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축구 원로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축구인도 아닌데 축구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줘 고맙다는 얘기였지요. 그렇지만 저는 선수 출신이 아니면서 한국축구 부흥을 위해 정말로 큰 일을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황현진 어린이, 바로 황선홍 선수의 큰딸입니다.
지난 월드컵 미국과의 경기,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진 한 사나이를 기억하십니까? 황선홍 선수는 상대 선수와 공중볼을 다투다 부딪쳐 선혈이 낭자한 채 그라운드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마취도 하지 않고 터치라인 밖에서 찢어진 부위를 꿰매고 붕대로 상처를 친친 동여맨 채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갔지요. 경기가 끝나고 현진양이 황선홍 선수의 품에 안겨 “아빠, 이제 축구 그만하면 안돼요?”라며 울먹이는 장면이 전파를 탔습니다.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진양은 이 한마디로 한국축구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직업에 대해 ‘이러저러할 것이다’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축구선수’의 이미지는 전사와 건설근로자(야외에서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중스타의 이미지를 조금씩 합친 것이었지요. 현진양과 황선홍 선수의 사진은 이런 점에서 대중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의 축구선수를 감싸고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족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너무나 극적이고 장엄한 순간에 그것도 매우 강렬한 방식으로. 축구선수라는 직업과 축구라는 스포츠가 이 순간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됐습니다.
또 하나, ‘주전 공격수의 부상’ 정도로 마무리될 일이 하나의 드라마로 확대·재생산됐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조국을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 피, 이에 굴하지 않는 투지, 장렬한 정신력,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나오는 전사를 향한 가족들의 손길, 그리고 소녀의 울먹임. 월드컵 역사책에 한 줄의 기록으로 끝났을 일이 먼 훗날 영화로, 연극으로, 그리고 회고록으로 다양하게 팔려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