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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 불교, 철학
 
 
 
카페 게시글
사찰순례기 스크랩 보원사지, 마애불
山中幽人 추천 0 조회 43 08.04.19 22:0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보원사지, 서산마애불


  고란사지는 정식으로는 보원사지이다. 94년 어떤 가을날 운전 연습을 하느

라 운산방면으로 갔다. 처음 차를 샀고 아직 연수는커녕 핸들도 잡아보질 못

했었으니 좀 떨렸다. 이 곳으로 가는 길에는 다니는 차가 별로 없다. 그래서운전 연습으로는 안성 맞춤이다. 그때 처음으로 용현리 계곡의 안쪽을 둘러보게 되었다. 가는 길은 가을 빛이 완연한 시골풍경이 죽 펼쳐져 있어 그림 같았고 길가에로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어서 왠지모를 행복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가야산 (충남 서산임-주변에 남연군묘와 수덕사, 개심사가 있음)자락에는 예전부터 99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10여개만 남아있고 (수덕사, 개심사, 천장사, 일락사, 보덕사.....) 오히려 저수지가 더 많이 생겨, 골골마다 저수지여서 오는 사람들마다 '와! 여기는 스위스나 북구처럼 호수가 많구나'라고 하며 좋아한다.

 

 

 

 

그리고 서산목장이 있어서 한층 유럽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목장을 볼때마다 꼭 산이 머리를 깍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저수지들을 볼때마다 그 때문에 없어진 계곡이 너무 안타깝고 그리고 각마을로 흘러가는 개울이 없어져 버리거나 물이 말라버린 것이 억울하다. 한데 가야산 주변은 평야이면서도 큰 강이 없어 용수를 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저수지를 만들어 계곡물을 저장하는 수 밖에는 없다. 전에 논이 많지 않을 때는 저수지가 필요 없었겠지만.(여기 저수지는 대부분1940년 이후에서 70년까지 생겼다). 하지만 그 덕에 고란사 가는 길 옆에도 가야산에서 제일 큰 고풍저수지가 길을 따라 펼쳐져 있어 드라이브길 또는 하이킹, 자전거 여행등의 길로는 최고이다. '부분과 전체'(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저)라는 책에서 저자는 유년 시절부터 친구들과 도보나 자전거로 시골과 숲을 여행하며 토론하고, 함께 연주도 하고, 밤에도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서 역시 광범위한 학문이나 생활문제등을 토론 하는 것을 보았을때 부러움을 금치 못했었는데 바로 여기 용현리계곡은 그런 곳으로 개발하여, 음식점이나 유흥가가 생기기 보다는, 숲과 야영장을 조성하여 청년과 소년들의 그런 심신수련장으로 썼으면 가장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한 코펜하겐학파가 양자역학을 세운 이면에는 그런 자유로운 토론과 자유스러운 학문의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독일이 2차대전 이전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선진국이었던 것도 그런 분위기의 덕이었지 지금의 한국처럼 놀고 먹고 마시고의 분위기거나 자동차로 그냥와서 보고 떠들고 하다가 휙 가버리는 그런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선진국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하다. 그렇지만 과연 어떤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할까? 내가 미친 녀석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처음 생각에는 절터가 으레 그렇거니 생각하며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다가 갑자기 옆의 밭을 보았는데 '어! 저게 뭐야.' 그곳엔 당간지주, 탑, 부도등이 여기저기 밭에 넓게 자리하고 우뚝 서 있었다. 절로 친다면 당간지주가 서있는 곳은 큰 마당이어야 하고(왜냐면 당간지주는 행사때 많은 사람이 모여 예불을 볼 때, 대웅전이나 건물에는 많은 사람을 수용하질 못하니, 넓은 마당에서 예불을 보기에 그때 큰 괘불을 거는 용도로 쓰인다) 그 주변에는 건물이 둘러싸고 있을 것이었다. 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것인데 그렇게 친다면 이절의 규모는 한국에서 몇 번째 안에  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계곡입구에 있는 서산백제마애불(국보)과 물그릇이나 그런 용도로 쓰인 석조를 보면 거대한 사찰이었음이 틀림없다. 이곳은 백제나 고려의 중심지는 아니었고 변방이며, 이렇게 깊은 산골인데 어떻게 저렇게 큰 절이 들어섰을까? 또 백제시대에 누가 이런 곳에 절을 세우려 했었을까?

  차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는데 아! 여기서도 내  마음을 아프게하는 것들

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은 밭으로 개간되  경작이 되고, 그 과정에서 주춧돌,

기단등등 모든 유물이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민가의 주춧돌이나 계

단은 모두 이곳의 유물을 줏어다가  썼다. 왜 이곳을 발굴을  안하나. 나중에 어떻게 저것들의 자리를 확인 할려고. 절들도 쓸데없이 크게 짓는데 열을 올리질 말고 오히려  이런 유적발굴에 힘쓰고  새로 지으려거든 이런  곳을 잘 발굴하여 복원하는 것이 여러면(세속적인면-돈관광, 기능적인면,  역사적인면등에서 훨씬 좋을텐데)에서 좋을 것인데...   하긴 보원사가 지어지기 이전인 500년 경에는 이곳도 그저 사람들이 저렇게 농사를 지었거나 아님 산토끼, 노루가 뛰어노는 곳이었을 것이다. 근데 인간이 나중에 만들어 세운 창조된 유적에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애초 없었던 것인데 한번 만든 후에는 그것에 집착한다. 즉 유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언젠가 설악산 가야동계곡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때는 가을, 계곡은  온갖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의 단풍이 눈이 시리도록 화려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덮고 있었다. 나혼자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곳은 백만년 전이나 천만년 전에도 이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 때는 누가와서 이 풍경을 보았을까? 猿人들이 물마시러 왔다가 보고는 넋이 나갔을까? 그리고 또 반달곰이나, 사슴, 노루, 산토끼 심지어는 호랑이도 목이 마르면 물마시러 왔다가 가곤 했을 것이다. 그들도 이 모습에 반하여 꿈에 잠겼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곳을 단지 계곡이상으로 여기질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지금 이모습에 반해 이렇게 감탄하고 있는데, 그리고 인간의 손에 다른 계곡처럼 훼손됨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도 그럴까?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시각이란 우물속에서 보니 그럴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문명에 젖어 자연에서 멀어져가니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속을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던 구석기 시대에는 자연을 감탄의 대상으로 보질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는 나도 자연의 한 부분이지 떼어서 생각을 못했을 테니까.

  자연은 그저 늘 그렇다. 아니 전체는 늘 같은 것이다. 우리의 유물이 일본에 가서 있는데 억울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분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2000

년 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사이 살던 사람들이 그저 돌이나 나무를 주워다 깎고 다듬고 해서 사용하다가 그들은 죽어갔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남겨진  것들은 유용한  생활이라는 면에서는 쓸모없는  물건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뒤에 나타나는 인간들은 그것에 집착하고 목숨을 건다. 이미 그런 것이 가치가 있다고 인간들이 규정을 지었고, 돈에 관계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도를 찾는 마-음에서는  그런 마음만큼은 버려야한다(실제에서는 찾아오려고 애써야하지만) 그런 무의미한 것에 집착한다면 영원히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 바로 그런  생각을 끊고, 집착을  끊고 하라는 경전의 말, 싣달타왕자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절이 복을 구하는 대상은 아니고 부처상이 구원을 주는 신은 아닌 것이다. 이미 이 자연을 보고 자라나는 우리의 마음에는, 선조가 깎아서 세웠던, 돌부처의 소박한 모습이 나타내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오히려 그런 물질에 대한 마음이 그런 유물에서 느껴야할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보는 것을 가로 막고 있다. 그러니 바로 자연을 느끼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유물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나 않을까. 요즘의 불교도 그런 마음을 찾지 못한다면 이미 죽은 것이다. 다른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라면 그것이 있어야 할 필요가 과연 존재할까?

  부도가 서 있는 잔디밭에 앉아서  저앞에 보이는 넓은 계곡을  바라보자니 1000년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들이나 나나 이곳에서 태어나 똑같이 가야산을 바라보고 자랐고 커가면서 첫사랑도 해봤고 살려고 애도 써봤고.... 그러다가 그는 여기에서 불문에 들어와서 청소와 밥짓는 것을 하였을 것이고, 어떤 때는 힘들고 또 사무치게 외로워, 또는 첫 사랑의 그리움을 못 잊어 도망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얻고, 수도에 전념하였을테지. 그러다보니 그때는 이미 늙어 있었을 테고. 그렇게 한평생을 보내다가 죽으니 화장하여 사리다 뭐다하여 부도를 세워주고....

  하지만 무엇하랴. 이 부도를. 오히려 사람들의 도를 향하는 마음에 걸림돌만 될것을. 유물에 집착하는 마음도 이와 같겠지.

  당간지주와 탑 사이에는 큰 개울이 흘러간다.  아마 예전에는 이곳에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려가보니 어! 석축이, 엄청 큰 돌을 깍아서 만든 석축이 일부분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 아래 갈대밭에 앉아보니 인공적인 것과 계곡등은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흰구름 몇조각 흘러가는 하늘만이  보였다. 아! 바로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완벽하게 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동자승은 너무 외로울 때는, 아님 엄마가 그리울 때는 여기에 와서 누워서 하늘을 보며 울었겠지. 아님 젊은 행자승도 여기 누워 구름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고. 신도중에 보았던 젊은 처자를 그리기도 했을 것이고. 아님 첫사랑을 그리워하여 구름을 보며 상념에  잠겼을까? 정말 맑은 물만이 졸졸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그래 이것이 秋水(가을물은 맑다)의 본모습이구나. 그래서 장자도 이런  맑은 물을 보면서  '추수' 한 편(장자 외편중의 하나)을 썼겠구나. 거기서 그도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남을 바라보고 강요하는 것을 비꼬았지.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곳을 뒤로하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느껴졌다.  이제 나도 젊음이 많이 갔구나. 아직도 사랑하고 싶고 꿈같은 행복을 갖고 싶지만 나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하니 그리고 앞날을 생각하면.... 한숨만이 나온다.

      1994. 10. 2.

     


정말이지 안타깝다. 이 보원사지에는  두집의 초가집이 있었다. 그중  한채를 어떤 떠돌이 털복숭이 중이 사들였다. 그리고  맨처음 한짓이 포크레인을 불러다가 이리 파고 저리 파며 유적사이로 길을 내고 덤프트럭으로 흙을  사다가 그위를 덮어 깔았다. 그리고 초가집을 요상하게 (남들은 좋다고 한다) 무슨 토굴이라나 하옇튼 전원카페 모양으로 바꾸고  거기서 산다. 발굴도 되기 전에, 천년동안 파헤쳐진  것보다 불과 한달사이에  파헤쳐진 것이  더 크다.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자기의  그 안목과 유적을 아끼는  마음을. 돈이 모일 때 언젠가는 이곳에 자기 절을 근사하게 짓는단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을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동안 수십번 다니며 안내하고 설명하고 했지만 그모습을 다시는  보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  이제 나도 벗어버리는  거야.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을. 머리로는 알고 이야기하면서 현실로는 집착하던 것을.

  이제는 그곳을 안간다. 다시는.

 

1998,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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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4.19 22:12

    첫댓글 제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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