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을 수용한 영도 先覺者
백봉 김기추 거사
영도사람들도 잘못 알아보는 영도토박이 見性道人
(1) 동맹휴학 主動 하다 퇴학처분 받아
「김기추(金基秋)」하면 영도사회에서는 지난날 말썽 많고 탈도 많던 자유당정권시절(自由堂政權時節)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정계퇴물인사(政界退物人士)로서만 알고 있다. 심한 경우는 젊은 시절의 백봉거사를 『백수건달 김기추』로 치부하기도 하고 있다.
그런 한편 우리나라 불교계(佛敎界)에서는 그가 견성(見性)한 재가불자(在家佛子) 곧 도통(道通)한 거사(居士)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영도사람들은 그와 같은 김기추의 진면목(眞面目)을 까맣게 모르고 지내고 있다. 살아생전의 김기추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조차 그가 견성도인(見性道人)임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 만년명성(萬年名聲)을 소문에 듣고 백봉거사를 찾아왔던 옛친지는 그가 왕년에 이름났던 『백수건달 김기추』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백봉 김기추 거사(白峯 金基秋 居士 : 이하 백봉거사라 줄임)는 1908년 음력 2월 2일 김해김공봉한(金海金公鳳翰)과 경주김씨부인(慶州金氏夫人) 사이의 5남1녀(五男一女) 가운데 맏아들로서 부산 영도구 남항동 1가 14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관명(冠名)이 기추(基秋)요, 아호(雅號)는 백봉(白峯)이며 법호(法號)는 망로자(莽鹵子)다.
백봉거사는 1923년 목도공립보통학교(牧島公立普通學校 : 오늘의 영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제2상업학교(釜山第二商業學校 : 오늘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백봉거사는 어려서부터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데다가 불의(不義)를 보고는 가만히 참아 견디지 못하는 다혈질성격(多血質性格)을 타고 났다. 그렇던 백봉거사는 부산제2상업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거리가 생겼다. 이 학교가 동맹휴학(同盟休學)의 소용돌이로 시끄러워졌던 것이다. 그것은 이 학교보다 뒤늦게 생긴 일본인 상업학교가 「제1」상업학교라는 이름을 따게 된 데에 반발하여 제2상업학교라는 교명(校名)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었다. 그 동맹휴학을 주도한 것은 김기추 학생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김기추 학생은 퇴학처분을 받아 학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됐다.
(2) 20대에 부산청년동맹 위원장 맡고 抗日地下運動 벌이다 獄苦 치러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쫓겨난 백봉거사는 그뒤 약관(弱冠) 20세에 항일결사(抗日結社)인 「부산청년동맹(釜山靑年同盟)」에 가입하여 초대 총무로서 활약했다. 그때 부산청년동맹 초대위원장이 일본경찰에 구속되자, 백봉거사는 그 위원장직을 대행하다가 나중에 제2대 위원장으로 정식추대 됐다. 백봉거사는 그때부터 조직적인 항일지하운동(抗日地下運動)을 벌였다. 백봉거사는 부산청년동맹을 이끌어 가면서 그 무렵 항일민족단체(抗日民族團體)로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던 신간회(新幹會)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것은 백봉거사가 민족독립운동을 벌여 나가는 은밀한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일로 말미암아 백봉거사는 1931년 일본경찰의 조선사상범(朝鮮思想犯) 검거선풍 때 붙들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에 따른 소요죄(騷擾罪)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服役)했다. 백봉거사는 만기출소(滿期出所) 이후에도 이른바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으로서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꼽혀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게 됐다.
그러자 백봉거사는 1933년 나라땅을 뛰쳐 나가 중국 동북부땅(만주)으로 망명(亡命)하기에 이르렀다. 백봉거사는 그곳에서 동만산업개발사(東滿産業開發社)를 설립하여 일꾼들을 모집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청년들은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려고 북간도(北間島)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여 주는 일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숱한 우리나라 청년들이 혹한(酷寒)의 대륙벌판에서 거지꼴이 되다시피한 채로 헤매고 있었다. 백봉거사가 일꾼들을 모집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때 동만산업개발사에 일꾼으로 취직하러 온 우리 청년들의 참담한 행색(行色)을 바라보곤 백봉거사는 『울분이 터져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치가 떨렸다』고 후일담(後日譚)으로 털어 놓았다.
(3) 大陸亡命地서도 투옥됐다가 관세음보살 名號에 힘입어 풀려나
백봉거사에 대한 일본관헌(日本官憲)의 눈초리는 대륙땅에서도 내내 번득이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백봉거사는 민족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일본관헌에게 붙들려 가서 사형수(死刑囚)만을 가두어 놓는 형옥(刑獄)에 갇히고 말았다. 백봉거사는 그 형옥에서 처음으로 불교(佛敎)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감방벽 가득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라는 명호(名號)를 한밤 사이에 적어 놓았다. 백봉거사의 후일담에 따르면『그때 나는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마치 몽유몽환자(夢遊夢患者)처럼 그렇게 써댔던 것으로나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고 했다. 그런 인연으로 백봉거사는 아마도 불교도(佛敎徒)인 듯한 일본인 간수(看守)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풀려난 뒤 1935년 귀국했다는 것이다.
(4) 「建準」 간사장 때 극빈자들에게 쌀 무상배급 내주었다 곤욕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자, 백봉거사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경상남도 부산중부지구 간사장(幹事場) 자리를 맏아 활약했다. 그의 다혈질이라고 할까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성격탓으로 백봉거사는 그때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 무렵 식량난에 허덕이는 극빈자들을 눈여겨 보게 된 백봉거사는 가만히 앉아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직권으로 식량보관창고에서 공유미(公有米)를 내다가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낱낱이 무상배급으로 갈라 주었다. 그때는 미군정시대(美軍政時代)였다. 그래서 백봉거사가 마음대로 공유미를 내다가 처분한 일일 군정포고령(軍政布告令)위반혐의가 되어 구금되고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아 한때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그러나 백봉거사는 재심청구 끝에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됐다. 그뒤 백봉거사는 인재양성(人才養成)에 눈을 돌려 1950년부터 고향땅인 영도에다가 부산남중학교 및 부산남고등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그뒤 백봉거사는 자유당정권(自由堂政權)시절에 영도에서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하곤 정계(政界)와 인연을 끊어 버렸다. 그로부터 10여년 동안 그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한적한 생활을 하면서 류엽(柳葉). 우승규(寓昇圭). 송지영(宋志英) 등 제씨를 비롯한 문학계 및 언론계 저명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백봉거사가 불교수업(佛敎修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그렇던 무렵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에서 비롯됐다. 1963년 백봉거사는 친지들과 함께 충청도 심우사(尋牛寺)를 찾아 소일했다. 그것이 백봉거사에게는 숙세(宿歲)의 인연이었다고나 할까? 백봉거사는 심우사에서 불법(佛法)을 접하더니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자 발심(發心)하게 됐다. 그리하여 백봉거사는 자나깨나 한결같이 「무자화두(無子話頭)」를 붙들고 정진(精進)했다.
(5) 禪定精進 끝에 頓悟코 三拜恭禮 받아
그 이듬해인 1964년 정월에 드디어 백봉거사는 심우사에서 철야선정(徹夜禪定)에 들었다가 때마침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는 불서(佛書)에 나오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의 네 글자를 바라보고 문득 공안(公案)을 깨뜨리면서 돈오(頓悟)했던 것이다. 그때 백봉거사의 온 몸이 눈부시게 발광(發光)하자, 심우사 대중들은 한결같이 놀라면서 삼배공례(三拜恭禮)로 그 앞에 열복(悅服)했다고 한다. 때마침 마을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오자 백봉거사는 다음과 같이 깨달음의 심경(心境)을 편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홀연히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忽聞鍾聲何處來)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하이, (寥寥長天是吾家)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一口呑盡三千界)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水水山山各自明)
깨달음을 이룬 당시 백봉거사의 세수(歲壽)는 쉰 일곱. 그때부터 그를 가까이하던 도반(道伴)들은 그의 아호를 따서 「백봉거사(白峯居士)」 라고 그를 경칭(敬稱)했다.
(6) 하룻밤 사이에 金剛經을 偈頌 달아 풀어내
백봉거사가 대오(大悟)한 직후 그의 도반(道伴)인 신원경(申圓鏡)이 「금강경(金剛經)」 해석을 청했다. 그러자 백봉거사는 불경(佛經)을 그제서야 난생 처음으로 접했는 데도 「금강경」을 펴자마자 법열(法悅)에 넘치는 모습으로 하룻밤 사이에 각 분(分)마다 남김없이 게송(偈頌)을 달아 읊었다. 그것이 그의 「금강경강송(金剛經講頌)」으로 엮어져 나오면서 백봉거사는 대중들에게 「금강경」강의를 시작했다.
백봉거사는 1965년 4월 서울에서 재가불교단체(在家佛敎團體)인 「보림회(寶林會)」를 결사했다. 뒤이어 1969년 3월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면 죽동에서 「보림선원(寶林禪院)」을 개창(開創)한 백봉거사는 「유마경(維摩經)」으로 지식청년대중을 계도했다.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원로대덕(元老大德)으로 이름이 높았던 청담화상(靑潭和尙)은 백봉거사의 설법(說法)을 경청하고 탄복한 나머지 『삭발입산(削髮入山)하여 본산조실(本山祖室)로 주석(住錫)하면서 중생제도(衆生濟度)해달라』 고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자 백봉거사는 『불법(佛法)이 머리카락 있고 없고(유발무발:有髮無髮)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갈파(喝破)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7) 쉬운 우리말로 풀어 옮긴 한자투성이 「반야심경」
그와 비슷한 또다른 일화(逸話)가 있다. 백봉거사가 「유마경대강론(維摩經大講論)」을 펴낸 뒤 있었던 이야기다. 일본에서도 내노라하는 불교학자로서 이른바 유마경대가(維摩經大家)라고 자부하는 일본인이 백봉거사의 「유마경대강론」을 받아 보고 『왜 내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남의 책을 중역(重譯)했느냐?』고 노발대발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엮은 일본어판 「유마경(維摩經)」을 백봉거사가 중역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 논술체제(論述體制)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일본인 불교학자는 감탄한 나머지 백봉거사를 일본에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해왔다. 그러자 백봉거사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 초청을 거절해 버렸다. 『내가 왜 왜땅에 건너가나? 나를 꼭 만나고 싶거든 그 사람보고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하시오!』라는 것이 백봉거사의 응대였다는 이야기다. 그렇던 백봉거사는 연호(年號)를 쓸 적에는 우리 단기연호(檀紀年號)를 쓰기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순전한 우리것 오롯한 우리말을 갈고 다듬어 쓰는 데에 크게 애를 썼다. 불교신도들이 곧잘 외는 한자투성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오롯한 우리말로 풀어 옮긴 것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다. 그나마도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누구나 알아먹기 쉽도록 절묘하게 우리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문도(門徒)들에게 외우기를 권면했다고 한다.
(8) 居士風 크게 떨치길 권면하며 居士林 창립
그뒤 백봉거사는 부산에 내려와 1971년 거사림(居士林)을 창립했다. 이 거사림이 오늘날 부산거사림(釜山居士林)의 효시(嚆矢)다. 백봉거사는 1972년 4월 부산 서구 초장동에 보림선원을 개설했다가, 동래구 사직동 그리고 남구 남천동과 광안동으로 그 자리를 옮긴 다음, 1975년 10월 다시 남천동 금련산(金蓮山) 남쪽 기슭으로 보림선원을 옮겼다. 백봉거사는 금련산 보림선원에서 9년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각계각층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펴서 열복(悅服)시켰다.
백봉거사는 특히 『출가수행(出嫁修行)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다』라고 학인(學人)들을 격려하면서 거사풍(居士風)을 크게 떨쳐 나가기를 권했다. 우리나라 선승(禪僧) 가운데서도 이름난 어느스님은 『인도(印度)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요, 중국에는 방거사(龐居士)요, 한국에는 백봉거사(白峯居士)가 있다』는 말로 백봉거사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던 백봉거사는 1984년 자신의 열반처(涅槃處)를 지리산(智異山)기슭으로 삼을 뜻을 문하생들에게 밝히고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국동마을 860번지로 보림선원을 옮겼다. 그리고 그뒤 9개월만인 1985년 8월 2일 (음력 6월 16일) 보림선원 여름철 수련대회를 마지막까지 주재한뒤 백봉거사는 마침내 78세를 일기로 그 모습놀이를 걷은 끝에 입적(入寂)했다. 백봉거사의 저술(著述)에는 앞에 말한 「금강경강송(金剛經講頌)」 (1965년)을 비롯하여 「유마경대강론(維摩經大講論)」 (1969년), 선문염송요론(禪門怙頌要論) (15권)(1978~1990년), 「백봉선시집(白峯禪詩集)」(1975년), 「절대성(絶對性)과 상대성(相對性)」(1975년) 등이 있다.
출처: 절영문회회
http://jyoung.flog.co.kr/zboard/view.php?id=pds&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