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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님의 여행기 파일 원문을 이곳에 다시 펼쳐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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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BACK TO THE PAST)
2010년 1월 15일 ~ 1월 28일
쉰 살에 하는 철학여행
인도로 가는 길은 과거로의 회귀였습니다.
3시간 반 정도 돌아가면 되는 줄 알았던 여행이 50년은 족히 거꾸로 거슬러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쉰 살에 하는 철학여행이라고 해 두고 싶습니다.
인도에서는 쉰 살을 '바나프라스타'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고 합니다. 스스로 산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자기 몫의 삶을 위해 마음을 닦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감히 마음을 닦기 위해 인도로 간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도의 철학과 정신, 그리고 인도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지 결국 찾지 못하고 과거라는 험악한 굴레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드라비다족이 일군 인더스문명이 운명을 다할 때 쯤 아리아족들이 쳐들어왔고 드라비다족들은 존재가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드라비다어는 아직도 인도 남부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 남아 있지만 세계 4대 문명이라던 인더스 문명은 사실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파키스탄 지역에 그 흔적을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갠지스강을 무대로 문명을 세운 아리아족이 만든 그 카스트 제도는 지금도 드라비다족을 불가촉천민으로 여기고 있고 인더스문명을 일군 주인공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긴 수드라 아래로 수백 수천 가지의 인간대접을 못 받는 계급이 있다고 하니 아리아족들의 간계가 탁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의 성지 인도
인도에는 아리안족이 들어와서 브라만교를 세움으로써 카스트제도와 더불어 힌두교가 생깁니다. 그리고 불교는 석가가 태어나서 카스트제도를 비판하고 평등사상을 내세움으로써 탄생합니다. 그런 다음 인도에서 1000년 정도를 머무르다가 AD 1세기경에 중국으로 건너오고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도 건너옵니다. 이슬람교는 AD 5세기경에 마호멭에 의해서 태어나서 중동을 통일하고 동남아시아까지 이릅니다. 힌두교의 특징은 다른 종교가 들어와도 융화시키는 특징이 있고 이슬람교는 무력과 평화의 양면성을 갖고 있으며 불교는 철학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과연 인도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종교가 어울려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잡음 없이 살아갑니다. 열심히 나름대로의 종교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모두들 죽기 위해 삽니다.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의 탈출 -가출
나는 이런 인도로 가출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끔씩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좋습니다. 나 같은 경우는 좀 잦은 편이라고들 합니다.
출가를 하는 것은 아니니 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가출'과 '출가'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므로 난 단지 ‘가출’을 자주 도모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번 ‘출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욕망,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욕망 그리고 우리 애들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려는 것이라고 해 두고 싶습니다. 아이티에 대한 참혹한 소식을 뒤로 하고 부티나는 배낭을 짊어 메고 떠나는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빈티나게 생활하고 돌아와 몇 푼이라도 그들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다국적 기업을 위한 생활은 철저히 절제할 것이며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찾고 올 것입니다.
옛날보다 훨씬 편리하게 살면서도 인간의 존엄성, 모든 생명의 존엄성이 사라져 버린 우리나라, 산을 무너트리고 강을 돌리고 파고 바다를 메우는 것이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것도 인고의 세월이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을 이렇게 무시하는 나라를 잠시라도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글 쓰는 이유
사실 내가 인도에 다녀와서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별 것도 없습니다. 허황된 꿈, 허풍, 가식, 환상 등등을 깨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법정스님의 '일기일회(一期一會)'를 읽고 좋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법정의 인도기행은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습니다. 이거룡의 '두려워하면 갇혀 버린다.'도 좋았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란 지금 이 순간은 생애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난 지금 이 순간의 인도를 보고 싶었습니다.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여러 인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시는 이승에서 만날 인연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기일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조지 오웰
나는 이번에 글을 쓰려고 함에 있어서 겁이 납니다.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가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오웰은 fact라고 했다)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지만 난 그 어느 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도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오웰처럼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한다는 말만 해두고자 합니다. 그는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작가였지만 난 내가 보고 느낀 것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하긴 정치적 목적이 없는 글은 생명력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난무하는 그런 글은 쓰지 않을 것입니다.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이번 글을 현재형으로 쓰려 합니다. 단, 역사적 사실은 항상 과거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1월 15일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조지 오웰을 읽습니다. 요즘 ‘1Q84’라는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1984’를 패러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Q’는 일본에서 ‘구’라고 읽습니다. 관심이 없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내킵니다. 그래도 디스토피아를 그린 오웰과 사랑이야기를 쓴 하루키가 다르듯이 두 소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하루키는 ‘1984’가 발표되던 194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또 다른 감흥을 줍니다. 그는 레이몬드 커버의 짝퉁이라고까지 불립니다. 허무적인 삶과 글의 색깔이 닮은 모양입니다. 나는 어릴 때 '노르웨이 숲'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야한 글이 많았다는 것 외엔 기억이 나는 게 없습니다. 김대중과 친했던 '와다 하루키'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법'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쉽지만 수영은 단념하고
발가벗은 채로 바위 그늘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일광욕 역시 무인도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한 가지였다.
나는 발가벗은 채로 몸 구석구석까지 듬뿍 햇볕에 쬐기를 몹시 좋아한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감출 것도 없다.
이런 일광욕을 해보면 알지만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인도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한 태양 볕에 알몸처럼 마음 구석구석을 쬐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걸러 나온 모든 찌꺼기들을 말려서 날려 보내고 싶습니다. 인도에서 날리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러기엔 인도날씨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햇빛을 볼 수가 없고, 밤엔 별도 달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웰은 인도에서 태어나 이튼스쿨을 나왔지만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미얀마 경찰 노릇을 하면서 제국주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동물농장과 ‘1984’라는 멋진 작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유토피아’가 사회주의를 그린 것이라면 ‘1984’는 전체주의의 종말을 그린 것입니다.
1984년은 영국이 '1997년도에 홍콩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약을 맺었던 해입니다.
홍콩을 비행기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습니다.
홍콩공항에서 내다보이는 홍콩의 풍광은 별로였습니다. 산은 웅장함도 아기자기함도 없습니다. 중국의 본토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홍콩은 아편전쟁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영국의 삼각무역 때문에 영국에 빼앗기게 됩니다. 삼각무역이란 바로 영국- 인도- 중국 사이로 이어지는 영국정부의 최고의 황금루트입니다.
은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아편을 판매해서 벌어들인 은이 인도가 아닌 영국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중국의 청백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 태워 없애 버립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중국은 힘없이 쓰러집니다. 이렇게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1842년에 남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홍콩은 영국령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이 되어서 영국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1997년에 중국에 다시 반환한다는 내용으로 협정을 맺게 됨으로써 홍콩이 중국령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에서 나오는 길에 홍콩에서 이틀간 머물 것입니다.
홍콩에서 잠시 쉬고 인디어에어로 갈아타고 본격적으로 인도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합니다. 오후 4시 15분 비행기가 딜레이 되더니 5시 40분에 출발하여 11시가 되어서야 델리공항에 도착합니다. 기내에서 음식이 달라집니다. 저녁식사가 인도음식입니다. TV에서도 인도음악과 춤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래와 춤이 꼭 뮤지컬 같기도 하여 인도풍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서양과 접목이 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깨와 발 그리고 엉덩이를 많이 이용한 춤사위입니다. ‘간디와 타고르의 대화’를 읽기로 합니다. 인도로 가려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영국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생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의 모든 문제에서 이견을 보여주는데, 불가촉천민에 대한 생각도, 영어교육에 대한 생각도, 국산품애용에도 의견이 다릅니다. 타고르는 서양배척의 외침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고, 물레숭배를 획일성을 몰고 온다 하여 비판합니다. 결국 비협력도 폭력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 타고르였습니다만, 두 사람은 진리를 향한 열정이나, 인류애의 깊이, 나라사랑의 깊이에 있어서 또한 인격의 고결함에 있어서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가난한 민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을과 마을, 집과 집을 누빈 간디였고 세계의 양심적 지성들과 폭넓은 교제를 하고 동서융화 인류일체를 주장하며 대륙과 대륙, 나라와 나라사이를 누비는 타고르였기에 이들의 민족운동방법 논쟁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간디와 타고르는 모든 사안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했음에도 서로 존중하고 존경했습니다. 또한 간디는 타고르의 조카딸과 40년간이나 플라토닉 사랑을 나눴다는 것도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문맹인 아내와는 금욕생활을 하면서 인텔리 여성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자서전에도 이 이야기는 빼버렸습니다.
간디는 인도 전체를 번개처럼 한순간에 장악했습니다. 그는, 허리에 짧은 옷을 두르고 손으로 짠 흰 무명의 깨끗한 숄로 몸을 감싼 미소 짓는 노인이라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미지로 수백만의 군중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짓궂고 오랜 권위가 몸에 밴 나이 지긋한 힌두교 성인들처럼 근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힌두교도도 아니고 정치가나 신비주의자도 아니며, 상인도 브라만도 무사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도 차체였던 것입니다.
간디가 좋아했던 타고르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너의 부름에 답하지 않으면, 혼자 걸으라.
그들이 무서워하며 몰래 얼굴을 벽에 대고 숨으면,
오, 너 불운한 자여,
너의 정신을 열고, 크고 높은 소리로 말하라.
그들이 사막을 건너갈 때 돌아서서 너를 버리거든
오, 너 불운한자여,
네 발밑의 엉겅퀴 풀들을 밟으며,
피로 물든 길을 혼자 가라.
비바람이 어둠을 찢을 때, 그들이 너에게 불을 밝혀주지 않으면,
오, 너 불운한 자여,
고통의 불씨가 네 가슴을 태울 때,
네 가슴이 고독 속에서 이글거릴 때.
타고르는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일본지국장의 간절한 부탁으로 시를 한 편 써 준 적이 있습니다.
동방의 등불/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주요한은 이 시를 각색하여 조선이 마치 동방의 등불인 것인 냥 글을 고쳤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모양입니다.
인도의 시간에 적응을 해야 합니다. 시계를 인도시간으로 맞춥니다.
이제 과거로 돌아온 것입니다.
인도소풍이 차를 보내 마중을 나왔습니다. 배낭족들의 중심지 바하르간지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1년 계획으로 인도를 다니고 있는 배낭족 김경희 씨도 다른 한 분과 같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방을 예약해 준 것은 고마웠습니다.
골드 인 게스트 하우스는 1인 5천 원 정도하는 숙소입니다.
우리나라 옛 여인숙 같습니다.
대학 다닐 때 김 최초 생산지인 광양에 동아리 선배를 따라 고향에 들리러 가는 길에 따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는 길에 다솔사 들렀다가 돌아오는 차가 없어 허름한 여인숙에서 친구랑 셋이서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분위기가 생생합니다. 도마리 버스의 운전기사와 차장이 옆방에서 사랑 놀음을 하고 있었고 우린 소주 사다가 홀짝이며 선배의 이야기를 주어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방 분위기가 납니다.
700원씩 2100원을 준 기억이 납니다.
이곳 숙소는 형편없습니다. 값이 비싼 거라고 하니 앞으로 이런 곳보다 못한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술을 사다 먹습니다.
맥주 사다가 한 잔 하고 새벽 2시에 잠이 듭니다. 맥주 값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술파는 곳도 흔치 않아 앞으로 일정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마시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소피아라고 불러 달라는 김경희 씨는 1년 계획으로 인도에 왔고 현재 2달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한 여인은 5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니 정신이 아찔합니다. 소피아는 우리 일정표를 보고 인도 여행을 한 번 해 본 사람인 걸로 착각하였다며 칭찬을 합니다. 하긴 6개월 동안 인터넷을 검색하며 고생한 것입니다.
1월 16일
느지막이 일어나 10시 30분 쯤 '인도방랑기'에 들립니다.
아침 겸 점심은 델리역 앞 서민들의 식사 - 북인도의 밥( 빵 같은 걸 구어 양념에 찍어 먹는다)인데 먹을 만하지만 더럽게 느껴집니다.
바라나시행 열차를 예약하는데 인도에는 외국인 전용이 있어 예약하기 편합니다. 바라나시까지 312루피라 값도 쌉니다.
낮에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라즈가트입니다. 간디를 화장한 곳입니다. 재를 뒤편 야무나강에 뿌렸다고 합니다. 인도하면 떠올리게 되는 위인인 간디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라즈가트입니다. 넓고 평화로운 공원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랄 낄라로 갑니다. 무굴왕조 때 세운 붉은 사암으로 지은 성인 랄 낄라(레드 포트: 붉은 성)는 타즈마할을 지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의 작품입니다. 외국인을 조금이라도 더 유치해 보려고 노력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외국인에게 모두들 바가지를 씌웁니다. 밖에서 보이는 붉은 성의 장엄함은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서라도 들어가 보게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들어가면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인도의 건물들은 대게 그렇습니다. 바깥은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안쪽은 사실 별 게 없다는 것을 나중에 돈이 많이 들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저녁엔 남인도 음식을 먹습니다. 1000원 정도인데 맛있습니다.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합니다. 저녁에 사이클릭샤를 타고 돌아와 와인샾에서 맥주를 사서 마십니다. 탄두리 치킨 닭다리 튀김 등 길거리에서 안주로 사가지고 마십니다. 소피아 박근생 등과 인도의 문명 철학 등에 관해 어설픈 토론을 합니다.
그들의 인도에 대한 희망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내 방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인도와 차도가 따로 없는 무질서한 나라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꾸질꾸질한 거리, 색바랜 건물, 씻지 않은 사람들, 희뿌연 하늘 ……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습니다. 우수마발은 3인칭이라더니 이곳 인도에서는 우수마발이 도로에서 제일 우선입니다. 사람, 사이클릭샤, 오토릭샤, 택시, 승용차, 허물어져가는 버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트럭 등이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거리가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팔 다리 없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걸 보면 분명 사고가 많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왕 거지처럼 살 바엔 아이가 어릴 때 팔 다리를 못 쓰게 기형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는 소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라면 그게 나은지도 모릅니다. 슬픈 인도입니다.
자기들은 "Incredible !ndia'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놀라운 인도' 혹은 '거짓말 같은 인도'라고 번역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터무니없는 인도'나 '신뢰할 수 없는 인도'처럼 생각됩니다.
자마 마스지드는 무굴시대의 이슬람 사원입니다. 인도에서는 가장 큰 사원이자 황실사원이었습니다. 이집트보다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인근 이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하긴 이란을 통해 이슬람이 유래되었으니 당연할지 모릅니다. 사원 안쪽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파인 것이 메카 방향으로 난 미흐랍입니다. 사원 안에는 사실 이 미흐랍밖에 볼 게 없습니다. 우린 들어가질 못합니다. 사진기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200루피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찬드니 촉 거리는 무굴시대의 명동거리와 같다고 합니다. 촉은 '중심거리'라는 말입니다.
인디아 게이트는 인도 정치의 심장이라고 하는 비자이 촉에서 동서로 뻗어 있는 라즈파트 거리 동쪽에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인도병사의 넋을 기리는 기념물입니다. 9만여 명의 장병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만 인디아게이트는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사진 찍는 걸로 만족합니다. 1월 26일 건국일 준비에 한창인 모양입니다.
대통령궁 앞까지 단장에 바쁜 모양입니다.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지나갑니다.
코넛 플레이스는 역동적입니다. 여기도 경비는 삼엄합니다.
코넛 플레이스는 인디아 게이트를 세운 해인 1931년 인도총독인 러셀이 올드 델리를 대체한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만든 뉴델리의 중심부입니다. 공원을 겸한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와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도로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너무 많은 것을 가슴에 담습니다. 인도로 오기 위해 애써 비운 마음이 벌써 차버린 모양입니다.
1월 17일
아침을 먹습니다. 어제와 같은 식당에서 먹습니다. 한국인들은 자기가 가본 데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중국식 볶음밥을 먹어 봅니다.
릭샤를 탈 때면 속을까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이런 것도 나중엔 즐거운 여행의 일부라는 걸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소피아는 호통까지 치면서 잘도 깎습니다. 어떨 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런 사람들 도와주러 공정여행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네들도 너무 합니다. 일단 2배 이상 부르고 시작하니 공정한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처음부터 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505번 버스를 타고 '꾸뜹 미나르'에 갑니다. 이 '꾸뜹 미나르'는 사암과 대리석의 조화를 이룬 유물들이 인상적입니다. 개조를 한 것이라 힌두사원인지 이슬람사원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 곁에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가 있습니다. 힌두교를 붕괴시킨 꾸뜹 왕조가 27개의 힌두사원을 헐어내고 그곳에 이슬람사원을 세운 것입니다. 꾸뜹 왕조는 노예왕조입니다. 노예들이 세운 왕조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노예 출신으로 이슬람교도인 꾸뜹 웃딘 아이바크는 인도의 델리에 인도 최초의 이슬람 국가인 노예왕조를 세웁니다. 그의 아들은 바그다드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고 이 미나르를 세웁니다. 탑꼭대기엔 지붕으로 돔이 있었지만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높이는 72.5m에 달합니다. 압사사고가 빈번해 탑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무너질 듯한, 가다가 쓰러져 버릴 듯한 버스를 타고 '티베탄 콜러니' 찾아 가는 길에 인도인 두 청년이 친절을 베풀어 줍니다. 계속 따라와서 티벳인들의 난민촌에 데려다 줍니다.
미로길 헤매다 티벳음식점에 들어가 티벳 음식을 먹어봅니다. 한국입맛에 맞습니다. 식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손님이 많이 있는 걸 보면 꽤나 괜찮은 식당인 모양입니다.
이곳은 한국사람들에게 숙소비를 20% 깎아 준다고 하니 정분이 가는 모양입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그런 것인지, 같은 동양인이라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티벳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티벳족에 대해 측은함을 갖고 있다고 그런 것인지 모릅니다.
뒤로 흐르는 강물이 더럽습니다.
사이클릭샤를 타고 역으로 가서 지하철로 바하르간지로 돌아옵니다. 시간이 남아 나비 헤나를 해봅니다. 별로 볼품이 없습니다.
저녁 9시 30분 쯤 역에 갔더니 10시 20분에 온다는 기차는 소식이 없습니다. 00시 50분으로 딜레이 되었다고 합니다.
맥주집에 가서 한 잔 하면서 시간을 죽여 봅니다. 돌아오면서 탄두리 치킨을 사서 일행에게 주었더니 잘들 먹습니다.
델리 대학에 못 간 것이 못내 아쉽지만 역에서 시간을 죽이면서 오가는 인도인들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여자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식당이고 시장이고 여자는 없습니다. 여자들의 천국인지 모릅니다.
시간은 잘도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믿으면 이곳에선 큰일입니다.
1월 18일
00시 20분 쯤 9번 플랫폼으로 옮기기 위해 일어섭니다. 다른 일행들 짐을 꾸리는 동안 10m 밖 벤치에 앉아 반대편을 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10분쯤 지나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떠난 모양인데 날 부르지도 찾지도 않고 가버린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여유 있게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 찾으러 올 거라 믿습니다. 소식이 없어 왔다갔다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어떤 인도 녀석이 달라붙습니다. 무작정 딜레이 되었으니 따라 오라고 합니다. 참' 미친 놈들 많다' 싶습니다. 허둥대고 있으니 또 어떤 녀석이 다가 와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무작정 저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신기한 나라입니다. 내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입니다. 항상 떠내기를 주시하는 녀석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45분 쯤 되어 9번 플랫폼을 물었더니 기찻길 건너편을 가리킵니다. 건너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낚이는 게 아닌가 망설여집니다. 역무원인 듯한 사람한테 다시 물었더니 역시 건너편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5분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무작정 철길을 건너보기로 합니다. 이 시간에 일행과 떨어지면 큰일이고 나에겐 인도 현금이 한 푼도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돈을 맡겨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철로를 건너봅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빈 기차가 가로 막았지만 관통을 해봅니다. 과연 플랫폼이 나타납니다. 물어보니 9번은 가까이 있습니다. 기차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고 다행이 SL5는 좀 전에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단체로 움직이니 불편한 게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한 사람만 졸졸 따라 다니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여행이 되는 거였습니다. 일행을 만나니 둘은 또 날 찾으러 가고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되니 모두 옵니다. 하지만 시간은 다 되었지만 기차는 안 옵니다. 안내 방송도 없습니다. 도대체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건지 모릅니다. 1시간을 더 죽치고 앉아 있으니 드디어 바라나시행 기차가 들어섭니다. 사실 저녁시간부터 기다리던 기차가 새벽 2시에 온 것입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출발을 기다렸더니 30분이 더 흐른 2시 반에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인도에서의 기차여행은 이렇게 험난하게 시작됩니다. 13시간 탈 기차를 꼬박 4시간을 기다린 끝에 출발을 하고 그것도 바라나시 졍선 역이 아니라 부근에 있는 무갈 사라이 역까지 가게 됩니다. 아침 8시에 잠이 깨입니다. 장사꾼들이 시끄럽게 다니고 있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책을 읽었더니 잠이 더 옵니다. 화장실에 다녀와 차창 밖을 구경해 봅니다. 유채꽃(?)이 많이 피어 있고, 보리도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락을 베어낸 듯한 논과 보리밭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라나시가 다가오고 있는지 붉은 벽돌집들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정겨운 마을 모습이 자주 지나갑니다. 아침 식사는 대충 기차 안에서 때웁니다. 저녁 5시 30분이 되어서야 무갈 사라이 역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뉴델리 역에 도착한 시간으로부터 20시간 만에 바라나시 부근까지 온 것입니다. 3시간 정도는 벌판에서 다른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보심 많은 기차를 탄 것입니다. 역에 내려 제일 처음 마주친 것은 쥐들입니다. 뭘 하다 들켰는지 후다닥 도망치고 있습니다. 잔시로 가는 기차를 예약합니다. 원래는 아그라로 가서 자이뿌르로 갈 예정이었으나 일정을 바꾸기로 합의합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 고돌리아로 갔더니 정신없는 곳입니다. 곳곳에 경찰인지 군인인지 거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바하르간지와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드디어 갠지스강을 봅니다. 어두운 탓에 강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개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가트(ghat 스탠드 계단)를 가로 질러 화장터까지 갔더니 죽음의 연기가 사방을 매우고 있습니다. 사라진 생명이 재로 화하고 있습니다. 역겨운 냄새가 코로 쳐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따라 한국음식점에 저녁을 먹으러 가다 장례행렬을 마주칩니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 메뉴……. 비싼 김치찌개를 시켜 먹으면서 소주를 생각해 봅니다.
숙소에 들어오니 10시 30분입니다. 종일 이동한 것입니다.
1월 19일
아침 7시 30분 강가(갠지스강)에 나갑니다. 시체 타는 냄새가 가득할 것 같았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재를 수습하고 또 태우고 순서를 기다리는 송장들, 서두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흐느낌도 슬픔도 없습니다. 재를 거둔 따뜻한 자리에 개 한 마리가 자리하고 누어있습니다. 똬리를 틀고 누운 개들이 마치 뱀처럼 보입니다. 하긴 이곳 개들은 낮에도 늘상 아무데서나 쳐 박혀 자고 있습니다. 피부병에 걸려 땅바닥에 몸을 부비는 개들이 대부분입니다. 먹지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개들은 된장을 바르지도 못합니다.
배부른 놈은 소뿐입니다. 소는 여기서 배부른 영혼입니다.
강은 보이지 않습니다.
갠지스 강!
얼마나 보고 싶었던 강인지 모릅니다.
안개가 자욱합니다. 돌이켜 보면 여태 햇빛 한 번 받은 적이 없습니다. 밤에도 달은커녕 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오니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하긴 내가 구경 다니러 온 것은 아니지 않으니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만 건강에는 좋지 않습니다. 마음 구석구석은커녕 몸도 제대로 씻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도하면 갠지스강이 떠오릅니다.
인더스 문명을 짓밟고 쳐들어온 아리아인들이 세운 갠지스문명은 오간데 없어도 인도인과 그들의 삶 그리고 종교가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힌두이즘을 모두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아침에 나와 이곳에 몸을 담그며 누굴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메스꺼워지는 이 물을 마시고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고 이곳에서 빨래를 하고 결국 주검이 되어 이 물에 뿌려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 강의 의미는 어머니 이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24시간 전국에서 몰려드는 주검들이 화장으로 불길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 이곳은 죽은 영혼의 부활을 바라는 힌두인들에게 삶의 일부인 것입니다.
어두운 강가를 보트타고 다니는 여행객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건지려는지 뭘 느끼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타다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했는데 강가에서 무슨 기름이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강입니다.
강가는 죽음뿐입니다. 허무와 슬픔조차도 없는 깨끗한 죽음뿐입니다. 많은 여행객들이 바라나시에서 혹은 강가에서 뭔가를 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식인가? 왜 대부분 뭔가를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이 또 나가고 없습니다. 여행이 통일성이 없다 하긴 배낭여행을 하기엔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낮에 바라나시의 중심부인 고돌리아를 돌아다닙니다. 의식하는 모습이 마치 시위하는 것만 같습니다. 내일은 큰 뿌자(의식)가 있다고 합니다. 시바신과 강가(갠지스강의 힌두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양입니다. 신기한 장비들이 보이고 여인들은 항아리를 들고 있습니다.
메리골드 꽃이 많이 보입니다. 이곳도 장례엔 국화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리골드를 팔고 다니는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오토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갑니다.
사르나트는 한자로 녹야원(鹿野園)이라는 말입니다.
부처가 다섯 제자에게 8정도를 설법한 최초의 장소입니다.
다멕스투파가 실제 최초의 설법지인데 이 용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 스님들과 신도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멍을 때리고 따라 앉아 봅니다.
저편에서 절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온 몸을 엎드리는 티벳식 절을 따라해 봅니다. 내가 비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얼 얻으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멕스투파엔 더덕더덕 흰 천이 붙어 있었습니다. 돈을 싸서 던지고 있습니다. 스투파 위로 잠시 얼굴을 내비친 태양이 내리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잿빛입니다. 죽음의 빛처럼 여겨집니다. 철조망 밖에서 구걸하는 어린이 손들이 들어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거지는 거지(巨智)라고 한답니다. 그들이 가진 큰 지혜를 오히려 배워야 할 지 모릅니다.
마침 한국에서 오신 순례단을 만났습니다.
중앙승가대 교수이신 보각성 스님의 설법을 들어봅니다.
200여 독거노인을 돌보고 있다는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설법을 하고 계십니다.
인생이란 간이역이라고 하십니다.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가진 게 있으면 두려워진다고 하십니다.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먼 길을 가려면 짐을 가벼이 해야 하듯이 수행자의 길을 가려면 불필요한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처자도 불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왜 대를 이을 아들은 낳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중이 되려면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 하고 가족이 먹고 살 재산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시타르타의 이야기도 하십니다.
비단 짜는 직녀는 제 몸을 가릴 비단 옷이 없고, 농사짓는 농부들도 제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데 왕실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생활이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룸비니에서 출가를 했을 당시 그는 왕자였습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출가의 조건은 대를 이을 아들과 가족이 먹고 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얘길 들으니 참 우습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처자에 갇히는 것이 더 한 구속이라고 합니다.
"태어나지 마시라 죽는 게 고통이다. 죽지 마시라 다시 태어나는 게 고통이다."
불교에서도 윤회를 하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를 사랑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불교의 중생사랑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버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석가. 그건 또 다른 형태의 욕심은 아니길 바랍니다.
8정도(正導)에 대한 말씀도 하십니다.
8정도는 불교의 실천 덕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①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는 정견
② 생각할 바와 않을 바를 잘 분간하는 정사유
③ 바르게 말하는 정어
④ 바르게 행동하는 정업
⑤ 정당한 방법으로 바르게 생활하는 정명
⑥ 물러섬이 없이 끊임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정정진
⑦ 꼭 생각할 것을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는 정념
⑧ 바르게 마음을 집중하는 정정
나는 '⑤ 정당한 방법으로 바르게 생활하는 정명'이 좋습니다. 공자의 正名과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한자를 잘 모르니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한자를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합니다.
흐르지 않는다는 시간은 잘도 갑니다.
오면서 읽었던 법정의 말씀이 생각나 다시 찾아 읽어 봅니다.
"세월은 가지도 오지도 않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사람과 현상이 가고 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시간 자체나 세월이 덧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결같지 않기에 덧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한 살 먹고 어른은 한 살 줄어드는 것입니다."
"종교는 마약입니다. 무엇 땜에 교회나 절에 나가는지 자문하지 않으면 감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습니다. ‘나만 믿고 살라’고 하는 사람들 믿어서는 안 됩니다. 중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자기 집도 떠나온 사람을 어떻게 믿을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절 녹야원에서 점심을 해 먹었습니다. 꿀맛이 이런 것입니다. 소피아랑은 면식이 있다고 합니다.
갖은 풀을 뜯어다가 조선된장에 찍어 먹었습니다. 김치도 맛있습니다. 밥도 맛있습니다. 성불하시길 빕니다. '중'이란 '대중' 즉 '중생'과 같이 있을 때 '중'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말 중생과 같이 하는 '중'입니다.
오후에 바라나시로 돌아옵니다.
철수와 만수 가게에 갑니다. 한비야가 16년 전에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철수는 지금 30살입니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 받아 강가에서 보트를 태우고 있습니다. 행복한 표정입니다. 우리말을 참 잘 합니다. 동생 만수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어도 잘한다고 합니다.
보트 타고 뿌자구경을 하면서 철수의 설명을 듣습니다.
윤회를 믿는 힌두교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영원히 죽기 위해서라는 철수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생(生)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기호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지, 왜 사람들은 신을 모신다, 요가수행을 한다며 힘들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먹고 살아가는 것, 그것조차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지 않습니까?
또 늙어가는 것 또한 서글퍼지는 것이고, 병들어 아픈 것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견디기 힘든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한 고통과 슬픔, 그 공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3차원의 세계의 법칙(신이 내려 준 본능)입니다.
항상 이 대우주를 새롭고 싱싱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이 우주의 필요악(必要惡)인 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러한 일체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힌두교에서는 해탈(解脫)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인들이 힌두교도들이 갠지스강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렵고 혼란스러운 밤입니다.
'법정'은 무엇을 보았는지 '한비야'는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갠지스강을 다녀온 사람들이 모두들 하나같이 좋았다하니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더욱이 류시화의 책을 보고 찾아온 사람은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보트를 타고 뿌자를 봅니다.
철수는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내일이 신의 날, 신을 위한 축제를 한다고 합니다.
힌두대학 학생 다섯이서 제사를 치릅니다. 많은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의식은 6시부터 7시까지입니다.
보트 타는 값은 1시간에 1인 40루피입니다.
가트에는 돈을 많이 뿌립니다. 나중에 가트 주인이 가집니다.
나무장사나 가트주인은 천민이지만 가장 부자이기도 합니다.
이 직업은 천민들만 할 수 있습니다. 계급에 따라 직업이 정해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돈만 있으면 대학도 갑니다. 양가 허락만 있으면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카스트제도가 없어질 날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 계급 간에 반목과 경원이 없다고 하니 신기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화장터에서는 계속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추위 때문에 많이 죽는다고 합니다.
인도인들은 강가에서 죽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고 재를 강가에 뿌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다시 윤회를 하지 않고 태양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강가에서 화장을 하고 그 재를 강가에 뿌린다고 하니 윤회를 믿는 힌두교와는 뭔가 어긋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른 곳에서 죽으면 재라도 가져 와 강가에 뿌린다고 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가족들이 강가 근처에 방을 잡고 죽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죽으면 화장을 합니다. 화장하는데 드는 나무가격이 장난이 아닙니다. 1200~5000루피라고 합니다. 다 못 타면 강가에 버려집니다. 강가엔 온갖 짐승들의 주검도 떠내려갑니다. 죽음의 강입니다.
요즘 전기화장시설이 생겼습니다. 500루피라고 합니다만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돈 없는 이들을 위한 공짜 방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인간적인 면이 보입니다.
만수와 세창이가 있는 가게로 와서 실크를 샀습니다. 그들에겐 믿음이 갔습니다.
저녁식사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했습니다.
난 인도의 탈리를 시켜 놓고 맥주를 사러 갔습니다.
가는 길에 길을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어느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설명을 하더니 데려다 주겠다고 나섭니다.
와인샵을 가르쳐 주고는 휑하니 가버립니다.
이런 인도인도 있습니다.
모두를 색안경 끼고 볼 수는 없습니다.
10시에 숙소로 돌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1시에 눕습니다.
1월 20일
8시 쯤 일어나서 찬물에 샤워를 합니다. 이곳은 뜨거운 샤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따뜻한 물이 없는 곳이 많고 시간을 정해 두고 따뜻한 물을 공급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이곳 옥상 식당에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사원엘 갔습니다.
바라나시 힌두대학도 갔습니다.
이제야 사람이 사람처럼 보입니다.
여자들의 빠져 들 것 같은 크고 깊은 눈이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제대로 쳐다 볼 수 없던 인도인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던 인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안의 인도인들은 딴판이었습니다. 맵시도 말씨는 물론이거니와 마음씨도 달랐습니다. 대학 안에도 사원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합니다. 부탄에서 왔다는 젊은 불자의 얘기도 들어봅니다.
성당 밖에서 여대생인 듯한 활짝 웃고 있는 아가씨들을 만납니다. 객기를 부려 사진 한 장 부탁하여 찍었습니다. 아가씨들 틈에 앉아 찍어도 봅니다. 향기가 납니다.
잔시로 출발하기 위해 또 한 번 우리는 기나긴 여행에 대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오후 4시 쯤 바라나시 졍선 역에 도착합니다.
잔시까지는 15시간 걸린다고 합니다. 17시 10분발 기차인데 어쩐 일인지 이번엔 기적적으로 정시에 와 있기에 일단 탑니다. 그러나 출발은 18시 35분…
가다가 쉬는 일만 없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라나시여 안녕!
갠지스여 안녕!
신을 믿는 그들이 행복하길 빕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윤회의 업을 끊는 것 그리하여 태양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아닙니까?
윤회를 믿지만 윤회의 사슬을 끊고 싶은 힌두교도들, 이 사실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윤회의 업보를 따르는 것인지 끊고 싶은 것인지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 행복을 목표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신과 의사는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행복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1.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 것
2. 행복은 자신이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
3.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
4. 긍정적 사고를 가지는 것
5.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는 것
6. 행복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인도인들에게 행복은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길 바랍니다. 갠지스강에 뿌려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는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갠지스강은 그래서 죽음의 강입니다 생명의 강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이룰 꿈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1월 21일
9시 30분에 일어나니 열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습니다.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제일 위층은 고개를 들 수도 없기에 창밖을 볼 수도 없습니다.
어제 저녁도 오늘 아침도 굶고 있습니다. 나야 굶는 게 이력이 났지만 한 끼만 굶어도 세상 큰일 난 것 마냥 호들갑 떠는 사람들은 참기가 무척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만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라 언제 도착하느냐가 더욱 큰 문제입니다. 그래도 언제 쯤 도착할 지 아무도 모른 채 열차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책이나 열심히 읽는 수밖에 달리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후 1시에 잔시에 도착합니다.
오르차까지 40분간 오토릭샤를 타고 옮깁니다.
fort view guest house의 허름한 방을 구해 두고 open sky 식당에서 볶음밥을 시켜 먹습니다. 배가 무척 고팠습니다.
숙소에서는 정말 성이 보입니다. 식당에선 정말 하늘이 보입니다.
오르차는 작은 마을입니다. 오르차의 매력은 고성들과 한적한 시골분위기에서 오는 여유로움으로 전형적인 인도마을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가지에는 아름다운 '벳트와' 강이 흐르고 있으며, 작은 폭으로 흐르는 벳트와 강을 건너면 아름다운 숲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더럽고 먼지 풀풀 날리는 인도에 깨끗한 강이 흐른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멀리 보이는 풍경들이 편안했습니다.
이곳이 사람 사는 것 같은 풍경입니다.
작은 마을인 것은 분명하지만 4~5백 년 전만 하더라도 대단하였던 도시였다고 합니다. 악바르 대왕의 아들 제항기르가 1602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도망친 곳이 이곳입니다. 분델라 왕조의 수도였던 이곳의 당시 마하라자가 제항기르를 숨겨주는 도박을 합니다. 3년후 악바르가 죽자 제항기르가 황제로 등극합니다. 그리하여 제항기르의 후광을 업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그 당시 수십 개의 궁전이 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입니다. 샤 자한이 왕위에 오르자 찬밥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샤 자한에게 박살이 되고 22년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맙니다.
반역을 꿈꾸었던 불온한 땅, 오르차는 한 때의 영화가 사라지고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raja mahal(라자마할)은 관리가 부실하여 허름하지만 기본 골격은 웅장하고 꽤나 큽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한 오르차는 카주라호에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지나는 사람들이 방문하곤 합니다. 인도의 숨겨진 진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르차는 인도의 아주 작은 도시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힌두교 사원은 너무 시끄럽고 사람들로 붐비고, 자항기르마할이나 라자마할은 그리 특색 있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시골 풍경을 보며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았습니다. 멀리 시골 풍경이 평화롭습니다.
raja mahal 외곽을 트레킹합니다. 시골 풍경은 세상 어디에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딴 집도 보이고 작은 마을도 보입니다.
sky view라는 친절한 부자(父子) 가게에서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배를 채웁니다. 맥주값을 깎아 주었습니다만 음식은 별로입니다.
부산 여대생 두 명이 옆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남부를 거쳐 와서 바라나시로 갔다가 네팔 로 넘어가려 한다고 합니다. 40여일 여정이라 합니다.
수제비 얻어먹고 맥주 한 잔 씩 권해봅니다.
숙소에 들렀다가 sky view에 2차하러 또 갑니다.
이곳 맥주는 킹 피셔입니다.
650cc 1병에 2천1백 원정도 합니다.
1월 22일
DiDi's house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여자가 인도남자랑 결혼하여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DiDi는 힌두어인데 sister라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아마 이곳을 여행하러 왔다가 이곳에 반해 눌러 앉은 모양입니다.
몸이 많이 뚱뚱하지만 마음씨가 좋아 보입니다. 남편도 착해 보입니다.
다시 트레킹을 합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라마교 박물관을 발견하여 들어가 봅니다. 안내인이 재밌게 설명을 곁들어 주더니 나올 때 사례를 요구합니다.
자전거 하이킹 벳트와 강변에 앉아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과 여인들이 몸을 씻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적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open sky에서 마지막 점심식사를 합니다. 또 볶음밥을 먹습니다.
2시 오토릭샤를 타고 잔시로 출발합니다.
3시 20분 기차입니다만 6시로 딜레이 됩니다. 또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실제 거리는 200여 km가 채 안 됩니다.
대합실도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무작정 기다립니다.
인내란 이런 것인가?
이렇게 해야만 인내를 배울 수 있을까?
일고장락(一苦長樂)이 되려면 기다리는 낙(樂)이 있어야 하는데 낙(樂)도 희망(希望)도 없는 무의미한 고행(苦行)이 아닌가 생각에 빠집니다.
플랫폼도 갑자기 바뀝니다. 이 때 멍청하게 있다가는 기차까지 놓치고 맙니다. 7시 45분에 기차는 출발합니다.
1월 23일
새벽 1시에 아그라(AGRA)에 도착합니다.
미친 짓입니다.
여행 시간의 반을 장소 옮기는 데 소모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깝습니다.
새벽 3시에 허름한 방을 구했습니다. 모든 게 열악한 방입니다.
배낭여행답게 두 팀으로 나누어져 정방환 샘과 둘이서 다니기로 했기에 9시에 나와 우리만 숙소를 버스주차장 옆에 잇는 사쿠라호텔로 방을 옮기고 아침 겸 점심을 대충 때웁니다.
한 서울 청년을 만납니다. 30일째라고 하는데 내일 서울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오늘이 인도의 마지막 밤이라고 합니다.
회사에 1달간 휴가를 내고 왔다고 합니다.
'즐거운 인생'입니다.
바라나시가 좋아 짧은 기간 중 열흘을 보냈다고 합니다.
인도 악기도 하나 사서 들고 다닙니다. 북 같은 것입니다. 바라나시 만수네 가게에서도 한국친구들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내 색소폰은 혼자 울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는 우리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입니다.
안개 때문에 내일 아침 8시15분 기차가 제대로 안 갈까봐 어쩌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더니, 결국 오후에 타즈마할만 보고 밤 버스를 타고 델리로 가야겠다고 합니다.
우리 뒤편에 아가씨 둘이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여대생들은 두 명씩 붙어 다닙니다. 남학생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둘이 붙어 다니는 경우는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파테부르 시크리로 갑니다.
페허의 도시인 파테부르 시크리를 보고 싶습니다.
무굴의 3대왕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14년간 수도로 쓰던 곳이었는데 물 부족으로 다시 천도를 하는 바람이 유령의 도시가 되어 버립니다. 원래 있던 도시가 파테부르, 새로운 도시가 시크리입니다. 멀리 옛 시가지가 보입니다.
황량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여기저기 폐허의 건물이 보입니다.
소똥을 빚는 모습도 쌓여 있는 똥답도 이젠 익숙하고 나무 지고 가는 여인들의 모습도 정겹습니다.
사원 안에 묘당이 있습니다.
이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리석을 투각한 창입니다. 빛이 부서져 반짝이는 엷은 유막을 형성하니 투각 창은 지상의 건축물이 아닌 천상의 건축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들 묘당은 창을 낮게 비껴 놓아 빛이 항상 비껴듭니다. 그렇게 비껴든 빛은 관 위에 떨어져 신비한 느낌을 줍니다. 이 묘당은 누구나 성자의 무덤에 소원을 빌면 하나는 꼭 들어 준다는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무슬림식 모자를 쓰고 들어가야 합니다. 묘당 안에는 화려한 대리석 제단 위에 색색 천으로 씌워 놓았습니다.
사원에서 만난 녀석은 닳고 닳아 보였습니다. 속도 모르고 친절함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진도 찍어 주고 설명도 해줍니다. 투각창에 빨간 색실로 매듭을 매면서 소원을 빌어도 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복을 받으려면 헌금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 복을 받지 못하고 나옵니다.
결국 수고비를 뜯깁니다. 물건도 거의 강매로 팝니다. 비싼 대리석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도에서의 친절은 대부분 사례를 요구합니다.
아그라로 돌아와 타즈마할(TAJ MAHAL) 외곽을 돌았습니다. 타즈마할은 무굴황제 샤 자한이 죽은 아내를 위해 만든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걸 짓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유폐를 당해 아그라 포트에 갇혀 있었습니다. 타즈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8년간 살았으니 나름대로 행복한 말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란 출신의 이사칸이란 건축가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연인원 2만 명 이상이 22년간에 걸쳐 지었다고 하니 고생께나 했습니다. 타즈마할이 완성된 후 건축가의 눈을 멀게 하고 손발을 잘랐다고 합니다. 다시는 재현하지 못하도록 그랬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난 이 곳을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맥주와 탄두리 치킨을 사서 들어와 인도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정방환 샘과 맛있게 마십니다. 이곳 맥주는 잘 취합니다.
1월 24일
아침에 타즈마할 들어갑니다.
너무 비쌉니다. 그런데 비싼 값어치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혼자 들어가게 하고 델리행 기차표 구하러 가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습니다. 둘이 떨어지게 되면 잘못하면 천애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왔으니까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호수의 물은 빠져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가 없습니다. 타즈마할이 물에 들어도 물은 끄떡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물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야무나강에서 보트라도 탔으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갠지스강의 최대 지류인 야무나강은 델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아그라는 중화학공업도시로 변모해 그 역사적 깊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1시 30분 쯤 기차역으로 가서 입석표를 삽니다. 3시간 30분이면 간다고 합니다. 200km이니까 거꾸로 매달아도 가겠지 싶었습니다. 62루피면 1400원이 채 안 됩니다.
2시간을 기다렸다가 1시 30분에 기차를 탔는데 이 기차가 원래 8시15분 출발예정이었다고 하니 이제껏 기다린 사람들은 이미 초죽음상태입니다.
인도에서 기차여행은 미친 짓입니다.
인도 기차의 등급은 1A, 2A, 3A, CC, FC, SL, II 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등급은 뒤에서 두번째 SL(Sleeper Class)로 배낭족들이 주로 이용한 등급입니다.
침대칸이라며 온갖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나마 SL까지가 내 자리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고 마지막 등급인 II(Second Class Seat)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과 혼동의 끝을 볼 수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가격은 서울에서 부산가는 정도의 거리는 500원 정도로 메리트가 있지만 이처럼 짧은 거리가 아니라 10시간 이상의 이동에는 절대적으로 말리고 싶습니다. 돈이 좀 있다면 2A까지 권합니다. 그 이상을 탑승하려거든 비행기를 타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아그라에서 델리는 II칸에 타야했습니다. 하지만 SL칸이 너무 많이 비어 있어 타고 있었습니다. 사실 II칸이 어디쯤 있는지 잘 모릅니다. 빈 자리 아무데서나 한 숨 잡니다.
검표원에게 들킵니다. 160루피 벌금을 내든지 칸을 옮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쫓겨납니다. 자리도 없는 제일 싸구려 칸에 들어갑니다. 밉지 않은 인도여자가 앞에 앉아 있습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가는 중입니다. 애를 먹이려는지 물을 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가지고 있던 물통을 건네주었더니 거절합니다. 여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갓 난 애랑 입을 맞추고 웃는 모습은 여느 모자랑 같아 보입니다. 도중에 세 번이나 젖을 먹입니다. 살짝 내비친 가슴은 통통하게 예뻐 보입니다. 아직 나이 어린 신부입니다. 그래도 삶에 찌든 모습이지만 그래도 눈은 맑아 보이고 모성애가 깊어 보입니다. 애와 입맞춤을 자꾸 합니다. 도대체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는 길일까 궁금합니다.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눈이 몇 번 마주칩니다. 인도에서 처음 보는 정겨운 모습입니다. 아비규환 틈새에서 8시20분까지 이 모습을 보면서 도착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골드인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밥 먹으러 나갔다고 합니다. 우린 스탁호텔에 짐을 풀고 한국인 배낭족들로 붐비고 있는 인도방랑기에서 밥을 먹습니다. 킹피셔 4병 300루피에 시켜 먹고 잡니다.
1월 25일
방을 골드인으로 옮겨 마지막 날 합류하여 지내기로 되어 있습니다.
내일 아침 5시30분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닫혀 있어 구경을 포기하고 선물가게나 가기로 합니다. 인도정부 특산품점(센트럴 엔토리움)으로 가려고 나섰는데 주정부 특산품점으로 데려가려는 녀석들이 자꾸 나타납니다. 그것도 커미션을 받아먹기 위해 사설 주정부 특산품점으로 데리고 갑니다. 우린 세 번이나 유혹을 뿌리칩니다.
릭샤 타면 1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1시간 30분 걸어 인도정부에서 운영하는 특산품점에 도착하였습니다.
품질이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값도 그다지 비싼 것 같지 않습니다.
실크와 다르질링 차를 삽니다.
품질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다르질링 차를 삽니다. 생산량이 적어 비싼 편입니다.
다르질링은 해발 2200m인 고산지역으로 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세계적인 차 생산지로 또 휴양지로 개발한 곳입니다.
중국 안후이 성의 기문(keemun), 스리랑카의 우바와 함께 다르질링은 세계 3대 명차입니다.
차는 녹차, 홍차 외에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분류는 발효의 정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발효되지 않은 차 즉 덖거나 찐 차로는 녹차가 있는데 주로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발효시킨 차에는 백차, 포종차, 오룡차가 있는데 중국에서 거의 생산하고 있습니다.
거의 다 발효시킨 차(85%)에는 홍차가 있고 인도, 스리랑카, 아프리카, 중국 등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처리 후 발효시킨 차(즉 후(後)발효차)는 황차, 흑차가 있고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이(普洱)차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들이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발효한 흑차의 일종입니다. 여러 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푸얼현(普洱縣) 차시장에서 모아 출하하기 때문에, 푸얼차(普洱茶)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푸얼차는 운남 대엽종 차잎을 이용하여 햇볕에 건조시켜 만든 모차(母茶)를 이용하여 만든 차를 말하지만, 원료의 부족으로 베트남, 타이 등지의 차엽으로도 만들고 있으며, 이런 차를 변경보이차라고도 합니다. 대부분 이것을 비싼 돈 주고 사가지고 옵니다.
좋은 보이차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원료 :윈난 성의 대엽종 차엽이어야 함.(인도의 아삼지방이 원산지인 15m까지 자라는 차나무)
2. 공법 : 햇빛으로 찻잎의 수분을 제거하는 쇄청건조(曬靑乾燥)공법을 거쳐야 함.
3. 발효 : 정상적인 발효가 진행된 후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되어 온 것이어야 함.
녹차는 그대로 녹색이어서 GREEN TEA라고 하고, 홍차는 발효 후 검게 변하므로 BLACK TEA라고 합니다. 그런데 흑차는 영어가 없습니다. 영어권 눈에는 모두가 BLACK TEA인지 모릅니다. RED TEA라는 것은 남아프리카 차에 따로 붙은 이름입니다.
녹차는 연한 녹색빛이고, 홍차는 붉은색 혹은 오렌지색을 띕니다.
종류에는 스트레이트 차와 블랜디드 그리고 가향차가 있습니다. 양주와 같습니다.
코넷 플레이스를 다시 구경합니다.
지하상가는 5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살 것도 없습니다.
인도방랑기에서 저녁과 맥주를 먹습니다.
맥주를 자주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하루 4~5병 마십니다.
1월 26일
8시 비행기입니다.
비행기조차도 실망을 시킵니다. 도대체가 모를 일입니다. 아무도 화를 안 내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12시에 이륙을 합니다. 4시간을 출발도 하지 않는 비행기에서 기다리는 심정을 아십니까? 아무도 설명을 해 주지 않습니다.
'중국을 읽는다'를 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 중국을 가야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중국의 문화유적에 관한 책입니다.
인도는 힘든 여행입니다.
인도의 시간으로는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홍콩에 도착하니 늦습니다.
홍콩은 옛날에 갔던 인공도시 인위적인 도시 싱가포르보다 훨씬 못해 보입니다. 포르투칼 식민지였던 마카오로 가려면 배를 타고 1시간 가야하는데 마음 맞추기가 쉽지 않아 포기합니다. 포르투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한참 뒤로 미루어집니다.
마카오는 배를 타고 갑니다만 시간이 없을 것 같고, 심천은 같은 중국땅이면서도 비자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살 수가 없습니다.
침사초이에서 이틀 잡니다. 침사초이는 홍콩에서 가장 번화가입니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방을 물어 찾아 갑니다.
방이 조그만 합니다.
앙증맞을만한 침대 두 개가 방안 가득합니다.
8천 원짜리 방에서 8만 원짜리 방으로 바뀝니다.
밤마실을 나갑니다. 몽콕야시장에 가봅니다. 곳곳에서 짝퉁을 권합니다.
맥주 한 잔 하고 잠을 청합니다.
1월 27일
바닷가도 형편이 없습니다. 남일대보다 못한 곳을 만들어 놓고 손님을 끌어 모읍니다.
아침에 태평산 정상을 갑니다.
홍콩섬 최고도에 위치한 이곳은 각종 홍콩영화에서 야경장면을 촬영하는데 단골로 이용되는 곳입니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본 홍콩의 야경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개의 지역이 바다로 나뉘어져 있고, 그 사이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과 정크선들, 이곳에서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일상에서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백만불짜리 야경 감상이라는 이 빅토리아 산정을 아침에 가니 비싸기만 하고 볼 게 없습니다. 게다가 안개까지 가득합니다. 이런 데를 왜 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영부영 스치게 되면 다신 올 수가 없습니다. 다행이 픽트램을 왕복으로 안 끊었기에 내려오는 산책로를 이용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숲 내음 가득한 산책로엔 조깅에 열중인 현지인들도 많습니다.
트램은 거의 45도 되는 급경사를 오르는데 놀이기구를 탄 것 마냥 신이 그렇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빅토리아 피크에 오르면 발아래 홍콩의 전경이 펼쳐집니다만 우리는 안개만 볼 수 있습니다.
태평산 정상에 위치한 피크타워는 시내전경을 구경하기 좋은 테라스와 유명인들의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는 마담투소(Madame Tussauds) 밀랍인형 박물관이 있습니다. 시내전경은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마담투소는 너무 비싸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밀랍 인형관을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 홍콩에서 만날 수 있지만 어른들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홍콩과 세계 유명 영화배우, 가수, 정치가 등 인사들의 밀랍인형이 100여점 이상 전시돼 있어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은 재미있어 할 것 같습니다. 한류스타 배용준도 웃는 표정으로 서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홍콩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도시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불빛이 도시 전체를 천의 빛깔로 물들입니다. 빛을 머금은 도시의 거리는 현지인과 이방인들로 뒤섞여 늘 분주합니다. 밤의 홍콩은 화려한 얼굴 뒤에 감춰진 수수한 본모습을 드러내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며 사람들을 반깁니다.
빅토리아항구의 빛의 교향악(symphony of light)은 반짝반짝 빛나는 홍콩 야경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빅토리아항구와 컨벤션센터, 제각각 다른 수많은 빌딩이 일제히 쏟아내는 화려한 불빛은 홍콩의 밤이 왜 홍콩여행의 첫머리를 장식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홍콩의 야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만 이 역시 사진기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안개 때문입니다.
홍콩 스타의 거리는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시작으로 빅토리아항을 끼고 홍콩 문화센터까지 뻗어있는 약 400m의 거리입니다. 홍콩섬이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전경에 유명한 홍콩배우들의 핸드프린팅으로 바닥이 장식되어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의 동판을 찾아 기념촬영을 할 수 있습니다.
맥주를 사다 먹었습니다.
방이 좁아 제대로 판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일본 호텔 같습니다.
밖으로 나와 한국식당에 갑니다.
두루치기와 소주를 먹습니다.
1병에 11000원 정도 하는데 정방환 샘과 두 병 마셔 버립니다.
1월 28일
KAL은 정확하게 출발하여 제 시간에 도착합니다.
우리나라에 인도의 탈 것들이 온다면 만날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10분만 늦었다간 시끄러워 못 사는 나라입니다.
여유 있는 인도가 나은지 빨리빨리 사는 한국이 나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문화는 그 나라의 풍토나 습성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쉽사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세상도 있다는 정도는 알았습니다.
살아가는 기준, 삶의 준거도 다른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공존하며 살아가는 게 신기한 것입니다.
인도를 다녀 온 사람들 중에는 다시 가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공짜라도) 안 간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공짜라면 갑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히말라야는 가야합니다. 인도의 히말라야가 될지 티벳의 히말라야가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티벳보다는 신장이 훨씬 좋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 집니다.
마음껏 드시지 못한 정방환 샘께 미안한 마음입니다.
위가 좀 줄었을 겁니다. 좀 있으면 고마워할 지 모릅니다. 나도 체중이 좀 줄었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좋습니다. 내일 중국으로 떠납니다.
2010년 1월 31일
인도방랑기를 쓰다 화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