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분류 : 사적 제87호
시대 및 시기 : 백제, 7세기
성격 및 유형 : 왕릉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쌍릉길55
방문일 : 2021년10월20일
누구와 : 아들네와 함께
익산쌍릉은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한다.
오금산 서쪽능선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상에 2기의 원형 봉토분이 180m의 거리를 두고 북쪽에는 대왕릉, 남쪽에는 소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쌍릉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 그 위치를 기록했으며 『고려사 금마금조』에서는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 있는데 속칭 말통대왕 능이라고 하며 일설에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이다.」 라고 쌍릉의 피장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조(1329년)』에는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의 능을 발굴하였다.」라고 쌍릉 도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익산쌍릉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12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는데 조사결과는 「13행으로 기술된 약식보고서와 유리건판사진 및 조사당시 봉분 및 석실의 실측도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그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파악할 수 없으며 소왕릉에 대해서는 대왕릉과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규모의 크기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7~2019까지 익산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쌍릉을 재조사하였는데 이는 익산쌍릉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향후 효율적인 보존이나 정비방안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7호로 지정된 익산쌍릉은 익산시 석왕동 산55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과 인접한 곳으로 720번 지방도로와 접하고 있습니다.
쌍릉은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하는데,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는 설과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는 설이 전하며 고려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되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라는 이름으로 일본놈들에 의해 파헤쳐 젔으며 일본사람 다니이(谷井濟一)에 의해 최초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는데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던것을 복원되어 현재 익산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왕릉 발굴조사 결과
대왕묘 봉분의 규모는 지름 25m, 높이 4m 정도로 석실묘의 구조는 단면육각형의 7세기 백제 사비기 국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잘 다듬어진2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백석위에 1매의 고임석을 두고 2매의 천정을 올린 형태이다.
짧은 연도를 두고 현실내 중앙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던 화강암재로 된 길이 270cm, 너비 84cm, 높이25cm의 관대가 놓여있다.
석실규모는 길이 401cm, 너비175cm, 높이225cm로 능산리 왕릉고분군 보다 큰 규모이고 석재를 다듬은 기술과 구조의 치밀한 피임새등을 볼 때 매우 공력을 들여 만든 석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내 관대 위에는 일제강정기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상자 안에는 102 조각의 사람뼈가 담겨 있었다.
사람뼈의 과학적 방법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 생전상황 등을 알수 있는 자료들이 확인되었다.
대왕릉의 석실 앞쪽으로는 길이21m, 너비4~8m 규모의 묘도가 조사되었으며 웅장한 규모의 묘도를 통해 장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묘도가 조성되기 전, 석실을 중심으로 봉분의 일정한 범위에서 표시적 성토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대왕릉의 석실축조 완료 시점과 장례 행위간의 일정한 시간적 차이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왕릉 발굴조사 결과
소왕묘 봉분의 규모는 지름 13m, 높이 3m 정도로 대왕릉에 비해 작지만 봉분 끝 주변으로 서쪽6m, 동쪽13m 길이 이상의 범위에 성토하여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전방부는봉분 성토층이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완만한 경사의 성토층을 조성하고 있다. 성토가 끝나는 지점에는 60-100cm 장방형 석재를 세워 반원형에 가까운 현태로 석렬을 시설하였다.
봉분의 축조는 대왕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석실을 중심으로 층층이 다져 쌓은 판축기법이 이용되었다.
석실은 봉분의 남쪽에 치우쳐 위치하며 남-북 방향을 정축으로 두고 있다.
석실묘의 구조는 잘 다듬어진 판석을이용해 뒷 벽면과 양쪽 긴 벽을 세웠으며 그 위에 1매의 고임석을 놓고 2매의 뚜껑 돌로 덮었다.
내부 중앙에는 1매의 화강암재로 된 길이 245cm, 너비 63cm, 높이20cm의 관대를 놓았다.
짧은 연도를 가지며 현실과 연도는 1매의 석재를 이용해 이중으로 폐쇄하였다.
전체적인 구조는 대왕릉 석실과 동일하며 석재의 가공 향상 및 파임새의 치밀함도 매우 흡사하다. 다만 석실규모가 길이 343cm, 너비128cm, 높이178cm로 대왕릉에 비해 작다.
묘도는 봉분의 전방부에 형성된 성토부를 수직에 가깝게 절개하여 조성하였는데 길이15m, 너비4~6m, 최대 깊이 3m이며 묘도 중앙에는 배수로를 길게 조성하였다.
소왕릉 조사에서는 2기의 묘표석이출토되었는데 1기는 석비형태로 석실묘 입구 부근, 다른 1기는 석주형태로 봉분내에서 확인되었다. 모두 일제강점기 교란 범위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으며 2기 모두 글자가 없는 무자비로서 백사의 의미로 세웠던 것이 아닌가 추정 하기도 한다.
소왕릉은 대왕릉에 베교하며 봉분, 석실, 묘도 등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을뿐 석실의 구조 등 전반적인 양상은 거의 동일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왕릉에서는 옥제 장구, 금동좌금구, 유문목재. 소소도재환 등이 출토되었고 소왕릉 내에서는 목관의 본체와 뚜껑을 결합하고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관식도금교구와 도금투금구가 출토되었다.
(위 기사는 쌍릉 주차장에 있는 안내판에 있는 글과 다른 자료를 합쳐 작성했습니다.)
미륵사지에서 옛 유적을 보고 우리는 왕궁유적지로 이동해 유적지를 돌아보며 오래전 무왕이 머물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왕궁유적지를 보고 다시 익산쌍릉으로 이동합니다.
미륵사지와 왕궁유적지 그리고 쌍릉은 가까운 곳에 삼각형 형태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미륵사지에서 왕궁유적지는 6.0km, 왕궁유적지에서 쌍릉은 3.2km, 그리고 미륵사지에서 쌍릉은 6.7km입니다.
쌍릉 주차장에 도착하면 관리가 되지 않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는데 30여대 이상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에는 인근 회사 차같아 보이는 승용하와 덤프트럭이 주차되어 있었고, 청소상태는 아주 불량했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 쌍릉을 구경하러 온 관람객은 우리 뿐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임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이곳 쌍릉이 빠져 있어 익산시나 문화재청, 그리고 관광공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 보였는데 미륵사지와 왕궁유적지 그리고이곳 쌍릉은 백제무왕과 관련된 유적지로 3곳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야함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쉬웠습니다.
주차장 서편에 작은 건물하나가 있는데 우리는 그곳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화장실로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화장실이 아니라 익산쌍릉관리사무소였는데 문은 잠겨있고 현관문 안으로 보이는 건 먼지로 덮인 청소도구와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책상이 전부였으니 누가이런 곳을 찾겠습니까?
우리는 먼제 소왕릉으로 갑니다.
주차장에서 약100m 정도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왕릉은 작은 언덕길을 오르면 거대한 능상이 나타납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진 은역에는 쌍릉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을 뿐 그외 다른 시설물은 없는데 거대한 능상의 잔디는 큰 사각형으로 이어 붙인 표시가 났는데 나중에 글을 쓰며 보니 2017~2019까지 2년동안 쌍릉을 재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묘역을 접이하고 잔디를 입힌 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은이와 나린이는 개대한 왕릉의 묘역 잔디위를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일행이 묘역을 돌아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대왕릉으로 이동합니다.
대왕릉을 돌아봅니다.
역사적측면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소왕릉과 대왕릉은 분명 많은 차리가 있겠으나 외관상으로 보면 거대한 왕릉이라는 것이라는 점으로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린이와 나은이도 그냥 즐겁게 뛰어다니며 놀기에 바쁩니다.
대왕을 동남방향으로 내여서니 사적입석이 있는데 입석의 크기나 형태는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일정한 것입니다.
익산싼릉은 사적 제87호입니다.
관리가 부실한 익산쌍릉을 보고 아쉬운 맘으로 내려서는데 소나무 숲 속에 비석이 있습니다.
용머리 갓을 쒸운 오석으로 된 비석은 청주한씨 창교라는 분의 공적비였는데 긴 한문으로된 문장을 읽어볼 수는 없었는데 청추한씨의 비석이 이곳에 있는 진의는 쌍릉의 주인인 피장자에 대해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는 설과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는 설이 전하는데 청주한씨에서는 무왕보다 마한 무강왕에 무게를 두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연유에서 이곳에 비석을 세우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이 비석이 있는 곳에서 약30여m 떨어진 곳에 제를 올리는 상돌(조선왕릉에서는 혼유석)로 보이는 석판이 있는데 궨 돌이 빠진 상태로 오랜동안 버려진 듯 했는데 비석을 세울 때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버림을 받고 있는 게 보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소나무 숲을 가로 질러 주차장으로 가며 익산시에서 미륵사지에 수백억의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 미륵사지만이 아닌 이곳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미륵사지에 쓰이는 수백억원은 익산시 돈이 아니고 우리 국민들의 돈이므로 소외된 익산쌍릉에도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