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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역 작가로 산다는 건
강병철(소설가)
35년 전 첫 발을 내디뎠으니,
알싸한 세월이다. 시인 흉내 포만감으로 헛배 채우던 열혈청년 시절부터 허허로운 초로까지 강산이 몇 차례 바뀌었다. 막걸리에 취해 철둑길 무너뜨렸고 장대비 쏟아지는 골목길을 고무신 밑바닥으로 쓸고 다니던 젊음의 기억이다. 그게 습작 청년의 몸 만들기인 줄 알았던, 그래도 지금보다 착했던.
그해 가을, 광주항쟁 직후 사복경찰들이 캠퍼스마다 상주하던 동토의 시국이었다. 지방대학생이던 나는 이은봉 선배의 추천과 전인순 문청의 설득으로 『삶의 문학』 동인으로 처음 입(入)했다. 벗들은 대전 은행동 지하 대성다방에서 달달한 커피로 굴뚝새 연기 뿜었고 먹자골목 찾아 시뻘건 두부두루치기에 사리를 비볐다. 빨간 뚜껑 금복주 채우며 쏘주 같은 눈물 흘리다가 통금 막차에 쫓겨 홍도동 자취방에 ‘쿵’ 쓰러지곤 했다. 눈을 뜨면 다시 책을 보고 글을 썼다.
이은봉, 이은식, 김영호, 박용남, 김흥수 선배들과 벗 조기호, 전무용, 윤중호 그리고 후배 이재무 등이 문필 혁명 전선에 배치되었다. 민주주의와 빵과 통일과 사랑을 토로하던 진보 문사들은 루카치와 트로츠키의 커튼을 열고 전태일과 이영희를 독파하며 자존의 골재를 쌓았다. 그러나 조금은 미안하다. 낭만적 치기가 절반은 차지했던 젊음이었으니.
하나, 내가 있는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다
둘, 목숨 걸고 글을 써서 나라도 구하고 돈도 벌자
셋, 신춘문예 거부하고 내 출판사 따로 차리자
넷, 지역 권력 만들어 중앙문단 초토화시키자
다섯, 밥은 굶더라도 술과 책은 끌어안자
특히 세 번째 강령에 푹신 빠졌던 것 같다. ‘신춘문예 거부’라니, 심사위원의 품에 안기는 조바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 마음에 딱 맞춤형 문장이었다. 그렇게 『삶의 문학』으로 글판에 나왔으니 그게 지역 작가로의 첫 출발이었으리라.
『삶의 문학』 6호 파란 껍데기 이후 우리는 조금 떴다.
공주시 반포면 농촌 현장에서 농민공동창작시 「옹매듭두 풀구유」가 생산되자마자 몇몇 잡지와 중앙문단 선배의 주목을 받으면서.
“충청도 젊은 애들, 무서워.”
칭찬 몇 마디에 ‘이히히히’ 발바닥이 허공으로 15센티쯤 떠서 다녔다. 집단의 몸피도 불어났다. 그즈음 충남대 ‘화요문학’의 김백겸, 임우기, 김상배, 유달상 등을 만났고 공주사대 ‘황토’와 ‘율문학’의 최교진, 정영상, 조재도, 이정록을 조우했으며 민중야학의 송대헌, 황호명을 만나면서 동네방네 지평이 확장되던 시점이다.
남도의 벗들과도 끈이 닿았으니 김진경, 최두석 등 『오월시』 동인들이 교육무크를 제안하면서부터이다. 『삶의 문학』 7호 기획 특집이 ‘문학과 교육’이므로 교육무크를 준비하던 그들과 금세 의기투합된 것이다. 그랬다. ‘지방’이란 용어 대신 ‘지역’으로 대체할 즈음이니 바야흐로 문학의 지역분권화가 도래하는 줄 알았다. 대전의 『삶의 문학』 서울, 광주의 『오월시』, 청주, 대구의 『분단시대』 그리고 남녘땅 어디쯤의 『민의』 『시와 경제』 등의 제호로 저마다의 지역에서 깨어있는 부정기종합지가 비료포대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전두환 집권 직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의 문예지와 『뿌리 깊은 나무』 등 대표성 잡지가 폐간된 틈새였으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랄까.
85년 그해 여름, 『민중교육』 사건이 터졌다.
5공화국 신군부 권력의 칼춤에 17명의 교사가 목이 잘렸고 나도 그 잡지에 단편소설 「비늘눈」을 발표한 죄명으로 밥그릇과 제자들을 단방에 빼앗겼다.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리고 있다’
TV 출연이 목표였던 나에게 어럽쇼, 브라운관 복판에 이름자가 또렷이 박힌 것이다. 제도권 나팔수들은 재빨리 붉은 글씨로 충성경쟁에 돌입했다. 내가 입은 잠바 색깔이 빨갛고 넘어질 때 무르팍 생채기도 빨갛고 술 마시면 얼굴 빛깔이 빨갛게 변질된단다. 운동화 뒤꿈치도 왼쪽으로 쏠려있고 머리 가르마도 좌측이라는 주입식 정보로 샤방샤방 도배를 했다. 아무 부적이나 대기만 하면 주홍글씨로 찰싹 달라붙으니 당사자인 나까지 ‘혹시 내 심장이 진짜로 빨간 펜에 찔린 것 아닐까?’ 헷갈릴 정도였다
또 있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매스컴의 플래시가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다. 해직교사 17명 중 서울 거주가 절반이 넘었고 나머지는 충청도 글쟁이 교사였는데, 동시에 중앙 입성의 열쇠를 딴 덕분인지 모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단계별로 구분되던 순간, 나는 벼랑 끝에 매달린 채 ‘태풍의 눈’을 떠올리기도 했다. 나중 얘기지만 그게 나의 유명세 전성기의 기회이기도 했다,
해직교사 시절, 동아일보 임시직 근무할 때가.
나의 마지막 서울생활이다. 윤중호 시인의 흑석동 자취방과 전무용 석학의 성남동 날맹이를 전전하면서 동가숙서가식에도 이골이 날 즈음이었다. 덕분에 86년 건국대 애학투 사태나 금강산 댐 수몰 홍보의 허구성, 그리고 1987년 1월 3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남보다 며칠 빨리 접했다. 마포의 자유실천문인회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가끔 중앙무대에 글도 발표했으나, 문제는 서울 거주가 싫은 것이다. 자꾸만 충청도 아랫목 구들장에서 등허리 지지다가 동치미 국물로 시린 속을 달래고 싶은 것이다. 술에 취하면.
“집에 가고 싶어”
꺼이꺼이 가슴팍 두들기기도 했는데.
이상하다. 벗들이 여전히 신춘문예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당선작을 만들거나 최종심 언저리에서 아슬아슬 밀려나는 벗들의 명단을 새해 첫날 활자판으로 만나면서.
‘우이씨, 등단 절차 거부하기로 했었잖아.’
약속 위반을 탓하면서도 덜컥,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야 하나? 그런 갈등이 아주 잠깐 등장했다. 지역에 거(居)하면서 글을 쓰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지역 거주 작가의 소명이란 게 따로 존재하는 거라고 자가 최면에 돌입했다. ‘쓰면 된다’는 슬로건으로 ‘변명은 약한 자의 비명’이라고 자신 있는 포즈를 취하려 했다. 삶의 궤도를 두어 차례 뒤집을 기회를 노리던 기울어가는 젊음 즈음이다. ‘나는 지역에 남아서 투자할 일이 많다’고 큰소리쳤으나 절반쯤은 불안한 마음의 합종이기도 했다.
하나씩 서울행 숫자가 늘어나면서.
막연했던 불안감의 씨앗이 호빵처럼 팅팅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20년 후 저 서울행 문사와 나의 간극이 와장창 벌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들. 다행이랄까, 도종환, 윤재철, 이재무, 정영상 시인 같은 몇몇 작가들이 무크지 등단으로 마침표를 찍기에 나도 밀고 나갔다.
89년 4월 공주 탄천중학교에 복직을 했다. (김홍정 작가를 거기서 만났고) 그해 여름 곧바로 전교조 교사 대량 학살 사태가 터졌고 젊은 진보 1700여 스승이 그 단두대에 서슴없이 몸을 던져 자발적 해직교사가 되었다.
그 부채는 엄청난 수렁이었고 부담이었다. 특히 나는 『민중교육』 해직교사 출신이므로 어떡하든 만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산성시장통 백락다실 3층 건물 전교조 공주지회 사무실에서 유지남, 전병철 선생 등과 시 창작 합평모임을 열었고 김상배, 김상천, 가덕현 선생 등이 가끔씩 합석했다. 2차 해직으로 가지 못한 빚을 갚으려 노력했으나, 어럽쇼, 예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이 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멀쩡한 수업 중에도 집안의 내 아들 딸 얼굴이 칠판 앞에 방싯방싯 떠 있는 것이다. 아, 아비의 피를 처음 체득한 가족사랑, 그게 소시민으로 가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어쨌든 마흔 살,
첫 소설집은 『비늘눈』이었다. 다른 작가들이 첫 출산에서 그랬듯 나 역시 첫 출간물이 행여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매체 점검으로 조바심했다. 동시에 베스트 작가만 되면 지역의 아주 조그만 출판사만 골라 출간하는 혜량을 보이겠다고 마음만 먹어보았다. 그 결의는 지금도 유효하며.
주로 금강권과 충청도 지역의 지면을 메꿔주는 역할을 했다. 대전일보, 중도일보, 금강신문, 공주신문, 웅진신문 칼럼을 썼고 금강시대, 중도타임 청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면 후배들에게 지면을 넘겨주었다. 그때만 해도 지역매체에서도 작가들에게 원고료만큼은 꼬박꼬박 챙겨줄 때이니 술값도 짭짤했지만.
전교조는 연중행사로 시국선언이나 불법집회를 터뜨렸고 그때마다 나는 젊은 교직원 여남은 남짓과 그 대열에 핀치히터 결사대로 동참했다가 교장님들과 옥신각신에 시달렸다. 기관장들은 배수의 진을 친 시한폭탄 중년의 교사를 껴안고 얼렀다가 달래거나 술청으로 끌고 다니며 시위 대열과의 분리를 시도했다.
그러나 난세는 작가의 집중력보다 더 무거운 책무로.
‘동지여, 투쟁이다’
그랬다. 붓을 접고 아스팔트 열혈 청년들의 동지요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팔을 자르고 술상을 날랐다. 거리마다 최루탄과 화염병 공방으로 뜨거웠으니, 시대의 아픔이 교사의 기쁨이기도 했던 시국 탓이다. 문제는 그렇게 뜨거웠던 세월들이 빛의 속도로 찰나에 흐른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백골단이 사라졌고, 최루탄이 증발되더니 촛불시위로 변신될 즈음, 나의 필력이 쪼글쪼글 쇠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건 나중 얘기고.
어느 순간,
몇몇 서울행 벗들의 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몸집 확장 이후 그들을 따르는 쪽으로 무리들의 무게중심이 홱 쏠렸지만 무심한 척 나만의 레이스를 위해 신발끈을 조이려 했다. 새벽 다섯 시, 전기밥솥 눌러놓고 대학도서관을 열었다. 글자 수 채우거나 원고지 칸 메워야만 나머지 하루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숨어있던 늦깎이 선배들도 글판의 네트워크에 자리 잡으면서 근육을 단련시켰다. 나도 그 틈새에서 ‘해마다 무 뽑듯 출산이다’ 그런 목표로 글을 썼고 술을 마셨고 두 자리 수 넘는 책자를 펴냈다. 문화계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았으나 나의 책들은 대개 출판사에 손해를 주지 않아서 최면 유지가 가능했다. 그즈음 한반도는 자본주의의 약진에 성공한 만큼 GNP가 올라갔으나 가난한 문사들은 여전히 밥고개 문턱을 넘지 못했으므로 수시로 나의 지갑 검열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역 작가들과 새콤달콤 심장을 나누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기웃기웃 짝사랑 수준이었다. 혼자 있을 때마다 완행버스 한 시간 남짓의 벗들을 끌어당겨서 나 홀로 막걸리 잔으로 그들의 스크린에 진하게 색칠하는 수준이다. 공주의 인간문화재 이걸재 작가가 그렇고 단 한 번의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았던 소설가 조동길 교수가 그렇다. 태안의 지요하 선배, 금산 좌도시의 길일기, 안용산, 김선주가 그렇게 떠올리기만 하고 몸으로 더듬지 못한 사이다. 흙빛문학의 정낙추, 임명희 선배를 떠올리며 센티멘털에 사무치는 이유는 따로 있고.
더러는 어느 골짜기 기슭으로 원고지 따라 텔레파시를 날리기도 한다. 고창 출신 박순호 시인은 텃밭 공사 돌멩이 나르며 머리 동여매고 글을 쓰는구나. 부산의 이아타 소설가나 임제다 동화작가가 작가촌 전전하며 원고지 칸을 채우는 중이로구나. 당진의 김광선 시인이 우럭횟감 뜨다가 칼도마에 걸린 감성을 다듬는 중이고, 제주의 조중연 작가가 호텔 주차요원을 접고 베트남 찾아 속죄의 글을 쓰는구나, 나 홀로 짐작할 뿐이다 청탁을 부탁하는 메시지도 없거니와 지면을 달라고 청탁할 성품들도 되지 못한다. 외롭고 무거운 하이에나 질주다.
나도 그렇다.
‘한반도 그나마 토막 난 좁은 땅의 간극 좁히기가 망연하구나’ 궁시렁거리며 책꽂이를 정리하고 파지를 버려야 속이 채워지는 것이다. 중앙 권력이 쓸고 간 자리, 등 돌린 채 이삭을 줍다가,
‘세상의 이치 모두가 낱낱이 소중하구나’
허리를 펴며 망망벌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와 말똥구리가 당기는 분비물의 크기가 똑같다고 강변하며 꼼꼼하게 옹매듭 엮는다. 더 이상 즈이끼리 폭죽 터뜨리는 우상의 우산 속에서 옹송거리지 않겠노라, 엎드려 삽질 중이다. 그러나 궁금하다. 나의 에너지는 언제까지 펄펄 넘칠 수 있는가, 하며.
첫댓글 돌이켜보니 참 아득하고... 파란만장한 시간이 흘러갔네요... 지역 작가로 산다는 건 마을 어귀를 지키고 서있는 당산나무처럼 늙어가는 일이겠지요...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홀연히 지역을 떠났던 이들도 결국 언젠가는 한 줌의 뼛가루가 되어서라도 다시 돌아올 테구요... 그들이 마을 어귀를 지나갈 때 나무는 긴 팔을 드리워 그들이 쉬고 갈 그늘을 만들어 줄 테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