을 띠게 될 때 회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작품의 사물화가 연극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미술의 자율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지점에서 들뢰즈의 형상의 감각론이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대안임을 제시하였다.
둘째로는, 감각의 고유한 힘을 포착하기 위한 발명을 넘어, 시각의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촉지적 기능을 실현함을 그 의의로 들었다. 구상적 형태를 혼란시키며 눈에 종속되지 않는 디아그람의 법칙을 따르고, 접촉기능을 자체 내에서 발견해 냄으로써?형상?이라고 하는 형태를 산출하는 회화전략은 진부함과 추상의 늪에 빠진 현대 회화를 구원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술의 회화사에서 재현의 논리가 극복되는 과정과 들뢰즈의 감각론이 어떻게 재현의 논리를 극복하고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재현을 재정의 하고,미술은 재현의 체계가 아니라 감각의 생성을 표현하는 감각적 존재임을 밝혔다.
서구의 미술사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재현,모방 개념을 들뢰즈의 유물론적 존재론을 함유하는 감각의 논리로서 전개해 나아가?잠재성?과?현실성?간의 비변증법적 변화라는 구도를 통해 세계를 설명함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존재와 생성간의 선택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하여 재현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미술을 정초함으로써 하나의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회화의 본질이 재현을 넘어선 차원에서 리얼리즘적 세계관과 구조주의적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모더니즘 미술의 한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는 시도로써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기대어 논의를 전개해 왔다.
회화의 본질이 재현의 논리에서 벗어나 감각의 고유한 힘을 포착하여 시각의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촉지적 기능의 실현까지 나아감으로써,감각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작품속에 표현해 내는 데에 있음을 3장에 걸쳐 논의를 통해 밝혔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는?재현의 논리?를 극복하고 구상의 진부함과 추상의 늪에 빠져 있는 현대회화에 있어 감각의 표현으로서의 회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더니즘이 현대 미술에서 만들어온, 새로운 것의 이데올로기, 미술사의 형식주의가 재현해내는 온갖 종류의 미학적 관념과 기구들은 우리가 거부해야할 모더니즘의 신화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현재 작용하면서 지적, 예술활동을 억압하고 온갖 편견에 기반하여 삶의 다양한 분출을 억지로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따르면,회화는 대상,풍경,행위,혹은 감정의 재현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일으키고 또한 파멸로 이끄는 운동을 포착하여 재현,서술,삽화성 모두를 내던지고 자연 속에서 사물의 핵심,삶의 본질로 접근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감각을 자극하는 생의 힘과 리듬을 포착하여 감각을 통해 그림에 다시 재주입 하려는 것이다. 들뢰즈의 미학적 문제들은?재현의 논리?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시작하여,감각의 고유한 힘을 포착하기 위한 발명들을 넘어,시각의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촉지적 기능의 실현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러므로 회화의 본질은 감각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찾는 동시에 그것이 예술과 삶의 실재적 조건들과 통일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있다고 본다.
-감각의 논리- 1. 들뢰즈의 회화론 (1) 이론적 배경 들뢰즈의 미학 이론은?재현의 논리?를 극복하면서 비재현적인 철학적 기획들이 감각론과 예술론을 통해 종합,구체화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재현의 논리를 벗어난 비재현적 사유 이론을 전개하면서 들뢰즈는?리좀?모델과?유목 사상/유목 예술?을 제시하고 있다.
1) 리좀모델
들뢰즈는 우리가 마주친 기호들의 폭력적인 경험이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는 주장에서 사유의 모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한다.
서구의 사유를 시초부터 지배해왔던 나뭇가지 혹은 뿌리 모양의 사유 체계로부터,다시 말해?재현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어떠한 통일적인 주체도 전제하지 않으면서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는 탈위계적 체계를?리좀?이라고 한다.
리좀은 식물학에서 ?땅속의 줄기?로서 뿌리나 잔뿌리와 대치된다. 여러 측면들 사이의 연계를 제한하고 조절하는 뿌리가 있는 나무의 구조와 달리, 리좀은 다른 선들과 무작위적이고 조절되지 않은 관계를 맺는 탈영토화된 선들의 비위계적 체계이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의 첫 번째 고원인 도입: 리좀 에서 몇 가지 원리들을 통해 이러한?리좀?의 특성을 보여 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리는 연결 접속(connexion)과 다질성(heterogeneite)의 원리이다.?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 접속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언어에는 어떠한 보편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는?리좀?과 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어, 기호학적 사슬들은?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원리는 다양체(multiplicite)의 원리로, 주체나 객체,정신과 자연과 같은 이항 논리를 작동시키는 하나와 관계가 없으며, 통일적인 주체의 위치 혹은 고정된 지점을 가지지 않는?리좀?의 특성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대상 내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내에서 분화되는 통일성도 없다 …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고 한다. 네 번째는 탈기표 작용적인 단절의 원리이다.?나무? 구조에서는 단절 지점들이 제한적으로 지역화 되고 기표 작용하는 반면에,?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고 한다.
말벌과 닮은 서양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서양란이 말벌을 모방한다고 봄으로써 우리는 기표 작용적 방식으로 해석하지만,서양란과 말벌 사이에는 단지 모방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생성, 즉 서양란의 말벌-되기,말벌의 서양란-되기와 같은 기표 작용과는 완전히 무관한 단절과 융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리좀은 하나의 반계보(antigenealogie)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원리는 지도제작(cartographie)과 전사[베끼기](decalcomanie)의 원리이다.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무나 뿌리의 재현적 모델에서 벗어난다.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사본](calque)의 논리이자 재생산의 논리,
즉?재현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재현이란 이처럼 이미 있는 어떤 것을 본뜨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리좀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본뜨기가 아니라 지도(carte)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사본을 만들지 말고 지도를 만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대상을?복제?하는 것이 아니라?구성?하기 때문이다. 본뜨기는 언제나 자기가 복제하려는 것을 선별·고립시킴으로써 모방하려 하지만,지도는 언제나 열려있고 실재에 대한 실험과 탐험에 의해서 구성해야만 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리좀?의 원리들은 결국?재현의 논리?의 방향을 선회시킨다. 요컨대,?리좀?은 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접을 통해서, 대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존을 통해서, 위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연결 접속을 통해서 작용한다.?리좀?은?더 이상 - 형이상학적으로 - 동일자와 관련되지 않는 차이 ,아무런 중심 없이 중첩되어서 가변적인 형태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노마드적 분산을 이루는? 차이의 사유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리좀의 특성은 단순한 수사학적인 은유로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현실에 무한히 개입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현실은?리좀?자체가 된다.
2) 유목사상
들뢰즈의 미학적 사상의 배경의 다른 하나로 유목사상/유목 예술을 들 수 있다. ?유목 사상?은?국가 사상?에 대립되는 근경학의 한 형태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는 국가와 유목민간의 전쟁의 역사로부터 도출된다.
예술 개념들들은 우선 원거리 파악과는 구별되는 근거리 파악이 있다. 우리에게 매끈한 것이야말로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 (촉각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고 청각적일 수 있는)촉지적 공간의 요소처럼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홈이 패인 것은 오히려 원격 지각,좀더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눈만이 이러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상대적으로 멀리 보이는 것이라도 가깝게 만드는 것이 회화의 법칙?이라고 한다.?세잔은 밀밭을 보지 말고 밀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아무런 좌표 없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림은 떨어져서 보더라도 가까이에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광학적 공간과 구별되는?촉지적 공간?이라는 개념인데,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첫 번째 측면은 방향,좌표,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방향들은 일정하지 않으며 변화하고,좌표들은?단자(monades)?로 부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상호 촉각적인 관계를 가진 유목민(nomades)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관찰자들과 연결된다. 접속들은 다양체를 흡수하고 거리에 불변성을 부여하는 주변 공간을 내포하지 않으며, 동일한 거리가 분할되면서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질서 잡힌 차이에 따라 구성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추상적인 선(line abstraite)-구체적인 선(line concrete)이 개입한다고 한다. 보링거는 추상적인 선이라는 관념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바로 이 선이 예술이 시작되는 점 자체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링거에게서 추상적인 선은 무엇보다 기하학적 또는 결정적 형태로, 가능한 한 직선적인 이집트 제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추상적인 선은 우선?고딕적?또는 오히려 유목적인 것이지 직선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링거가 기계론적이며 행동의 선이자 소용돌적이라고 말하는 유목민적 선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히 살아 있으며 그것은?기계론적?관계들을 직관으로까지 높여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비유기적이며 배아 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 없는 강렬한 삶,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명력 있는 몸체 - 유기체들 사이를 지나가는 모든 것, 사람들은 유목민 예술에서 장식적인 선과 동물적인 모티브들 간에 일종의 이원성을 통합하고, 시작과 끝도 없는 도주선과 거의 부동자인 자기선회 간의 이원성을 확인해내려고 해왔다는 것이다.
?유기적인 재현이 홈이 패인 공간을 주재하는 감정이듯이 추상적인 선은 매끈한 공간의 변용태이다. 촉지적 - 광학적, 가까운 - 먼 이라는 구분을 추상적인 선과 유기적인 선이라는 구분에 종속시켜 두 유형의 공간들의 일반적인 대립 속에서 구분의 원리를 찾아내야 하고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적인 것과 직선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기관 없는 신체
들뢰즈는 자신의 신체개념을 구성해 내면서 다른 포스트 구조주의자의 이론들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분열증 동학의 구성요소인 신체관은 니체와는 달리 전혀 생물학적이 아닌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를 따라?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뢰즈의?기관 없는 신체?는 우리가 우리들의 신체를 그것들의 생물학적인 조직의 면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지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이런 비-유기적인 신체관과 메를로-퐁띠(Merleau-Ponty,1908-1961)의?살아있는 신체?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지만 메를로 퐁띠와는 달리 통일성, 일관성, 의도성을 신체의 속성으로 돌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기적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의 부재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정되지 않은 기관의 존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결국은 결정된 기관들이 잠정적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림 속에 시간을 도입하는 방식이며, 형상 속에 시간을 놓는 것이 베이컨 그림에 있어서의 신체의 힘이다.
(2) 감각론으로서의 예술
1) 감각,공통감각
들뢰즈의 철학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개념들보다는 감각적 집합체들(agregate sensible)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예술의 목적은?감각의 덩어리를, 감각의 순수한 존재를 추려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에서?개념?이 맡았던 역할을 예술에서는?감각?이 떠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또한 위대한 사상가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개념보다는?감각?에 의해 사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감각은 신체가 소유하는 것이다.
감각의 형이상학적 대상은 강도(intensit)라는 이름을 갖는다. 감각은 감각경험 속에 표현된 강도이다. 강도란 일상적으로 변화하는 차이의 정도라는 의미로 쓰인다.
즉 강도란 감각적인 차이를 말한다. 하지만 강도는 발생의 측면에서 볼 때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관념적인 에너지이라는 것이다. 강도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개체화의 활동이다. 그런데 강도의 차이성은 동일성의 반대항으로 설정된 차이성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동일성이 먼저 있고 차이가 나중에 온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차이는 고정된 두 항간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강도는 표상적인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강도의 차이는 동일성의 반대 항이 아니다.
강도의 차이는 기호학적인 차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차이일 수밖에 없다. 강도는 스스로를 현실적인 영역 속에서?접혀진 차이?이다. ?접혀진 차이?는 일상적인 감각경험을 벗어난다. 하지만 ?위장된? 차이,즉 펼쳐진 차이로서의 강도는 어떤 특수한 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칸트적인 ?공통감각?의 통제를 벗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감각,강도,비표상적인 경험과 같은 모순되어 보이는 이 개념들을 예술에 연관시킴으로써 들뢰즈는 미술을 재현의 질서에서 해방시키는 단서를 잡는다. 미술을 모방물의 모방물로 규정한 재현의 질서를 처음 구축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환각,이미지,뮤규정적 질료와 동일시한다. 시뮬라크르는 양방향/역설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들뢰즈에게서 예술은 하나의 시뮬라크르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드리야(Jean Baudrillard,1929~)의 시뮬라크르와 달리,실재를 대체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의 모습 그 자체이며 사건이자 강도이다. 하지만 동일성을 갖지 않는 시뮬라크르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최소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우리 곁을 스쳐지나간다.
그래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시뮬라크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감속시킨(동일성의 외관을 갖추도록 잠시 정지시킨) 이미지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철학이 개념을 창조하고 과학이 기능을 창조한다면 예술은 감각(sensation)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은 감각들의 집적, 말하자면 지각들(percepts)과 정서들(affect)의 복합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각과 정서는 주체에 속한 것도, 대상에 속한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순히 현실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선행하고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원초적인 사건을 가리킨다.?감각?은 동시에?대상이고 주체?가 되는 현상,메를로 뽕티의 표현으로는?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현상이다. 감각은?세상에 있음?,즉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의 주관적 심성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와는 다르게 에너지를 느낄 수 있도록 가시화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들뢰즈가 보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다.
사물의 집합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힘들이 부딪히는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세계, 즉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가시화 하는 것이 회화라고 지적한다. 미분화된 리듬 속에서는 ?하나의 색,맛,촉각,냄새,소리,무게 사이에는 감각의 순간을 구성할 존재론적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 감각의 원초적 통일성을 보여주려고 복수 감각을 가진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나게 해준다<내장이 드러난 소 (수틴,1925 도1)>. 들뢰즈는 여기서 바로 공감각이라는 현상을 지적한다.
19세기에 들어와 하나의 자극을 동시에 둘 이상의 감각으로 지각하는 공감각이라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공감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알파벳에서 색깔을 보는 랭보, 회화에서 음악을 들었던 칸딘스키(Kandinsky,vassily. 1866~1944)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감각론이 감각을 엄격히 구별하고 위계 질서를 만들려 했다면, 들뢰즈는 미분화된 기관 없는 신체에 의해 감지되는 감각의 원초적 통일성으로서의 리듬 속에서 감각들의 교차와 횡단을 본다. 들뢰즈에게 궁극적인 것은 리듬과 감각 사이의 관계이고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감각의 논리이다.
(2) 감각의 요소: 지각과 정서
들뢰즈가 말하는?지각과 정서의 복합물?로서의?감각?은 합리적 이성이 개입하는?지각작용?이라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식론적 재현의 방식을 넘어선다. 오히려,?감각?은 그러한 인간적?이성적 지각 단계 이전의 원초적 관계인 신체와 세계 사이의 직접적?무매개적 만남으로 되돌아간다.
전통적으로 지각작용이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이 중심에 자리하는 재현적 인식모델이라는 주?객 관계의 이분법의 한계 속에 갇혀있다면,들뢰즈는?지각은 인간이 부재하는,인간 이전의 풍경?이라고 봄으로써?재현의 논리?의 붕괴를 의도하고 있다.
이것이 들뢰즈의?감각론?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예술론은 비재현적?감각론?이다. 들뢰즈에 의하면,이?정서?와?지각?이 바로?감각?의 요소들이며,예술 작품이란 바로?감각의 덩어리,즉 지각들과 정서들의 복합물?이라는 것이다.?지각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존속하는 감각과 관계의 꾸러미?이며,?정조는 또한… 그것을 겪는 사람을 넘쳐나는 생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과 정조는 그것을 체험하고 겪는 주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스스로 존재하고 보존하는 자립적인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스스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가는 주어진 사물의 개념적 정체성, 주체로서 예술가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순수한 지각들과 감각들(sensations)을 표현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지각들과 감각들은 세계를,더욱 정확하게는 지평[평면](plane)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현실적 실존(actual existence)과 그것 바깥의 어떤 것을 연관시키는 잠재적(potential) 운동들과 변화들로부터 우리를 끌어낸다.
이런 의미에서,들뢰즈는 니체(Nietzsche,Friedrich Wilhelm 1844~1900)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생성(becoming)으로서의 세계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전형적인 동물적 지각들과 감각들을 포착함으로써 인간 속에 있는 동물을 표현한다. ?감각론?은 들뢰즈의 미학 이론의 주요 주체로서,?Aesthetics?의 어원이 되는?감각적인 인식?을 뜻하는?aisthesis?의 적극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감각론?은 바움가르텐(Baumgarten,Alexander Gottlieb1714~1762)의 에스테티카?와 차이가 있다.
바움가르텐은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이성의 아래로 포섭함으로써 인식론적으로 구원하려 했다면,들뢰즈는 포스트- 프로이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감각을 존재론적으로 복권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두 감각론은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3) 히스테리
감각은 기관으로 분화된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 된다?는 지적은 감각은 지각과 달리 재현적 인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스테리 속에서 나는 ?자기 모습을 보는 착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가령 ?나는 나를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신체 속에서 나를 느끼고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벗은 신체 속에서 나를 본다.?고 베이컨은 말한다.
베이컨 속에서 신체는 자기의 몸을 이루는 유기체를 빠져나가고, 옷을 입은 형상이 거울이나 화폭 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본다(도2).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회화가 이러한 감각과 전이적 기관의 존재를 표현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유기적 신체의 모습을 재현했지만 그 아래에서 무기적 신체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는 ?현재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현재함?은 회화를?히스테리화? 한다. 히스테리는 과도한 현재함 속에서 이미 거기 있음과 언제나 뒤늦게 도착함의 동일성, 도처에 현재함이 신경시스템 위에서 직접 작용하고, 재현이 자리를 잡거나 재현을 하도록 할 만한 거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회화는 히스테리의 증세처럼 감각의 착란과 전이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눈은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이 되고, 기관 없는 신체인 순수한 현재함으로서의 형상을 본다. 회화는 눈을 우리의 … 귓속에,뱃속에,허파 속에 아무데나 놓는다.? 그래서?회화는 히스테리이다. 혹은 히스테리를 전환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히스테리적 성격이 회화에 국한된다고 말한다. 음악은 신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히스테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선-색의 시스템 그리고 다기능적인 기관인 눈과 함께 신체의 물질적 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은 회화이다.
회화의 모험은 오직 눈만이 물질적 존재와 물질적 현재함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화와 히스테리 사이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회화는 재현 아래서 재현을 넘어 직접 현재함을 추출하기를 제안한다. 색의 시스템 그 자체도 히스테리가 아니고 회화의 히스테리이다.
회화와 함께 히스테리는 예술이 된다고 한다. 회화는 히스테리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회화는 현재함을 직접 보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회화는 선과 색을 눈을 통해 투여한다. 회화는 선과 색을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눈을 그 유기체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고정되고 규정된 기관의 성격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것이 바로 회화의 이중적인 정의이다. 주관적인 의미에서 회화는 복수 기능적이고 전환적인 기관이 되기 위해 유기적이기를 그만둔 우리의 눈을 투여한다.
객관적 의미에서 회화는 우리 앞에 신체의 히스테리를 추방하기 위해 회화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유기적 재현의 구상적 요소들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상적인 형을 향해 고유하게 회화적인 두뇌성을 발명하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이노센트 10세(1650,도 3)?와 ?베이컨의 이노센트 10세(1953,도 4)>?를 통해 베이컨은 자문한다. 추상적 방식과 구상적 방식을 동시에 거부하면서 회화와 히스테리의 관계를 어떻게 명백히 드러낼 것인가? 회화는 신체가 빠져나가는 그곳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는 빠져나가면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물질성을 발견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선-색의 시스템 그리고 다기능적인 기관인 눈과 함께 신체의 물질적 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은 회화이라고 말한다. 회화의 모험은 오직 눈만이 물질적 존재와 물질적 현재함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화는 신체가 구성되어지는 물질성,즉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수 현전을 발견하는 각도로 신체를 만난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히스테리로서의 회화가 가진 이 ?현재함?의 성격은 회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즉 생성과 힘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내는가를 설명해준다. ?회화의 영원한 대상은 힘을 그려내는 일이다? 힘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이다.
회화는 감각의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해야 하다는 것이다. 재현적 감각에서 벗어나 현실적 감각으로,그리고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감각은 재현적이 아니기 때문에 판에 박힌 것에 반대될 뿐 아니라 ?너무 감각적인 것?에도 반대된다는 것이다.
(3) 회화의 본질
1) 추상회화론
미메시스(mimesis) 혹은 모방?재현이란 개념은,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들뢰즈는 예술은 모방이나 미메시스가 아니라 변형이고 ?추상?이라고 한다.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키고 추상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심지어 재현이란 관념을 갖고 있는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 시대의 화가조차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만은 아니며, 어떤 그림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금세기 초의 예술사가였던 보링거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보링거 역시 예술이란 대상을 모방하려는 모방충동이 아니라 대상을 변형하려는 추상충동에 의해 성립되었음을 주장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는 클레(P. Klee,1879-1940)의 입을 빌려 ?예술이란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라고 말한다. 가령 카트린 밀레(Catherine Millet,1814.~1875)가 ?중요한 것은 농부가 들고 가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정확한 무게를 그리는 것이다?라고 할 때, 그리고 세잔(P. Cejanne,1839~1906) 이 나름의 선과 형태, 색채를 통해서 사과의 무게를 그리기 위해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변형하고 추상화했을 때, 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이란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변형하고 추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상이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된 ?형식?이나 ?구조?를 추출하는 것으로서의 추상과 주어진 형식을 변형하거나 형식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추상을 구분하며, 들뢰즈의 ?추상적인 선?,즉 모든 방향을 향해 풀려 나가거나 감겨드는 변형으로서의 ?유목적인 선?에 대해 얘기한다. 현대미술의 역사는 바로 소실점의 제거와 탈주선의 범람으로 요약되는 투시법의 해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특히 들뢰즈는 ?추상?이 모든 종류의 형식화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으며,새로운 구성물로서의 ?일관성?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회화의 재현 기능이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인 이해가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가 주제가 되는 들뢰즈의 예술론이, 그의 저작인『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에서 극대화된다. 재현의 기능을 거부한 회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전개해 나간다.
현대 회화가 구상의 진부함, 즉 판에 박힌 것들을 회피하고 직접적으로 감각을 획득하기 위해 시도했던 두 가지 일반적인 경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 추상 미술로 나아갔던 경로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한 축으로는, 몬드리안의(P. Mondrian,1872-1944) ?도5나? 칸딘스키(Kandinsky,1866-1944) ?도6의 작품과 같은? 추상 미술(abstract art)이 있는데,그것은 비록 고전적인 구상을 거부했지만 감각을 정화하고 탈물질화하며 순수한 광학적(optical) 코드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추상적 형태들의 집적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추상 미술은 건축학적(architectonic) 구성의 평면(plane)으로 향했는데,그 안에서 회화는 일종의 정신적 존재,즉 느껴지기보다는 우선 사고 되었으며,관람자들에게 일종의 ?지적 금욕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다른 한 축으로는,잭슨 폴록(J. Pollock,1912-1956)의?도7과 같은?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또는 앵포르멜(informel)이 있는데,그것은 추상적 형태들을 그려냄으로써가 아니라 선과 색의 유동적(fluid)이고 무질서한(chaotic) 텍스쳐 내에서 모든 형태들을 분해함으로써 재현을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추상 표현주의는 눈에 대한 종속을 뒤집으며,더 이상 어떤 것을 윤곽 짓거나 한계 짓지 않고 전 화면 위로 펼쳐진 순수하게 손에 의한[손적인](manual) 선에 의해 힘들을 보여주면서 질료(matter)에 최대한의 확장을 주려고 시도했다.
현대 추상 회화는 이처럼 두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지만,들뢰즈가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두 가지 추상의 방법이 아닌 제 3의 길을 베이컨의 회화에서 찾는다.
들뢰즈는 경험주의적이며,내재론적이고,보다 실험적인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미술에서 추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또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그것은 보다 혼란스럽고 무형식적인 것으로 더 이상 구상이나 이미지에 대비되어 정의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추상은 일종의 비순수한 혼합으로서 형식들에 선행해서 어떤 외부를 향해 운동하는 재접합체를 혼성해 내는 데에 의의를 갖는 그런 추상이다.
화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혼돈(chaos)과 대재난(catasptrophe)을 어떻든 자신의 방식으로 껴안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한다.
추상 미술이나 추상 표현주의도 나름대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그것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리 나아갔다. 들뢰즈는 이것을,구상적인 것에서 나와 혼돈을 뛰어넘어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가버렸거나(추상),혼돈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켜서 시각적인 것의 포기와 더불어 전적으로 손적인 것으로 가버렸다고(추상 표현주의) 평가한다. 베이컨은 추상 회화처럼 시각적인 길도 아니고, 액션페인팅처럼 손적인 길도 아닌 제 3의 길을 따른다.
2) 형상의 감각론
『감각의 논리』에는 ?거울?이라는 사유의 이미지로 구축된 근대의 재현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깔려 있다.
현대 회화에서 구상의 파괴는 오늘날 철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현적 인식 모델 파괴의 예술적 선취였는데,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에서 이 재현적 모델의 파괴를 보았다.
대상을 파괴하는 방법은 추상화와 추출 및 고립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들뢰즈는 ?두뇌를 통과하는? 전자와 거리를 둔다. 정형과 무정형이 섞인 기괴한 순수 형상을 통해 구상성을 파괴하는 베이컨의 형상은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구상적인 것(le figuratif)?과 ?형상적인 것(le figural)?을 구분하고,구상적인 것의 특성을 서술적(narratif)이며 삽화적(illustratif)이라고 보고 있다.
회화에서 구상이나 재현(representation)이 위험한 것은 외계의 이미지가 그 화면 내의 이미지와 연관되고,그 때문에 시각(the eye)이 재인(re cognition)의 모델에 종속되면서 감각의 직접성과 강도(intensit)가 상실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해주어야할 스토리도 없고,구상적인 것 혹은 재현을 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가지는 추상(abstraction)을 통해 순수한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고,다른 한가지는 추출(extraction) 혹은 고립(isolation)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순수 추상 회화도 추상표현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즉 베이컨의 회화의 전략인 형상을 고립시키는 방법에서 찾는다.
베이컨은?구상?을 포기하면서 추상이 아닌?형상?을 선택했다. 들뢰즈는 재현을 극복하기 위해서 회화는 구상적인 것으로부터 형상을 끌어내야 한다고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형상이란 감각에 관계하는 감각적인 형태이며, 신경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 반면에 추상적 형태는 두뇌에 관계하고 두뇌의 중계를 통해 작용한다.
구상을 포기함으로써 재현적 대상성을 극복하되, 추상의 길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화가의 주관성마저 극복하는 것이 바로 직접적인 신경시스템을 통해 작용하는 형상의?감각론?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목표는 어떻게?구상적인 것?을 탈피하고?형상적인 것?을 얻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한다 .
?구상적인 것?은 삽화적이고 서술적인 것, 재현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을 말하며?형상적인 것?은 그것을 탈피한 것, 감각 자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형상은 한 낯선,참을 수 없는 표피에 쌓여 있어서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에 굴복해 있기나 한 것처럼 이 표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며,그러므로써 이 표피성을 벗겨내고 자신의 육질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구상은 재현의 대상으로 환원되지만, 형상은 감각으로 환원된다. 지적이고 금욕적인 추상미술은 이러한 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 회화는 텅 빈 캔버스의 공포를 극복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텅 빈 캔버스란 환상일 뿐이다.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는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가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화폭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며, 작가 역시 순백의 지면 위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면이나 화폭은 이미, 사전에 결정된 기존의 구태의연함 들로 너무도 빼곡히 뒤덮여 있어서,우선은 지우고 청산하고 눌러서 두께를 줄이고 심지어는 조각조각 해체시켜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비전을 가져다줄 카오스로부터 솟아나는 한 줄기 공기를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화가는 ?판에 박힌 것?을 극복해야 하며,들뢰즈는 세잔느가 남긴 수많은 습작들 속에서 이 판에 박힌 것을 극복하고자 한 화가의 노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베이컨의 격리되고 고립된 인체의 형태들에서 그 극복의 자취를 보고있다. 베이컨이 형상으로 향하는 길을 세잔은 ?감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정확하게 D. H. Lawrence가 말한 바,?세잔의 사과?,?사과의 사과적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정물,(세잔,1983-1894 도12 )>.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고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신체,그것도 재현된 신체가 아니라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 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회화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이다. 세잔이 감각을 그린다고 말한다면,베이컨은 사실을 기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비록 세잔이 풍경화가?정물화가이고 베이컨은 머리-고기를 그리는 초상화가이지만,그들은 재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으로 환원되는 형태(구상)를 거부하고 감각으로 환원되는 형태(형상)를 찬양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이컨은 정형에서 무정형으로,무정형에서 정형으로 이행하는 중에 있는 기괴한 형상,푸줏간의 살덩어리와 형상을 즐겨 그렸는데,들뢰즈는 이를 감각의 주체라고 보았다.
이렇듯 들뢰즈의 감각은 신체와 연결된다. 들뢰즈에게 있어 베이컨이 종종 몸에서 얼굴을 지워버리고 얼굴 없는 머리가 솟아나게 만드는 것은 곧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지우고 그 자리에 신체의 코기토를 솟아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살 속에서 인간은 동물과 아직 구별되지 않는데 그것이 순수 감각의 주체인?살?이라는 것이다 재현을 포기한 베이컨이 그리고자 한 것은 바로 ?감각? 그 자체이다.
이러한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들뢰즈는 근대의 재현적 인식 모델의 파괴로 해석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sensation)은 주객 이원론에 근거한 관념론적 인식론의 전제인 근대 미학에서 말하는 ?지각?(preception)과는 그 함의가 전혀 다른 유물론적 존재론을 함축한다.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기초한 어떤 인식론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론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움가르텐이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유사 이성이라 하여 이성의 아래로 포섭함으로써 인식론적으로 구원하려 했다면,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감각을 감각 그 자체로 존재론적으로 복권하려 하였다.
미학 사상 처음으로 감각이 이성과 관계 맺지 않는 순수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3)힘의 표현으로서의 회화
들뢰즈에게 있어서 포스트모던은 화가나 회화뿐만 아니라 예술소비자와 비평과학을 위한 감각의 문화를 의미한다.?현전(presence)은 베이컨 회화의 전면에 처음 나오는 낱말이다?라고 들뢰즈는 기술한다.
힘들은 -회화의 선들과 색채들 -눈에 투자한다. ?회화의 영원한 대상은 힘을 그려내는 일이다? 힘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이다.
회화는 감각의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며, 재현적 감각에서 벗어나 현실적 감각으로,그리고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감각은 재현적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 된다? 감각은 재현적이 아니기 때문에 판에 박힌 것에 반대될 뿐 아니라?너무 감각적인 것?에도 반대된다.
감각의 강렬함은 어떤 광경의 격렬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포?를 그린다고 할 때,공포에 대한?너무나 감각적인?공포스러운 장면들은 도처에서 - 미디어 이미지 속에서,현실 속에서 -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베이컨은 공포스러운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너무 감각적?이며 진정한 감각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스토리를 다시 도입하고,구상적인 것,판에 박힌 것에 즉시 속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면들은 오히려 감각이 아니라 감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베이컨이 택한 것은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조건?,즉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조건을 보여주는 것,그것이 바로 구상적인 것에 반대되는 형상적인 것이라고 한다. 힘은 감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감각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신체,즉 파동의 장소 위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하지만 비록 힘이 감각의 조건이긴 하지만,느껴지는 것은 힘이 아니다. 감각은 그의 조건인 힘으로부터 출발하여 힘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기 때문이다.
음악은 소리나지 않는 힘을 소리나도록 해야 하고,회화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의 형상들은 회화사에서 나온 다음의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 가운데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것은 형상들의 제1차 적인 기능이다. 이를 위해 베이컨은 힘의 결과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베이컨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하도록 하는 문제에 더욱 직접적으로 도전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이컨의 문제는 형태를 기형적으로 변형하는 문제이다. 이것들은 전혀 다른 범주로서 형태의 변형은 추상적이거나 역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형적 변형은 언제나 신체의 변형이고 정체적이며 제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 변형은 움직임을 힘에 종속시키고 또 추상적인 것을 형상에 종속시킨다.
들뢰즈가 보기에 일종의 감각들의 본원적인 통일성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화가에게 고유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여러 가지 시각적 감각이 다른 모든 영역들을 넘쳐나고 통과하는 생생한 힘 위에서 직접 포착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들뢰즈는 이 힘을 가리켜?리듬(Rythme)?이라고 부른다.
2.회화의 전략과 방법
(1) 형상의 고립
형상적인 것은 감각,즉 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인데 그것은 형상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재현은 필연적으로 서사를 포함하는데 베이컨은 회화의 재현성을 피하기 위해 동그라미,입방체 혹은 트랙을 이용해 형상을 격리시킨다.
베이컨의 회화 미학의 토대는 구상성에 대한 거부라고 질 들뢰즈는 말한다. <루시앙 프로이드의 초상 연구(1971,도13)>에서처럼 동그라미는 인물, 형상이 앉아 있는 장소를 제한한다 .
<말하고 있는 조르주 다이어의 초상(1966,도14)>에서 동그라미는 그림의 옆면을 벗어나기도 하고,세 그림을 가지고 하나로 만든 삼면화의 한가운데 위치하기도 한다<삼면화(1970,도15)>.
또한<인간신체의 연구들(1970,도16)>처럼 인물이 앉아 있는 동그란 의자나 누워있는 타원형의 침대로 대체되기도 한다.
동그라미는 인물의 신체를 둘러싼 원들에 의해 반복되는데 이것은 단지처럼 생긴 대지에 의해 하나의 형상으로 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장소로서 일종의 원형 경기장인 트랙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동그라미는 형상을 고립시킬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수법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루시앙 프로이드의 세 연구 (1969,도17)>에서 처럼유리나 거울로 만든 평행 육면체 속에 가두거나 형상을 자석의 성격을 띤 무한대의 원의 호와 같은 레일이나 길게 늘어난 막대 위에 붙여 놓기도 한다<인간 신체 연구 (1970,도18)>.
베이컨은 이 모든 방식들의 치밀하게 결합함에도 불구하고 장소들이 형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형상이 장소나 자기자신에 대하고 있는 모색과 탐험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림이란 고립된 한 현실 혹은 한 사실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격리는 사실에 매달리는 방식이다. 형상을 고립시키는 동그라미,입방체들은 베이컨의 회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나타나고 있으며,베이컨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요소들은 판에 박힌 구상성을 탈피하게 한다.
베이컨의 작품을 이루는 3가지 구성요소는 형상,윤곽(트랙,동그라미 등 형상을 고립시키는 것),아플라로 이야기된다.
(2) 신체의 변형
들뢰즈에 의하면 회화는 감각을 그린다. 이는 회화가 감각을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라 감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회화,특히 베이컨의 회화는?감각의 폭력?을 행사한다. 이 폭력은 재현된 폭력이 아니라 신경 시스템 위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회화는?형태의 변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각의 폭력을 통해?신체의 변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주로 제한된 내면적 공간 속에 놓인 기괴하게 왜곡된 자세를 가진 인간들의 ?형상?을 그렸다.
베이컨은 추상형식주의나 추상표현주의의 전략들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어떤 형상을 비틀어 만들어낸다. 그것은 허위의식이나 껍데기를 버리고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추상성 속에 은폐된 억압이나 현실도피를 거부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틀어서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더 잘 드러내 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삶의 진실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일종의 자연주의이며 생태학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한 붓의 놀림이나 채색에 의해 유도된 변이의 선을 따라가고 그것이 형상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베이컨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망상조직이다.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베이컨의 형상들이 나타내주고 있다. 이것은 형상들의 제 1차 적인 기능이다.
베이컨의 머리 시리즈나 자화상 시리즈에서 이 머리들의 동요는 움직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머리 위에 행사되는 압력,팽창력,수축력,평탄하게 누루는 힘,늘어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조명아래 조르주 다이어를 위한 세 연구(삼면화1964,도25)>,<자화상을 위한 네 연구(1967,도26)>.
이 힘들은 우주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초-공간적 여행자가 만나는 힘인데,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각도에서 머리를 후려치는 것과 같고 지워지고 쓸려진 얼굴부분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 부분들은 힘이 두드리고 있는 지역을 표시하는데,이런 의미에서 베이컨의 문제는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전환하는 문제가 아니라,한 형태를 기형적으로 변형하는 문제이다.
형태의 변형은 추상적이거나 역동적일 수 있지만 기형적 변형은 언제나 신체의 변형이고 정체적이며 제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변형은 움직임을 힘에 종속시키고 또 추상적인 것을 형상에 종속시킨다. 이 기형적 변형은 움직이지 않는 휴지통의 형태 위에서 만들어진다.
물질적 주변인 구조는 형상의 형태가 움직이지 않는 만큼 더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벽들은 수축되고 미끄러진다. 의자들은 약간씩 기울거나 혹은 다시 일어난다.
옷들은 불붙은 종이처럼 오그라든다. 따라서 이러한 기형적 변형을 회화적 행위로 만드는 것은 바로 힘이다. 회화 속에서 긴장을 실현한 것은 바로 고기라는 것이다.
고기 속에서 살이 뼈로부터 내려오는 것 같고,뼈는 살로부터 솟아나는 것 같다. 이러한 신체는 형상의 물질적 재료이다.
신체는 형상이지 구조가 아니다. 형상은 신체이기에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이컨은 그의 회화에서 얼굴을 해체하여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다.
이와 같이 베이컨의 회화가 구성하고 있는 변형되고 왜곡된 신체의 모습,히스테리의 발작적인 모습은 바로 인간과 동물사이의?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을 좀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리고,인간이 모든 이데올로기와 욕망이라는 규약,구조 속에 억압되고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탈주하여 자연 속에서 ?생태학적 숭고미? 상태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와 ?생태학적 숭고미?의 접속은 회화를 통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이 행한 또다른 보이지 않는 힘의 표현은?외침을 그린다?는 것이다(도
4). 시각적 외침과 소리치는 입을 힘들과의 관계 속에 놓고,외침을 만든 힘들,즉 입이 지워질 정도로 신체를 경련시킨 힘들은 그를 보고 소리치게 하는 어떤 광경과도 결코 혼동될 수 없다.
소리친다는 것은 언제나 모든 광경을 흐릿하게 하고 고통이나 감각조차도 넘쳐나는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이컨이?공포보다는 외침을 그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외침을 회화로 만들었다. 그림자의 심연처럼 벌린 입을 미래의 힘들에 불과한 보이지 않는 힘들과의 관계 속에 놓았다.
(베이컨의 <이노센트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1953,도4)>) 예컨대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이노센트 10세>그림을 변형시켜 소리치는 교황의 모습을 그린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공포?인데,실제 작품은 어떠한 공포의 장면도 갖고있지 않다.
공포의 장면이란 힘의 결과에 불과하며,그것을 그리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감정이나 감각작용에 속한다.
오히려 그는 공포스러운 장면을 완전히 생략하고 단지 의자에 앉아 소리치고 있는 교황의 모습만을 그렸다.
교황은 자신을 소리치게 만드는 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의 존재는 그의 감정상태나 개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로 하여금 소리지르게 만드는,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한다.
외침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거나 탐지하는 것과 같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는 베이컨,베케트,카프카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운 것,절단된 것,인조 신체,추락,파산자 등을?재현한?그 순간에 그들은 악착스러움과 현재함을 통해 제압되지 않고 꺾을 수 없는 형상들을 굳건히 세웠다.
형상들의 외양적 움직임이 형상들 위에 행사되는 보이지 않는 힘들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움직임으로부터 힘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베이컨이 감지되고 포착한 힘들의 경험적인 목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첫 번째는 격리의 힘,두 번째는 변형의 힘,세 번째는 흩뜨리는 힘이라고 한다. 또한 두 신체를 결합하는 힘과 영원한 시간의 힘,혹은 시간의 영속성이라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힘은 움직임이지만 움직임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은 힘을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래파의 연속사진과 같은 회화는 결과의 묘사일 뿐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오히려 단순히 밀폐된 공간 속에 누워있는 베이컨의 형상들에게서 움직임을 발견한다. 즉?우리는 움직임으로부터 힘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거슬러 올라감은?시간?이라고 하는,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회화,재현을 넘어서 감각과 힘과 시간을 보여주는 회화,그것이 바로 들뢰즈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이다.
(3) 디아그람(diagramme)
감각의 표현은?형상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판에 박힌 것?을 극복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들뢰즈는 베이컨이?판에 박힌 것?으로부터 무조건 철수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단 화폭 위에 그려놓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베이컨은 그 다음 우연하고 돌발적인 손의 흔적에 의해 국지적인 카오스를 발생시킴으로써 거기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는다. 이 국지적인 카오스는 디아그람(diagramme)이라고 불리운다.
디아그람을 거쳐 다시 구성된 화폭은 이전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 된다고 한다. 베이컨은 아무리 변형시켜도 진정한 변형을 이룰 수 없는 판에 박힌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우선 들뢰즈가 말하는?무기력한 포기?를 감행한다.
아무리 판에 박힌 것을 변형시킨다 하여도 그것은 최소한의 회화적인 변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지를 상실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부에 의해서 거기서 빠져 나올 때 화가의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화가가 무기력한 포기를 가지고 그리기 시작했을 때,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이 판에 박힌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그려진 이미지 내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구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들뢰즈는 그려진 이미지 내부에?자유로운 표시들?을 아주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자유로운 표시들은 돌발적인(accidentel) 것이며 전혀 재현적이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화가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혀 표현하지 않으며 오로지 화가의 손에 의한 우연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는 이 자유로운 표시들,또는 손적인 표시들(marques manuelles)을 자신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판에 박힌 것과 삽화적인 것,서술적인 모든 것을 떼어 내기 위해,그리고 그 시각적 이미지로부터 형상(혹은 감각)이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화폭 위에 있는 판에 박힌 것에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것처럼 하면서,우연을 조작하고 돌발적인 흔적들을 만들어 내며 재빨리 거기에서 벗어나고 회화적인 형상을 구성해 내는 것,이것이 베이컨이 선택한 회화의 전략이다.
베이컨은?그리는 행위?가 우연에 맡긴 표시들을 하기(터치들-선들),어느 장소나 지역들을 닦고 쓸거나 혹은 헝겊으로 문지르기(얼룩들-색채),여러 각도에서,그리고 다양한 속도로 물감을 뿌리기와 같은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규정한다.
화폭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구상적 여건들이,그리는 행위를 통과하여 나온 결과를 베이컨은?디아그람[돌발 흔적]?이라고 부른다. 디아그람은 비합리적이고,비의지적이며,자유롭고,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솟아남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현적이거나 삽화적이며 서술적이지 않는 감각적인 얼룩들인데,이 감각이란 혼동된 감각들이다. 세잔이 말했듯이 사람이 태어날 때 가지고 오는 혼동된 감각인 이것들은 손으로 된 흔적들로,헝겊,비,솔 혹은 스폰지로 작업하는 것이고,손으로 물감을 뿌리는 것이다.
그것은 손이 더 이상 우리의 의지나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표시를 하면서 일종의 독립을 하였고, 그래서 다른 힘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아그람을 통해서 회화는 무질서,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의 단초를 구성해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디아그람은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며,회화에서 모든 구상적 여건들이 사라져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새로운 구상,형상의 구상은 디아그람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하고,감각을 명확함과 엄밀함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들뢰즈는 디아그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전면적인 디아그람,카오스나 카타스트로프의 상태에 머무는 경우를 잭슨 폴록의 경우에서 보고 있다.
액션 페인팅은 관람자에게 날것의 감각을 잘 전달해 주기는 하지만,그 감각은 돌이킬 수 없이 혼란스런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이 경우를 살과 뼈의 관계에 유비시켜 보면, 형상으로서의 살과, 구조 혹은 골격으로서의 뼈의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살과 뼈의 변증법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기도 한다. 추상적이고 코드화 되어있는 것은 감각을 신경 시스템으로 직접 전달하지 못하고 두뇌로만 이해한다는 것이다. 베이컨이 생각하고 행하는 예술은 결코 두뇌와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추상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진정한 예술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본다. 이처럼 디아그람을 통한 회화의 그리기 작업은?마치 손이 우리의 의지에도 시각에도 의존하지 않는 표시들을 하면서 독립을 쟁취?한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즉 회화사에서 시각으로부터 손이 독립한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