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모습
가을의 모습
예배당 내부-1
예배당 내부-2
예배당 내부-3
교회 옥상은 '야외 예배당'이다.
지붕의 모습
'이 페이지의 사진은 경동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은것들입니다. 제가 찍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http://blog.naver.com/dotard/80010366398 |
출처카페 : 건축/실내건축의 꿈~!! / 크라시아님 |
중구 장충동 1가 26-2번지에 위치한 경동 교회. 전면의 도로는 넓진 않지만 항상 복잡한 편이고 주변 환경도 일상적인 도심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라면 서양의 고딕 건축 양식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이 교회의 형태는 매우 인상적이다. 성채같기도 하고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고 평가되는 이 건물은 1980년에서 81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건축가 김수근이 두번째로 설계한 교회 건축이다. (마산 양덕성당-경동교회-불광동 성당으로 이어지는 김수근의 종교 건축은 오랫동안 한국 교회건축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전체 건물의 규모는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약 503평 대지에 들어선 건축면적은 265평, 연면적은 726평 정도가 된다. 1945년 창립된 경동교회는 한국 개신교 교파 중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의 교회로서 “바로 역사의 현장 속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을 추구해왔다고 한다. 현재의 교회당 건물은 1958년부터 사용하던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다.
새로 교회당을 지을 당시 교회측의 생각은 “교회는 세계적이고 시대를 초월하고 영원과 이어지는 보편성이 있는 반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는 특수성의 측면도 있어서, 이 두 측면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도 안된다” 는 것, 즉 “한국적인 것은 바로 생명력이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경동교회는 이러한 이념과, 1978년 이미 마산의 양덕성당 건축을 통해 종래와 다른 한국적 교회의 새로운 원형을 탐구하고 있던 건축가의 의지와 결합되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건축가는 스케일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 의식을 낳을 수 있는 감각의 공간, 또는 생활과 밀착될 수 있는 교회로 기능할 수 있는 공간으로 풀이하였다.
건물의 외관는 경사지며 분절된 각각의 벽들이 안쪽을 향해 꺾어지며 모이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여러 개의 단위 공간들이 덧붙여지는 내부 구성에서 비롯된 형태이다. 특히 교회 전면이 되는 부분의 두 개의 매스가 다른 부분의 벽보다 높게 솟아있어 시선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붉은 벽돌은 반쪽이 깨진 채 마감되면서 부분부분 장식적 처리가 되어 있어 거칠고도 견고한 느낌을 준다.
내부 회중석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건물과 옆 대지와의 경계선을 따라 전개되는 외부계단을 따라 건물의 뒤쪽으로 돌아들어가야 한다. 계단은 위쪽옥상부로도 연결되며, 건물을 한바퀴 빙 돌아내려오면 다시 가로와 만난다. 즉 일견하기에는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이 외부계단으로 인해 전체 구성은 매우 개방적이 되는 것이다.
이 경로는 예배를 보러 오는 신도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신성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산 속의 절들을 찾아갈 때, 산문을 지나서 본당이 나올 때까지 한참동안 산길을 걸으며 세속의 때를 벗게 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종교에 있어 대상은 전혀 다르지만 그 속성은 유사한 건축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길이 끌리는 옥상에는 원래 다양한 행사를 위한 ‘열린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 설계를 시작할 당시 개방적인 형태로 만들고자 했던 개념을 옥상의 열린 교회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교회측에서는 “두 가지 의미, 즉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아울러 전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예배와 축제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하늘을 향해 열려 있던 이곳에서 설치미술가 최재은 씨가 대나무와 조명 등을 이용한 작품을 설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하무덤인 카타콤에서 출발한 교회 건축은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된 이후 로마의 공회당인 바실리카를 기본형으로 발전해 왔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이전까지의 교회가 신 중심의 권위를 강조했던 경향은 점차 초대교회의 인간중심적인 분위기의 추구로 변모해 왔다.
교회의 여러 기능 중에서도 초월적 존재의 신성에 대한 표현이라는 부분과 인간 공동체 생활의 구심적 역할이라는 두 가지 목적은 건축가들에게 교회 건축을 가장 어려운 분야로 인식하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삶과 종교가 함께 하는 만큼, 종교 건축도 삶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동교회 http://www.kd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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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하루를 살아간다는건... |






제작년 겨울에 찍었던 사진.바람이 불어서 상당히 추웠던 기억이..ㅎㅎ
교회 건축은 참으로 재미가 있다.(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종교건축들)
건물자체가 성령의 받아들임과 '기도'라는 바람의 에너지를 증폭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곳이기 때문에 경제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건물자체도 교인과 건축가의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고 그것이 특별한 공간과 형태를 통해 표출이 된다.
경동교회!
우리나라 건축계의 대부 '김수근'선생님이 설계하신 교회이다.
역시나 외부는 붉은 적벽돌로 되어 있다.그리고 건물은 덩쿨더미로 덮여있다.
이 덩쿨이라는것이 공간사옥에도 사용되고 있지만 참 재미있는 외장재료(?)이다.
사계절의 변화를 건물로 직접 느낄수가 있다. 여름에 푸르른 느낌, 겨울엔 벽돌자체와 줄기의 황량한 느낌까지.나중에 내가 설계한 건물에도 사용해 봐야지.
건물의 형태는 사람이 두 손을 모아 하늘을 떠 받드는 모습이다.
참으로 강렬하고 직설적인 표현방법이다. 내부는 들어가보질 못해서 촬영을 하지 못했다. 아쉬움..
그리고 주변 상황이 좀 좋지않아서 약간의 실망이다. 한적한 언덕위에 있었으면 더 멋졌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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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평면도
2층 평면도
3층 평면도
4층 평면도
남측 입면도
동측 입면도
북측 입면도
서측 입면도
중2층 평면도
지하2층 평면도
횡단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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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공간사옥은
1971년 완공한 건축에 잇대어 77년 증축된 구관과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97년 지은
장세양(1947-1996)설계의 신관으로 돼 있다.
사면을 투명한 유리로 마감한 첨단공법의 신관은
외관상 흑색벽돌의 패쇄적인 구관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지만
애초의 공간철학은 그대로 구현했다.
구관이 한옥촌에 지어지는 것을 고려해
기왓장 느낌의 전(塼)을 새로 만들어썻듯
신관은 창덕궁을 놓치지 않으려
존재감을 극소화하는 투명한 공법으로 표현했다.
또 구관이 작은 마당을 둬 내.외부를 소통 시켰듯
신관은 유리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안팎을 없앴다.
덕분에 오가는 사람들은 샹들리에처럼
빛나는 야경을 볼 수 있게 됐고
그덕에 도시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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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 시니' blo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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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31년 서울생 1950년 경기중학교 6년 졸업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2년 중퇴 - 일본으로 밀항 1958년 일본 동경 예술대학 건축학과 졸업 일본인 미찌꼬(김도자)와 결혼 1960년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국회의사당 건축현상설계 1등 당선 1961년 김수근 건축연구소 개소 홍익대학교 조교수 "워커힐" 설계 및 설계위원 1962년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자유센타" 설치위원회 건축분과위원장 1966년 월간 종합문예지 "공간" 창간 1968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이사 1974년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회 위원 대한민국 건축국전 심사위원 1975년 국민대학교 조형학부 학과장 세계건축가 연맹(U.I.A) 이사 1976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79년 문화재 공보부 문화재 위원회 의장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장 1981년 건설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1982년 미국건축가협회(Honor,FAIA) 명예회원 1984년 서울특별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 1986년 간암으로 사망 |
개 요..
"김수근"이란 이름 석자를 빼놓고 과연 한국건축을 논할 수 있을까?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과 예술임을 증명해보인 김수근.. 그러나 그만큼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건축가도 없다. 왜색풍이다는 논쟁을 비롯해, 서구 유명건축가의 모방이라는 논쟁까지, 실제 그의 건축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삶 또한 그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논쟁이, 김수근 개인에 대한 논쟁이라기 보다는 당시 한국의 건축계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즉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건축가 김수근은 건축가가 아니다. 재정압박에 월간지 "공간"의 폐간이 논의 되는 시기에 "등사판을 미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지 발간을 중단할 수 없다."며 종합 예술지 "공간"에 보였던 애착. 아파트 한채 겂에 해당하는 피아노까지 사들이며 소극장 "공간사랑"을 운영하면서 공옥지, 김덕수 등의 인물을 발굴해낸 일련의 활동등, 분명 그는 한명의 건축가이기를 넘어서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등 모든 문화예술장르를 넘나든 종합예술가였다.. 16세기의 르네상스운동이 건축에서부터 시작해 문화예술 전반으로 퍼져나갔듯이, 어쩌면 김수근 역시 건축을 시발로 한국판 르네상스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건축의 해를 맞이한 1999년, 또다른 천년을 준비해야하는 시점이기도 한 이때, 바로 우리가 김수근을 주목하고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자료 출처 : KBS[TV 명인전] - 벽돌의 빛 건축가 김수근 중에서 -
작품성향..
이 건축이 위치하는 원서동은 창덕궁을 비롯한 궁원이 있고, 도시의 가로 이면에는 아직도 한옥 주택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건축가 김수근은 자신의 작업장을 건축하며 이 공간이 예술가들을 위한 문화적 핵으로 만들 프로그램을 실천하였다. 이 건축은 그의 오랫 동안의 공간적 실험의 집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궁극적 공간", "네거티비즘", "제3의 공간", "모태공간" 등의 개념을 발표하던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건축의 내,외부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간적 연출의 다채로움과 그의 공간적 사유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흑색의 벽돌인 전(傳)이라는 재료 역시 전통의 소재였으며, 외벽을 덮고 있는 담재이가 계절을 표현한다..
기존의 한옥과 사이에 마당을 가지며, 건축은 세 단계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 결과 가로에서부터 안쪽으로 층단을 이루며 볼륨이 변화된다. 내부에서 김수근문화재단, 공간건축사사무소, 소극장인 공간사랑, 월간 [공간] 편집실, 갤러리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다. 내부의 공간적 다양성은 공간의 중첩, 전이의 효과를 느끼게 하며, 기본적인 척도를 인간화에서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자료 출처 : 한국의 현대 건축,건축가 기문당 2000 -
김수근의 건축세계
건축조형에 있어서 그를 계속해서 지배했던 이미지는 강한 선적인 요소였다. 김중업이 한옥 의 지붕이주는 양감에 집착한 반면, 김수근은 유년시절 북촌의 한옥이 그에게 준 강한 선으 로 분절된 선적 이미지에 집착한다. 이것은 그의 조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매스를 잘게 분절하고 이들을 반볼륨화하는 경 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건축조형을 바라다보는 시각은 시간에 따라 계속 변했다. 1960년대의 경우 노출 콘크리트에 의한 강한 조형성이 강조된다. 이 당시 그가 사용하여왔 던 건축어휘들은 대부분 르꼬르뷔제와 단게 겐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건축언어의 원전은 르 꼬르뷔제였지만, 김수근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단게 겐 조가 일본식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시기 그는 단일한 건물을 선적으로 분할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자유센터, 부여박물관, 남산맨션, 해피홀, kist 본관 및 아파트까지 하나로 연결 되는 이미지는 강한 선적요소가 입면을 지배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와함께 건축조형에 있 어서 완결성과 강한 기념 성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퐁피두센터 현상설계를 통해 전혀 새 로운 조형방법을 선보였다. 그것은 작은 상자를 계속해서 쌓아 가면서 획득되는 것이었다. 단일 조형보다는 다양한 매 스를 중첩시켜서 군집미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분명히 1970년대 이후 김수 근건축의 주요 특징으로 등장하였다. 그렇지만 1970년대의 그의 모든 건축물들이 동질한 이 미지를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퐁피두센터 계획안에서 공간 사옥까지는 다양한 매스가 중 첩되지만 수직의 선적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인도대사관, 문예회관 건물들은 선적 이미지보다는 볼륨을 가 진 단위 매스들이 더욱 강조된다. 붉은 벽돌로 마감된 단위 매스들이 서로 관입하거나 중첩 되면서 특이한 건축조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나온 두 개 의 박물관과 세 개의 종교건축에서는 한국건축이 가지는 뛰어난 군집미를 건축의 주제에 맞 게 표출하였다. 건물에 건축가의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한국건축의 새로운 이 념형을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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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간 사 옥
설계 : 故김수근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219
연면적 : 1,350㎡
구조 : 철근 콘크리트조
규모 : 지하1층, 지상5층
설계년도 :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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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 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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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본 내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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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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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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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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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 | |
ㆍ개요
공간사옥은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에 있어서 최대의 성과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높지 않은 천정, 손을 올리면 마치 닿을 듯한 크기, 두손을 뻗치면 맞닿을 것 같은 양쪽 벽면, 크지 않은 공간의 분위기, 우리나라 옛 도시나 주거 속에 혼재해 있던 골목길의 스케일을 현대적인 패턴으로 재해석한 공간사옥은 한국적이라는 인간척도개념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곳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ㆍ설립배경
본격적으로 공간사옥의 형태와 공간분석을 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설립배경을 간단하게 서술해 보기로 하겠다. 김수근 건축에 있어서 공간사옥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거의 모든 계획을 전담하다시피한 건축가 자신의 강한 의욕과 더불어 매우 이상적인 설계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이 건물이 자신의 사옥을 짓는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건축주의 생각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건물이 거의 7-8년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두 차례나 나누어져 설계되고 지어졌으므로 시간적인 구애가 비교적 적었다. 건물을 짓는 과정에 있어서도 실제로 건물을 지어 본 다음 공간이나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뜨리는 작업을 계속했고, 그래서 그의 공간의식이나 조형감각이 철저히 건물에 스며들어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건물을 짓기 시작한 1970년대 초라는 시기 또한 김수근에게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건축의 기술적인 면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가 제안해서 만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나선 시기였고, 국가적으로는 오일쇼크로 인해 건축경기가 거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국가적이고 기념비적인 건물의 설계가 주를 이루었던 1960년대 자신의 건축에 회의를 느끼면서 공간의 탐구에 몰두하던 시기였고, 퐁피두 센터, 타누 신정부청사 그리고 탄지에만 휴게소 같은 국제현상 설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공간 사옥은 과거 그가 지녀왔던 생각들과 앞으로 그가 지향하게 될 여러 차원의 건축적인 의미들을 가장 명확하게 담고 있는 하나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
청주 박물관-1979년, 충북 청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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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충북 청주시 명암동 |
대지면적 |
136,211.57 m2(41,203.99평) |
건축면적 |
4,677.36 m2(1,414.9평) |
연면적 |
5,545.78 m2(1,677.59평) |
구조 |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
규모 |
1층/전시실 지하1층·중2층/격납고 지하1층, 지상1·2층/사무실 |
외부마감 |
지붕/한식기와입히기 벽/PC판넬본타일 바닥/화강석깔기 | |
문예진흥원 전시 공연장-1977년, 서울 연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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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1 |
대지면적 |
4,450.0 m2(1,346.13평) |
건축면적 |
2,223.21 m2(672.52평) |
연면적 |
5,030.75 m2(1,521.8평) |
구조 |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
규모 |
1층/전시실 지하1층·중2층/격납고 지하1층, 지상1·2층/사무실 |
외부마감 |
지붕/아스팔트방수, 벽/붉은벽돌치장쌓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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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SiTE
문예회관 및 미술회관은 마로니메 광장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남쪽의 문화예술의 Court로 자리하며 비교적 도심에 가까운 있으면서도 조용하고 문화의 거리로서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
ㆍ기능
건물의 기능은 크게 두 그룹으로 기능을 분리하여 북측은 관리기능의 사무실, 자료실, 식당 등이 있고 남측은 전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전시장은 임대전용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Multi-Purpose 하고 Multi-Useful하며 이러한 Flexibility를 크게 하기 위해 Multi-Duct에 의한 조명과 Multi-Rail에 의한 Movable Partition System을 적용하였다. Front Facate의 벽돌 Relief는 문화예술의 벽으로서의 상징적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하여 디자인 하였다. 문화예술의 거리로서 역할이 큰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한 이들 건물들은 이 지역의 명실 상부한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외관은 타 문화예술회관과 달리 대중의 접근을 용이하게 건물의 성격에 비해 많은 창을 내고 세심한 조형미를 구사하고 있다. | |
진주 박물관-1980, 경남 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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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남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 |
대지면적 |
17,930.66 m2(5,424.02평) |
건축면적 |
2,792.29 m2(825.0평) |
연면적 |
4,948.78 m2(1,497.0평) |
구조 |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
규모 |
지하 1층, 지상 2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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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時間의 의미
이 박물관이 건립되던 시점은 박물관 정책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변화를 가져가던 때였다. 이를테면 천재지변에 대응하여 유물의 분산수장이라는 방침과 수장고의 기능을 확장하여 지역문화권을 수렴한 박물관의 지역적 특성을 살리자는 발원이 그것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요청을 배경으로 세워진 박물관은 광주박물관, 신라문화권의 경주박물관 및 청주박물관 등이 그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진주남강변의 진주성 내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필자 개인적으로는 공간연구소의 설계실장으로서 처음 맞이한 담당 프로젝트였다. 이 박물관은 70년대 까지의 고체화된 전통논의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면에서 전통과 연관지어 Nature Dominance, 즉 인간적인 것보다 自然이 主가 되게 한다는 테제를 살린 시공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
ㆍ空間의 의미
결과되어진 이 박물관의 용도는 단순히 유물의 수장보관의 의미 이상으로 이를 이용하게 되는 지역주민들의 교육적, 문화적 기능의 중추역활로서 정리될 수 있다는 데에 일차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전까지의 박물관이 갖는 성격은 과거의 유물을 [과거연]하게 하는 수장의 의미가 강하여 이용자로 하여금 현재적 시점을 상실하게 하여 과거유물을 보고 느낌으로 해서 현재의 시각으로 전시물을 관람하고 곧장 현재적 상황의 자아발견과 좌표인식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비전의 제시를 획득케 하는 데에는 대체로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이 박물관은 중앙홀 상부의 천창을 통하여 자연채광의 도입을 꾀하게 된다. 그러므로써 이용자로 하여금 [현재]라는 개념을 [빛]을 통하여 찾아주고 그것은 이 건물 자체를 구성하는 개념적 Function으로 작용하게 하며 실질적인 Function은 시각적 휴게의 개념으로 연결지운다든지 전시실간의 연결통로를 외벽에 치우치게 하여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끔 내부공간의 구성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 박물관은 [開天藝術祭]의 중심되는 마당인 진주성의 액티비티를 강화시켜 문화 중심의 코어(core)로서 그 기능을 다하게끔 유도하였다. 또한 기존의 성곽을 이 건물의 담장으로 성격을 부여하여 박물관 자체의 경계를 따로 구획하지 않은 점은 이 박물관이 갖는 또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건물의 디자인 factor를 살펴보면 주어진 진주성의 경관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파괴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여 주변 경관보다 낮게 건립되도록 규모를 낮추고, 기본적인 볼륨의 처리에 필요한 조형도 하나의 지붕에 의해 느껴지는 거대한 스케일감을 피하도록 분절하고, 주변과의 조화를 꾀할 수 있도록 접지되는 부분에 대하여는 진주청석(변성암 계통의 진주産 청회색돌)을 주재료로 하여 조경요소로 살림으로써 성곽내의 고건축물에서의 기와와 돌의 개념을 동일한 문맥으로 파악하여 처리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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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人間의 의미
에피소드라고까지 할 것은 없겠으나 본시 이 박물관의 위치는 지금의 장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진주성내 가장 언덕받이인 곳이었는데 (故)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차기 정권의 교체 등 정치적으로 과도기의 시점에 이 건물의 위치는 전직대통령의 결재사항을 변경하면서까지 지금의 위치로 바뀌어졌다. 그 소요기간은 근 8개월이었다. 언덕받이에 건물이 위치함으로 해서 예견되는 과시적 존재의 강력성을 배제하고, 그 규모를 최소화 시키기 위하여 진주성 내의 적절한 분지를 찾아내어 그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들인 이 기간은 지금 생각해봐도 의미있는 것이지 싶다. 또 한가지 경우는 근래의 박물관 프로젝트에서와 같이 발주처가 박물관이 되는 경우가 아닌 특수한 상황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발주하고 그 결과물을 박물관에 귀속시키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보이지 않는 갈등을 건축적으로 풀어 나가는 데에서 노정된 건축가의 한계, 그것으로부터 지금의 박물관처럼 지상에 건물이 세워지고, 계획입안시 30여개에 이르렀던 박물관의 지하공간 제안은 희미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현대문화의 의미로서 이렇다 할 박물관 건축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당시의 건축적 상황을 비유하여 (故)최순우 관장께서는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다. [과거유물에 대한 韓日간의 교류전 제의를 일본으로부터 받고, 나는 거절하기로 했다. 오늘의 우리 박물관 건축이 과거 선대의 유산에 버금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진주박물관이 완성되면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다.]
<장세양 記> | |
마산 양덕 성당-1977년, 경남 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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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상남도 마산시 양덕동 |
대지면적 |
1,758 m2(531.8평) |
건축면적 |
892 m2(269.83평) |
연면적 |
1,702 m2(514.86평) |
구조 |
철근 콘크리트조 및 일부조적조 |
외부마감 |
붉은 벽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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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지분석
계획대지(Site)는 도심중심축의 정점을 이루는 신마산 중심지로서, 마산 종합역사의 전방 50미터으 현 도심으로 향하는 간선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 환경은 인접한 공장들과 밀집된 주택군, 내버려진 땅들로 환경요소가 불량한편이며, 따라서 이들과의 조화보다는 대조를 이룸으로써 장래 기대되는 환경을 위한 척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ㆍ고려된 사항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교회의 기능인 사역, 축제, 만남, 환경의 4가지 주요기능이 집약된,공동체의식이 적극 이루어질 수 있는 장으로서 였다. ㆍ분석
수용능력 600~800명의 이 성당의 내부구조는 예단이 놓여진 지성소(Sanctuary)와 전실(Narthex)에서 바로 통하는 고해소(Confessional Booth)및 Over flow일 때 이용할 수 있는 회랑(Gallery)과 외부에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의식집회떄 연결할 수 있는 기도실(Chapel)등으로 구성되었다. 또 편안하고 적당한 길이를 가진 Approach Way로써 외부와 연결시켜 Main Level에 설치했다.
교구내 집회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행사에도 사용 가능한 다목적 홀을 중심으로 각종회의실과 강의실을 두고, 현관에서 친교실(Koinonia Hall)로 통하게 하며, 서비스 시설을 긴밀히 접속시키고 전체 건물을 관리하는 사무실도 다목적 홀과 연결시켰다.
유아교육을 담당하는 유치원은 별관으로 하고 사찰관은 아래층에 대회의실을 두고 식당으로도 쓰이며, 위층에서 본당 회랑과 통하게 하였다. 관리인 숙소는 서비스 시설에 기능적 연결을 시켰으며, 고용의 저택(전저)을 두었고 평신도용의 Memorial Garden을 두었다.
교회내부의 빛은 의식의 성취를 가늠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Pendentive와 같은 6각의 주 지붕과 부정형의 보조 지붕 사이에 흘러들어 온 빛이 그 광원을 신비롭게 하고, 제단 뒷벽과 사이벽 사이에서 내려온 빛은 공간의 연속성(Endless Space)을 더하게 했다. 벽체와 벽체가 서로 마주 닿는 부분(Slit)을 Stained Glass로 접합시켜 빛의 기교를 새롭게 했다.
대중과 지역사회와의 친화를 위해 정문이나 높은 담 등은 일체 거부하고 땅의 일부, 벽의 일부를 내어 놓아 열려진 공간(Naked Space)의 이미지를 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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