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울산에는 어떤 부자들이 얼마의 재산을 갖고 살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고 또 일부 부자들 중에는 재산이 부풀려 알려진 사람들도 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영농국가였던 우리나라는 재산을 나타낼 때 현금이 아닌 만석꾼, 천석꾼 등 쌀 생산의 양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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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울산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이근수씨가 살았던 만석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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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재벌급인 당시 만석꾼의 재산은 얼마나 되었고 우리나라에 만석꾼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울산에는 과연 만석꾼이 살았을까.
만석꾼이 되기 위해서는 한해 소작으로 들어오는 쌀의 양이 만석이 되어야 한다. 당시 지주들이 한해 농사를 지은 소작인들을 상대로 3대7 혹은 4대6 비율로 소출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만석꾼은 최소한 1만5000여마지기의 논을 가져야 한다.
당시 논 한마지기가 430~661㎡(130~200여평)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석꾼이 가진 논의 넓이는 661만1570~991만7355㎡(200만~300만여평)가 되는데 이는 오늘날 울산 석유화학회사 전체 넓이의 2~3배가 된다. 이렇게 보면 타지에 비해 넓은 평야가 없었던 울산에는 실제로 만석꾼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는 경주 최부자와 충청 갑부 김갑순, 호남 갑부 김성수씨 그리고 강원도 갑부 최씨 문중 등 10여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울산 출신으로 만석꾼이 넘는 재산을 가졌던 인물로는 이종만씨가 있다. 그는 금광을 개발해 전국적인 부자가 되었다.
이씨는 1885년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를 해야 할 10대를 질병으로 보내었던 그는 20대가 되면서 큰 뜻을 품고 고향 울산을 떠났다. 그는 당시 자신의 고향인 용잠을 ‘반농반어 포구로 주민들이 농어업에 종사하면서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고 표현했다.
특히 그는 당시 울산에 병마절도사가 있었는데 이곳에 주둔하는 군인들의 폐단이 컸으나 주민들은 이들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못하면서 오히려 이들을 우러러 보면서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활 속에서 그는 자신이 좀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결심한 것이 서울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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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금광에서 금을 캐는 광부들의 모습. |
그가 서울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이 미역장사였다. 그러나 이 사업에서 빚만 지고 용잠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때가 1912년인 24살이었는데 그는 이 무렵 고향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대흥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가 중석광산을 운영했으나 이 역시 1차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계속 가난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광산의 꿈을 버리지 않고 계속 전국을 돌면서 금광에 손을 대었지만 실패했다.
이런 그가 금광을 통해 돈을 벌게 된 것은 1932년 일본인 기다마시로부터 영평금광을 매입하면서다. 그는 당시 450원(요즘 금액으로 4500만원)을 주고 산 이 금광에서 금이 쏟아져 1936년 한 해 번 돈이 40여만원이었다.
이 해 그는 장진광산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을 매입하는데 여기서 또 금이 쏟아져 우리나라 최대 금광왕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53세였다. 당시 그의 재산은 오늘날 시가로 치면 3000억원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1939년 고향으로 와 용잠초등학교를 세웠다. 이 외에도 그가 당시 고향 발전을 위해 희사했던 돈을 보면 대현면에 10만원을 들여 자작농을 만들었고 대현면 학교 설립에 1만5000원, 울산농고 건립에 1만원을 내어 놓았다. 또 대현면민들의 복지에도 1만원을 선뜻 내어 놓았다.
이런 그의 뜻을 고맙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이 1942년이었다. 기념비는 1977년까지 있었으나 용잠동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해체되었다가 2002년 이 마을에 다시 복원되었다.
그는 서울에 사는 동안 서대문 근처에서 살았다. 그런데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다녔던 김창식(87·성남동 거주)씨가 이씨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이씨의 아들이 보성전문학교를 다녔고 또 조카 이경석씨가 저의 이모부였기 때문에 저가 서울에 있는 동안 가끔 이종만 댁을 찾았습니다. 당시 그의 집은 4·19때 불타버린 리기붕씨 집 가까이 있었는데 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씨는 화신백화점 박흥식씨와 호남 재벌 김성수씨 등과 함께 국내 5대 부호에 들어갈 정도로 부자였는데 해방 후 그가 고향으로 오지 않고 북한으로 간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경제에 대한 이종만씨의 소신은 만인이 행복하게 사는 ‘대동사상’이었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직원들의 복지와 농촌 구제 사업에 썼다. 아울러 그는 이 돈을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바쳤다.
광산 개발로 번 돈으로 그가 평양 숭실전문대학을 구입한 것이 1937년이었다. 당시 숭실전문대학은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는데 이때 120만원을 주고 이 학교를 구입했다. 이후 그가 세운 학교가 이공계 전문인력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대동공업전문학교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전문대라고는 보성전문대와 연희전문대 뿐이었다. 특히 광원전문대학은 일본 전체를 보더라도 아끼다 한 곳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광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학교는 1944년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간판을 바꿔 단 후 광복 후에는 평양공업대학, 김일성대학 공학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이 되어 지금도 북한 최고의 수재들이 다니고 있다.
그는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3할만 받았을 뿐 아니라 학교 건립에 사재를 아낌없이 출연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질 때 북으로 가 북한에서 일생을 마쳤다. 북한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장과 광업부 고문을 지내면서 자신의 재산을 육영사업에 모두 내어 놓았던 그는 죽은 후 자본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평양 애국 열사의 능에 묻히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일대기는 딸 이남순(90)이 지은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씨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북한을 4번이나 방문해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2006년 제주도로 와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북한으로 갔기 때문인지 일제 강점기 울산 부자를 얘기할 때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드물었다.
1930년대 서생에 살았던 이근수(李根守)씨 역시 울산에서 만석꾼으로 불리는 큰 부자였다. 이씨가 부자가 된 것은 부친 규현(奎賢)씨가 경주에서 울산으로 와 진하에서 돈을 벌면서다. 규현씨는 경주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진사가 되지 못하고 초시만 통과하는 바람에 실망해 울산으로 왔다고 전한다.
울산에 온 후 무역업을 시작했던 그는 울산에서 나무를 해 부산에 내다판 후 그 돈으로 울산에 나지 않는 물건들을 사와 울산에서 팔아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 번 돈으로 논을 샀다. 당시 이씨 집안이 얼마나 부자였는지 울산과 언양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래까지 땅이 많아 그가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남의 땅을 밟을 수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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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현재 서생에 있는 만석정은 규현씨가 3년 동안 지은 집인데 목재는 강원도 간송을 배로 수송했다. 건축 당시 대지는 1983㎡(600여평)었고 건물은 본채와 사랑채가 하나, 행랑채가 둘이었다. 이처럼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씨 집 재산은 해방 후 농지개혁 때 줄었다고 하는데 마을 중앙에는 아직 당시 영화를 보여주는 재각이 있다. 근수씨는 생전에 교육사업에 힘써 성동초등학교를 지을 때 9917㎡(3000여평)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도 이 학교 마당에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있다.
동생 종노(鍾魯)씨는 동아일보 지국 고문을 지냈고 아들 진우(珍雨)씨는 동래고보 출신의 수재였다.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을 지낼 때 이씨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장우씨가 이 집안 출신이다.
울산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울산에 만석꾼이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만석 재산을 가졌던 집안은 이 집 뿐이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