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해리스와 그의 가족
로타리의 창시자 폴 해리스(Paul P. Harris)는 어렸을 적, 그의 가정에 문제가 많았으며, 요즘의 교육적 언어로 표시하면 그는 결손가정(缺損家庭)의 문제아(問題兒)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조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후에 훌륭한 변호사로 성장했으며, 국제로타리를 만든 위대한 선각자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영향을 미친 가족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 소개해 본다.
(사진 : 만년의 폴 해리스와 3세 때의 모습)
폴 해리스의 부계(父系)쪽 선조(先祖)는 스코틀랜드(Scotland) 출신이며, 해리스라는 이름은 노르만디 출신의 헨리(Henry)에서 변화한 것이라 전해진다.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Harrison, 웨일즈(Wales)에서는 Harries, 스코틀랜드에서는 Harris라고 많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버지니어주(Virginia)의 해리스버그라는 지명은 요크셔 출신자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요크셔는 스코틀랜드와 깊은 관계가 있다.
폴 해리스의 조부인 하워드 해리스(Howard Harris)는 버몬트(Vermont)주 윌링 포오드에서 농장을 경영한 자산가이며, 조모(祖母) 파멜라(Pamela) 역시 같은 윌링포오드(Wallingford)의 실업가인 제임스 러스틴(James Rustin)의 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전형적인 경건한 청교도이며, 하워드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파멜라는 몸무게가 89파운드(약 41kg)의 왜소한 여성이었다. 또 현재는「폴 해리스 기념관」으로 윌링포오드 로타리클럽이 주회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폴 해리스가 어릴 때 다녔던 「빨간 지붕의 작은 학교」는 이 제임스 러스틴이 1818년에 지은 것이다.
(사진 : 폴의 조부 하워드 해리스와 조모 파멜라 해리스)
하워드와 파멜라 사이에는 1남 4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외동 아들인 죠지(George)가 폴 해리스의 아버지이다.
3명의 딸은 일찍 죽고 말았으며, 막내딸인 파멜라는 웨스트 러틀랜드(West Rutland)의 의사인 죠지 폭스(George Fox)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폴은 폭스 의사 집에 머물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다감한 소년시대의 한 때를 여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인격형성에 폭스 의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폴이 소년시절 자주 수영하려 다녔던 폭스연못(Fox pond)는 죠지 폭스의 동생인 윌리엄 폭스(William Fox) 박사의 소유였다.
폴의 모계(母系)쪽 선조(先祖)는 아이슬란드(Iceland)에서 메사추세츠로 건너온 이민으로 원래는 오브라이언(OBrien)이라는 이름이었으나 후에 브라이언(Bryan)이라고 개명했다. 폴의 외증조할아버지는 뉴욕주 서부개척의 창설자적 존재인 루벤 브라이언(Reuben Bryan)이고, 그 아들이 해리스의 외조부인 핸리 브라이언(Henry Bryan)이다.
헨리는 시카고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었으나, ‘Gold Rush’에 인생을 걸고 49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황금광맥을 찾아 떠나 전 재산을 투자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라시느(Racine)에 돌아왔다. 라시느는 당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였으며, 헨리 브라이언는 전에 시카고에서 변호사를 했다는 경력으로 2대째의 시장에 취임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몹시 어려웠던 것 같다.
(사진 : 폴의 아버지 죠지 해리스와 어머니 코넬리아)
폴의 양친이나 조부모에 관한 기록은 폴 자신의 자서전에 의한 것이 많으며, 그 가운데는 직계인 조부 하워드와 조모 파멜라의 일에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외조부인 헨리 브라이언의 영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폴은 성격적으로는 헨리를 쏙 닮았기에, 후에 시카고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것이나 샌프란시스코에 두 번째 로타리 클럽을 확대한 것도, 그 외조부 헨리가 시카고에서 변호사였던 점, 이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받은 큰 타격에 대한 보복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헨리 브라이언의 여덟 번째의 딸, 코넬리아(Cornelia)가 바로 폴의 어머니이다. 친할아버지인 하워드 해리스는 자식인 죠지와 며느리인 코넬리아를 위해 라시느에 약방과 집을 마련해 주었고, 코넬리아의 친정에도 상당한 재정적 원조를 하고 있었다.
폴은 죠지와 코넬리아의 둘째 아들로 라시느시 5번가 316번지에서 태어났지만, 이 집은 1956년에 호텔을 짓기 위해 허물어 졌고, 현재는 이 곳에 라시느 은행이 들어서 있다.
죠지는 다재(多才) 다양(多樣)한 재능을 타고 났기에 팔리지도 않은 소설을 쓰기도 하고, 발명에 정신이 빠진 생활의 연속으로 건전하게 약국을 경영하지 못했다. 코넬리아도 금전적 감각에 우둔하여 나날의 양식이 어려워도 가정부(家政婦)를 두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절박한 사정이 있을 때마다 조부인 하워드에게 도움을 바라는 일상생활을 반복했는데, 드디어 이러한 생활에도 한계가 와, 일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가족(離散家族)의 파국을 맞게 되었다.
1871년 7월 다섯 살 난 형 세실(Cecil)과 폴은 아버지 죠지와 함께 밀워키(Milwaukee)를 경유하여 배와 기차를 갈아타고 버몬트주(Vermont)의 윌링포오드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코넬리아는 타고난 높은 자존심 때문에 시아버지의 신세를 거부하고 갓 태어난 폴의 여동생인 니나 메이(Nina May)와 함께 라시느에 머물며 피아노 교습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길을 택했다.
폴과 세실이 몇 년간 이 윌링포오드에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겨우 안정된 직업을 가지게 되어 뉴욕주 동부의 캠브리지(Cambridge)에서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으나, 다시 폴은 윌링포오드로 되돌아오게 된다. 한참 후에 또 다시 할아버지인 하워드가 아버지인 죠지에게 약방과 집을 사 주었기 때문에 일가족이 버몬트주 서부 페어 헤이븐(Fair Heaven)에서 모여 살았지만 역시 2-3년 후에는 원상태로 되고, 죠지는 계속 발명에 열중하는 등 가족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반복되었다.
세 번째로 폴은 조부 하워드에게 맡겨진 이후로는 양친과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는 기록이 없다. 어떤 맑은 날 아름답게 차려입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윌링포오드를 방문하여 폴에게 은방울꽃다발을 주었다는 것이 모친에 관한 유일한 추억이며, 이 후로는 양친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그 후는 양친과의 접촉도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폴이 아이오아 주립대학에 입학하기 전, 데모인의 셀든 대리석회사에서 외판원으로 일할 때, 함께 일하도록 권유한 것은 형인 세실이었고, 로타리가 창립된 후, 국제로타리 사무국 직원으로 근무했으나 젊어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진 왼쪽: 폴 해리스의 동생 레지날드)
(사진 위와 아래: 폴이 1947년 1월 22일 보낸 편지봉투 소인과 Lions International이 보인다)
폴이 양친과 헤어진 후 페어 헤이븐에서 세 사람의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첫 번째 동생은 요절, 두 번째 동생은 미국과 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막내 동생인 레지날드(Reginald:Reg)는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국제라이온스의 문헌에 의하면 1905년 2월 23일, 로타리 최초의 모임이 열렸을 때, 그 장소에 레지날드가 참석하여 로타리 최초의 회의에는 4명이 아니고 5명이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 후 레지날드는 라라미(Laramie) 로타리클럽 부회장까지 지나고 국제로타리 사무국에 근무했지만, 1930년 국제라이온스(Lions International)로 옮겨, 로타리안을 라이온스로 끌어감으로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의 로타리조직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폴이 서거하기 5일전인 1947년 1월 22일자로 폴이 레지날드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그 주소는 “국제라이온스 사무국 귀중” 으로 되어 있다.
폴은 생애에 걸쳐 양친으로부터 애정에 굶주렸을 뿐 아니라, 조부모도 양친을 대신해서 폴에게 애정을 쏟기에는 너무나 나이가 많았다. 폴이 세 살 때 맡겨졌을 때 조부 하워드는 이미 72세라는 고령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히 폴을 유산상속인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했기 때문에 애써 다니던 프린스턴대학을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한편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나 막내 여동생에게는 유산을 남기는 불공평함에 대하여 항의하는 의미에서 할머니인 파멜라의 장례식 때에도 윌링포오드에 발길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 해리스의 부인 진 톰슨)
폴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출신의 진 톰슨(Jean Thomson)과 결혼했지만 자식 복이 없는지 한 명의 자녀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떠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폴에 대한 조사(弔辭) 속에 진이 말한「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쌀쌀한 말이나, 진이 폴과 함께 묻히는 것을 싫어 해 4,000마일이나 떨어진 에딘버러에 따로 묘소를 만든 것 등을 미루어 보아, 그렇게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었던 것 같으며, 일생동안 가족의 사랑을 잃어버린,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생을 보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1947년 1월 27일 콤리벵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였다. 그의 묘소는 시카고 교외의 블루 아일랜드의 마운트호프(Mount Hope) 묘지에 있는데, 그의 부인 곁이 아닌, 평생의 친구인 실베스트 쉬일 곁에 묻히었다.
(참고 문헌 : My Road to Rotary. The First Rotarian. 기타 Web site)
첫댓글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였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