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조선의 염초(화약)생산 인프라
우리나라 최초의 염초는 명나라에서 도입됐다.
1374년 고려 공민왕이 명나라 태조에게 흑색화약을 요청했고
염초 50만 근과 유황 10만 근 등의 화약재료를 지원받았다.
1375년에는 최무선(崔茂宣)장군이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장사하던
중국인 염초장 이원(李元)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을 전수받고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을 저술해 국산 염초의 첫 생산을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2년 뒤 고려 조정은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고 염초생산을 관장했다.
초창기 염초정제는 초토를 물로 걸러 질산을 추출하고 잿(灰)물로 칼륨성분을 뽑아내는
단순과정에 불과해 긁어온 초토에 비해 극소량의 염초만 추출됐다.
조선 태조 임금은 즉위 다음 해에 염초제조를 관장하는 군기감(軍器監)을 설치했고
태종 임금은 1407년에 화약장인 33명을 배속시켰다. 고려 최무선 장군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주도한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1415년 군기감 산하에 만들어지면서
국산 염초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화약감조청은 설치 2년 만에 연간 7천근(4.2톤)의 화약을 생산해냈다.
북방 국경에 4군6진이 설치되면서 화약소비가 늘어나자 세종 임금은 1445년에
대궐 한구석에 염초를 굽는 사표국(司豹局)을 비밀리에 설치하고 연간 8천근(4.8톤)으로
화약 생산량을 늘렸다.
염초증산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임금님은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었다.
비록 3년 재위에 그쳤지만, 아버지 세종대왕 아래서 30년 가까이 세자생활을 하며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던 분이다. 문종은 즉위하자말자 조선 팔도 곳곳에
25개소나 되는 염초공방 자초도회소(煮硝都會所)를 세워 화약을 구워냈다.

▲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현릉(顯陵). 서쪽 능이 문종(文宗: 재위 1450-1452) 왕릉이며 동쪽 능이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1441)를 모신 왕후릉이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7살 때 세자 책봉을 받아 30년에 가까운 세자생활을 통해 아버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돕는 한편 성군의 업적을 바로 곁에서 배우고 익혔던 준비된 조선왕조 제5대 임금이셨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셨다. 문종 임금은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조선의 국방력 강화에 기울인 공이 유난히 컸다. 즉위년에 동국병감(東國兵鑑)을 출간하고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三軍)의 12사(司)를 5사로 줄이는 한편 병력을 대폭 증강하여 각 병종(兵種)을 5사에 배분했고 총통부대의 전력강화를 위하여 염초의 국내 자급자족에 많은 공을 들이신 분이다.
문종 임금때만 왜구는 제대로 된 염초를 굽지 못했으므로 제조비법이 새나가지 않게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공방을 지었다.
조선 초기의 염초는 백 수 십년 동안 그렇게 만들어지다가
임진년(1592)의 왜란을 맞으면서 일대 변혁에 몰렸다.
왜국의 화약으로 장전된 화승총의 위력이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조선의 염초는 거기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조선과 왜국 염초제작기술이 역전된 것이다.
순도 높은 염초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관서지방의 하급무관
성근(成根) 별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염초달이는 법을 배워 스스로의 연구를 더해서
1635년 신전자취염초방(新傳煮取焰硝方)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이서(李曙)가 한글 목판 언해본이 만들어지며 조선 전역의
염초생산 지침서노릇을 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수입해 썼던 화약의
상당부분을 국산으로 대체했다.
성근은 오래된 가옥의 부엌이나 부뚜막, 담벼락과 방구들 아래 흙 가운데
혀로 맛보아서 짜고 시고 달고 매운 맛(鹹,酸,甘,辛)나는 흙의 윗부분만 긁어와
가마솥밑바닥에 들러붙은 시꺼먼 재(灰)를 긁고 또 사람의 오줌을 섞어 진흙처럼 버무렸다.
그 흙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담벼락처럼 쌓고, 말똥을 얹어 짚불로
태우면 화기가 흙속으로 스며들어 하얀 이끼가 생겨났다.
그런 상태에서 반년이상 묵히면 질산약기가 실한 초토가 됐다.
이 초토는 16단계의 가공공정을 거치고 우려낸 물을 가마솥에
세 번 달이면 정초가 올라붙었다. 고려 말의 염초정제보다 한결 개량된 방식이었다.
그러나 문종 임금 이후 평화시기가 계속되자 얼마안가 염초공급 과잉이 초래됐고
그에 따라 지방관아가 할당량을 줄여서 구워내게 했다.
숙종 임금 때 더욱 질 좋은 염초가 생산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베이징에서 새로운 염초제조기술을 배워와
1698년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한 덕택이다.
신전자초방은 성근의 염초정제보다 뛰어난 10단계 작업공정으로
조선 후기의 화약생산 지침서가 됐다. 1796년 정조 임금시절에는 김지남의 비방을 한글로 번안,
목판본으로 찍어 팔도의 염초공방에 배포하기도 했다.
신전자초방의 10단계 제조공정은 흙을 모아놓고(取土),
말린 풀을 태위 재를 만들고(取灰), 흙과 재를 같은 비율로 섞어서(交合)
항아리 안에 골고루 펴서 담은 뒤 그 위에 물을 부어 밑으로 흐르는 여과수를 받아(篩水: 사수)
가마솥에 넣고 초벌 달이기에 들어간다.(熬水)
가마솥 물이 절반으로 줄어들 때쯤이면 불순물은 밑으로 가라앉고
약기가 올라붙어 더부룩한 털처럼 응결되는데 이를 모초(毛硝; 초석원재료)라 부른다.
모초는 갖풀(阿膠) 녹인 물을 부어가며 센 장작불로 달이고(再煉) 수시로 휘저어
거품을 걷어내면 마침내 질산칼슘 결정체인 정초(精硝)가 올라붙는다.
정초가 제대로 결정되지 않으면 아교 물을 부어 달이는 과정(三煉)을 반복한다.
이렇게 얻은 정초가 곧 염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초토 수십 수레를 퍼 와서
졸여도 정초 한 사발 구워내기 힘들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십여 배 이상을 추출해냈다.
흑색화약은 정초 1근(375g)에 버드나무 목탄 3냥(70.3g)과
유황가루 1냥3전(34.7g) 비율로 배합하고 맑은 쌀뜨물로 반죽한 뒤 방아에 넣고
밀가루처럼 고와질 때까지 한나절 이상 찧는다.(合製)
쌀뜨물에는 녹말 당(糖)성분이 함유돼 재료 간 결착을 높여 폭발력 증가에 도움이 된다.
염초와 함께 쓰이는 유황가루는 조선 초기만 해도 청국과 왜국에서 수입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경상도와 충청도, 한양에서도 유황을 채굴했다.
완성된 화약가루는 일정 무게단위로 밀봉하고 염초장 이름을 적어
5년간 약효성능 보증 실명제를 시행했다.
김지남의 배합비율은 상당히 과학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오늘날의 흑색화약 구성비인 질산칼륨(초석, KNO3) 75% : 숯가루(C) 15% : 유황가루(S) 10%에
근접하는 78% : 15% : 7% 비율로 섞었기 때문이다.
쌀뜨물도 오늘날 흑색화약 제조 때 첨가하는
덱스트린(Dextrin, 糊精)성분과 거의 동일하다.
▲ 강화 화승총동호인회에서 조선시대의 검댕화약 제조배합
방식을 충실하게 적용하여 재현해보았다. 사진 왼쪽의
흰가루가 염초(KNO3)분말이며 가운데 검정색이 목탄가루.
오른쪽 노란색 분말이 유황가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