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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은 정보를 직접 전달받은 백 대령은 물론 한국정부로부터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백 대령의 증언에 의하면 고마움의 표시로 몇 차례 식사 초대를 했지만, 그 때마다 선약이 있다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고, 쉐라톤 호텔에서 한국에서 온 해군정보장교들과 만났을 때에는 백대령이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섰다고 한다.
그 후 딱 한번 로버트 김을 접대한 적이 있는데, 그가 FBI에 체포되기 며칠 전인 1996년 9월 초, 한국에서 연수차 미국에 온 제독 두 사람을 로버트 김에게 소개시키게 되어 워싱턴 DC 근교에 있는 미 육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이 로버트 김이 받은 접대의 전부였다. 이전 정권에서 로버트 김 사건을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 “미국의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미국 법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방관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정보제공의 순수성과 그 정보의 중요성으로 볼 때 한국 정부로서는 책임을 회피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체스넛 검사는 최후 논고에서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고 말하였다. 로버트 김은 한국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기밀을 수집하고, 마치 미국의 안보를 해친 중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그의 희생에 대해 우리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
로버트 김은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고, 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관련일지
1994.10.01 |
백동일 대령 미국 도착 |
1995.11.29 |
한미정보장교회의에서 한국장교 및 백대령과 로버트 김 최초 만남 (FBI 12월부터 FBI에서 백대령, 로버트 김 감시 추정) |
1996.03.20 |
한국장교들 쉐라톤 호텔에서 만남, FBI 감청 |
1996.05.01 |
FBI 로버트 김 사무실 감시, 감청 시작 (FBI 주장) |
1996.09.18 |
강릉침투 잠수함 사건 |
1996.09.21 |
백대령, 로버트 김에게 잠수함 사건에 대해서 정보를 부탁 로버트 김 백동일 대령과 최후 대화 (강릉잠수함건에 대해) |
1996.09.24 |
워싱턴 한국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FBI에서 로버트 김 체포, 미 검찰, 로버트 김 기밀누설죄로 기소 |
1996.10. |
피터 긴스버스 변호사 선임 검찰측과 Plea bargain시작 |
1996.12. |
여야 국회의원 100명, 미검찰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에 서명 |
1997.01.03~10 |
김성곤, 조순승의원 미 국무성방문 |
1997.02. |
변호사가 변론서를 검찰에 제출했으나, Plea bargain협상난항 |
1997.04.01 |
조선호텔에서 로버트김 사건 담당변호사 (제임스고어, 마크 샌드그라운드) 와 구명위원간 조찬대담 |
1997.05.07 |
미 검찰과 변호인, 로버트 김 플리바겐 (PLEA BARGAIN) |
1997.07.11 |
로버트 김 재판(9년형을 언도받고 현재 복역중) |
1998.06.29 |
로버트 김 형량재심청구 (Patrick Kim변호사) |
1999.02. |
1차 형량 재심 청구 기각 |
1999.10. |
2차 형량재심청구 신청, 기각 |
2002.02. |
부시 미 대통령 한국 방문시, 외교통일부에서 로버트 김 문제 정식 거론 |
2003.01. |
로버트 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
2003.05. |
노무현 대통령 방미 중 로버트 김 사면 건의 |
2003.08.18 |
로버트 김 후원회, 주미 대사관 및 외교통상부에 일시석방 호소문 전달 |
2004.01.30 |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 |
2004.03.03 |
후원회장 미 로저아담스 사면담당관 및 한승주 주미대사 면담 |
2005.10.05 |
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 집행정지 결정을 통보받음 |
백동일 대령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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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안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한국에서는 꼭 알아야 했던 정보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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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백동일 대령은 당시 정보 수집의 임무를 가진 장교였다. 그와 로버트 김은 1995년 11월 28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로버트 김은 이 회의에서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앤드루 미 공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중 그는 로버트 김에게 “정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군 관련 첩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니 기밀이 아닌 사항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로버트 김은 “한국군의 대북 첩보수집 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고 되물은 후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이후 로버트 김은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 정보들은 미국의 안보나 재산(인명피해 포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Damage Assessment Report(피해평가보고서)를 재판관에게 제출할 수 없었다. 이런 사건에서 꼭 제출해야만 하는 아이템이며, 로버트 김의 변호사로서는 당연히 판사가 검사에게 이 보고서 제출을 명하도록 요구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1996년 9월 18일, 북잠수함 침투사건으로 남북은 물론 한미 양국관계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당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당사자들(남북한)은 우리가 남북대화나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도발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문스런 발언을 했다. 그 사건은 분명 불가침 합의를 깨고 남한 영토 안으로 들어온 북한의 도발행위인데도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미국은 남북한을 동급으로 놓고 자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에 백동일 대령은 미국이 북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로버트 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로버트 김은 “미국이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3일 전으로 소급하여 북잠수함의 경로를 추적했고, 두 대의 잠수함이 동해안을 오고 간 위치들이 추적되었다고 백 대령에게 통화로 알려주었다. 이날 통화 이후 얼마 안되어 로버트 김은 간첩혐의로 FBI에 의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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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한국에 제공한 정보들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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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백대령에게 1995년 12월부터 제공한 자료는 약 50여 건인데, 이 중에는 미국의 주장처럼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것들은 주로 미국이 아닌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것이었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에는 이미 제공된 것들이었다. 사건 담당 검사는 법정에서 “어떤 정보가 미국 안보에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 왜 공유되지 않았는지는 미국의 고위 관리들이 결정할 사항이다”라고 말했지만, 해군 정보국에서 19년 동안 일해온 로버트 김이 어떤 게 민감한 정보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의 변호사였던 피터 긴스버그도 “로버트 김이 한국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하는 서류들은 역으로 미국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정보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정기간행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동맹국과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라고 변론하였다. 그러나 이 변론은 검사나 판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의 저명한 기밀 분류 전문가들조차도 로버트 김이 한국 해군에 제공한 정보는 미국으로서는 매우 중요하지 않거나 기밀이 아니며, 대부분은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미국의 공식채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고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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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미 양국이 당연히 공유해야 할 정보를 제공,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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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백동일 대령에게 서류를 보낼 때는 자료출처와 비밀등급을 지우고, 반송될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의 주소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FBI의 감시 자료에 의하면 로버트 김이 백 대령의 집에 직접 갔다가 그가 없자 정원에 있던 아들에게 전해주기도 했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백 대령에게 서류를 잘 받았느냐고 전화하는 모습도 찍혀있다. 그리고 1996년 9월, 10여건의 기밀서류가 전달될 당시 봉투가 개봉된 흔적이 있어서 자료 제공을 중단한 일도 있었다. 이런 행동들로 인해 두 사람은 첩보 분야 종사자들로부터 ‘어설픈 삼류 스파이’라고 지적 받았는데, 달리 말하면 그것은 두 사람에게 스파이 행위를 한다는 인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로버트 김은 한미 군사동맹과 정보 공유라는 관행에 비추어, 당연히 한국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전달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자료들이 한국에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이 한국측에 고의로 보내지 않고자 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결점 때문일 수도 있다고 판단, 이를 시정하기 위해 상부에 보고하려던 참이었다.
불리한 당시 정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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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잠수정 동해안 침투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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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체포되기 정확하게 6일 전, 한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침투하여 좌초된 초대형 안보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우리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참수함이 출동했고, 그 중 한 척이 원산항으로 되돌아온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한 척이 강릉으로 침투한 것인데, 미국의 첩보능력으로 미루어 보면 이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동일 대령도 이같은 생각을 하였고, 그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로버트 김에게도 그와 관련한 정보를 요청했다.
외교관이 쓰는 전화는 100% 주재국의 외사방첩기관에서 도청한다. 하지만 백대령은 한국에서 일어난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예로 보아 정보를 요청하면 당연히 미국측에서 기밀이 아닌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믿고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해군성의 정보 참모부(I-2)와 작전?기획참모부(N-3&N-5) 등에 전화를 걸어 자료제공을 부탁하였다. 로버트 김은 백대령의 부탁으로 해군정보국의 컴퓨터를 통해 북 잠수함 사건이 언론에 터지기 직전부터 사흘 전까지의 모든 정보를 검색해본 결과 북 잠수함이 동해안에 좌초되기 전부터 미국은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 잠수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북 잠수함이 동해안에 좌초되면서 그 실체를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북 잠수함의 침투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로버트 김의 체포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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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바빴던 한국 정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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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재판이 열리기까지 10개월이나 걸리게 되면서 로버트 김의 존재는 점차 사람들부터 잊혀져 갔다. 구명위원회의 활동도 소강상태였는데, 아마 비싼 돈을 들여 유능한 변호사를 구했으니 일이 잘 풀리리라는 낙관적인 기대에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정부의 권력 누수현상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재벌들의 부도와 한국의 경제위기설이 파다하게 펴지고 있었다. 당시 세인들의 관심은 ‘한보비리와 청문회‘ 등으로 쏠려있었다. 한보 정태수회장의 재판이 열릴 무렵에는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 비리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어 이국 땅에서 힘없는 한국 교포 한사람이 미국이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버트 김이 구속되었을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미국의 사법제도에 의해 처벌되는 것은 미국 내부의 문제로 방치했다. 이후에도 로버트 김이나 가족들의 탄원서에 대해서도 그의 정보제공이 무관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한국 정부가 관계된 간첩행위는 아니었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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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한미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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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18일, 북잠수함 침투사건으로 남북은 물론 한미 양국관계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당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당사자들(남북한)은 우리가 남북대화나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도발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문스런 발언을 했다. 그 사건은 분명 불가침 합의를 깨고 남한 영토 안으로 들어온 북한의 도발행위인데도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미국은 남북한을 동급으로 놓고 자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에 백동일 대령은 미국이 북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로버트 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로버트 김은 “미국이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3일 전으로 소급하여 북잠수함의 경로를 추적했고, 두 대의 잠수함이 동해안을 오고 간 위치들이 추적되었다고 백 대령에게 통화로 알려주었다. 이날 통화 이후 얼마 안되어 로버트 김은 간첩혐의로 FBI에 의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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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변호사들,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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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관선 변호사에 대한 오해 로버트 김 사건을 처음 맡은 변호사는 관선 변호사인 짐 클라크였다. 미국의 관선 변호사는 사안에 따라 판사가 거기에 맞게 임명하도록 되어있다. 실제로 짐 클라크는 당시 형사 담당 변호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관선 변호사라고 하면 무능하거나 무성의하게 변론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관선 변호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물론 짐 클라크의 명성을 알리 없었기에 그의 가족들은 민선 변호사인 피터 긴스버그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하지만 검사에게 끌려다니며 그를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긴스버그에게 실망한 그와 가족들은 좀 더 이름있는 변호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②변론보다는 돈에만 관심이 있던 변호사들 이 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정?관계에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김목사를 소개받게 되었다. 김 목사는 고어 부통령의 사촌인 제임스 고어를 추천했고, 가족들은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형사 전문변호사가 아닌 민사 전문임에도 변호사 교체를 원했다. 하지만 고어 변호사를 인터뷰한 로버트 김은 그의 능력을 의심하였는데, 고어는 또 다른 변호사를 데리고 와 둘이 함께 변론을 하겠다고 해서 결국 선임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김목사는 미의회와 관련된 업무가 있어 한국에 가게 되었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정작 한국에 가서는 로버트 김 가족들을 만나 변호사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목사란 사람은 사건을 소개하고 수임료 형식의 사례금을 챙기는 일개 사건 브로커였다.
그 후 로버트 김은 그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고, 연락을 할 때마다 다른 사건으로 법정에 갔다는 연락만 받았다. 피의자가 유죄를 인정(guilty plea)한 다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증거를 다시 보는 기간이 있는데, 그 증거들이란 게 모두 기밀로 분류되어 있어 변호사는 기밀취급인가(security clearance)가 있어야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어는 인가를 신청했으나 기각되었고, 다른 변호사는 이전에 한번 받은 인가를 갱신했는데, 의뢰인과 함께 보아야 함에도 혼자 가서 보고 왔다고 하였다. 로버트 김은 과연 그가 증거자료를 열람하고 왔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했다. 변호사란 사람이 의뢰인을 보호하기는커녕 검찰측 대변인처럼 유죄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후 그들은 다시 신출내기 변호사를 기용해서 로버트 김이 여러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 변호인 자격으로 배석하게 했는데,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중요한 증거 열람기간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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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공의 필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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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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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의 부친 김상영 옹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초대정경련 상근부회장, 8?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경제연구소인 <산정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한국 정치?경제계의 원로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옹은 가진 재산이라고는 거주하던 아파트 한 채 뿐일 정도로 청렴결백하게 평생을 살아왔다. 한국은행 부총재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아들인 로버트 김을 전방에서 군생활을 하도록 했으며, 유학을 떠날 때도 규정대로 50달러만을 주어 보낼 정도로 원리원칙을 지키는 분이었다.
그의 동생인 김성곤은 고려대학 문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반독재투쟁을 하던 중 지난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결국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선 국회의원이던 김옹을 공천하지 않아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옳은 일은 한 아들의 용기를 칭찬하였다. 이후 복학이 불가능해 방황하던 동생 성곤은 형인 로버트 김의 제의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템플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0여 년만에 금의환향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가 지난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 부자가 같은 지역에서 대를 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동생의 국회의원 당선은 로버트 김의 조국애가 한층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살면서 자신을 낳아준 조국에 뭔가 뜻 깊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백동일 대령의 요청에 대해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시민이 된 후 23년 동안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왔고, 명예롭게 은퇴한 후 노후를 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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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한국의 정보 수집 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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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정보당국에서도 북한 잠수함이 동해에 자주 나타났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에까지 항적을 남기고 있었음을 포착하여 일본 정계 고위급 인사들이 한국의 지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우리 군 당국만 과학적 정보수단 부족으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로버트 김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에게 올라오는 한반도 관련 정보가 미국 동맹국 중 알 필요가 없는 나라에는 나가면서 정작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로서는 그 점이 안타까웠고,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정보수집이 강화되면 강한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정보수집력으로 국제사회에서 결코 무시하지 못할 국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중요한 정보, 심지어 바로 코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북한과 관련된 정보조차 대부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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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폴라다드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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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폴라드는 미국 텍사스주 출생으로 1979년 미해군정보국에 들어갔다. 1984년경부터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접촉해 미국의 국가기밀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 양이 무려 1천여건이나 되었고, 심지어 미국의 첩보위성이 촬영한 중동지역의 군사시설에 대한 극비사진까지도 건네주었다. 물론 그 대가로 4만 달러를 받았다. 폴라드는 자신의 범죄행위가 드러나자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피신해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와 접선한 요원들은 이미 이스라엘로 도주한 뒤였으므로 폴라드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없었던 대사관은 FBI에 그를 인도했다. 이 사실을 안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신의 안전만 챙기기에 급급했던 정보국 요원들과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의 무능에 분노를 터뜨렸다. 폴라드는 스파이 혐의로 구속되자 형량을 조금이라도 낮출 요량으로 플리바겐을 했다. 하지만 당시 와인버거 국방장관이 “이보다 더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해를 끼친 예는 상상할 수 없다. 폴라드는 사형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법원에 보냈고, 이 편지는 판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폴라드가 구속되자마자 당시 이스라엘의 라빈 국방장관은 “국내의 원자력과 기간시설에서 활동해온 미국 스파이 5명을 적발했다”고 발표하여 미국에 대한 반격을 가했다. 미국이 폴라드를 체포한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마음만 먹으면 미국 스파이를 적발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로버트 김과 조나난 폴라드 두 사람 모두 현재 수감 중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폴라드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고, 지금도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반면 로버트 김은 자신이 제공한 정보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을 한국 정부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원자탄 기술을 중국에 제공한 혐의로 붙잡힌 리웬호(Peter Lee) 박사의 경우를 기억해야 한다. 당시 미국 거주 중국인은 물론 중국 정부도 미국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로버트 김과 기소조항(18USC Section 793)이 똑같은 Peter Lee도 10개월 형을 받고 풀려나왔다.
국가간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안의 경우 해당국가가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가 한 개인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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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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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김이 이제 한국에서 오래 간직했던 소중한 꿈을 펼치려고 합니다. 예순 여섯, 결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신다면 그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40년 가까이 미국에 거주해서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고, 경제적 기반이 거의 없어 원만한 활동을 장담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럴수록 여러분들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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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속적인 관심
그는 더 이상 뉴스메이커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사회발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
2. 사업 구현을 위한 전문성 확보
현재 로버트 김은 국제화 시대에 맞는 진정한 세계인의 양성, 그리고 민주주의의 본질에 입각한 가치관 정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교육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해서 성과를 얻으려면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3. 세대와 이념을 초월한 사회통합의 아이콘
로버트 김 사건은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우리 시대의 불행한 일이었지만, 사건 이후 우리들은 이념과 가치관을 초월해서 하나 되어 그를 도왔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뜨거운 피를 경험했고, 그런 화합의 정신은 더 큰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앞으로도 로버트 김이 세대와 이념을 초월해서 우리 사회를 하나로 아우르는 상징적 존재로서 자리잡는다면 사회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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