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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玄의 시학을 꿈꾸며
김상환
먼저 대구시인협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뜻밖의 수상소식을 접한 것은 집을 떠난 길 위에서였습니다. 양지바른 무덤가에 바람이 불고 저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기도 하지만 저간의 자신에 대한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문득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고요와 고독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저 박래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처럼 내 시의 영혼은 자신이 처할 곳 말고는 숫제 문을 닫아버리고 만 형국입니다.
20대 초반의 달 뜨지 않은 밤 심천 미루나무 숲에서 태어난 저의 시는, 이번에 새로이 펴낸 시집 『왜왜』에서 새벽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밤과 새벽의 사이존재와 경계야말로 다름아닌 현玄입니다. 앎과 느낌의 방법으로서 시는 그 현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문지방입니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말과 사물을 잇고 나누며 새로운 하나로 진입해 가는 경계의 경지로서현은 주름이자 내재성의 쁠랑plane입니다. 공간의 연인으로서 아토포스atopos입니다.
수상시집 『왜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며 내면의 아픔 내지 슬픔입니다. 딴은, 사유와 방법으로서 현의 세계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거기엔 나만의 오랜 마음과 마음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 마침내 내게로 온 현은 이후 문학과 생이 다할 때까지 새롭게 추구하고 발현시켜 갈 거울이자 등불입니다. 그리고 시는 물론, 시학의 새로운 전통이자 방법론입니다.
초승달은 푸른 말이다// 달의 갈기 곧추 세워 소녀는 현을 켠다// 물수제비처럼 선율이 하늘가에 퍼진다/ 말은 검푸른 달/ 그 달의 말과 빛으로// 뭇별이 쏟아지면// 홍교 아래 물이 흐른다 졸시「달과 소녀」전문입니다. 이렇듯 저에게 현은 달과 소녀입니다. 만월이자 초승달이며, 처녀이고 어머니입니다. 기원으로서 마고麻姑입니다. 그것은 현실의 현이고, 현존재의 현이며, 피아노와 거문고의 현입니다. 아니, ‘현지우현 중묘지문’의 현입니다. 정말이지, 이 현玄의 시를 알고 느끼는 것만큼 매혹적이고 우리를 홀황의 경지로 내모는 게 있을까요. 시를 읽고 쓰는 것만큼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이 있을까요. 막스 피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이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들은 다음 우수憂愁를 느끼는 법입니다. 이는 심연으로부터 함께 울리며 솟구쳐오른 전체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렇듯 저의 기쁨과 행복도 문학과의 순전한 만남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와 예술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체험하고 사유하며 향유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참된 현실성이 죽음에 이르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것(빌렘 플루서)이라면, 시와 현실, 시와 실존의 문제는 결국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현존재인 시인에 의해 말해지고 읽혀져야 비로소 의미를 갖고 사물의 구원마저 이루어진다면, 나의 문학과 삶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부족한 작품과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선해 주시고 그 의미를 부여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여러 회원님들에겐 좋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대구시인협회의 무궁한 발전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1957년 경북 영주 태생. 한남대 영어교육과 및 영남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81년 8월《월간문학》으로 시, 1993년 여름호《문화비평》에 평론 「한 내면주의자에 대한 비망록적 글쓰기-이가림론」을 발표함으로 등단. 시집 『영혼의 닻』, 『왜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시선 『칸초니에레Canzoniere』(공역) 출간. 제4회 이윤수문학상 수상. 대구 경일여고 교사 및 영남대 강사 역임.
수상 특집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 외 4편
김상환
아들아, 말씀보다 절대 앞서지 말아라 그저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가, 가서 배우거라 어둠은 어둠 속에서 밝고 가침박달나무의 가르침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아들아 흰 그림 위에 찍힌 검은 점을 보거든 흰 바탕을 보아라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도 있지 않더냐 알레프, 베이트, 김멜, 달렛… 이렇게 알파벳 문자를 따라 외우다 보면 알레프는 문자의 기원, 말과 시의 처음인 것을 안다 동구밖 키 큰 상수리나무는 그루터기도 없더구나 네가 곧잘 오르던 아그배나무는 비탈에서도 무럭 잘 자랐었지 그래요, 어머니!
많은 물소리 같은 요한의 음성**을 듣고 홀로 근심하는 자 앞에 놓인 밤의 포도주, 뜯겨진 달력 뒷면에사도신경을 옮겨 적은 어머니도, 르무엘왕의 어머니도 가고 없는 지금 나는 이제 누구의 권면을 더 들어야 하나. 들을 게 없다면 숫제 입이라도 다물까보다 아파트 분리수거함 뒤로 말없이 핀 벚꽃이 만개를 서두른다 서두를 일 하나 없는 나의 발 앞에 가는 비가 온다
*구약성서「잠언」31장 8절. **신약성서「요한계시록」1장 15절 참조.
왜왜
德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만 벼랑에 핀 홍매가 말없이 지고 나면 무릎을 펼 수 없어 나이테처럼 방안을 맴돌고 물음은 물가 능수버들 아래 외로 선 왜가리가 왜왜 보이지 않는지 먼산 능선이 꿈처럼 다가설 때 두엄과 꽃이 왜 발 아래 함께 놓여 있는지
達蓮 어머니에 대한 궁금은 앵두 하나 없는 밤의 우물가에 몰래 흘린 눈물 이후 단 한 번의 말도 없는 손 다시는 펼 수 없는 축생의 손가락, 산수유나무 그늘 아래 먹이를 찾는 길고양이처럼 길 잃은 나는 왜 먼동이 튼 아침마다 십이지신상을 돌고 돌며 천부경을 음송하는지 좀어리연이 왜 낮은 땅 오래된 못에서 피어나는지 어느 여름 말산의 그 길이 왜 황토빛이고 음지마인지
해맞이공원을 빠져나오다 문득, 사리함이 아름답다는 생각
나무 믹담*
-부인사
겨울 산사를 찾았다
부인은 없고
부인과 함께 바라본 느티가 묻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럴 땐 나를 봐 무를 봐,
라고 곁에 선 왕벚이 거든다
나무에 새겨진 칼날의 허
공에는 마침내의 도가 있다
한쪽 귀가 깨진 서탑
풍경과 바람과 석등의 비밀이
부인에 있다
대웅전 지붕 끝 치미가
하늘을 오르다말고
산신각 앞에 내려와 앉는다
흠도 티도 없는 절집 아침
마당과 마음을 돌고 도는 나는
포도나무 잎진 자리
떨켜를 생각한다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길
눈의 흰 그림자
*히브리어(מכתם, Michtam). 조각에 새겨 놓은 금언이나 지혜의 말씀.
빈집
가지사이로달빛이새어나온다새로운병은나을기색조차없다기별의기별도없이사라진먼나무그늘로수염이자라듯삼이자란다빈집에서듣는에릭사티의짐노페디2번베란다의꽃이란꽃은말이없다느리고슬픈피아노의무한선율명가명비상명*의저녁이가고이름을 알수없는새벽이온다꿈은사라지고나는아프다
야마野馬**와
살갗과 읍울悒鬱과
거룩한
*『도덕경』1장. 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면 (그 이름은) 변함없는 이름이 아니다.
**『장자』내편 소요유. 연못 가운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운문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법고소리에 개울물이 깨어나면
꽃담에 비친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구름체꽃을 본지 오래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떠나온지 오래
죽은 새를 뒤로 하고 운문을 나서니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신작시
끓는 가마의 환상
김상환
살구나무 가지와 끓는 가마의 환상*을 본다. 두려움의 나뭇가지와 길 사이로 혼자 산을 넘다 마주친 천 길 낭과 빛나는 저녁별. 현람玄覽이다. 바닷가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믿고 있으려니,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가마솥의 아버지는 열에 열을 더하여 춘양장에 갔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이 밤, 광야의 당아새** 가 하나의 심연이라면, 춤추는 나방의 잿빛은 제 짝을 찾기 위해 온산을 헤매었어야 했다. 사막의 흰 머리뼈를 본 것은 돈황에서였다. 모래알처럼 부서진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직도 경이란 경을 읽고 있을까. 요적寥寂한 이 밤, 책상 위 마른 꽃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구약성서「예레미야」1장 11절~13절 참조. **「시편」102편 6절(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그리스어로당아새charadrios는틈새․심연charadra의 의미. 딴은, 당아새는 나쁜 기운을 들이마시고 다시 뱉아내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의『피지올로구스-기독교 자연상징사전』(노성두 옮김, 知와 사랑, 2022) 참조.
[작품론]
순연(純然)한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
김홍진(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올해 여름 김상환 시인의 시집『왜왜』(서정시학) 원고를 받아들고 다소 긴 해설을 썼다. 그리고 며칠 전 이 시집으로 대구시인협회에서 주관하는「제33회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시인은 그 소식을 전하며 수상 특집으로 직접 선별한 듯한 작품 다섯 편에 대해 작품론을 써 줄 것을 급히 부탁해 왔다. 선별된 다섯 편은 시집 해설에서 온전히 언급한 것과 글을 전개하며 필요에 따라 단편적으로 언급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섯 편에 대해 시집 해설을 바탕으로 좀더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의미를 추적하면 좋으련만 주어진 시간은 넉넉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선별된 다섯 편의 시에 대한 보다 새롭고 심화 확장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시집 해설에 기반한 압축적 부연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김상환의 시는 우선 형태적으로 짧고 정갈하며 정형성에 가까운 행갈이를 기본으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간결한 산문시의 형식미를 지니고 있다. 산문시라 하지만 이 또한 대체로 호흡이 짧고 압축적으로 정제된 형태미를 주축으로 한다. 그런 까닭에 형식적으로 균형 잡힌 안정감을 주며, 표현적으로 불필요한 장식적 수사나 과장된 비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요컨대 섬세한 언어 조탁을 통한 정제된 시적 사유와 압축된 형식미의 구현이 그의 시의 특장을 이룬다. 아울러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시선과 어법은 지극히 차분하고 정관적이며, 내용은 다분히 계시적이고 잠언적인 특성을 지향한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은 서정 양식의 본래 특성인 세계의 자아화, 즉 자기 인식이나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이러한 특성은 서정시가 지닌 자기 고백과 표현적 속성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상환의 시학은 형태적으로는 절제된 형식미, 표현적으로는 내면의 심층과 일치하는 자기 회기성의 고백적 어법, 내용적으로는 직관적 통찰과 자기 성찰을 통한 예지적 계시성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의 시는 매우 잠언적이며 계시적이고 성찰적이며 예지적이다. 그의 언어는 수도승의 화두(話頭), 즉 오래고 깊은 참선의 명상 끝에 내뱉는 수도승의 최후의 단발마처럼 간결하다. 이것은 그의 시가 사물의 묘사나 객관적 재현보다는 직관적 통찰의 주관성 혹은 명상적이며 정관적인 태도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환기한다. 그로 인해 그의 시는 사회적 현실과 조건, 말하자면 삶의 구체, 말하자면 어차피 우리의 현실적 삶이 포함할 수밖에 없는 고통, 아픔, 비애, 설움 등속에서 비껴나 있다는 점을 지시한다. 그것을 내재적 초월에 대한 애착과 열망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는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정신의 힘에서 비롯하는 삶과 세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구름은 멀고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구름체꽃을 본 지 오래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을 떠나온 지 오래
죽은 새를 뒤로 하고 운문을 나서니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운문」 부분
시적 주체의 내적 정념을 고백하는 특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인용 시는 그의 시가 내장한 형식미와 시적 사유의 형질을 특징적으로 담아낸다. 이 작품을 시집『왜왜』를 여는 첫 시로 배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시집의 서언 격인「시인의 말」일부를 이 시의 끝 연에서 가져온 것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적 지향성에 대한 하나의 암시를 제공해 준다. 그 암시의 끝자락에 언어란 기호 체계 혹은 정보 전달 도구 이상의 무엇이며, 시의 언어란 현실 너머에 잠재한 어떤 가능성을 응시하고 감지하며 그것을 현현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통찰이 자리한다. 그 특별한 힘으로 인해 그의 시는 깊고 깊은 존재의 유현(幽玄)한“사이의 현”, 즉 악기의 현(絃)이 햇살처럼 환(晛)하게 발하는 울림의 노래를 지음(知音)할 수 있도록 한다.
인용 시에서 시인의 정신은 세계와 자아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껴안음으로써“죽은 새를 뒤로 하고”“시가, 노래가 되는” 감각의 각성을 이룩하고 있다. 시인은 감각을 단일하게 응축시켜 정신에 접맥시킴으로써 자아의 핵심, 즉“꽃담에 비친 나는”‘나’가 아닌“나비가 되어버린”상태에 도달한 각성을 이룩한다. 김상환은 이러한 언어의 집중과 응축에 의해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시에 접맥한다. 집중과 응축의 시적 태도는 다양한 정서와 감각을 결합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며, 자아와 세계를 껴안으면서 찰나적 정신의 핵심에 이르려는 시적 전략일 것이다. 그 집중과 응축의 정신은 의지적인 것이기도 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 자아와 대상이 뒤엉킨 상태를 지시하기도 하다. 어떠한 경우든 시인은 대상과의 관계를 각성된 정신과 감각 속에서 수용함으로써 세계와 화해하고 그 세계를 자아화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강인하고 유현(幽玄)한 정신의 힘이다.
화자는“한여름 오후”절간, 즉 운문(雲門)에 든 모양이다. 불법을 비유하는“법고 소리”는 절간의 고요한 적막을 깨워 개울물을 생동하게 하고,“배롱나무 그늘”“꽃담에 비친”현상계의‘나’를‘비(非)’, 즉 언어유희의 역설을 통해‘나’를‘나’가 아닌(非) 존재로서‘나비’로 인식하도록 이끈다.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케 하는‘나’는“나비가 되어버린”것이다. 이는 피아의 구별을 잊은 채 물아일체 혹은 만물일여라는 혼연(渾然)의 상태를 지향하는 화자의 정신적 태도를 그대로 표상한다. 이를테면 독성(獨聖)의 지혜로운 깨달음에 이른“나반존자의 하늘”같이 고양된 정신의 역동성, 즉 지고한 정신의 역동적 상향성을 환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의 잠재태를 응시하고 감각하려는 시인의 지향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의 정신 지향과 감각은 오랜 시간 응결된 사유의 결정체로서“구름체꽃”,“석조여래상”이 상징하는 오랜 기다림 끝에서나 한번 만날 수 있는 침묵의 언어, 그 언어의 응결체로서 운문(韻文)의 리듬에 가 닿아 있다. 시인은 이제 현상계 밖으로 나와 그윽한 어둠(玄)의 사이 속에서 현(絃), 이 시집의 다른 시에서“저녁의 훈(塤)”(「비가 아비가 있느냐」)이 발하는 음악, 운문의 절대 리듬을 지음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 리듬 앞에 서서“물줄기는 바윗돌에 새겨진 현”의“악기”가 발하는 소리, 혹은 생황(笙篁)의 리듬이“율, 려, 율, 려”(「동천 완장」)로 흐르는 율려(律呂)의 음양적 조화와 리듬의 선율을 탄다. 시인의 눈과 마음은 현상의 허상을 버리고 본질의 드러남을 향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정신의 역동적 상향성이라 부를 수 있겠다.
겨울 산사를 찾았다
부인은 없고
부인과 함께 바라본 느티가 묻는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럴 땐 나를 봐 무를 봐,
라고 곁에 선 왕벚이 거든다
나무에 새겨진 칼날의 허
공에는 마침내의 도가 있다
한쪽 귀가 깨진 서탑
풍경과 바람과 석등의 비밀이
부인에 있다
-「나무 믹담-부인사」부분
김상환의 시는 대체로 시적 대상과 내면을 관조적으로 대면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시가 세계 내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정관적 사유를 핵심으로 하며, 현실 너머에 있는 심원하고 항구적인 존재에로의 다가감을 지향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고전적인 동양 정신이나 성서의 말씀에 기반한 듯한 심미적 태도, 즉‘영혼의 닻’을 존재의 심연에 뿌리내리고 펼치는 탐색은 삶의 구체에서 유리된 독백, 공허한 관념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가파른 현실 속에서 상처받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운문」이나 위의 시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내면 지향의 자기 독백과 함께 현실과 절연된‘운문’, ‘산사’에서 깨닫는 성찰적 어조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김상환의 시가 현실과의 주체적인 맞섬을 강조하기보다는 자기 내면과 맞서는 것을 두고 공허한 관념주의나 정신주의라 하는 것은 오해이다. 현실에 대한 자세가 현실로부터의 고립이나 초월인 양 오해를 사고 있을 따름이다. 인용 시는 현실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실과의 주체적인 맞섬을 시도하는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나무’에서‘나’가 없는‘무’와‘허’와‘공’과‘도’를 깨닫고 끝내는 탈속이나 초월을 이룩하지 못하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닌“저잣거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삶과 세계의 비정함으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느 한 곳에 집착하거나 고정되지 않으면서 유연한 태도로 현실과 대응하며 전진하려는 의지가 그의 상향적 정신, 역동적 의식을 부여한 것이다. 김상환에게 상향적 정신의 힘에 대한 믿음은‘저잣거리’로 상징되는 현실의 가파른 질곡을 초극해 갈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한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은 현실의 고정관념이나 찰나적 현상계의 허상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시적 주체의 자기 존립과 부단한 자기 각성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깨닫고도 다시‘저잣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곧 삶이다.
시는 여타의 다른 담론 유형 혹은 언어 기능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계시성을 갖는다. 여기서 계시성이란 합리적 이성과 논리적 사유와 문법적 규범 안에서 이해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언어의 일반적 기능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곧 운문의 형식이란, 시의 언어란, 시란 결국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인 의미 혹은 은폐된 비의를 직관적으로 포착, 통찰, 해독, 폭로, 현시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정신의 힘과 상향적 의식을 통해 김상환은 세계와 맞서 은폐된 세계와 존재의 비의를 발견하려 고투한다. 또한 그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에 의해 자기를 각성하고 자기 존립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때 시인의 정신이 다가간 지점이 이 시에서처럼‘믹담’과 같이 계시성과 예지성을 내포하는 잠언이나 경구(警句)의 인유적 상상력이다. 예컨대 그의 시집에서 산견되는 호접몽,‘천부경’연관의 시구, 성서, 불경 등 경전에 등장하는 잠언이나 경구, 혹은 선대가 들려주는 말씀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들은 모두 사물이나 현상, 존재가 숨긴 비의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며, 이를 통해 김상환은 존재의 비의를 풀고 자기 각성과 자기 정체성의 존립을 확인하는 것이다.
김상환의 시는 세계와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정관적 사유를 내용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현실 저편에 있는 심원하고 항구적인 존재에로의 다가감을 목표로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하여 김상환이 고독하게 응시한 내밀성의 광맥은 우리를 일상적 의식 저편에 자리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안내한다. 그곳은 어떤 음악의 소리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가 시집『왜왜』의 여러 작품에서‘훈’,‘현’,‘율려’,‘음악’,‘노래’,‘소리’와 연관한 시적 상상력을 자주 반복한다거나 원초이며 절대적 태허(太虛)와 궁극의 상태를 상징하는 흰빛과 눈(雪), 검은 빛과 어둠(밤, 저녁)의 대비적 이미지를 통해 빈번하게 시적 사유를 펼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궁극의 리듬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면 시초와 종말, 순간과 영원,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세계가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나날의 진부하고 공허한 삶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고양된 감각과 존재의 깊이를 얻게 된다.
가지사이로달빛이새어나온다새로운병은나을기색조차없다기별의기별도없이사라진먼나무그늘로수염이자라듯삼이자란다빈집에서듣는에릭사티의짐노페디2번베란다의꽃이란꽃은말이없다느리고슬픈피아노의무한선율명가명비상명의저녁이가고이름을알수없는새벽이온다꿈은사라지고나는아프다
야마野馬와
살갗과 읍울悒鬱과
거룩한
-「빈집」전문
김상환에게 시 쓰기는 형이상학적인 모험이며 탐색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전과 저항이다. 이를테면 현실의 문법이 기각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도전적 탐문을 의미하며 완고한 현실원칙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한 탐문은 필연적으로 어떤 갈등과 혼돈, 부재와 결핍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인용 시에서 화자의 정신은 대상과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각성함으로써 오는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킨 상태를 환기한다. 강인한 정신의 힘은 고통과 상실, 부재와 결핍을 껴안을 수 있지만 그 껴안음은 단지 견뎌냄을 목표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고통과 혼돈, 부재와 결핍을 껴안음으로써 찰나적인 정신의 핵심, 존재의 비의를 풀어냄이라는 목표를 지닌다. 그렇다면 그 정신의 핵심이나 존재의 비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찰나적인 고요함이기도 하며 이름할 수 없는 혼돈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2번처럼 고요한“무한선율”이거나“명가명비상명”처럼 이름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다.
김상환은 그 부재와 결핍, 고통과 혼돈, 꿈과 환상, 이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존재의 비의를 감각한다. 시인은“무한선율”이나“명가명비상명”처럼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운데서 순간적으로 구성되는 정신의 명징함을 찾는다. 그것은 이 시의 표면적 구조에서부터 의도되어 있다. 이를테면 첫 연의 띄어쓰기 거부와 끝 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두 개의 단어가 한 연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분명 단순한 무시가 아니라 충분히 의도된 시적 전략이다. 마치 첫 연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연상에 의한 자동기술법을 연상하게 한다. 시인은 띄어쓰기를 거부함으로써 독자의 의식적 개입을 방해한다. 독자의 의식 작용을 방해하는 의도는 곧 되도록 시인 자신의 의식 상태가 변질되지 않고 지속하여 독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것은 부재와 결핍, 혼돈과 고통의 내면을 효과적 표현하려는 전략적 수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하여 끝 연에 이르러 시인은‘빈집’이 표상하는 부재와 결핍, 띄어쓰기의 무시로 표현된 혼돈과 고통의 내면, 혹은 무한한 선율로 인해 이름할 수도 없는 세계의 비의를 몇 마디 단어로 압축한다. 이것이 시인의 정신의 명징함을 표상하며, 세계 내 존재의 비의를 현시하는 방법인 것이다. 즉‘야마野馬’같은 삶의 현기증,‘살갗’의 살아 있는 감각, 살아 있음으로 인한“읍울悒鬱”속에 성스럽고 존엄한 가치로서‘거룩’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김상환은“허물어진 고성과 노새의 방울소리”를 성좌로 삼아 막막한 사막을 건너는 순례의 길 위에 있다. 불타는 사막의 화염 속에서“낙타가 그림자 꽃을 피우”고“꽃과 나무/ 새”가 없어도“아름다운 비단, 길”(「서역의 달」) 끝에 열리는 법열의 지극한 극점을 향해 걷는 중이다. 그 순례의 길이 시 쓰기이고, 그 순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강인한 정신의 힘이다. 시인은 순례의 구도자인 듯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현기증의“야마(野馬)”와 살아 있음의‘살갗’의 감각, 그리고“읍울(悒鬱)과/ 거룩”함이 모두 공존하는 세계 내 존재의 내밀한 깊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울림을 지음한다. 달빛과 병과 이별, 음악과 꽃과 슬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아픔의 고행이 그의 시 쓰기인 것이다.
아들아, 말씀보다 절대 앞서지 말아라 그저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가, 가서 배우거라 어둠은 어둠 속에서 밝고 가침박달나무의 가르침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아들아 흰 그림 위에 찍힌 검은 점을 보거든 흰 바탕을 보아라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도 있지 않더냐 알레프, 베이트, 김멜, 달렛… 이렇게 알파벳 문자를 따라 외우다 보면 알레프는 문자의 기원, 말과 시의 처음인 것을 안다 동구밖 키 큰 상수리나무는 그루터기도 없더구나 네가 곧잘 오르던 아그배나무는 비탈에서도 무럭 잘 자랐었지 그래요, 어머니!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부분
德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만 벼랑에 핀 홍매가 말없이 지고 나면 무릎을 펼 수 없어 나이테처럼 방안을 맴돌고 물음은 물가 능수버들 아래 외로 선 왜가리가 왜왜 보이지 않는지 먼산 능선이 꿈처럼 다가설 때 두엄과 꽃이 왜 발 아래 함께 놓여 있는지
-「왜왜」 부분
김상환이 정신의 핵심 혹은 존재, 혹은 삶의 비의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계시성과 예지성을 내포하는 잠언이나 경구(警句) 등을 인유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게 한다. 인용 시 역시 구약의 잠언과 신약의 요한계시록, 또는“德萬 아버지”의‘말씀’이 시적 상상력의 원천을 이룬다. 이들 시 역시 세계 내 존재의 비의에 접근하기 위한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을 보여주는데, 그 길을 찾는 한 방법을 어떤 잠언이나 경구 등의‘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시인은 세계 내 존재의 비의를 깨닫고 자기를 각성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신의 각성된 날을 세운다. 시인은‘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삶과 세계에 숨겨진 비의를 관찰하고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주며 성찰하는 이유는 정신의 정직함과 치열함을 효과적으로 증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말미암아 삶과 세계의 허무나 무상함이 다른 대상에게로 이입되지 않고 치밀한 밀도로 응축된다.
김상환은 존재의 심연을 탐색하며 생의 리듬을 감각하고 명멸하는 우주 창생의 이치를 사유한다.‘말씀’을 통해 존재의 시원과 끝, 생과 사, 백(흰)과 흑(검은), 빛과 어둠, 두엄과 꽃, 음과 양에 대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강렬한 계시성과 예지성을 느끼게 한다. 근엄하고 장중한 경전의 어투로 발화되는 계시성과 예지성은 그 자체로 시인의 유현(幽玄)한 사유의 극점을 환기한다. 요컨대 자연의 리듬과 조화로운 순리를 따라야 하며 생과 사, 흑과 백, 빛과 어둠이 통합되는 경계에 시인은 서 있는 것이다. 정신의 핵심에 도달하려는 시인의 유연하고 유현한 태도는 개체적 삶의 욕망과 고통의 크기를 왜소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왜소해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정신은 되려 차분해지고 그의 마음은“사리함이 아름답다”는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안착하는 것이다. 우주창생의 이치가 그에게 삶의 왜소한 목적과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고, 마음을 비우라고,“맑은 물소리 같은 요한의 음성”을 들으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고고한 정신의 기품,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은 곧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려는 김상환의 고상한 인격미를 느끼게 한다. 그는 세속의 공리적인 속박에 찌들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에서 유연하게 삶과 세계를 정관하는 태도를 시종 견지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법이나 정관적 태도, 정신의 상향적 역동성은 동양의 고전시학에서 말하는 충담(沖淡)의 멋, 즉 번잡하고 물욕이 판치는 세속적 현실에서 벗어나 음양의 조화를 관조하는 담백한 멋이 내재한다. 그리고 세속적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우주적 이치를 응시하는 유현한 사유로 말미암아 초예의 미학을 구현한다. 고고한 정신의 기품이 절제 있게 발현하는 언어의 압축미, 관조적 사색의 결정체를 담담하게 드러내는 충담의 미, 우주적 음양의 조화를 응시하는 유현한 초예의 미가 김상환 시의 시학이다. 그 유현함이 우리를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