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한명원
조련사K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당선 소감] "초심으로 돌아가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아,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연말 캐럴 송을 들었지만 올해의 캐럴은 유난히 따뜻한 음절로 들립니다. 상처받으면 혼자 공상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좋아하던 제가 이렇게 보상을 받는군요.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사물들에게 감사합니다.
집 근처에 있는 동물원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자주 갔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개최하는 동물교실을 수강 신청했습니다. 염소에게 풀도 주고 물개들에게 생선도 던져주며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련사를 보면 동물들은 달려왔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컸고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나는 여전히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새장 속 독수리, 철창 속 호랑이, 돌 위에서 앞만 멍하게 바라보는 곰 식구들. 그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였기에 야생을 그리워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동물원 입구에 서 있던 나뭇잎이 휘날리고 머리 위로 나뭇잎 왕관이 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동물원을 다 돌고 나올 때가 되면 어느새 마음이 편해져 겸손한 내가 오만했던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미흡한 제 글을 뽑아주신 조선일보와 조정권, 문정희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문학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용기를 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이승하 선생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친구 미정, 옥련, 미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제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이 내린 축복 같은 딸 수연과 오랜 시간 묵묵히 견디어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초심으로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1965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학원 논술강사·여성회관 독서논술지도 강사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곳’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201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미옥
식탁에서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나의 고아원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신춘문예 2012]시 ‘나의 고아원’ 당선소감
시 앞에서 용기 있는 사람 되리라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도망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언어의 시작이 되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시를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의 오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정현 덕분이다. 내가 의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말로 다 할 수 없게 고맙고 미안하다.
힘껏 미워하고, 힘껏 사랑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의 벗, 사랑과 버들에게, 나를 믿어주는 은정에게, 항상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정숙 언니에게, 곁을 지켜주는 슬기에게, 나보다 나의 잘됨을 더욱 기뻐하는 진희 언니에게, 부케처럼, 바통을 넘긴다. 나은아. 내 옆에 있어 준 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원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했다. 깊고 단단하게,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명지대 교수님들과 부족한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 앞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무서운 손으로.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신춘문예 2012]시 ‘나의 고아원’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묻지 않은 목소리 / 장석남(왼쪽) 장석주 씨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장석주 시인, 장석남 시인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류성훈
'월면 채굴기'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류성훈 당선소감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 같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할 것"
바다 건너에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라는 옛 검술이 있다. 그 창시자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오직, 다 버리고 초연하게 내던지는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
아직 미숙한 내게 등단은 그런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으로 찾아왔다.
숨을 고르며 새삼 뒤돌아본다. 문학을 배우겠다고 덤빈 날이 어느덧 두 자리 햇수를 넘겼을 때, 내 앞의 시는 노력과 버림 사이에 있었고 초연함과 무덤덤함의 사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희망이 없어도 캐어낼 순 있었고, 오랜 그늘 속에서도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로 내려앉은 것 같은 지금의 느낌을, 나는 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가 아닌 ‘시’인 것이라고 뜨겁게 한 번 우겨보려 한다.
나의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들, 부족한 내게서 재능보다 노력을 높이 보아주셨을 고마운 분들에게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행복한 걱정이 앞선다.
문학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주신 김석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권혁웅 조연호 선생님을 비롯한 금요반 모든 시인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우들에게 이 행복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이젠 내가 이 따뜻한 빚을 갚아나갈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늘 촌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마음.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설치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불만도 없이 끝까지 믿음을 주셨던 부모님께, 차마 부끄러워 표현할 수 없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행복하게 전하고 싶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성민
저무는, 집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시 당선소감
난 詩 소비자, 더 읽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는 걷습니다. 산호 미용실을 지나 파리바게뜨를 지나 물왕리 저수지를 지나 아스널 FC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지나 메텔의 슬픈 눈이 떠도는 은하철도999를 지나플라이 투 더 문을 지나…. 저무는 것들이 저무는 사이로 걷습니다. 저무는 것들 사이에서 여러 번 저물며 걷습니다.어느 저물녘엔 전화를 받습니다. 그 밤에 첫눈이 푹푹 내립니다. 조금씩 눈 속에 묻혀 가는 집과 산과 논과 창문을 봅니다. 집이, 산이, 논이, 창문이 하나씩 저물고 있다는 느낌. 어머니의 둥근 무릎처럼 그 속에서 불빛들이 견디고 있다는 느낌. 그 밤에 그는 저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짓던 시를 마저 짓습니다…. 견딥니다….배고플 때 밥 사주던 금호초등학교 동창들이 생각납니다.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서울신문과 심사위원님들을 생각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페이지처럼 많은 밤들이 지나갑니다. 시를 읽으며 흐려지던 밤, 은혁이와 민혁이를 낳던 밤, 첫사랑이 있는 골목을 지나며 버스 안에서 아프던 밤, 창조주의 밤이 스르르 지나갑니다. 모든, 혼자였던 밤들. 그리고 나. 나는 아직도 소비하는 사람.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사람. 시를, 더 많이 읽겠습니다.
■ 약력 1967년 충남 서천 출생. 안양대 신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소설)
시 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심사위원 함성호(시인), 송찬호(시인).
[201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호빈
그늘들의 초상
[2012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 소감-“멋진 병, 현기증이 나에 대한 믿음 되살려”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전부 이해하기 위해 한 인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인간이 되길 바랐다. 한때 내 몸은 그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반항하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영혼이 아니라 그의 죽은 몸을 닮고 있었다. 스무 살의 겨울, 몽마르트 언덕에서 길을 헤매던 중 한 묘지로 들어갔고 처음 본 공동묘지에 그를 내려놓았다. 파리의 지붕들을 뛰어다니던 그에겐 밟고 다닐 무덤들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빈자리가 말을 건넨다. “나는 침묵과 밤에 대해 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유의했다. 나는 현기증을 응시했다.”
얼마 전 흑백의, 내 머릿속 사진을 보았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커다랗고 외로운 눈(目)이었다. 그 눈은 대답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질문만을 내게 건네는 듯했다. 아무 문제 없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 이후로 나는 눕거나 일어날 때 어지럼증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 살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깨어나면서 나에 대한 불신들 사이에 나를 믿게 만들 씨앗을 흩날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다. “멋진 병”에 걸렸다. 다행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고마움과 건강히 오래 지켜봐주길 바라는 아들의 마음을 전한다. 시 쓰는 길을 열어주시고 큰 관심을 가져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곧’이라는 말로 격려해주신 선후배님께 감사드린다. 시 속에 숨어 있으려는 나를 밖으로 꺼내주신 멘토 권혁웅, 조연호 그리고 금요일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크고 달콤한 힘에 감사한다. 다른 내일을 열어주신 도종환, 박주택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 1979년 서울 출생 ■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재학
[2012 경향 신춘문예]시 심사평-“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 / 도종환·박주택 시인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새 봄의 문학’이다. ‘새 봄의 문학’은 혹한과 얼음을 이긴 ‘새싹의 문학’이자 ‘꽃핌의 문학’이다. 이는 오랜 탁마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순간을 견디며,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 끝에 찾아오는 문학이다. 이 점에서, 시를 구성하는 미적 형식과 내용을 직조하는 시선, 제재를 가공하는 세공술, 그리고 이를 각고로 새겨 돋우는 치열한 정신은 ‘새 봄의 문학’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예술적 덕목들이다.
예심에서 올라온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령을 견지하면서도 개성적 시각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낸 것들이었다.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썼는가’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어 미래적이다.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하는 강한 추동력과 낮은 자의 고통을 존재의 장소에서 불러내는 동일자의 윤리를 보여준다. 함께 투고한 시편도 고르게 완성도가 높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후보작 ‘곰탕’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뼛속까지 곰삭은 그리움을 푹 고아내고 나면 눈꽃처럼 퍼지는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와 같이 세계를 긍정한다. 그러나 산문적 사변(思辨)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로켓맨’은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튼튼한 신뢰를 얻고 있지만 대상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좁은 것이 흠이었다. ‘그 자작나무 숲으로’는 참신하기는 하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인색했다.
모두에게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과 같이 ‘견인’과 ‘겸양’을 함께 권한다.
[2012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광희
거미줄동네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
TV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
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
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
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
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
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
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
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
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
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
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
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
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
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
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
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
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
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
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
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당선소감/ 내게 주어진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것
일상은 내게 호흡이었다. 시 또한 그랬다. 오래 덮고 살다가 언젠가부터 덮개를 열고 나온 그것은 차츰 내 일상을 점령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제자리를 만들고 있었던가 보다.
아직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서 크기를 소망했다. 내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금씩 성장 중이지만 이제 내게로 와 덥석 안긴 시를 끌어안아야겠다.
뒤늦은 출발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셈이다. 절대 급할 일 없으나 결코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늘 그래왔듯 새로 난 이 길을 오래 꼼꼼히 새기며 걸을 것이므로 스스로에게 그 책무를 지워본다. 아침부터 눈이 부슬부슬 내리더니… 이렇듯 좋은 소식을 안겨주려고 그랬나보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인내하며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하며, 주변 친지들과도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박광희(55)△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졸업△독서논술지도 강사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 가운데 5편을 선정했다. 정정례의 `내력' 박명삼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귀' 강기순의 `미용실' 오영애의 `춘신 春信' 박광희의 `거미줄 동네'였다.
이 중 최종 세 편을 압축해 논의했다. `미용실에서'는 감각이 뛰어났고 일상적 삶을 노래한 것은 좋았으나 사유의 깊이가 미흡했다.
`춘신 春信'은 발상은 좋으나 주제의식이 명징하지 않았고 시적인 역동성이 약하여 평면성에 그치고 말았다. 박광희가 응모한 여섯편 모두의 수준이 고르고 특히 그중 단연 돋보인 작품은 `거미줄 동네'였다.
이 작품은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시의 후반에서 보여준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골목이 환하게 열리는”이라는 이미지 묘사는 시의 전반을 지배하는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과 공허를 반전시킨 점이 이 시를 더욱 빛냈다.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 이영춘 시인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허영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당선소감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 속의 우울을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과 눈 맞추게 하는 행위다. 형체 없이 스며 있던 상처와 욕망이 육체를 얻어 활동하게 하는 작업, 나무속에 들어가 가지 따라 솟구치고 햇볕에 몸 비비며 잎으로 팔랑거리게 하는 일이다. 바람의 팔과 햇살의 눈으로 고루 세상과 마주하는 일. 오래 바라보면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세계는 평등하고 풀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한 개의 삶도 눈물겹도록 진지하다.
보송보송 마른 마음으로는 시가 오지 않는다. 무언가 아련하고 아릿한, 나는 그것이 오랜 세월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우울이라는 것을 안다.
눈부신 날개를 팔랑이며 나비가 돌아온 아침이었다. 당선통보의 벅찬 감동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던 내 시력(詩力)에 대한 절망감에도 환하게 해를 비췄다. 살아 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살 것이다. 언제나 최초의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동진 회원님들, 유진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을 붙들고 밤을 새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슬그머니 놓고 나가던, 내 시의 첫 독자이며 평자인 남편 이일상 씨,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해 준 동걸,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 같은 다영이, 행운을 물고 우리 집으로 날아온 나현.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허영둘/1956년 경남 고성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종해·천양희·김경복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영애
흰꽃이 지다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당선 소감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다
뛸 듯이 기쁩니다. 무변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것만도 같이 기쁩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야 벗어버리는 듯한 홀가분한 이 기분 생에 최곱니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줍니다. 무량으로 기쁩니다.
뼛속까지 다 비워버리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시조새의 날갯짓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좀체 떠날 수 없었던 슬픔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깨지고 부서지고 여과 없이 떠나갑니다. 화석으로 옹이 박혀 점점 더 깊이 화인 자국을 남기고 결집해 있던 시의 응어리들이 가차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십수 년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곪을 대로 곪은 상처투성이,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신춘폐인으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과 마음으로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힘을 주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 즉 위대한 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같습니다. 제게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으니까요.
이제 시의 꽃을 피우는 봄이 왔습니다. 마음껏 시의 밭을 누비며 황량했던 마음을 갈고닦으며 경작해 보이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전날 밤 꿈속에서 본 영롱한 빛깔의 시 무지개를 하늘에 걸겠습니다. 한림대 김은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태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식구들 감사합니다. k.k.k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끝으로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첫눈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공손히 받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1955년 강원 춘천 출생 ●제7회 김유정문학공모 대상 ●신사임당문예 수상 ●강원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3회.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김언희>
[2012 아시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우포 왕버들
민 승 희
살얼음 정수리에 꽃대하나 벌고 있다
서리 내린 가지마다 동안거 푸는 버들
이른 봄 풍경소리가 우포늪을 깨운다
적멸을 꿈꾸는가, 가시연 마른 대궁
깃을 턴 휘파람새 푸른 정적 깨트리면
하르르 이는 바람에 물비늘이 일어난다
감았던 눈을 뜨면 문빗장이 열리듯
희뿌연 이내 걷고 우뚝선 수마노탑
층층의 뼈대하나가 하늘을 받쳐 든다
버들가지 필 때마다 옥개석도 자라나고
금강경 피워 물듯 초록 장삼 두른 나무
그 앞을 도는 사람들 부처마냥 환하다
[2012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호박(琥珀) 속의 모기
권영하<경북 문경시 점촌중학교>
호박 속에 날아든 지질시대 모기 한놈
목숨은 굳어졌고 비명도 갇혀 있다
박제된 시간에 갇혀 강울음도 딱딱하다
멈추는 게 비행보다 힘드는 모양이다
접지 못한 양날개, 부릅뜬 절규의 눈
온몸에 깁스한 관절 마디마디 욱신댄다
은밀히 펌프질로 흡혈할 때 달콤했다
빠알간 식욕과 힘, 그대로 몸에 박고
담황색 심연 속에서 몇 만년을 날았을까
전시관에 불을 끄면 허기가 생각나서
호박 속의 모기는 이륙할지 모르겠다
살문향(殺蚊香) 피어오르는 도심을 공격하러
[심사평] “상상력·소재의 확장 돋보여”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감각적인 언어유희가 메시지를 놓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고개 숙인 농심을 일으키고 농업인의 입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농민신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농업인의 애환을 대변할 만한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삼효문을 읽다> <하얀 종이 집> <호박 속의 모기> 세편이었다. <삼효문을 읽다>는 감각적인 표현에서 돋보였으나 전개의 상투성이 거슬렸고 <하얀 종이 집>은 시적 은유의 깊이가 두드러지면서도 주제 전달의 한계가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호박 속의 모기>를 당선작으로 합의하였다. 이 작품은 행간마다 상상력의 힘이 느껴지고 소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함께 보낸 작품에서의 다양한 시상과 시어의 건강성 또한 신뢰를 보탰다.
시를 쓰는 일은 관찰과 사색, 사유를 통한 세상 읽기에서 얻은 정신적 에너지를 문자의 힘을 빌려 독자에게 전달하는 수단의 하나다.
근년에 투고되는 신춘문예 작품들을 보면 표현에 치우쳐 그 정신의 깊이가 자꾸만 얕아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당선자는 이 점을 유념하여 시조의 숲을 건강하게 하는 나무로 자라나기 바란다.
심사위원=민병도<시조시인>, 백이운<시조시인>
[2012 중앙일보 중앙시조연말장원]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유 영 선
이번 역은 여름역 초록그늘 여름역입니다
온도가 조금 올라도 모세혈관 불붙는 사람
심장을 던져버리고
내리시면 됩니다
눈빛마다 불이 붙는 가을역 곧 도착 합니다
南도 北도 한때는 저리 붉어 아팠는데
타는 몸 놓아버리고
바람처럼 내리세요
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
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
다음 역은 꽃잎 날리는 아지랑이 봄 역입니다
노랑제비 애기똥풀 별빛보다 밝은 마음
손끝에 하늘 물 들 때까지
활짝 펴고 날으세요
[심사평]
소통 꿈꾸는 따뜻한 마음, 신인다운 발상 돋보여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27명 141편의 작품을 놓고,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신인의 이름에 부응할 만한 신선함과 대성 가능성에, 기교보다 패기와 투철한 시정신의 사고와 감각에 주목하기로 했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4~5명의 작품을 선고한 뒤 논의 끝에 때깔만 화려하고 내용이 공허한 작품과 관념 서정, 제재가 진부한 작품을 걸러낸 뒤 최종적으로 ‘은행나무 친견(親見)’ ‘마하’ ‘고래역(驛)’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등을 놓고 다시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유영선의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시조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꿈꾸면서 마음 시린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희망의 봄으로 안내하는 현실 서정의 참신함과 신인다운 발상이 돋보였다.
‘은행나무 친견’과 ‘마하’는 감각과 이미지 처리가 물 흐르듯 유연했으나 관념 서정이, ‘고래역’은 패기가 돋보였으나 시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의 안이함이 지적됐다. 최종심에 오른 이들의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오승철·오종문·이종문·강현덕(대표집필 오종문)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김석이
비브라토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발밑으로
수없이 저어대는 물갈퀴의 움직임
점선이 모여서 긋는 밑줄이 떠받치는 힘
차선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들
꿈틀거리는 지면을 가속으로 쫙쫙 펴는
평평한 길 아래 있는 주름들의 안간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손가락들
소리의 맹점 찾아 이리저리 누를 때
닫혔던 물꼬를 틀며 길을 여는 강물소리
부딪쳐야 파문으로 밀려오는 그림자
짓눌려야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
발끝에 온힘을 모아 중심을 잡고 있다
◆당선소감 - 신춘! 봄이 한걸음씩 다가오네요
지나온 날들이 발 밑에 엎드려 길이 되네요.
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하루하루가 추운 등을 감싸줍니다. 낙엽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었네요. 겨울의 밑둥치에서 자라고 있는 초록의 꿈을 바람이 흔들어 깨웁니다. 신춘!
봄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네요.
바위에 짓눌려 있던 시조의 씨앗을 흔들어 깨워주신 현대 문화센터 시창작반 권애숙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바위 뒤에 숨어 주춤거리는 저를 앞으로 나오게 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브라토로 시조의 싹을 틔워 짓눌렀던 바위까지 감싸 안는 숲을 이루도록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한 걸음 뒤에서 무심한 척,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빛으로 끝까지 엄마를 응원해 준 영민아, 예슬아 꿈은 역시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 해주고 싶구나. 오늘도 열심히 창작의 길을 열어가는 문우들에게 문운이 깃드시길 바라면서, 2012년 새해에는 모두에게 희망의 물결이 밀물처럼 밀려들기를 기원 드립니다.
김석이(본명 김인숙) 1959년 부산 출생 동의공업대학 식품공업과, 방송대 초등교육과 졸업
동주대 음악과 졸업 부산문예창작아카데미, 영남여성문학회 회원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주제의 깊이·시적 긴장 모두 제대로 구현
화려한 등단의 길인 신춘문예에 사설시조가 당선된 적은 한 번 있다. 그러나 단시조가 당선된 예는 없다. 특기할 점은 응모작들 중에 단시조 편수가 의외로 적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조의 본령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되고, 역량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시조여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린 측면도 있다. 단시조 한 편에 못 담을 소재는 없다. 빼어난 단시조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나올 때 시조는 새로운 물꼬를 트는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이로는 심순정, 이한, 김석이 제씨였다. 심순정 씨의 '꽃의 부호'는 감각과 새로움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메시지의 전달이 명쾌하지 못하였다. 내공은 쌓였는데 비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하고 있는 점을 면밀히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한 씨의 '운림산방에서' 외 네 편의 작품들은 주목할 만하였다. 모두 고른 목소리를 유지했고 참신한 감각과 주제 구현 능력이 돋보였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고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개성적이고 새롭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강렬한 에스프리에 비해 작품 곳곳에서 음보의 파탄을 보인 것이 아쉬웠다. 시조는 엄연한 정형시이므로 기율 곧 정형률을 잘 숙지하고 형식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여 김석이 씨의 '비브라토'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신선한 제목에서 비롯된 시적 긴장감이 네 수 전편에 고르게 깔려 있다. 음의 떨림 현상인 ‘비브라토’라는 음악 용어에 착안하여 결국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함을 구체적이면서도 명징하게 육화한 '비브라토'는 ‘물갈퀴, 자동차 바퀴, 바람의 손가락들’을 동원하여 주제를 탄력적으로 잘 구현하고 있고, 끝수에서 인생에 대한 품격 높은 자세를 보인다. ‘짓눌려야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이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절로 끄떡이게 하는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일이다.
이 영광에 값하는 혼신의 정진이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정환(시조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