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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기행과 원자력 안전 체험의 앙상블
김영훈(대전문인총연합회장)
우리 일행이 김동리․ 박목월 문학관을 찾아 경주로 떠난 것은 지난 9월 스무이틀 날이었다. 우리 대전문인총연합회(이하 대전문총)는 전에도 가끔 문학기행을 했다. 해마다 우리 한국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기시고 떠나신 시인․작가들의 문학적 향기를 찾아 그분들이 태어나 유년을 보내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사색하고, 결단을 내렸거나 직접 작품의 배경이 되었곳, 그리고 소재가 되었던 사건을 추적하며 곳곳을 순례했다. 이러한 문학기행은 선배문인들의 흔적을 더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학에 대해 심도 있게 점검을 하고, 성찰하면서 새롭게 마음을 다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 기행이 퍽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
전에도 인근의 한용운 생가, 정지용 문학관를 비롯해, 이효석, 박경리, 서정주, 박인환, 김유정 문학관 등 여러 선배 문인들을 찾아 순례했다. 그 문학관들을 둘러보면서 바로 그 문인의 품에 안겨 한국문학의 줄기를 탐색하면서 그들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나 개인적으로도 잠시 휴지(休止)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끄집어내어 창작의 길로 새롭게 매진하는데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며 자신을 충전해왔다. 그래서 문인들은 작가․시인들은 한해에 한 두 번씩 문학기행을 한다.
(사진 한 장 삽입- 원자력안전연구원 사진)
그런데 이번 우리의 문학 기행은 아주 특별했다. 문학체험의 기회를 원자력안전체험 연구원에서 제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대전은 우리나라 과학의 메카이다. 대전에 거주하는 우리는 대덕 밸리에 산재해 있는 국내 유수한 과학 연구소를 평소에도 자주 들를 기회가 있다. 그만큼 대전은 우리나라 첨단과학의 발전의 산실로서의 역활을 하는 곳이 많다. 그러한 맥락에서 원자력 발전소도 대전에 자리하고 있는 거고, 그에 따른 원자력 안전에 대한 요구도 강조되면서 체험행사를 가진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일년 내내 그곳 원자력안전체험연구원(이하 연구원)에서는 원자력 안전을 위해 국민들에게 직접 원자력 발전소에 가서 견학을 하는 기회를 준다. 그런데 그 때마다 프러스 알파 행사로 문화체험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중요한다. 바로 그 기회를 우리가 잡은 것이다. 원자력 안전체험도 하고 문학기행도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호기회가 온 셈이다.
우리는 주관하는 쪽의 안내와 인솔을 받으면서 그날 10시쯤에 먼저 대덕 밸리에 위치한 연구원에 도착했다. 역시 대전에 거주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랄까? 회원 일행 41명은 가슴을 설레면서 조금은 들뜬 채로 연구원 현관 앞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조두현 담당자께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조두현씨는 연구원에 근무하는 분으로서 우리 대전문총 회원들이 이번 체험 여행을 직접 주선해주신 분이었다. 그는 시인기도 했다. 나는 회장으로서 김용재 명예회장님과 함께 그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숲속에 들어앉은 연구원 환경은 매우 쾌적했다. 그러나 산책을 할 시간은 없었다. 출발에 앞서 조두현씨의 원자력 안전에 대한 사전 교육이 바로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귀를 귀울이며 경청을 해야만 했다.
이어서 또 한 분의 강사인 **** 박사님이 원자력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금은 전문적인 영역이라 생소하게 들렸다. 오히려 우리들 마음은 성급하게 벌써 경주를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출발하는 순간에도 ‘원자력은 안전하다’ 는 말씀 하나만은 꼭 귀에 매달어야 했다. 조두현씨의 강조에 또 강조를 하는 열의는 탄복할만했기 때문이다 열 번은 더 이를 강조하고 있었다. 하긴 이 체험의 목적이 바로 원자력은 우리에게 유익한 에너지 자원이며, 생각보다 아주 안전한 미래자원이라는 걸 홍보하는 것이 체험의 목적이기는 했다.
(사진 한 장 삽입 -기념사진 촬영 모습)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경주를 향해 출발을 했다. 원자력 연구소 직원이 한 사람 동승을 했다. 조아라씨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상량하고도 미소를 짓는 얼굴로 우리의 여행을 도왔다. 싱그러움이 넘치는 아가씨였다. 예의도 매우 바른 아가씨였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밀지지 않고 비교적 소통이 원활해 우리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가을 하늘까지도 청명했다. 모두들 여행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원자력 안전체험도 하고, 김동리 박목월의 문학 세계에도 깊숙이 안겨야 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충족해야 하는 여행의 배합이 부담감으로 왔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여행이라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둘 다 충족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조금은 긴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회장으로서 어필을 하지 않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정하고, 컨트럴은 하되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한 리더싶을 발휘하면서 회원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기로 했다. 그들에게 원자력 안전체험도 하고 문학적인 열정과 무뎌진 감성을 일깨워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게 하는데 이 여행의 목적이 있음을 인식해본다.
물론 그동안의 준비과정은 만만하지는 않았다. 여행이라는 즐거움 때문에 조금쯤 이완될 수도 있는 마음이지만, 나는 회장 자격으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문학 기행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랬다. 이 번 여행을 처음 기획하고, 연구원 측과 협의를 시작하면서 스케쥴을 확정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41명의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이나 탑승하기 전까지의 섬세한 준비 과정은 결코 녹록치도 않았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버스는 고속도로를 잘도 달리고 있었다. 추풍령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을 뿐 버스는 경주를 향해 한 숨에 달려갈 듯이 서둘고 있었다. 그러나 경주가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걱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점이다. 월요일은 대한민국 문학관이 다 쉬는 날이다. 금방 여행 일정에 차질이 왔다. 조아라씨와 협의를 했지만 문학관 탐방을 내일로 미루면 월성 원자력 발전소 안전체험과 겹쳐 시간상 차질이 온다는 것이다. 문학 기행은 월요일을 피해야 한다는 아주 상식을 잊은 것이 우리의 일정을 가로 막았다. 아즈 사소한 망각으로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 때 김용재 명예회장의 퍼뜩이는 머리로 예지를 발휘했다. 동리 목월 문학관장인 장우익교수님과의 친분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제안이었다. 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몇 차례 통화로 결과는 생각 밖으로 호전되었다. 마침내 오케이였다. 장유익관장님과의 막역한 친분으로 문제는 쉽게 해결 된 것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이는 김용재 명예회장님이 아니었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진 한 장 삽입- 버스를 배경을 찍는 사진)
우리 일행이 경주에 도착해 동리 목월 문학관에 들어섰을 때 이미 장관장님은 대기를 하고 있다가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마침 경주문학축제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도 김용재 명예회장님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급히 왔다는 이야기였다. 직원도 둘이 나 일부러 나와 우릴 맞아 주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국면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우리 회원 41명은 그저 즐겁기만 한지 모두들 만족했다. 그들은 모두 환한 얼굴이었다. 일행은 서사문학의 큰 줄기이신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문학의 큰 산맥인 박목월에 취해 두 분의 문학 자료를 관람하며 두 큰 줄기의 문학적 산맥에 올라 희열감을 느끼는 모습들이었다. 잠시 예서제서 스마트폰을 눌러대는 소리들로 법석이다가 우리는 영상홍보실로 바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장유익관장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동리 목월에 대한 관장님의 해설은 분명하고도 감동적이었다. 바쁜 일정을 다 제치고 우리를 위해 두 분 선배문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주옥같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영상물을 시청한 후라서 더욱 두 분의 일생과 문학정신이 혼불이 되어 설득력 있게 다가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문 쪽 글을 쓰는 나로서는 김동리 소설가의 일생이 더 흡인력이 있게 다가들었다.
내가 청년시절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하던 습작기에 읽었던「무녀도」,「화랑의 후예」,「사반의 십자가」「등신불」등이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장관장님의 설명을 들으니 더 선하게 떠올랐고, 가슴이 뜨겁게 덥혀지고 있었다. 특히 유년시절 소녀의 죽음으로 인한 체험은 작품 속에서 진하게 녹아있다는 말씀을 들으며 마치 김동리 소설가를 지근에서 뵙는 듯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들었고. 그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문학체험이라는 묘한 감동이 다가드는 설 느꼈다고나 할까?
무당촌에서 태어나 무속의 세계에서 보낸 유년 시절 탓으로 그가 쓴 많은 소설이 이 무속과 함께 기독교 신앙과 맞부딪히는 강한 면이 들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그가 경험한 유년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소설 공부를 하며 들었던 스승의의 말씀이었다. 그만큼 유년의 삶은 작품 속에서 투영된다는 뜻인데 김동리 역시도 이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나는 이 문학기행을 하기 전에 일부러 소설가 이진우의 학위 논문인 『김동리 소설연구』를 정독했었다. 이 독서는 크게 보면 김동리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고, 작게 보면 문학기행을 떠나기 위한 작은 준비 작업이기도 했다. 죽음의 인식과 구원을 중심으로 작성된 이진우 소설가의 논문인데 김동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영상홍보실을 나온 우리 일행은 두 분의 자료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감상을 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다. 전시된 자료 모두가 소중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떠날 줄을 몰랐다. 하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해도 어느덧 기울어가고 있었다.
(사진 한 장 삽입- 동리 목원 문학과 관람 사진)
나 역시 일행과 함께 문학관에서의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하면서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전으로 돌아가 다시 이진우교수의 '김동리 소설연구'를 재독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는 능력과 함께 자기 장르의 영역의 이론을 추스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평소에 믿고 있는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삶을 잘 알아야 그 작가의 문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원자력안전 연구원에서 마련해준 숙소는 경주 보문단지에 위치한 콩코드 호텔이었다. 좀 해묵은 여관이기는 했지만 만족하기로 했다. 대전을 떠날 때 조두현씨의 말대로 우리는 이번 이 귀한 여행을 국민의 세금으로 한다는 걸 귀뜸 해준 말이 떠올라 고맙기만 했다. 나는 '원자력은 안전하다. 원자력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다. 원자력을 쓸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소유한 나라는 선진국이다.' 라는 말을 몇 번인가를 마음속으로 새겨 본다. 그럴수록 이 번 여행은 그저 고맙기만 했다.
거기다 다행인 것은 저녁식사가 아주 맛이 있었다. 돼지 주물럭 틀별 요리로 우리는 허기가 감도는 배를 만족하게 채웠다. 하지만 시장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저녁식사보다도 우리를 더 설레게 한 것은 안압지의 야경 관람이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리고 있었다. 20여분 달리니 안압지였다. 안압지는 이미 관광을 와 저녁을 즐기려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김동리 박목월도 잊었다. 물론 원자력 안 체험도 머리에 있을 리 없었다.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안압지뿐이었다. 사람이란 분위기에 약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진 한 장 삽입- 안압지 야경)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현란한 불빛을 즐기고 있었다. 줄지어 가는 학생들도 보였다. 대형 버스와 승용차가 가득했다. 우리 일행도 그 속에 끼어 안압지의 야경에 취한채로 카메라랑 스마트폰의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안압지 발굴을 통한 신라 역사의 조명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몇 장의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누렸다. 일행들은 넉넉해진 마음으로 안압지의 밤을 그렇게들 즐기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가 조반을 마치고 향한 곳은 월성 원자력 발전소였다. 가는 길에 감은사진와 수중 문무대왕릉을 거쳐 우리의 여행을 하기 위한 주 목적지인 월성원자력 발전소를 향해 차는 달리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발전소로 향하면서 문득 2년 전의 상념에 빠졌다. 한국문인협회 이사로서 한국문협 임원들의 원자력 발전소에 견학단의 일원이 되어 안전체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이 월성이 아니었다. 전라도 쪽의 영광원자력발전소였다. 같은 발전소는 아니었지만 2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그 때 원자력 발전소에 직접 들어가 용광로를 관찰하기도 하고 발전 과정을 설명을 들었다.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 느낌은 한 마디로 '원자력의 위대한 힘'이었다.
그 때 들였던 강의 내용도 분명하게 떠올랐다. 강사는 불의 역사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다. 제1의 불이 자연 발화의 불이라면 제2의 불은 전기에 의한 불이고 제3의 불이 바로 원자력에 의한 불이라는 것이다. 원시의 불은 번개, 화산 폭발 등 자연 발화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음식을 익혀 먹는 역할부터 시작해 난방부터 이용되다가 마침내 인류문화 발전에 기반을 조성했고, 제2의 불인 전기는 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제 제3의 불인 원자력은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불로서 선진국의 진입을 판가름 할 수 있느냐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불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고, 이 제3의 불인 원자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미래 에너지원이라는 것이다. 강사는 캐나다에서 원자력을 수입한 초기를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는 원자력발전소를 수주해 외국에 원자력 수출 시대를 열고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고 기술이 발달했다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다만 원자력이 가공할만한 에너지를 발휘하는데 비해 그만큼 위험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두려움도 뒤따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원자력을 평화적인 에너지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앞으로도 원자력의 보유가 여전히 국력을 좌우하고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최근에 일본의 쓰나미 현상으로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되고, 인근이 초토화되었으며 바다가 오염되어 경각심 차원이 아닌 상태에서 커다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얼마든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강의 내용이었다.
(사진 한 장 삽입- 월성원자력 발전소 과람사진)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월성원자력 발전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와서는 직접 원자력 발전소의 내부를 관찰할 수는 없었다. 국가 중요 시설을 일반인에게 지나치게 노출시켜 안보에 손실이 온다는 국가정보원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상황실에서의 설명과 함께 축소된 원자력 발전소 시설의 모형을 전시하면서 설명을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금쯤은 실망스러웠다. 두 해전의 그 생생한 원자력 발전 시설이나 발전과정을 볼 수 없음은 실로 큰 아쉬움이었다. 나는 이미 체험을 했지만 기대를 걸고 처음 방문한 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쉬움을 달랜 것은 월성원자력 발전소 인근에서 아주 평화롭게 사는 주민들의 모습과 함께 '주상절리'라는 이름의 절경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를 이내 감동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남해안의 청정한 바다, 맑은 바람,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은 우리의 혼을 빼기에 충분했다. 군데군게 전망대를 설치해 주위를 감상하거나 진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한 시설물에 드려서는 잠시 휴식을 할 수도 있었다.
(사진 한 장 삽입- 주상절리 관광 사진)
이런 여행은 우리 일행에게 특히, 나에게 안식과 함께 즐거움을 주었고 게다가 국가 차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원자력은 안전하고 유익한 에너지원이라는 홍보를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켜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문학 체험도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돌 하나를 던져 두 마리, 세 마리의 새를 잡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절묘하게 앙상불을 이루는 여행으로 삼을 수 있어 나는 뿌듯했다.
더구나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든 회원이 누릴 수 있는 여행이기 더욱 보람이 있었다. 그런 깊은 감동으로 주상절리를 가볍게 걷는 동안 내내 나의 기분은 쾌적하기만 했다. 게다가 우리 일행은 이제 점심을 먹고 나서 경주 양동마을로 가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서 깊은 동네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다시 우리를 들뜨게 했다. 양동마을은 우리가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체험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들려야 할 기착지였다. 그러한 여정을 잘 알고나 있다는 듯이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그 유명하다는 물횟집을 향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참 비가 온다던 가을 하늘이 참 맑기도 하구나!"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점심 후에 바쁜 일정에 쫓기며 양동마을을 향해 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달렸다. 꽉 짜여 진 일정이라서인지 조금쯤 마음까지도 급해졌다. 그러나 양동마을에 들어서자 그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에 부쩍 더 는 관광객이라고는 하지만 그 날도 양동마을은 많은 사람들의 붐빔 속에 섞이니 어느새 그들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바쁜 마음도 양동마을 속에 들어서니 다 사그러들고 마음이 안온해짐을 느낀 것은 나만일까? 역시 양동마을은 세계 유산에 등재될 만 했다.
나는 우리 일행들과 함께 차분하게 마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대전문총에 배정된 문화해설사는 은행원 출신의 양동마을 두 집안인 월성 손씨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여강 이씨 후손의 인테리 명해설가였다. 나는 그이의 말씀을 일일이 녹음해 간직하기로 했다. 마침내 스마트폰의 녹음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유산을 좀 더 분명하게 간직하고 싶어서 시도한 의도였다. 다만 이 글의 분량 제한으로 여기서 양동마을을 다루지 못함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여의 양동마을 관광을 마치고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보금자리인 대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좀 더 머물고 싶어 하리라 예상했는데 막상 귀성한다는 말에 회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스위트 홈 그곳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곳이었다. 회원들의 얼굴이 상기되고 있는 걸 바라보니 그랬다. 하지만 집행진에서는 끝까지 회원들에게 휩싸이미 말고 더 좋은 추억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대전으로 향하는 동안에는, 이 번 두 가지 목적으로 실시한 여행을 정리하는 하이라이트로 기억할 수 있게 마침표 찍기를 시도했다.
맞다. 문인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며 사식과 명상 그리고 속 깊은 정담을 하면서 이틀간의 관광 추억을 했지만 나름대로의 절점을 이루며 마침표를 찍으려는 의도였다. 바로 김용재 명예회장님의 제안으로 실시한 사행시 지어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이미 기획 단계에 이 행사를 의식해 상품도 두둑하게 마련한 집행진이었다.
김용재 명예회장님이 미리 시제를 둘로 정해 제시한 것은 여행을 떠나던 첫날 아침이다. 여행 목적에 맞게 제시한 것은 바로 두 주제였다. 한 주제는 '원자 안전' 였고, 다른 한 주제는 대전문총의 계간지 제호인 '문학 시대'였다. 회원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한동안 심사를 진행했다. 물론 심사 대상은 41명 전 회원이었고, 모두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한 작품 속에서 엄선해 공정성을 기하며 영광을 안겨주기로 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뽑힌 작품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들은 이들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원자안전
원하던 이상형에 내가 선택한 그대여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세월을 다 써 버렸구려
안 보아도 못내 그리움으로 내 가슴에 들어와 있는 것은
전부 그대가 나에게 퍼준 사랑의 그 결실이었더라 〈조남명〉
원망이 미움 되어 속앓이 해도
자고나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안개 속 돌부리에 걷어 채이며
전생을 손잡고 가는 부부 인연 〈권예자〉
원망도 미움도 다 뜯어내고
자라난 나무, 나무 일품이더라
안압지 천년사직 불꽃 피는데
전생을 여행할까 당신 손잡고 〈김용재〉
원하고 기다리던 경주 문학 기행
자유로운 흰 구름 하늘과 솔숲 내음
안팎의 묵은 마음 닦고 청소하니
전해지는 햇살의 따뜻한 체온 〈우종숙〉
문학시대
문학에 반해서
학인(學人)이 되고
시인(詩人)이 되어
대전 문총에 들었네 〈박진문〉
문학의 모임은
학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운데
시대와 인물을 가리지 말고
대전에서 만납시다 〈김완용〉
그랬다. 우리 회원 모두는 우수상에 뽑힌 이들에게 마음껏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역시 문인들에게 던져지는 여행의 의미는 좋은 사행시 작품 속에서그리고 아낌 없는 박수로 더 빛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수상한 이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수상자가 흐뭇해하는 동안에도 버스는 대전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석양으로 붉어진 그 고소도로를 헉헉거리며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