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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
# 1 주점 겸 만두가게
회랑식의 주점 있고, 그 앞 공터에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다.
회회(31세, 남)가 만두피 반죽을 하고, 야채소를 거칠게 다진다.
달구(9세, 남)가 곁에서 피를 만들면 회회가 만두를 빚는다.
두 사람 땀을 흘리며 열심히 하지만, 만두의 모양은 영 좋지 않다.
[점 프]
회회가 기대에 가득 차 찜통 뚜껑을 연다.
김이 가득 피어오르는데, 회회의 푸른 눈이 반가움에 번뜩한다.
김 사이로 도화녀(25세, 여)가 보인다.
도화녀가 돌아서자, 회회가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쫓아간다.
# 2 미곡상 앞
회회가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두고 도화녀를 따라간다.
미곡상 : (앞을 가로막으며 꾸벅 인사, 아부) 아이구, 회회 아닌가?
상납금 수금 나왔는가? 바쁠 텐데 애들 시키지...
회회가 인상을 팍 쓰며 미곡상을 밀어젖힌다.
미곡상은 나동그라지고, 회회는 도화녀가 간 방향으로 달려간다.
기름집이 나동그라진 미곡상을 부축해 준다.
미곡상 : (침을 탁 뱉고)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게 딱 저 놈 두고 한 말이야.
원나라 색목인 군졸하고 붙어먹은 지 에미 옆에 붙어 구걸하던 놈이 위세는!
기름집 : 그래도 호랑이 한마리가 낫지. 기억 안나? 난리 끝나고 이리떼같이 이놈저놈 와 뜯어 먹으니
얼마나 징그러웠어.
미곡상 : 쥐뿔, 호랑이는! 그래봐야 저 새끼도 원나라 공주마마 겁령구 밑딱개야.
[자막]- 겁령구 : 고려 국왕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사속인
기름집 : (망설이다) 저... 혹시, 저... 회회말이야, 지 에미 일 때문에....
미곡상 : (말을 막으며 버럭) 저 눈깔 시퍼런 잡종 새끼 낳은 년이야! 우리가 뭘....
도화녀E : 저기...
미곡상이 돌아보면 도화녀가 미소지며 인사를 한다.
도화녀의 미소에 미곡상 침을 꿀꺽 삼킨다.
도화녀 : 요 건너 포목점 아주머니가 염색 일거리가 있다 하셔서....
# 3 저잣거리
회회가 여기저기 도화녀를 찾아 헤맨다.
회회가 지날 때마다 상인들 두려워하며 인사를 한다.
그러나 찾을 수 없자 실망해서 돌아선다.
# 4 미곡상 앞
도화녀가 미곡상에게서 흰 옷감을 받는다.
미곡상 : 내 품을 후하게 쳐줄 것이니 잘 부탁하네.
도화녀 : 예, 따님께 어울리게 곱게 물들여 올 것입니다.
미곡상 : (은근히 손을 잡으며) 소문에 자네가 색을 잘 낸다더니, 역시...
도화녀 : (난감, 손을 빼려 애쓰며) 저는 가봐야 합니다.
미곡상 : (손목을 잡아끌며) 서두르기는, 들어가 목이라도 축....
누군가의 발이 미곡상을 걷어찬다.
회회가 넘어진 미곡상을 무섭게 노려보며 서 있다.
미곡상 : (놀라) 왜... 왜.. 이러나....
도화녀 :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회회를 본다.)
회회 : (도화녀의 눈길에 당황하여, 퉁명스럽게) 안가고 뭐해!
도화녀가 그제야 고마운 마음이 들어, 작게 목례를 하고 그 자리를 뜬다.
회회는 멀어져 가는 도화녀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반대편에서 바타르(57세, 남)가 부하들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온다.
바타르의 모습을 발견한 회회가 엎드리고, 상인들도 엎드린다.
바타르가 회회 바로 곁에 멈추자 회회는 흙먼지를 뒤집어쓴다.
바타르 : (회회의 모습에 웃으며) 이런, 이런... 니가 날 웃기는구나!
# 5 바타르의 집 방 안
회회가 장부를 살피는 바타르의 앞에 조아리고 있다.
바티르 : 네 놈이 주점에서 못 먹을 상화를 빚는다는 소문이 쫘아하다.
네 에미하고 상화점하자 했다는 약속 때문에 그 미친 짓이냐?
[자막] - 상화 : 만두의 옛말.
회회 : .....
바타르 : 미련한 놈, 글줄이나 하는 놈 구해다 이 장부나 정리 하거라.
바타르가 장부를 회회의 면전에다 던져버린다.
펼쳐진 장부는 글이 아닌 그림과 선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바타르 : 이번에 귀향하는 내 수하들에게 붙여 줄 기집을 좀 모아야 겠다.
위에서 과부처녀추고별감까지 두고 기집을 다 쓸어가니 힘들긴 할 것이다만.
[자막] - 과부처녀추고별감 : 원에 투항한 군인들에게 주기 위해 고려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
회회 : 염려 놓으십시오, 일은 차질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바타르 : (흐뭇) 다 죽어가는 놈을 주어다 놓은 보람이 있구나. 나가봐라.
회회 :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방을 나간다.)
# 6 노름방 안
남자들이 둘러 앉아 골패(송나라때 고려로 전래)에 미쳐있다.
창우(24세, 남)가 한쪽에서 판에 끼고 싶어 안달을 하며 기웃거리자, 남자들이 귀찮아 밀쳐낸다.
하지만 창우, 웃으며 다시 판을 기웃거린다.
# 7 노름방 앞
서달(19세, 남)이 회회에게 은전 주머니를 건넨다.
서달 : 이번 달, 노름방 수입은 영 꽝이네요. 저잣거리 수금도 그게 그거고.
회회 : (보다, 싱긋) 까불지 마라. 내가 까막눈이라고 귀도 먼 놈은 아니다.
서달 : (뜨끔) 형님, 뭔 소리예요? 뭔 오해가 있는 진 모르....
회회 : (말 자르며) 무역선! 시치미 뗄래?
서달 : (펄쩍 뛰는) 아니예요! 그냥 무역선에 줄 대면 수입이 짭짤하대서 좀 기웃거린 거뿐이라구요.
회회 : 정도껏 해먹고, 그 손 목아지 조심....
회회가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된 채 말을 잃는다.
서달이 시선을 따라가 보면 도화녀가 노름방을 살피고 있다.
남자들이 창우를 방 밖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친다.
창우가 던져진 개구리마냥 마당에 뻗는다.
도화녀 : (얼른 달려와 창우를 일으키며)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남자1 : (비웃으며) 미친 새끼! 돈도 없는 게 어디서 재수 없게!
이 모양이니 기집 등꼴 빨아먹는 단 소리 밖에 더 들어?
남자2 : (도화녀를 훑어보며) 아이고 탐스런 마나님이 오셨네.
어떤가, 창우. 자네 아낙을 건다면 내 이판에 끼워주지.
회회 : (버럭) 시끄러! 들어가 하던 짓이나 해!
회회의 말에 남자들은 옴짝도 못하고 문을 조용히 닫는다.
창우와 도화녀가 회회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회회는 창우를 다정히 잡은 도화녀의 모습이 보기 싫어 외면한다.
창우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창피해져 도화녀의 손을 뿌리치고 간다.
도화녀가 황망하게 그의 뒤를 따라 간다.
회회가 떠나는 도화녀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서달은 회회의 마음이 짐작되어 기회다 싶다.
서달 : 형님, 그리 쳐다보신지 꽤 되셨어요.
회회 : (뜨끔, 버럭) 보긴 뭘 봤단 거냐!
서달 : (눈치를 보며) 지가 창우 놈을 아는데 손을 좀 써볼까요?
회회 : .....
서달 : 저 기집한테도 그편이 좋을 겁니다, 저런 놈하고 사느니 말입니다.
회회 : .....
# 8 도화녀의 집 방안
창우가 심통이나 앉아 있고, 도화녀는 그를 달래는 중이다.
도화녀 : (창우의 긁힌 상처를 닦아주며) 얼굴 다 긁어 먹었네.... (안타까워) 뭐하러 그런 곳은 기웃거려?
창우 : 힘없는 놈이 재물이라도 손에 쥐어야 될 거 아니야.
도화녀 : ... 재물이다 힘이다 그런 게 그리 갖고 싶어?
창우 : 당연하지! 당신도 봤지? 아까 모두들 회회한테 쩔쩔매는 거.
뒤에서 눈 시퍼런 잡종 놈이다 뭐다 쑥덕여 봤자, 그 앞에선... 그 사람이 몽고 관리를 등에 업고
저잣거리 돈줄을 쥐고 있어 그런 거야. 그게 바로 힘이야.
도화녀 : 난 그런 거 하나 안 부러운데....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창우 : (울컥) 당신도 나 속으론 우습게보지? 별것도 없는 놈이 일은 안하고 허황된 꿈만 쫓는다고?
도화녀 : 아니야, 아닌 거 알잖아.
서달E : 창우 형! 있어요?
# 9 도화녀의 집 부엌 안
도화녀가 가마솥에 염색재료(치자정도)를 끓이고 있다.
땀을 흘리며, 힘겹지만 열심히... 간간히 밖이 신경 쓰인다.
# 10 도화녀의 집 마당
서달이 머리를 맞대고 서서, 창우를 꼬드긴다.
서달 : 아깝네.... 그 좌판 자리 꽤 짭짤한데.
(생각에 잠긴 척) 모자란 밑천 단번에 벌기엔 거기만한데가 없긴 한데....
창우 : 어디? 방법이 있는 거야?
서달 : 골패는 자신 있우?
창우 : (눈이 번쩍) 자신 있어, 끼워만 줘!
서달 : 알았수, 내가 힘 좀 쓸게. 형도 이제 형수 뼈골 빼먹는단 얘긴 그만 들어야지.
창우 : (서달의 손을 와락 잡으며) 믿어도 되는 거지?
서달 : 내가 등쳐먹을라면 형같이 없는 사람 찍겠수?
창우 : 그럼, 알지. 알구 말구 내 자네만....
도화녀 : (부엌에서 염료담긴 나무통을 들고 나온다)
서달 : (도화녀의 눈을 피하며) 안녕히 계시우.
서달이 인사를 하지만 도화녀는 탐탁지 않다.
도화녀가 말없이 염료통에 말린 천을 넣어 뒤적인다.
[점프]
창우와 도화녀가 나란히 서서 염색된 천을 넌다.
창우 : ... (눈치보다) 아까 미안해.
도화녀 : (마음이 풀리는) 괜찮아.
도화녀가 땀을 훔치며, 널린 천을 보며 빙긋 웃는다.
# 11 도화녀의 집 방안 / 밤
창우가 자고 있는 도화녀 몰래 앉은뱅이 장을 뒤진다.
도화녀가 깨서보자, 창우 당황한다.
창우 : (불쑥) 좌판을 할 수 있게 해준데. 서달이가 자릿값 만들게 도와준데.
도화녀 : (보다, 한숨) 어떻게? 노름으로? 그만 둬, 믿을 사람 못 되잖어.
창우 : (잠시 우뚝 서 있다가 앉은뱅이 장 뒤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는)
도화녀 : (놀라, 잡으며) 활 가진 거 들켰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구?
창우 : 지금 사는 꼴은 뭐 얼마나 좋아서? 색끼 많은 여편네 덕에 밥술이라도 얻어먹고 산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놈이야, 내가. 내가 그런 꼬락서니라구!
도화녀 : (욱씬, 달래려는) 어머님이 애지중지 하시던 할아버님 유품이잖어.
창우 : 그딴 영감 난 몰라! 몽고군과 대적한다고 버틴 덕에 우리 집안이 요모양요꼴이 된 거야!
할아버지만 요령껏 살아줬어도, 이렇게 개무신 안당하고 살았어!
도화녀 : (마음이 아프다.)
창우 : (간절) 우리도 재물만 모으면, 그래 그 회회란 사람만큼 휘두르곤 못살아도,
남들한테 무시 안당하고 살 수 있잖아~. 좀 도와주라! 좀 도와줘....
도화녀가 애잔하게 바라보다, 앉은뱅이 장 안에 숨겨 놓은 은전을 꺼내 준다.
창우가 은전을 집더니, 도화녀를 와락 안는다.
창우 : 고마워, 고마워.
# 12 주점 겸 만두 가게
서달이 술항아리에서 아랑주(소주의 옛말)를 몰래 훔쳐 먹는다.
뒤에서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나자 화들짝 놀라 사래가 걸린다.
서달이 돌아보면 회회가 험악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고,
달구가 만두 그릇이 놓인 탁자 앞에 죽상으로 앉아 있다.
서달 : (잔뜩 긴장) 혀, 형님. 제가 절대 아랑주를 훔쳐 먹으려 한 건 아니고...
회회 : (말을 자르며) 이리와 앉아!
서달 : (얼른 달구 곁으로 가 앉는다.)
회회 : (진지하게) 먹어.
서달과 달구가 만두를 집지만 선뜻 먹지 못하고 눈치를 본다.
회회 : (윽박) 안 먹어!
달구 : (얼른 만두를 입에 넣고, 불분명한 발음) 어거서어(먹었어요)
회회 : (달구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는다.)
창우E : 저기....
회회 : (굳어져 돌아보면)
창우 : (회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긴장) 안녕, 안녕하십니까.
서달 : (다가와 창우에게 어깨동무 하며) 자, 자 나가서 얘기 합시다.
서달이 창우를 데리고 쑥덕이며 나간다.
달구는 서달이 남긴 만두까지 먹어야 하나 고민이고,
회회는 씁쓸하다.
# 13 몽타주
1. 노름방 안
창우가 쭈빗거리며 골패 판에 끼어든다.
서달이 그 곁에서 노름판 꾼과 눈길을 주고받는다.
2. 노름방 앞
회회가 서달에게 은전 주머니를 건네준다.
도화녀가 창우를 찾아 기웃대자, 회회는 얼른 몸을 숨긴다.
3. 노름방 안
창우, 은전을 계속 잃는다.
낮에서 밤으로 또 낮으로 날이 바뀔수록 초췌해져 간다.
서달은 간간히 창우에게 은전을 건넨다.
4. 도화녀의 집 앞 / 밤
도화녀가 걱정스레 서성이며 창우를 기다리고 있다.
# 14 주점 겸 만두 가게 안
엉망으로 맞은 창우가 한구석에 묶인 채 나동그라져 있다.
도화녀가 서달을 따라 들어서다, 그 모양을 보고 달려가 보듬는다.
창우 : (눈을 뜨고 도화녀를 알아보고 울먹) 여보....
도화녀 : (마음이 아린) 걱정마, 괜찮을 거야, 걱정마. (서달을 향해 강단 있게) 빚 갚아요. 다 갚을 테니 풀어줘요!
서달 : 말만 믿구요? 에이, 장사 그리했다간 망해요.
도화녀 : (품에서 은전을 꺼내주며) 가진 거 다예요.
서달 : 안 되겠어요, 이걸론. (한숨) 창우 형이 금광에서 몇 달만 고생하세요. 얘들아, 창우 형 어서 모셔가라!
왈패들이 달려들어 창우를 끌어내려 한다.
창우는 필사적으로 도화녀를 부여잡는다.
창우 : (버둥거리며) 사, 살려줘, 여보 살려줘. 거기가면 나 죽어! 죽어!
도화녀 : (달려들어 몸으로 막으며) 그만둬요! 내 뭐든 할테니 제발 우리 서방님만은 살려 주셔요!
서달 : 진짜, 뭐든지 하실라우?
도화녀가 두려움에 떠는 창우를 감싸 안으며 끄덕인다.
# 15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회회가 의자 앉고, 그 곁에 서달이 서 있다.
앞쪽 바닥에, 사색이 된 도화녀와 넋 나간 창우가 앉아 있다.
도화녀 : (간절) 좋은 분인 줄 압니다. 저도, 우리 서방님도 도와주신 적 있으시지요?
회회 : (도화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 외면하는)
도화녀 : 부탁입니다, 우리 두 내외 지금까지처럼 살게 한번만 도와주세요.
회회 : (괴롭지만 냉정히) 나한테 와라.
도화녀 : (당혹, 이해가 안 되는) 무슨... 제가, 제가 뭐 할 일이라도... 어디서, 제가...
회회 : (힘겨워 역정) 네 서방과 헤어져 내게 오란 말이다!
도화녀가 하얗게 질려 창우를 돌아본다.
창우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듯 고개를 쳐 박고 겁에 질려 떨고만 있다.
도화녀 : 그건, 그... 것은... 내가... 내가 꼭 갚을 게요. 알아보세요,
비록 없이 살지만 약조는 꼭 지켜요. 그러니... 조금만...
회회 :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네가 나한테 오든 저놈이 광산으로 가든.
창우 : (놀라 머리를 땅에 박듯 조아리며) 아, 안돼. 제발 사, 살려 주세요.
(도화녀의 옷자락 끝을 잡고) 여보... 여보, 나... 살고 싶어, 살려 줘...
도화녀 창우의 가엾은 모습을 돌아보다, 회회에게 등을 돌리고 털썩 주저앉는다.
도화녀 : 그리해요, 내가 할게요. 내가... 그리 하지요.
엉망이된 창우는 그 자리에서 엉엉운다.
도화녀는 회회에게 등을 돌린 채 우는 창우를 아프게 보고,
도화녀의 등을 보는 회회는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 16 주점 겸 만두가게
상인1이 일하고 있는 도화녀를 음흉하게 쳐다본다.
도화녀가 술과 안주를 상인1에게 가져가는데 회회가 가로챈다.
회회가 술과 안주를 거칠게 내려놓아, 상인1에게 튄다.
상인1 : 뭐하는 짓이야!
회회 : (살벌) 그 눈 제대로 떠, 확 뽑아버리기 전에!
상인1이 회회의 서슬에 놀라 조용히 술을 마신다.
회회가 돌아보자, 도화녀는 얼른 외면하고 들어가 버린다.
회회 : .... (혼잣말) 빌어먹을....
# 17 주점 겸 만두 가게 안채 마당 / 밤
닫힌 방문에 잠자리를 준비하는 도화녀의 그림자가 비친다.
회회가 괴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다.
# 18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방안 / 밤
문이 벌컥 열리며 회회가 들어서자, 도화녀 놀라 굳어진다.
회회가 도화녀를 안는데, 도화녀 꾹 참으며 눈을 감는다.
하지만 역겨움에 몸을 부르르 떤다.
회회가 화가 치밀어 도화녀를 확 밀쳐버린다.
회회 : 그 놈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그 병신 같이 약해 빠진 놈 때문에!
도화녀 : (노려보며) 약한 것이 죄는 아니지요.
회회 : 죄다, 이런 세상에선 분명한 죄란 말이다! (괴로운)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킬 수 없는 죄....
도화녀 : (외면) 우린 가진 것 없는 무지랭이들이지만, 당신같이 힘으로 남을 생이별 시키는 죄는 안 지어요.
회회 :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지. 그 놈도 다를 바 없다.
힘이란 것을 맛보고 나면 다를 바 없어진단 말이다!
도화녀 : 역겨워! 당신을 잠시나마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나조차 역겨워!
회회가 금방이라도 때릴 듯 손을 치켜들지만,
도화녀는 떨면서도 회회를 독하게 노려본다.
회회, 화가 나지만 도저히 도화녀를 칠 수가 없다.
# 19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마당 / 밤
요란하게 때려 부수는 소리가 가득 하다.
회회가 발과 손에 걸리는 대로 때려 부순다.
서달과 왈패 몇몇 그리고 달구가 놀라 뛰어나온다.
회회 : 창우 놈... 어떻게 지내냐?
서달 :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다는 데요.
회회 : 내일부터 수금 일에 데리고 다녀.
서달 : 별 쓸모도 없는 놈을 뭐하러....
회회 : 그 놈한테 힘이 어떤 맛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그 샌님은 우리 같은 놈들이랑 얼마나 다른지 보자.
서달 : (그제야 씩 웃으며) 네, 잘 알겠습니다, 형님.
# 20 저잣거리 일각
서달과 왈패들이 서너패로 나뉘어 저잣거리를 휩쓸며 수금을 한다.
창우는 서달 패거리의 꽁지에 붙어 빌빌거리며 따라다닌다.
# 21 미곡상 부근
서달 일행이 포목점에 들러 수금을 하는 동안,
창우는 그 꽁지에 붙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미곡상과 기름집이 그 모습을 보고 쑥덕이며 비웃는다.
미곡상 : 저쉐끼 저거 기껏 서달이 꽁지에 붙으려고, 지 기집을 회회 놈한테 바친 거야?
기름집 : 들을라 조심하게, 그래도 회회 놈 끄트머린데.
창우 : (굴욕감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 22 주점 겸 만두가게
회회가 앉아 있는 주변으로 왈패 무리가 공손하게 서 있다.
서달은 장부에 수금된 포목과 은전들을 기록한다.
창우는 한 구석에 오금도 못 펴고 서 있다.
회회 : (서달에게) 기집들은 얼추 모았냐?
서달 : 아직.... 기집장부에 든 년들은 거의 다 뽑아 가서, 새로 찾아 올려야죠.
회회 : (창우에게 툭) 할 만해?
창우 : (얼어붙은 채) 저, 저... 그저...
안채 쪽에서 도화녀가 안타까운 마음에 창우를 주시하고 있다.
창우, 도화녀와 눈이 마주지자 울듯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다.
회회가 창우의 눈길을 쫓다 도화녀와 눈이 마주친다.
회회, 질투가 솟아올라 창우를 가리고 선다.
회회 : (도화녀를 보며 창우에게) 내가, 니 기집을 빼앗아 내 밑에서 일하기 싫은거냐?
도화녀 : (이를 앙다물고 회회의 눈길을 마주본다.)
창우 : (겁에 질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회회 : (여전히 도화녀를 보며, 버럭) 진정 아니냐!
창우 : (놀라 크게) 그, 그럼요! 여 영광입니다!
씁쓸한 회회의 눈길을 따라가 보면 도화녀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다.
# 23 미곡상 안
창우가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들어와 문가에 선다.
미곡상은 창우를 힐긋 보고는 본체만체다.
창우 : (안절부절못하며 간신히) 저, 오늘부텀 제가 그... 서달이 대신에 수금을...
미곡상 : 아, 거기 버티고 서서 남의 장사 방해 하잖거야!
창우 : 저, 수금을....
미곡상 : (버럭) 날짜가 안됐잖아! 날짜가....젠장 맞을 개나 소나 다 날뛰니...
서달이 나타나 미곡상을 확 차버린다.
미곡상은 고꾸라진 채, 왈패들에게 찍소리 못하고 두들겨 맞는다.
서달 : (미곡상 가슴팍을 밟고 서) 언제 수금할 지 아저씨한테 허락받고 다니란 말야! 어디서 확!
미곡상 : (비굴) 미, 미안하네. 내 지금 바로....
서달 : (들은 채 만 채) 창우 형, 이리 와 봐!
창우 : (슬금슬금, 간신히 서달의 곁에 가) 왜... 왜 그러나?
서달 : 이렇게 밟아봐.
창우 : (기겁) 내, 내가 어떻게... 나는, 난 그냥...
서달 : (윽박) 해 보라는대두!
창우 : (덜덜 떨며 미곡상의 가슴팍에 발을 올려놓는다.)
서달 : (미곡상에게) 사과하셔야지, 아저씨.
미곡상 : .... (하는 수 없이) 내 미안하게 됐네.
서달 : 어때. 기분 조옷~치?
창우 : (어색하게 웃으며) 어, 으으응.
서달과 왈패들이 창우에게 밟힌 미곡상을 손가락질하며 낄낄댄다.
미곡상은 밟힌 채, 창우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피해버린다.
당황하던 창우는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에 퍼져가는 비뚤어진 우월감에 미소가 떠오른다.
# 24 저잣거리 몽타쥬
창우가 서달과 어울려 저잣거리를 지나간다.
상인들이 인사하자 어색해 하다 점점 익숙해져 당당해진다.
창우가 혼자 왈패들을 거느리고 지나간다.
상인들이 창우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창우 목에 힘이 들어가는 폼이 어릿광대 같다.
# 25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도화녀가 조각이불을 만드는데, 달구가 몰래 훔쳐본다.
도화녀가 손짓을 하자 달구가 머뭇거리며 다가온다.
달구 : (조각 이불을 만지며) 이게 뭐예요?
도화녀 : 이불이지.
달구 : 근데 왜 이렇게 기웠어요.
도화녀 : 아줌마는 큰 천이 없거든, 일하고 남긴 작은 천들밖에.
달구 : 아줌마 꺼예요?
도화녀 : 아니.... (착잡) 아줌마 낭군꺼.
회회E : (버럭) 그 딴 짓 할 시간 있으면 애들 밥이나 지어 먹여!
도화녀가 돌아보면, 회회가 잔뜩 심통이 나서 서있다.
# 26 주점 겸 만두가게 부엌 안
도화녀가 잡탕죽을 끓인다.
달구가 야채며 잡곡 씻은 것을 부지런히 도화녀 곁으로 나른다.
도화녀 : 부모님은?
달구 : (명랑하게) 없어요.
도화녀 : 돌아가셨니?
달구 : 아뇨, 그냥 없어요. 여기 있는 형아들도 다 없어요.
도화녀, 너무 가여워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도화녀의 눈에 한 구석에 소주 내리는 것이 들어온다.
도화녀 : .... (할 말을 못 찾던 차에) 저게 뭔 줄 아니?
달구 : 아랑주 내리는 거예요.
도화녀 : 아랑주?
달구 : 형아들이 그러는데, 원나라 병사들이 고려사람 먹고 죽으라고 가져 온 거래요.
쬐끔 먹어 봤는데요, (제 가슴을 가르치며) 여기가 타서 죽는 줄 알았어요.
# 27 주점 겸 만두가게 부엌 밖
회회가 부엌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도화녀와 달구의 대화를 듣고 있다.
도화녀E : 그런걸 왜....
달구E : 아저씨가 맘에 안 드는 놈 있으면 먹고 죽게 할라고 자꾸 만드는 거래요.
없어진 형아들은 다 저거 먹고 죽은 거라 던데요.
도화녀E : .... 달구는 아저씨가 좋구나?
회회 : (도화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 28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마당
도화녀가 왈패 아이들에게 죽을 나눠주고, 회회는 곁에 서 있다.
죽을 받은 아이들은 제각기 앉아 숨도 안 쉬고 먹는다.
도화녀 : 좋은 일도 하네요, 배곯는 애들 목에 곡기도 넘기게 해주고.
회회 : (쑥스러움에) 난 꽁밥 안 먹여. 딴 일손보다 싸서 들여 놓는 거 뿐이유.
도화녀 : (애들의 지저분한 몰골을 둘러보다) 다 먹고, 빨래거리 들여놓라고 해요.
회회 : 그런 거까지 해줄 필요 없어.
도화녀 : 사람 꼴은 하게 해야죠.
회회 : 먹여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쥐뿔이...
도화녀가 말갛게 바라보자 회회 얼굴이 붉어지며 말문이 막힌다.
# 29 미곡상 안
창우가 미곡상 안으로 들어온다.
미곡상 : (반갑게) 아이구, 고생이 많네. 이리, 이리와 좀 앉아.
창우 : (앉으며 거드름) 이리 친절하시니, 아주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집 팔아먹은 놈이라 본 척도 안하시더니.
미곡상 : (뜨끔) 뭘 그런 걸 맘에 두고 그러나. 그거야, 다 팔자 소관인 것이지. 지난 일은 다 잊자구, 응?
미곡상딸 : (병색, 나오며) 아버지, 어머니가 떡 드시라고....
미곡상 : (화들짝) 뭐하는 짓이냐? 당장 안으로 못 들어가!
미곡상딸 : (떡 그릇을 떨어뜨리듯 두고 새파랗게 질려 들어간다.)
미곡상 : (창우의 손을 잡으며) 부탁 일세, 비밀로 해주게. 기집장부에 올리면 안 되네.
저년이 몸이 워낙 안 좋아, 집을 떠나면 죽은 목숨이야.
창우 : (싱긋) 나한테 득 될 것도 없는 일을 하겠어요?
미곡상 : (눈물이 찔금) 고맙네, 고마워. 역시 같은 고려인이니 다르네 그려.
자네도 당했으니 알겠지만, 그 회회 놈은 피도 눈물도 없어! (안절부절못하며) 자, 자 이 떡 좀 먹어 봐.
창우 : (느긋하게 떡을 받아 천천히 먹는다.)
# 30 주점 겸 만두가게
회회가 만두통 앞에 앉아 목반지를 깎고 있다. 아직 나무로 둥근 고리모양을 만드는 중이다.
인기척에 올려다보면 창우가 와있다. 회회가 당황해서 얼른 목반지를 감춘다.
회회 : 뭐냐?
창우 : 저... 일전에 기집이 모자르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회회 : (퉁명) 마땅한 기집이라도 찾은 게야?
창우 : (싱긋) 예에.... 하나 있긴 합니다만....
# 31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도화녀가 창우가 회회와 쑥덕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달구E : 뭐해요, 아줌마?
도화녀 : (화들짝) 어? 어.... (망설이다) 달구야, 아줌마 심부름 좀 해 줄래?
달구 : (해맑게) 네!
# 32 주점 겸 만두가게 앞
창우가 만두 가게를 나오는데, 달구가 앞을 막아선다.
달구가 들고 있던 조각 이불을 내민다.
달구 : 아줌마가 주래요.
창우가 놀라 주변을 둘러보더니, 빼앗듯 이불을 받아든다.
창우 : (위협하듯)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달구 : 안 해요, 아줌마랑 약속했어요.
창우가 가면, 달구가 그의 뒷모습에다 혀를 ‘베’하고 내밀며 돌아선다.
그러다 앞에선 회회를 보고는 놀라 딸꾹질을 한다.
회회는 질투로 무섭게 굳어 서 있다.
달구가 살금살금 도망치는데도, 회회는 창우가 간 쪽만 바라보고 있다.
# 33 미곡상 앞 저잣거리
서달과 왈패들이 병약해 보이는 미곡상 딸을 끌어내고 있다.
미곡상 : (회회에게 매달리는) 데려가 봐야, 쓸모없는 병잡니다, 살려 주시오!
이리 생이별을 하면 죽소! 나도 이 아이도 죽소!
도화녀E : (회회의 귓전에 울리는) 당신같이 남을 생이별 시키는 죄는 안 지어요!
회회 :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놔주라고 말할 듯)
미곡상 : 그 일 때문인가? 자네가 어미 숨겨 놓은 곳을 알려 준... 그 일 때문에 이러나?
회회 : (분노로 무섭게 굳어진다.)
미곡상 : (이마를 땅에 박으며) 죽을죄를 지었네, 내가 죽일 놈이야.
내 식구만 살려 보겠다고, 몽고 것들한테 자네 어미를 넘긴 죽일 놈이야. 그러니 날 죽이게, 날 죽여...
회회 : (분노에 떨며) 어서 끌어내라!!
미곡상 딸이 서달과 왈패에게 끄려나가며 비명을 지른다.
미곡상은 절규하며 딸을 쫓아간다.
그 가운데, 분노에 찬 회회와 흥미로운 표정의 창우가 서있다.
# 34 주점 겸 만두가게
손님이 없는 가게를 도화녀와 달구가 지키고 앉아있다.
달구 : 아줌마.
도화녀 : 응?
달구 : 아줌마는 우리 아저씨보다 그 아저씨가 더 좋아요?
도화녀 : .... 왜 그게 궁금할까?
달구 : 나는 우리 아지씨가 훠얼~씬 좋은데.
도화녀 : (미소) 그거야, 달구하고 아저씨는 같이 살아 온 가족이니까 그렇지.
달구 : 그럼, 아줌마도 그 아저씨하고 가족이여서 좋은 건가요?
도화녀 : (작게 끄덕이며, 미소)
달구 : (망설이다) 그럼, 그럼 아줌마는 다시 그 아저씨하고 살고 싶어요?
도화녀 : ....
달구 : 나는 아줌마 가족이 아니라서, 그 아저씨한테 가고 싶은 거예요?
도화녀가 달구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준다.
넋이 나간 모양새의 미곡상이 다리를 절며 들어온다.
미곡상 : (와락 도화녀의 손을 잡으며) 부탁이네, 딸년이 간 곳만이라도 알려주게.
부탁이야. 회회 그 사람에게 말해서, 제발....
도화녀 : (놀라) 아저씨 무슨 일세요?
미곡상 : 내 딸아이가 끌려갔네. 귀향병들 첩으로... 이리 비네.
내가, 내가 그 아이 가는 곳에 내가 갈터이니. 부탁이네..
도화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 미곡상이 나동그라진다.
회회와 창우, 서달등이 와 있다.
회회 : (미곡상에게) 다리하나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얼른 사라져.
도화녀 : 뭐하는 짓이예요! 아픈 딸 간 곳만 알려 달라는 데 그것도 안 되나요! 어떻게 사람이 이리 몰인정해요!
회회 : (매섭게 도화녀를 노려보다, 창우에게) 자네에게 맡기지.
미곡상 : (무릎으로 걸어가 창우의 다리를 잡으며) 살려 주게! 자네는 알잖나! 제발 도와주게!
내 딸, 내딸은 그냥 두겠다고 했잖은가!
창우 : (무감각하게 내려 보다 미곡상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며)
내게 득이 되지 않는 짓은 않는다 했을 뿐이죠. (서늘하게) 그냥 가세요.
미곡상 : (황망한 마음에 넋을 잃고 주저앉는다.)
창우 고개를 들다 새파랗게 질린 도화녀와 눈이 마주친다.
창우, 움찔하는 마음에 눈길을 피해 등을 돌린다.
그런 창우를 보는 도화녀는 금방 통곡이라도 할 것 같다.
# 35 노상 주점 / 밤
창우가 취한 서달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서달 : 아주 제법이야, 형. 적응이 빨라. 어때, 힘 맛이 달어?
창우 : (술을 쭉 마시고, 소근) 달아, 아주 아주 달아.
서달 : 요즘엔 통 노름방에 발길도 안하데, 은전도 넉넉할텐데.
왜? 노름으로 그 기집 잃은 거 같아 이제 못하겠어?
창우 : (굳어지는... 하지만 곧 풀며 부드럽게) 노름보다 일이 더 재밌어서.
서달 : 만약에 말야, 그 기집 다시 줄게 전처럼 살라면 그럴거야?
창우 : .... 아마....
서달 : 못하겠지? 하긴 쎄고쎈게 기집인데...
창우가 키들거리고 웃으면 서달도 같이 웃어젖힌다.
그러다 서달이 술에 취해 푹 고꾸라진다.
창우,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시어 서달을 내려다본다.
창우 : 쎄고쎘지... 하지만 달라. 다르지만... 찾을 수도 없어. 웬 줄 알아? 아직은 내가 너무 약하거든.
# 36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방안 / 밤
회회가 외면하고 선 도화녀를 자신을 보도록 돌려 세운다.
회회 : 어떠냐? 니가 그리 믿던 창우 놈도 나와 별반 다른 것이 없지 않느냐?
도화녀 : (흔들리지만, 부정) 그 사람 본심이 아니예요.
그 사람 지금 괴로울 거야, 그런 짓을 하고 힘들어할 거라구요.
회회 : (울컥) 웃기는 소리! 그 놈도 타고난 천성이 그런거다.
쥐뿔만한 힘을 얻어 떵떵거려보니 그 맛에,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되는 거야!
도화녀 : (부정) 당신때문이야, 그 사람은 당신한테 눌려 그런 거 뿐이야!
당신처럼 남에 것 빼앗는 일을 다 즐기진 않아요!
회회가 화가 나 도화녀를 벽으로 확 밀어 붙인다.
도화녀, 빠져 나오려 하지만 회회가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회회 : (낮게, 무섭게) 왜 나는 저잣거리 주먹패에다가 잡종놈이라서?
도화녀 : 당신이 하는 짓은 짐승의 짓이야! 힘이면 다해버리는 짐승!
회회가 끌어오르는 분노로 주먹을 들어 올린다.
도화녀가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꽝하며 회회의 주먹이 벽을 부서지도록 내리친다.
회회 그대로 나가 버리고, 도화녀 간신히 서있다.
# 37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방안 + 마당 / 밤
방안이 휑하니 비어 있다.
회회가 문밖에서 안을 둘러보고 있다.
달구E : 아저씨! 아줌마가, 아줌마가 가버렸어요!
회회 : (돌아보는)
달구 : 얼른 쫓아가요, 내가 잡아도 그냥 가버렸단 말야.
회회 : (고통스럽다).....
달구 : (회회의 손을 잡으며) 얼른요!
회회 : 놔둬라.
달구 : (울먹) 잡아요, 아저씨.
회회 : (버럭) 놔 두라고!
# 38 도화녀의 집 방안 / 밤
창우가 도화녀가 만들어 준 조각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다.
도화녀가 방안으로 들어와 맥이 풀려 풀썩 주저앉는다.
창우 : (놀라) 누구요? (눈에 익어) 당신? 당신이야?
도화녀 : (창우의 손을 잡아끌며) 도망가자, 우리 두 입 어디가든 굶어죽진 않아.
창우 :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도화녀 : 그만... 그만 하자. 나 당신 망가지는 거 더는 못 봐.
창우 : .... (도화녀의 뺨을 가만히 만지며) 미안해... 참기 힘들지?
도화녀 : (눈물) 우리 옛날처럼 살자, 가난해도 약해빠져서 손가락질 받았어도... 그땐 우리 사람같았잖어.
창우 : (도리질) 아니, 안 돼. 안 돼... 다시 그렇게는 안살아! 강해질거야. 언놈도 다시는 나 못 건들이게 만들거야!
(간절히)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라, 응?
도화녀 : 내가 다른 남자 옆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걸 참으란 거야?
창우 : (눈물이 그렁해져) 아니야, 절대 아니야... (도화녀를 와락 안으며) 당신은 언제까지나 내편이지?
도화녀 : (창우를 가만히 안는다.)
창우 : 변하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편이여야 해, 나한테 등 돌리면 안돼.
# 39 주점 겸 만두 가게 앞
도화녀가 창우의 손에 이끌려 온다.
도화녀 : 미쳤어, 이 길로 오면 어떡해! (돌아서며) 들키기 전에 얼른 가자.
창우 : 당신은 날 위해 뭐든지 해줬어, 뭐든지... 해 주는 사람이지?
도화녀가 돌아보는데, 창우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돌린다.
도화녀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창우 (소삭이듯 중얼거리 듯) 그냥 맞아줘, 날 위해 그냥 맞아!!
창우 점점 더 심하게 도화녀를 패고, 그녀의 비명도 높아간다.
회회, 가게에서 뛰어나와 그 광경에 기겁을 한다.
회회가 창우의 팔을 잡아채자, 도화녀는 주저앉는다.
회회 : 뭐하는 짓이야!
창우 : 이년이 같이 도망가잡니다. 저 색끼로 홀려서 형님하고 내 사이마저 이간질하려 든단 말입니다!
도화녀 : (창우의 바짓단을 잡고) 이러지마... (올려다보며, 애절) 이러지마~아!
창우 : (뿌리치며) 다신, 보지 말자.
창우가 도화녀를 남겨두고 등을 돌린다.
도화녀, 넋을 놓고 창우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회회는 도화녀를 안아주고 싶지만 너무 아픈 모습에 그럴 수가 없다.
돌아서 가는 창우는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악물고 있다.
# 40 주점 겸 만두가게 안채 부엌 안 + 마당
도화녀가 마당에 멍하니 서 있다.
부엌 안, 소주가 만들어지는 항아리가 보인다.
도화녀가 천천히 다가간다, 떨어지는 맑은 소주를 손으로 받는다.
처음엔 조금씩 점점 더 많이 마신다.
괴로움에 자신의 가슴을 치다, 양손으로 가슴을 살이 파이게 뜯는다.
회회가 마당으로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보곤 놀라 달려가 도화녀를 잡는다.
회회 : 무슨 짓이야!
도화녀 : (버둥대며 빠져 나오려 한다.)
회회 : 창우 놈을 죽여줄까!
도화녀 : (입을 꼭 문 채 도리질만)
회회 : 그럼 날 죽이고 싶어? (단도를 주며) 이걸로 찔러, 찌르라구!
도화녀 : (단도를 팽개치고, 쇳소리 나는 숨을 몰아쉰다.)
회회 : 널 죽이지 말고, 니가 죽이고 싶은 걸 찾으란 말이야!
도화녀 : (말이 아닌 비명만이 비칠비칠 새어 나온다.)
회회 : 차라리 소리치고 울어!! 다 불태워 줄까? 창우 놈도, 나도, 이 저잣거리도, 다 태워버릴까!
도화녀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회회를 마구 때린다.
회회는 도화녀가 하는 대로 받아준다.
회회를 때리다 지친 도화녀가 그의 품안에 쓰러지듯 기댄다.
도화녀 낮지만 서럽게 뱃속이 끓는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망설이다 도화녀를 안는 회회도 고통스럽다.
# 41 몽타주
방안, 도화녀가 넋 나간 모양으로 방바닥에 엎어져 있다. 무표정한데, 눈물은 하염없이 나온다.
방 앞, 문틈으로 안을 엿보던 달구가 실망한 표정으로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당에 서있는 회회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다. 회회, 안타깝다.
마당, 도화녀가 평상 위에 오독하니 인형처럼 앉아있다.
달구가 반가워 다가가려는데 회회가 잡는다.
회회가 고개를 저어보이자, 달구 실망한다.
# 42 주점 겸 만두 가게 안채 마당
댓돌 위에 도화녀의 신발이 흐트러져 있다.
회회가 신발을 가지런히 해 놓는데, 도화녀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눈이 마주치자 회회가 당황해서 먼 산을 보며 큰기침을 한다.
달구가 장작을 잔뜩 해서 들어서다, 도화녀를 보곤 멈칫 선다.
도화녀 : (불쑥 회회에게) 뭐해요? 애한테 이걸 다 짊어지게 하구. 어서 받아요.
회회 : (나뭇짐을 받아 들려하면)
달구 : (당황) 괜찮은데, 괜찮은데 아저씨.
회회 : (민망해서, 나뭇짐을 빼앗으며) 됐어, 임마.
회회, 머쓱해서는 나뭇짐을 들고 나가는데 표정은 밝다.
도화녀가 회회의 뒷모습을 보다 달구에게 다가간다.
달구 : 아줌마, 이제 다 나았어요?
도화녀 : (달구의 땀을 닦아주며) 힘들지? 아저씨가 너무 부려 먹는구나.
달구 : 괜찮아요. (슬퍼진) 전에는요, 맨날맨날 혼자 배고프고 그래서 싫었는데요,
아저씨가 날 주워오고 나서는 괜찮아요.
도화녀 : 주워와?
달구 : 네. 내가 처마 밑에서 숨이 꼴깍거리길래 주워왔대요. 아저씨도 옛날엔 나 같았대요.
혼자서 맨날 배고프고, 떠돌아다니구. 사람들이 아저씨를 땅에도 못 있게 내몰아서,
아저씨 눈이 파랗다구 그랬대요. 그래서 배타고 떠돌았는데, 내내 배도 고팠지만 땅이 그리웠대요.
도화녀 : (가만히 보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래, 그랬구나.
달구 : (헤헤 웃다, 걱정) 저기 아줌마 아직도... 가고 싶어요?
도화녀 : .... 아니.
달구 : (반짝) 왜요?
도화녀 : .... (미소) 달구랑 있는 게 좋아서.
달구 :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인다.)
# 43 주점 겸 만두가게 앞
회회가 흐뭇한 얼굴로 나오는데 창우가 서 있다.
회회, 굳어진다.
[점프]
회회와 창우가 마주 앉아 있다.
회회 : 평양에 아는 놈이 하나 있지, 나하고 꽤 인연이 있는 놈이야.
거기서 네가 좌판하나 벌이고 살게는 해 줄 수 있다.
창우 : .... 지금까지처럼 형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회회 : 나는 네 기집을 빼앗은 놈이야.
창우 : .... 잊겠습니다. 형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도 저잣거리에 천덕꾸러기로 살고 있을 놈입니다.
형님 덕에 이제 제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놈은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다 생각합니다.
회회 : (움찔) 진심이냐? 진심으로 내 밑에서 계속 일하겠단 거냐?
창우 : 네, 내치시지만 않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회 : .... 네가 그리 원한다면, 저잣거리에 권세를 원하는 거라면 내 도와주지.
창우 : (일어나 굽실거리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회회가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나 안채로 들어간다.
굽실거리던 창우가 허리를 굽힌 채 꼼짝도 않고 있다.
창우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하고, 손은 꼭 쥔 채 부들부들 떨린다.
# 44 저잣거리 일각
도화녀가 장을 보는 회회의 뒤를 따르고 있다.
도화녀가 나무로 조각된 연꽃을 보느라 불교용품점에서 걸음을 멈춘다.
상인 : 왜? 상화 사시게?
회회 : 이게 상화요? 연꽃이지.
상인 : (웃고) 먹는 상화가 아니라, 불전에 바치는 나무 연꽃을 상화라 합니다.
회회 : 갖고 싶소?
도화녀 : (고개를 저으며) 가요.
상인은 아쉽게 쳐다보고, 회회와 도화녀가 나란히 걸어간다.
회회 : (못 사준 것이 아쉬워) 하나 사도 될 것인데....
도화녀 : 연꽃은 참 정갈해요, 진창 속에서도. (씁쓸) 나 같은 여인네가 가질만한 것이 아니예요.
회회 : (도화녀가 짠해 마음이 먹먹하다.)
# 45 저잣거리 일각
창우가 따라오는 기름집을 확 밀치자 기름집 비틀거린다.
회회와 도화녀가 창우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선다.
창우가 다가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도화녀는 담담한 창우가 밉다.
기름집 : (다가와) 미안하네. 미안한데... 우리도 살아야지 않겠나.
창우 : (살벌하게 기름집을 향해) 나중에요!
회회 : (기름집에게) 무슨 일이우?
기름집 : 어, 그게 저... 상납금을 안내겠다는 건 아니고, 내긴 내는데.... (숨을 고르고) 한 달에 한번,
그래 보름에 한 번도 좋단 말일세. 수시로 버는 족족 걷어 가면 우리보고 죽으란 얘기 아닌가?
창우 : (당황) 오해가 좀 있어 그럽니다. 제가 해결할 테니, 걱정마세요.
도화녀 : (창우 노려보며) 상납금이란 거, 원래 이리 마구잡이로 걷는 건가요?
창우가 도화녀를 보자, 도화녀가 회회의 손을 잡는다.
회회가 놀라 도화녀를 보면, 도화녀는 창우를 노려보고 있다.
창우, 모멸감을 참느라 꽉 쥔 주먹이 가늘게 떨린다.
회회 : (기름집에게) 그만 가보쇼, 이번 달엔 더 안 걷을 거요.
기름집 : 정말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창우 : (밀리는 것이 싫어) 하지만 서달이가...
회회 : (버럭) 이번 달은 그만이라고 했다!
창우 : .... 알겠습니다.
회회 : 그만 가봐라.
창우가 가버리자, 도화녀도 잡았던 회회의 손을 놓는다.
나란히 서 있다가 회회가 앞서가고, 그의 등을 보는 도화녀 미안하다.
# 46 주점 겸 만두가게 / 밤
회회가 서달을 다그친다.
회회 : 빼돌리고, 등쳐먹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서달 : ... 빼돌린 게 아니라 잠깐... 전에 말했던 무역선에... 돈이 된다기에...
서역 유리다, 향신료다 이런 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회회 : (말을 자르며) 저잣거리 일에서 손 털어.
서달 : 형님! 제가, 제가 형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데요.
회회 : 경고 했다, 조심하라고! (등을 돌리며) 가봐, 굶어죽게는 안 할 테니.
서달 : 이러시면 안 되죠... 형님 위해서라면 드럽고 개같은 짓 다했는데...
회회 : (고개를 돌려보면)
서달 : 변했어요! 그 창우 놈 기집을 얻으신 뒤로 물러지셨다구요!
회회가 주먹으로 서달을 갈긴다.
서달이 나동그라져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회회를 노려본다.
# 47 만두 가게 안채 방안 / 밤
도화녀가 씁쓸한 마음으로 앉아있다.
회회E : (밖에서 헛기침하며) 잠시.... 나갔다 옵시다.
도화녀 : (문 쪽을 돌아보고) .....
# 48 연못가 / 밤
커다란 연못이다. 봉우리에서부터 활짝 핀 것까지 연꽃이 가득하다.
도화녀가 홀린 듯 연못으로 다가간다.
회회, 혹여 빠질까봐 도화녀의 팔꿈치를 잡는다.
회회 : (단호히) 닮았소, 당신은 이 연꽃하고 꼭 닮았소.
도화녀 : (말없이 돌아보며 미소)
회회 : (마주 미소 짓다 고개를 돌리며) 아직도 그 자가 그리 밉소?
도와녀 : ?.... (창우 얘기임을 알겠다, 착잡) 미안... 해요.
회회 : (고개를 젓고) 그냥 나만 미워했으면 좋겠소.
도화녀 : (보면)
회회 : 마음이 없으면 밉지도 않을 거 아니오.
도화녀 : (회회의 모습이 짠하다.) ... 왜 상화를 만들어요?
회회 : (잠시 도화녀를 보다) 땅위에 내가 설 곳을 갖고 싶어 그 가게를 냈소. 상화는.... (멈칫) 그게 좋다 했소.
찜통을 열었을 때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것 말이오. 그걸 보면 배고픔도, 아픔도 잊혀진다고...
도화녀 : .... (보면)
회회 : 어머니가 그랬더랬소.
도화녀 : 어머님은....
회회 : (뼈아픈) 끌려갔소. (말이 잘 안나오는) 나.... 같은... 자들한테 말이오.
도화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회회가 가슴 아프다.
도화녀가 회회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매만져 준다.
회회, 처음엔 흠칫하지만 그녀의 손길이 따스하다.
도화녀가 촉촉한 눈길로 회회를 보고 있다.
회회가 이끌리 듯 도화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한다. 제 행동에 제가 당황해 화들짝 떨어진다.
도화녀가 천천히 다가와 까치발을 하고 회회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회회와 도화녀의 발이 보인다.
# 49 주점 겸 만두 가게
회회가 만두 만들 준비를 해놓고 옆에서 목반지에 연꽃을 새기고 있다.
도화녀E : 뭐해요?
회회 : (놀라 목반지를 감추며) 암것두 아니오.
도화녀 : (갸웃, 미소) 만두 만드는 거 도와드려요?
회회 : 어? 어... 그럽시다.
[점프]
도화녀가 회회가 만두 속 만드는 것을 이것저것 도와준다.
달구가 지나다니며 끼고 싶어 흘깃거린다.
도화녀가 웃으며 손짓을 하자,
달구가 쪼르르 달려와 도화녀 곁에서 만두피를 만든다.
세 사람 나란히 서서 즐겁게 만두를 만든다.
[점프]
도화녀가 만두통을 열어 만두를 꺼내고,
회회, 달구가 긴장해서 바라보고 서 있다.
도화녀가 곱게 완성된 만두를 회회에게 건넨다.
회회가 흐뭇이 보다 달구에게 내민다.
회회 : 먹어봐.
달구 : (선뜻 내키지 않아) 지금요? 뜨거울 텐데.
회회 : 이 녀석이!
달구 : (회회의 호통에 만두를 꿀꺽 먹는다. 찌푸렸던 표정이 점차 환해진다.) 우와, 맛있어요!
도화녀 : (기뻐서) 그래, 그렇지?
도화녀가 회회를 바라보며 환히 웃어준다.
그 모습에 회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 50 주점 겸 만두 가게 안채 마당 / 밤
어둡다. 불들도 모두 꺼져있다.
댓돌 위에 나란히 도화녀와 회회의 신이 놓여있다.
신발 앞에선 뒷모습이 보인다. 창우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란히 놓인 신과 어두운 방을 번갈아 본다.
# 51 거리
창우와 왈패가 넘긴 여자들이 굴비 엮듯 엮여 몽고군들에 의해 끌려간다.
회회는 한쪽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는데 마음이 안 좋다.
소년(10세정도)이 ‘엄마’하며 달려 나와 여자1에게 찰싹 붙는다.
군졸들이 떼어내려 애쓰지만, 소년은 ‘우리 엄마 내놔!’하며 발버둥친다.
여자1이 소년과 안 떨어지려 하니, 여자들이 엉켜 넘어지고 난리다.
회회 : (창우의 멱살을 쥐고) 자식새끼 있는 기집은 넣지 말랬잖아.
창우 : (눈을 깔며, 거짓말) 모,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병사E : 어서 끌고 가!
병사의 발아래 소년이 나뒹굴고 있다.
회회가 창우를 던지듯 내려놓고 다가간다.
회회 : (여자1을 거칠게 잡고) 이 여잔 놔 줘.
병사 : 뭐? 죽을라고 환장했냐? 바타르님의 명을 거역할 셈이야!
회회 : (병사의 멱을 잡아 올리며) 누가 죽는지 해볼까? 여긴 내 관할이야. 바타르님도 인정한 내 구역!
병사 : (콜록대며) 아, 알았... 어.
회회 : (병사를 내려놓는다.)
병사 : 야! 그년은 놔줘라!
여자1이 풀려나자, 다른 여자들도 놓아 달라 아우성이다.
여자1은 소년과 부둥켜안고, 회회를 향해 고맙다며 인사를 연신 한다.
회회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그 자리를 뜬다.
# 52 바타르의 집 정자
바타르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다.
회회가 창우를 거느리고 서 있다.
회회 : 부르셨습니까?
바타르가 회회를 무시하고 술만 마신다.
정원이 소란스러워지며, 병사가 남루한 농민하나를 끌고 온다.
바타르 : (보며) 뭐냐?!
병사 : 활과 화살을 만든 놈입니다.
농민 : (가며 악을 쓰는) 아닙니다요, 그건 무기가 아니라구요. 장남감이란 말이요.
아들내미 줄 장난감. 쬐끄만한....
바타르 : 금광으로 보내버려라!
바타르가 회회를 노려보다, 일어서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간신히 균형을 잡더니 회회를 발로 차버린다.
바타르 : 감히 네 놈이 내 병사에게 호령을 해! 멋대로 기집을 놔 줘!
니 놈도 살만해 지니 내 뒤통수를 치겠다 이거냐!
회회 : (엎드리며) 잘못하였습니다! 분수를 몰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회회가 용서를 빌며 바닥에 이마를 찧는다.
바타르는 그런 회회를 보며 분을 가라앉힌다.
고개를 숙인 창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친다.
바타르 : 니 옆에 이건 뭐냐?
회회 : 서달이 대신 일을 도와주게 된 창우란 놈입니다. 글도 알고, 셈도 할 줄 알아 장부정리도 잘 합니다.
바타르 : 음, 그래. (사이) 얼마 전에 궁에 들어갔더니 말이다.
너희 왕이 기생들을 모아다 남장별대란 것을 만들었더구나.
남장한 기집들이 춤도 추고, 재주도 넘고, 창극까지... 나도 그리 놀아보고 싶구나.
기집을 좀 더 모아 오너라. (회회의 등을 토닥이며) 너만 믿을 것이다, 알았느냐?
회회, 꼼짝 못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화가 난다.
# 53 주점 겸 만두 가게 / 밤
회회가 굳어진 얼굴로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다.
도화녀가 가만히 앞으로 와 앉는다.
도화녀 : 뭣 때문에 이리 힘든지 알려주면 안 돼요?
회회 : (말없이 술만 마시고)
도화녀 : (가만히 기다리는)
회회 : (힘겹게 입을 여는) 이제 내손으로 자식 딸린 계집까지 잡아들이게 생겼소.
이 내가... 어미를 그리 잃은 내가 말이오.
도화녀, 회회의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든다.
회회가 놀라 술잔을 잡는다.
도화녀 : 괜찮아요, 조금은.
회회 : (놓아주고)
도화녀 : 이것을 마시면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가 타서 죽는다 그러더군요. 타서 죽진 않아도,
가슴이... 마음이 불에 타는 것 같긴 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이랬어요. 그 사람이 날 그리했을 때도...
그래서 차라리 가슴이 타서 죽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회회 : 바타르 어른신을 거역할 순 없소, 날 살게 해준 사람이오.
도화녀 : (씁쓸) 네.
회회 : .... (사이) 여길 잃고 싶지 않소. 여기서 당신과 살고 싶소.
도화녀 : 나, 당신이 만드는 상화도, 이 가게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 손으로 당신 같은 아이, 당신 어머니같은
여인네를 만드는 짓은 안 했음 좋겠어요, (간절, 회회의 손을 잡으며) 하지 마요.
회회 : (고뇌에 휩싸인 채 술을 마신다.)
창우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엿보고 있다.
# 54 노상 주점 / 밤
서달이 엉망으로 취해서 난동을 부린다.
서달 : 술! 여기 술 내놔! 이 쉐끼들, 니들도 나 무시하지!
서달의 잔에 술이 부어진다.
서달이 쳐다보면 창우가 술을 따르고 있다.
서달 : (술을 쭉 들이 키고) 내 생각을 해봤는데, 사단은 다 그 기집때문이야.
형, 기집이였던 그년이 오구부터 우리 형님이 변했다구! 왜 그랬어? 그년이 도망가잘 때 가버리지!!
창우 : 자네가 나 같으면 그랬겠어?
서달 : (자조적 웃음) 달달한 힘 맛을 봤는데, 못 그러지. 헌 기집 때문에 안 그러지.
그래, 그래서 욕심껏 맛 봤수, 힘맛은?
창우 : 아니, 아직 간에 기별도 안가.
서달 : (한숨) 젠장 그러면 뭐하냐구, 뺏긴 놈들끼리 궁상이나 떨고 있는데.
창우 : (느리게, 하지만 앙다문 느낌으로) 뺏긴 건.... 찾아야지 안 그래?
서달 : 어떻게, 무슨 힘으로?
창우 : .... (의미심장한 미소)
# 55 빨래터
도화녀가 오자, 여자들이 도화녀를 슬금슬금 피해 일어선다.
여자들, ‘서방 버린 년이라며’ ‘몽고 잡종 놈 기집이래’ ‘드러워서 같이 빨래 못하지’ 정도로 쑥덕이며 자리를 뜬다.
도화녀는 모멸감을 견디려 빨래에 더 열중한다.
창우E : 너무, 애쓰지 마세요, 형수님.
도화녀 : (화들짝 놀라 돌아보면)
창우 : (곁에 와 앉으며) 아무리 애써도 말이죠, 형님은 힘이 뭔지 너무 잘 아시거든요.
그러니까 나, 도 이렇게 따르게 만든 거 아닙니까?
도화녀 : 그리 좋아요? 힘이라는 것이 그리 돌 정도로 좋아요?
창우 : (굳어지는).... 좋지요. 이 갈리게 좋지요. 이제 저잣거리 어떤 놈도 나 개무시 못해요.
나만 지나가면 무서워서 벌벌이야, 그러니 안 좋겠어요?
도화녀 : (속쓰린) 당신, 왜 점점... 사람이 이렇게 변하면 안 되잖아.
창우 : (무표정해져서) 변한 건 당신이지, 당신 마음이 변한거지.
도화녀 : 버린 건 당신이였어.
창우 : 난 버렸지... 하지만 변하진 않았어. (싱긋) 어서 들어가 보셔야죠, 형님이 기다리실 텐데.... 형,수,님.
도화녀가 빨래거리를 들고 자리를 뜬다.
창우는 서늘한 마음으로 멀어져가는 도화녀를 지켜본다.
# 56 주점 겸 만두 가게
회회가 긴장한 모습으로 바타르 일행을 맞이한다.
일행 안에는 서달이 보인다. 회회와 눈이 마주치자 외면한다.
회회 : 여기까지 무슨 일로...
바타르 : 일은, 매 사냥 다녀오는 길에 목도 마르고 해서...
도화녀가 빨래거리를 들고 들어서는데, 바타르가 넋을 놓고 본다.
회회가 놀라 그 눈길을 막아 선 사이 도화녀는 안으로 들어간다.
바타르 : (실눈을 뜨고) 자네 안사람인가?
회회 : (긴장, 경계) 그렇습니다.
# 57 바타르의 집 마당
바타르가 들어오는데, 창우가 기다리고 있다.
바타르 그대로 지나치려다 멈춰 선다.
바타르 : 넌 회회 밑에서 일하는 아이 아니냐?
창우 : 네, 오늘 형님이 바쁘셔서 제가... 용서해 주십시오.
바타르 : 음... 그 회회 아낙 말이다... (탐내는) 아주, 미인이더구나.
창우 : (슬픈 듯) 아, 그 여자는....
# 58 바타르의 집 방안
회회와 바타르가 술상이 차려진 탁자에 마주 앉아 있다.
바타르 : 여기 고려에는 윗사람에게 계집을 바치는 풍습이 있느냐?
회회 : (움찔) 무슨 말씀인지....
바타르 : 네 아낙 말이다, 원래는 니 밑에 있는 놈의 기집이였다 들었다.
회회 : (긴장, 다급)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정이...
바타르 : (말을 막는) 됐다, 됐어. 내가 어디 그런 일로 탓을 할 사람이냐. (술병을 들며) 자, 자 술이나 한잔 받거라.
회회 : (떨리는 손으로 술을 받는다.)
바타르 : 너도 말이다...., 이제 그만 그 계집과 살 수 없게 되면 어떠냐?
회회 : !!
바타르 : (껄껄 웃고) 마시거라, 마셔!
회회 : (부들부들 떨며 술을 마신다.)
# 59 강변 / 밤
회회가 몰래 사공을 만나 은전을 준다.
그를 지켜보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
# 60 거리 / 밤
으슥하다. 검은 그림자가 회회를 덮친다.
회회가 대항해 싸우다 보면 미곡상이다.
미곡상 : 주, 죽었어... 네 놈 때문에 내 딸이! 노상에서 짐승처럼 죽었단 말이다.
그러니 죽자,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가잔 말이다!!
미곡상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회회가 미곡상이 들고 있는 칼날을 잡는다.
회회 : 나는 죽어 줄 수가 없소.
미곡상 : 살고 싶으냐? 내 아길 그리 만들고 네 놈은 살고 싶으냐?
회회 : 살고, 싶소. 언제나 살고 싶었소! 아저씨는 왜 안 봐줬소, 왜 어미를 봐달라며 애걸하던 나한텐!
불쌍한 내 어미한테는, 짐승에게도 베푼 자비를 안 베풀었소!
미곡상 : 내 탓이 아니야! 세상이 그리 생겨 먹은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네 놈 같은 잡종 놈 낳은 년은 이 고려 땅엔 없는 게 나아!
회회가 분노에 차 미곡상의 목을 잡아 올린다.
미곡상은 칼을 든 채 몸부림친다.
미곡상 : 죽여... 라! 죽어서 라도 네... 놈을 찾... 내 딸의 원한은...
회회의 눈에 어린 광기어린 분노의 빛이 차츰 사라진다.
미곡상을 내려놓은 회회가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을 찌르게 한다.
미곡상, 제대로 깊이 찌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떤다.
회회 : 그리 생겨 먹은 세상, 누가 만들었소? 내 어미였소? 나였소? 그냥 좀 살게 두지 그랬소.
이 파란 눈깔이 거슬려도 좀 두지 그랬소.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살게 그냥 두지!!
그랬으면 이리 만나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니오!
회회가 물러서자, 미곡상은 그대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회회, 천천히 칼을 빼내어 던지고 비틀거리며 자리를 뜬다.
# 61 주점 겸 만두 가게 안채 방안 / 밤
도화녀가 회회의 상처를 매어주며 눈물짓는다.
도화녀 : 어떡해요, 이렇게 다쳐서 길을 어찌 가요. 왜, 바보같이 왜...
회회 : (도화녀의 뺨을 만지며) 괜찮소, 이 정도는 당해주는 편이 좋소.
도화녀 : (회회의 손을 꼭 잡는다.)
창우E : 형님 계십니까!
도화녀와 회회 화들짝 놀란다.
창우 : (급히 들어서며) 죄송합니다, 늦게. 급한 일이라. 바타르님께서 형수님을....
# 62 주점 겸 만두 가게 안채 마당 / 밤
도화녀가 회회를 부축하며 방에서 나온다.
창우가 그 뒤를 따라 나온다.
문으로 가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병사E : 회회, 있는가! 바타르님이 찾으시네.
도화녀와 회회, 당황해서 서로를 본다.
회회 : (결심한 듯 창우에게) 이 사람을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 나가게.
도화녀 : 안돼요, 이 사람 못 믿어요.
창우 : 나와 형님은 한배를 탄 몸입니다. 내가 탄 배를 엎지는 않아요.
회회 : 부탁이오, 혼자 몸이여야 도망도 칠 거 아니오!
(창우에게) 부탁하네, (도화녀에게) 어서 가요, 곧 따라갈게요.
창우가 도화녀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간다.
회회가 심호흡을 하고 안채 문을 연다.
# 63 바타르의 집 마당 + 대청 / 밤
회회가 병사들에 의해 마당으로 끌려 들어온다.
바타르는 대청 위, 의자에 앉아 있다.
회회의 발밑에 활과 화살을 던진다.
(#11에 나왔던 활과 화살이다.)
바타르 : 고려인에게 활과 화살이 금지되어있거늘, 네가 감히 명을 어기고 이런 것을 숨겨두고 있었더냐!
회회 : 내 것이 아닙니다!
서달 : (긴장) 마, 맞습니다! 소인이, 저... 저자의 상화점에서 찾은 겁니다!
회회 : 나한테 덮어씌우는 이유가 뭐냐!!!
창우 : (들어서며) 네 놈이 바티르님의 은혜를 등에 업었다 하여 안하무인으로 구느냐!
네 것이 아니라면 도망친 이유가 무엇이냐!
도화녀가 창우와 병사들에게 끌려 들어온다.
회회 : (도화녀를 보고, 분노 창우를 행해) 버러지같은 새끼! 죽여 버린다!
바타르E : 저 놈을 당장 잡아 꿇려라!
회회가 병사들에 의해 몸이 눌린다.
창우는 회회에게로 가려는 도화녀를 붙잡는다.
창우 : (도화녀의 귀에 대고) 한발짝만 움직여, 저 놈의 목을 따줄테니.
도화녀 : (그대로 얼어붙는다.)
회회 : (발악) 놔! 그 여자를 놔줘! 놔주라고 이 새끼들아!
바타르 : 시끄럽다, 더 말할 것 없으니 끌어내라!
병사들이 회회를 끌어내려 하지만, 회회 버틴다.
창우가 도화녀를 병사들에게 넘기고, 옆에 놓인 나무 몽둥이를 끌고 회회에게 다가간다.
회회 :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 모두 없애버릴 거야! 다 죽여버린다구! (도화녀를 향해) 기다.....
창우가 몽둥이로 회회의 입을 쳐버리자, 그대로 꼬꾸라진다.
창우 꼬꾸라진 회회의 목에 허리끈을 풀어 감아, 질질 끌어낸다.
도화녀, 비명이 새어나오는데 두 손으로 입을 가려 간신히 참는다.
회회는 끝까지 도화녀에게 말하려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도화녀도 회회가 사라질 때까지 그를 놓치지 않고 지켜본다.
# 64 바타르의 집 마루 / 밤
무감각한 모습의 도화녀가 인형처럼 꾸미고 서있다.
창우 : (도화녀의 뒤에 서서 속삭이는) 죽고, 싶어?
도화녀 : (인형같은 눈을 한 채) 그렇게 해줄래?
창우 : (킥 웃고) 미안해, 죽으면 안돼. 말 안 들으면.... 그 새끼가 죽어. 알지?
도화녀, 그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바타르가 일어나 도화녀를 안고 가는 모습이 방문에 그림자로 비친다.
창우가 그것을 덤덤히 보고 있다.
# 65 거리
회회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굴비 엮이듯 엮이어 끌려가고 있다.
달구가 회회 일행을 쫓아간다.
달구 : (울먹이며) 아저씨! 아저씨!
회회 : (돌아보고 말을 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달구 : 뭐라구요!?
회회 :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던지며) 전해.... 기다리라.... 전해....
달구 : (회회가 던진 것을 줍고) 알았어요! 꼭 전할게 걱정하지마요!
기다리라고 할테니까 꼭 돌아와! 돌아와요, 아저씨!
회회가 병사들의 서슬에 끌려가고, 달구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진다.
# 66 바타르의 집 정자
도화녀가 날카로운 머리장식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피가 새어나온다.
도화녀, 무표정하게 그것을 목으로 가져간다.
달구 : 아줌마!
도화녀 : (놀라 보면 달구가 정자 곁으로 기어온다.)
달구 : (도화녀의 손에 뭔가를 놓아준다.) 아저씨가 전해달래. 기다리라고, 꼭 온다구 기다리라구.
도화녀 : ...
달구 : 갈게, 아줌마. 잊지마 기다려야돼.
달구 그대로 다시 숨어 나간다.
도화녀, 자신의 손에 놓여진 것을 보면 목반지다.
반지에 반쯤 핀 연꽃이 새겨져 있고, 붉은 피가 엉겨있다.
무표정하던 도화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물이 고인다.
도화녀가 반지를 꼬옥 쥔 채, 엎어져 소리죽여 통곡을 한다.
# 67 바티르의 집 정원
연회가 벌어져 있다.
바타르의 한 쪽 곁에 앉은 도화녀만이 아무 표정 없는 모습이다.
창우가 여자들을 데려와 인사시키자, 그 여자들이 바타르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도화녀는 점점 구석으로 밀려 난다.
화려한 음악 속에 여자들의 현란한 춤이 이어진다.
도화녀 구석으로 밀려 나 점점 어둠 속으로 묻혀간다.
# 68 금광 부근 야산 / 밤
회회가 도망치고 있다. 병사들이 그를 쫓는다.
도망치던 회회가 병사들에게 몰려 굴러 떨어진다.
다시 일어서려 하지만 다리를 다쳐 고통스레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회회의 주변을 병사들이 둘러싼다.
# 69 유곽 앞
도화녀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마차에서 내린다.
유곽 여주인이 나와 여자들을 둘러본다.
창우가 서달을 데리고 도화녀의 곁으로 다가 온다.
창우 : (잔인하게) 이제 마지막이네, 그래도 오래오래 살아야 해, 죽지 말고, 알았지?
도화녀 : (낮게, 덤덤히) 당신도, 이렇게 가여운 모습으론 죽지는 마.
여주인 : 뭣들 해! 어서 들어가지 않구!
도화녀가 여인들과 함께 유곽 안으로 들어가고,
창우가 도화녀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주시한다.
창우 : (서달에게, 차게) 그 놈은 어찌하고 있느냐?
# 70 금광 안 감옥
회회가 어두운 금광 안 감옥에 갇혀 있다.
창우가 서달을 이끌고 나타난다.
창우를 본 회회가 덤벼들려 하다 쇠사슬 때문에 고꾸라진다.
창우 : (한숨) 그러다 몸 상하시겠소, 형님. ...그 여자 소식 알려 들릴까?
회회 : (무섭게 노려 보며) 어쩐 거야!
창우 : 어쩌긴요, (잔인한) 제 색끼를 못 이겨 유곽까지 흘러들어 갔답니다.
회회 : (괴성을 지르며 또다시 덤비다 그대로 꼬꾸라진다.)
창우 : (혀를 차곤) 지금, 형님께선 저한테 손가락 하나 댈 힘도 없으시잖아요.
그 깐 계집 잊고, 저하고 손잡으실래요? 그럼 살려드릴 텐데.
회회 : (이를 뽀드득 갈며) 죽여주마. 네 놈을 반드시 죽여주마.
창우 : 어쩔 수 없죠, 이제 진짜 이별이군요. 원나라 죄인들이 유배된 섬에 보내드리지요.
(바싹 다가가) 거기서... 천천히 혼자 죽어요.
회회 : (싱글거리는 창우를 분노에 떨며 노려본다.)
# 71 금광 앞
창우가 나오는데, 햇살이 눈부시다.
안에서는 회회의 짐승같은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서달 : (괴로운) 이렇게 찾아 올 거까지야 없잖소.
창우 : 없지만.... 그냥 저렇게 울부짖는 걸 보고 싶잖아, 안 그래?
창우가 미소 지으며 가고, 서달은 소름이 끼친다.
# 72 몽타주
1. 금광촌 일각
회회와 일꾼 몇몇이 마차에 오른다.
창우가 그 모습을 싱긋이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2. 유곽 안
도화녀가 병사에게 선택되어 방으로 들어간다.
3. 배 위
회회가 모두가 잠든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든다.
4. 저잣거리
창우가 서달과 왈패를 거느리고 지나간다.
상인들 창우가 두려워 눈도 못 마주치고 피한다.
창우, 그것이 즐거워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5. 산길 / 밤
회회, 다리를 절며 어둠 속에 산길을 간다.
# 73 유곽 안
방문이 열리더니, 병사하나가 도화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온다.
지쳐 보이는 도화녀의 배가 부풀어 있다.
도화녀, 이를 악물고 짹소리도 내지 않는다.
병사 : 재수 없는 년 들이지 말랬지! 이년 때문에 벌써 둘이나 뒈졌다구!
여주인 : 그게 왜 얘때문이야, 지들 재수지.
병사 : 암튼 난 이년 싫으니까, 딴 년으로 데려와!
여주인 : 알았어, 들어가 있어.
병사는 들어가고, 도화녀는 무표정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여주인은 도화녀를 벌레 보듯 지켜본다.
여주인 : (한숨) 야, 야 안되겠다. 너 짐싸. 밥벌레 둘이나 나 감당 못한다.
여주인도 들어가 버리고 도화녀 혼자남는다.
도화녀의 지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진다.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킨다.
# 74 창우의 집 방안
창우가 몽롱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앉아있다.
그의 곁에서 두 여자가 시중을 들며 술과 안주를 먹여 준다.
서달이 들어와 창우에게 귀엣말을 하자, 창우가 싸늘하게 굳어진다.
# 75 도성 안
회회가 엉망인 몰골로 절뚝이며 유곽을 찾아 헤매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런 회회를 피해 멀찍이 돌아간다.
회회가 행인의 팔을 잡자 빠져 나가려 버둥대지만,
회회의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회회 : (거칠게) 유곽이 어디야?
행인 : (벌벌떨며 한쪽을 가리킨다.)
회회, 행인을 던지듯 놓아주고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간다.
# 76 유곽 앞
도화녀가 작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도화녀,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보다, 품에서 목반지를 꺼낸다.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목반지를 낀다.
# 77 동장소
도화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유곽 앞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며,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회회가 다가온다.
유곽주변에서 기웃 거리던 달구가 회회를 발견하고 멈칫 선다.
회회도 인기척에 돌아보고, 달구임을 알아본다.
회회가 미소지으며 달구에게 다가가려는데,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린다.
회회 : (달구에게, 낮지만 강하게) 도망쳐!
순간 채찍이 날아와 회회의 목을 감아 넘어뜨린다.
말에 앉은 창우가 버둥거리는 회회를 내려다본다.
창우가 말을 달리게 한다. 회회는 말에 매달려 끌려간다.
한구석에서 달구가 그 모습을 지며보며 눈물을 삼킨다.
# 78 주점 겸 만두 가게 앞 / 밤
가게가 망가져 있다.
도화녀가 애잔한 눈으로 가게를 둘러본다.
달구E : 아줌..마?
도화녀가 돌아보면 달구가 울먹이며 서있다.
도화녀가 환히 웃으며 팔을 벌리자 달구가 품으로 뛰어든다.
달구 : (엉엉 울며) 아줌마, 아저씨가... 아저씨가...
# 79 창우의 집 대청 + 마당 / 밤
창우는 대청 위, 의자에 비스듬히 느긋하게 앉아 있다.
회회를 구타하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리고 있다.
마당에서는 왈패들이 묶인 회회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다.
창우 잠깐 쉬자!
창우가 느긋하게 싱긋거리며 회회의 앞으로 간다.
창우 : 어떠시오? 회회어르신, 내 밑으로 들어오신다면 내 그 목을 보전시켜드리지.
회회 : (창우의 옷자락을 잡고 사정) 부탁이오. 나를 보내주시오. 그 사람만 찾으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소.
창우 : (마주 앉아, 장난처럼) 그래? 내 그 계집을 당장이라도 네 앞에 데려다 놓으마.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말이다. (손을 내밀며) 이 손을 잡겠느냐?
회회가 부들부들 떨며 창우에게 침을 뱉는다.
창우가 창백해져서 일어선다.
무표정한 눈으로 피투성이인 회회를 내려다보다 돌아선다.
창우 : (낮게) 계속 쳐라.
서달 : 이러다 죽이겠소.
창우 : (미소, 냉정한 목소리) 저 놈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어야지. 그러니. 쳐라 계속~.
서달, 그런 창우의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지만, 회회의 구타는 계속 된다.
# 80 창우의 집 앞 / 새벽
도화녀와 달구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비속에서 지켜본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몸을 숨긴다.
왈패들이 거적에 싸인 회회를 밖으로 던져 놓는다.
회회는 허리가 뒤로 꺾이고, 알아보기조차 힘든 죽은 자 같은 몰골이다.
도화녀와 달구가 대문이 닫히자, 회회에게 급히 다가간다.
도화녀, 회회를 부둥켜안지만 꼼짝도 않는다.
달구는 그녀의 곁에서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도화녀와 달구 놀라 쳐다본다.
서달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도화녀가 마치 벌레처럼 몸을 웅크려 서달에게 인사를 한다.
같이 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으로.
서달이 외면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화녀는 회회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
# 81 움집 안
깨끗이 씻긴 회회가 누워 있고, 그 곁을 도화녀가 지키고 있다.
회회가 눈을 뜨고 둘러본다.
도화녀 회회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도망가려 한다.
회회 : .... 가지 마.
도화녀 : (몸을 움츠리고) 오지 말아요, 보지 말아요, 제발....
도화녀가 나가려하자, 회회 일어나려 하지만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회회, 몸을 비틀어 도화녀를 향해 기어간다.
도화녀가 회회의 필사적인 모습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에게로 다가가 안아 일으킨다.
그녀의 손가락엔 피묻은 목반지가 끼워져 있다.
회회 : (도화녀의 손을 만지며) 고맙소.
도화녀 : (부른 배에 회회의 얼굴이 닿자 몸을 움츠린다.) 미안해요... 이렇게, 되서 미안해요.
회회 : (배에 얼굴을 올리며) 당신 배가 상화 같아. 동글동글 이리 따스하니... 좋구려.
도화녀 :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회회를 보듬는다.)
# 82 창우의 집 마루 + 마당
창우가 홀로 마루에 앉아 있다.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도화녀가 만들어준 조각이불이다.
창우가 부르르 떨며 작은 몸을 조각 이불 속으로 더 파묻는다.
# 83 길
햇살이 가득한 길 위로 수레가 굴러 간다.
도화녀가 수레를 끌고, 수레 위에는 회회가 아이를 안고 앉아 있다.
달구는 뒤에서 수레를 민다. 그 위로...
달구E : 우리, 상화점 다시 열어요. 이제 손님도 많을 거예요. 아저씨 상화도 맛있어졌으니까.
도화녀E : 그럴까요?
회회, 아기를 어르는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회회 : (환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그럽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