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지금까지 예술이 된 '빛'이 있나니글·사진 김종목 기자 입력 2021. 12. 28. 21:44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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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국 테이트미술관 순회전
서울 북서울미술관서 내년 5월 8일까지
조지 리치먼드, ‘빛의 창조’, 1826, 마호가니에 템페라, 금·은, 48x41.7 테이트미술관
창세기를 담은 18·19세기 윌리엄 터너·제이콥 모어·조지 리치먼드부터
네온·형광등·거울을 활용해 빛을 매체화한 현대 작가들까지…43명 작품 110점 한자리
‘빛 그림’ 이전에 ‘빛 이야기’가 있다. 빛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구약> ‘창세기’에 나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3~5절)는 등 천지창조의 ‘빛과 어둠’에 관한 구절은 인문학자, 종교학자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광명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16절을 직접 묘사한 게 조지 리치먼드(1809~1896)의 ‘빛의 창조’(1826)다. 이 작품이 서울 북서울미술관의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에 나왔다.
리치먼드는 “옷을 걸치지 않은 근육질의 신” “크게 굽이치는 구름” “태양에서 솟구쳐 오르는 화염” “바다 위 물결”로 16절을 재현했다. 이 방식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아담을 심판하는 하나님’(1795)과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1795~1805)가 전시에 나왔다. 블레이크와 리치먼드의 유사점, 상이점을 볼 수 있다.
그림은 단지 신화를 녹이고, 자연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시대 사상과 이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블레이크가 스위스 출신 개신교 목사 겸 유사 과학자 요하나 카스파 라바터(1741~1801)가 쓴 <관상학>(1772)의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적 이미지”를 따른 게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다. 착한 천사는 금발의 흰 피부를 가진 이다. 이런 이미지가 “(백인이) 지적으로 완벽하다는 편견”과 이어졌다. 라바터는 흑인과 백인, 황인의 외형적 특징을 인종 간 우열의 근거로 제시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대홍수’(1805년 전시)는 노아의 방주를 다룬 창세기 7장을 묘사한 것이다. ‘대홍수’에서 주목할 건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구조하는 장면이다. “모든 인간이 독립적으로 행동할 자유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터너는 1840년 노예제 반대 그림인 대표작 ‘노예선’(1940)을 발표했다. 터너가 1805년 자메이카 노예노동 농장에 투자한 것도 사실이다. 테이트미술관 이사인 알렉스 파쿠하슨은 이 점을 거론하며 “터너를 이상화해선 안 된다”고 했다.
터너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다. 터너는 괴테(1749~1832)의 <색채론>(1810)에 영향을 받았다. “흰색이 가장 고귀한 색”이라는 괴테의 말은 인종주의란 비판을 받았지만, “색채는 빛의 행동, 다시 말해 빛의 행위이자 고통”이라는 그의 해석은 미학과 예술 부문에 영향을 끼쳤다. 색채 현상을 관찰자 시각과 관계없는 객관적 실체로 본 뉴턴과 달리 괴테는 그 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만남 또는 대립으로 봤다. 또 인간의 감각과 연결했다. 터너는 ‘빛과 색채(괴테의 이론)-대홍수 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1843년 전시)를 내놓기도 했다.
제이콥 모어(1740~1793)의 ‘대홍수’(1787)도 창세기 7장이 주제다. “화폭의 중심부에서 빛이 퍼지며 전경의 인물들을 비춘”다. “대재앙 속에서 존재하는 희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빛의 여러 뜻 중 ‘희망이나 영광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에 해당한다.
필립 파레노, 저녁 6시, 2000~2006년, 카펫, 가변크기.
전시는 근현대를 아우른다. 빌헬름 함메르쇼이(1854~1916)의 ‘실내, 바닥에 햇빛’(1906)과 필립 파레노(1964~)의 ‘저녁 6시’(2000~2006)는 근현대의 작가들이 빛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보여준다. 둘 다 햇빛과 창문, 그림자를 묘사한다. ‘실내, 바닥에 햇빛’은 창문을 뚫고 들어온 빛이 바닥에 만들어 낸 격자 무늬 그림자를 나타낸 작품이다. ‘저녁 6시’는 ‘실내, 바닥에 햇빛’이란 제목에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다만 이 작품은 여러 색조의 직사각형을 직조해 바닥에 깐 카펫이다. 관람객은 작품인지 모른 채 밟고 지나갈 수 있다.
근대 작품이 빛을 ‘그린’ 것이라면, 현대 작품은 빛 스스로 매체가 된다. 댄 플래빈(1933~1996)의 형광등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Ⅴ.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1966~1969)는 플래빈이 가장 긴 시간을 들여 만든 작품이다. 러시아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1919~1920)에 대한 오마주다.
제임스 터렐, ‘레이마르, 파랑’, 1969, 형광등, 가변크기.
백남준, 촛불TV, 1975, 초 1개와 철제 TV케이스 1대, 34x36x41㎝.
1969년 발표된 제임스 터렐의 ‘레이마르, 파랑’도 주목해야 한다. 항공기 조종사였던 그는 비행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늘을 날 때는 … 대기와 빛 현상에 의해 결정되는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터렐은 유리, 네온, 형광등을 활용해 설치 작품과 관람객의 경험을 강조한 ‘빛과 공간 운동’의 주요 멤버다. 그는 “작품 앞에서 관람객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도록 고도로 통제된 몰입 환경”을 만들어냈다.
빛의 효과 중 하나는 반사다. 구사마 야요이(1929~)의 설치 작품 ‘지나가는 겨울’은 거울과 유리로 만들었다. 정육면체 거울은 전시실에서 다른 작품들과 관람객들을 비춘다. 아니쉬 카푸어는 빛의 반사에다 왜곡 효과를 더한 ‘이쉬의 빛’(2003)을 출품했다.
전시실 입구에 백남준(1932~2006)의 ‘촛불 TV’(1975)가 설치됐다. 텅 빈 TV 모니터 안에 촛불 하나를 켜놓은 이 작품을 보면, 다시 백남준에 감탄하게 된다. 작품을 제작한 1975년 당시 첨단기술을 집약한 TV와 오래된 기술인 촛불을 접목했다. 세속적이고 현란한 전자기파를 대신해 모니터의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촛불은 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테이트미술관의 순회 전시다. 43명의 회화, 수채, 에칭, 메조틴트, 사진, 조각, 영화 등 작품 110점을 전시한다. 내년 5월8일까지. 1만원.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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