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김종민(제민일보 4·3취재반)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께, 제주도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이하 당시의 지명임)를 포위한 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기운에 놀란 주민들이 황급히 집밖으로 뛰어나오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드넓은 교래리 벌판에 총성과 비명이 뒤섞였고 불바다를 이룬 마을에선 하늘과 땅이 온통 붉었다. 1백여 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설촌 7백년의 유서깊은 마을이 하룻밤새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 제주도에서는 거주지역을 크게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눠 부른다. '중산간'이라 함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마을 뿐아니라 불과 2~3km 거리에 있는 마을까지도 통칭한다. 통상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대개 '중산간'이라 부른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폭도'라고하여 학살된 희생자 중 파악된 신원은 다음과 같다. 김인생의 어머니(당시 70살) 김성진(65) 김성지(63) 김성지의 아내(60) 양재원(60) 양재원의 아내(60) 김만갑((57) 양관석(여, 50) 김채화(여, 45) 김채화의 아들(5) 부자생(44) 부영숙(여, 38) 부영숙의 아들(3) 신보배(여, 25) 양남선(여, 25) 양남선의 아들들(5, 3) 고계생(여, 18) 김영자(여, 15) 고옥심(여, 14) 김순재(여, 14) 김순생(10) 김문용(9) 등이다.
이건 토벌이 아니라 무자비한 살인극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탔고, 열네살난 한 소녀의 시신에는 대검이 찔려 있었다. 주로 노약자들인 이들의 '죄'는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날 양복천 할머니(81세)는 어린 딸과 함께 총상을 입었고 아홉 살난 아들(김문용)을 잃었다. 양 할머니는 그날을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에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했습니다.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어요.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빌었어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 하며 내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죽었네!' 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에 총을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나는 우선 총맞은 아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마당으로 끌어낸 후 딸을 살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리려는데 담요가 너덜너덜해요.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무릎을 부숴놓은 겁니다. 두 번째 생일날 불구자가 된 딸이 벌써 쉰두살입니다."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국민에게 저지른 일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50년 전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오히려 증언자들은 "총에 죽은 사람들은 고통이 짧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사건발발 40주년이 되던 1988년에 출범했다. 올해로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자료를 모았고 국내외에서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을 넘어선다. 그간의 신문 연재를 모아 『4·3은 말한다』(전예원)라는 제목으로 다섯권의 책을 펴냈다. 신문 연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문 연재든 책이든, 그리고 이 글의 내용 역시 오랜기간 여러 단계의 검증을 거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 이 글은 제민일보4·3취재반(양조훈, 김종민)의 『4·3은 말한다』(전예원) 제1권∼제5권까지의 내용 중 일부이다. 책에는 일일이 각주를 달아 출처를 밝혀 놓았다.
아무튼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으며, 50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지난 1997년 초 부산의 독립영화단체인 하늬영상은 4·3의 참혹상 사례 몇가지를 모아 '레드헌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레드헌트'는 지난해 인권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고 올해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그러나 서준식 씨(인권운동사랑방 대표)는 인권영화제 때 '이적표현물'인 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1997년 11월 5일 구속됐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증언은 처절한 것이지만 제주도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내용의 수난사일 뿐이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은 이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왜 역대 정권은 이 사건을 암흑 속에 묻으려 애를 쓰고 있는가.
4·3 이란
'4·3'이라는 숫자들의 조합은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무장대는 단독선거·단독정부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발발 원인도 5·10단선 반대라는 현안에서부터 경찰의 '3·1절 발포사건', '고문치사 사건' 등 다양하다.
) 4·3의 배경이 되는 이들 사건에 대해서는 『4·3은 말한다』 제1권을 참조.
4·3을 제대로 보려면 그 당시 남한사회의 보편적 모순구조와 한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미군정의 실책, 그리고 제주도의 저항 역사와 사회·경제적 여건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한마디로 4·3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그런데 4·3을 역사적 사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사건이 진행 중일 때 한 미군보고서(1949년 4월 1일자)는 "지난 해 동안 1만4천∼1만5천 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보안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때이긴 하지만 6년 6개월의 전개과정 중 단지 1년간의 집계라는 점에서 전체 희생자라 할 수 없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지난 1994년과 1995년에 '4·3피해신고 접수처'를 개설해 희생자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14,500여명의 희생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조사 결과, 가족이 몰살했거나 유족들의 피해의식 때문에 명단에 수록되지 못한 희생자도 많았다. 희생자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설이 있지만 대략 3만명 안팎으로 모아진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이다. 이 글은 그 중 군·경 토벌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된 무차별 양민학살극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망자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초토화작전 전야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백명 안쪽이었다. 그 5백명의 무장대에 대한 토벌작전에 3만명이 희생된 것이다. 토벌전이 본격화되던 1948년 11월께 한 미군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기록했다.
"제주도 연대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유격대 122명을 체포하고 576명을 사살했다. 10월 1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체포했다. 많은 물건들을 노획했으나 무기는 거의 없었다."(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1948. 12. 1.)
이 시기의 또다른 보고서를 보면, '11월 13일 경비대 작전결과, 구좌면 행원리에서 유격대 115명 사살' 혹은 '11월 24일 제주읍 노형리 부근의 전투에서 유격대 79명 사살' 등의 전과기록이 나오는데 토벌대 희생자는 한명도 없다. 많은 숫자의 무장대를 사살·체포했으면서 노획한 무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전투가 벌어졌다면서 어떻게 토벌대 사망자는 한명도 없고 무장대만 사살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교전을 벌이던 무장대가 죽은게 아니라 대부분 불가항력의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마을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4·3발발 후 한동안 이어지던 소강상태는 1948년 10월에 접어들면서 깨졌다. 그동안의 토벌작전은 정부수립을 앞둔데다가 우기(雨期)로 인해 지연돼 왔다. 강경작전은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순간 이미 예고돼 있었다. 남과 북에 서로 적대적인 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으로 부각됐다.
10월 5일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간 온건책을 지향해온 경찰청장을 사퇴시키고 강성 인물을 새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어 경비대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에는 제주도 주둔 9연대장의 포고가 발포됐다. 포고문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때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특정한 산악지역이 아니다. 해변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산간에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께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동안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덮쳐 온 가옥에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에 앞서 10월 18일 제주해안을 봉쇄했다. 제주도의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유일한 지역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됐다. 제주에 주재기자를 뒀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의 지사장이 끌려가 총살됐다. 급기야 토벌대는 제주신보를 아예 접수, 서북청년단장을 사장에 앉혔다.
또한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9연대 장병 1백여명이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처형됐다. 희생된 군인들은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같은 시기인 11월 1일 제주도 경찰당국은 경찰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무장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군인과 경찰들은 바닷물 속에 수장됐다는 풍문만 전해질 뿐 대부분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로써 초토화작전의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주읍내에서는 제주도청 공무원을 비롯해 교육계와 언론계 등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심지어 제주지방법원장 등 법조계 인사들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중학교 교장, 제주도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학살됐다. 심지어 제주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끌려가 죽었다. 읍내 사정이 이 정도이고 지방 주민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중산간 초토화작전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4·3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형제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한 유족들의 한은 크고 깊었다. 그 많은 상처들을 어떻게 가슴에 묻고 살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50년 묵은 한을 토해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가엔 어느덧 이슬이 맺힌다. 10년간 취재를 했으면 이골이 날만도 한데 여전히 목이 메인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증언을 들을 때가 많았다.
토벌대는 우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아래 갑자기 들이닥쳐 무차별 총살하고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구좌면 상도리 출신의 오맹은 씨(58)는 1948년 12월 5일 졸지에 고아가 됐다. 이날 오 씨의 할아버지 오지현(당시 54세), 아버지 오문형(28), 어머니 김정숙(29), 그리고 동생 오차은(7)과 오계은(5)을 잃었다. 한 살난 여동생은 굶주리다가 며칠 후 숨졌다.
"그날 오후 갑자기 비가 내리자 땔감이 젖지 않도록 손보기 위해 온가족이 나섰습니다.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토벌대가 들이닥쳤습니다. 맨 뒤에 오던 나는 문 뒤에 급히 숨었습니다. 토벌대는 갑자기 총을 쏘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토벌대가 가버린 후 황급히 마당에 들어서니 이미 모두 숨졌고 젖먹이 여동생만 불타는 집 마루 위 애기구덕 속에서 울고 있었지요. 아기는 업고 나왔지만 먹이질 못해 곧 죽었습니다. 난 지금도 그들이 눈을 뜨고 우리가족을 쏘았는지, 눈을 감고 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말못하는 짐승에게도 그렇게 할 순 없는 일입니다"
오 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 씨가 여덟살이던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힘에 겨워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 씨의 아내는 "남편은 입버릇처럼 '내가 열다섯살만 됐어도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 불타지 않게 할 수 있었을텐데…'라며 두고두고 한탄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무차별 학살극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더욱 깊은 산중으로 도망치게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점점 조여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을 피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아낙네들도 등에는 이불을, 머리엔 솥단지를 얹은 채 어린 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겨울 한라산으로 향했다. 얼어 죽지 않으려 자연굴을 찾아 헤맸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로 내려와 숨겨논 식량을 파갔다. 토벌대에게 걸려 온가족이 몰살하기도 했고, 급히 숨어 혼자 구사일생한 사람들은 가족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안덕면 상천리 출신인 정갑선 씨(여, 70)는 엄마가 아기의 입을 틀어막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시집식구들과 피신생활을 했는데 매일이다시피 토벌대가 올라와 총을 쏘았습니다. 도망치다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먼저 총에 맞았습니다. 한 번은 토벌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을 때 두 살난 여조카가 계속 울어대는게 아닙니까. 동서는 급히 자기 딸의 입을 틀어막았지요. 그런데 그만 질식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즈음 부근의 한 초기밭(표고버섯 재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난 친정의 남동생 세명도 죽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3백여구의 시신이 있더군요. 어린아기들도 엄마에게 안긴 채로 여럿 죽어 있었습니다. 어린애들을 모두 들춰 보았지만 동생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산중을 헤매다 잡힌 안덕면과 대정면 주민들중 많은 사람들이 서귀포 정방폭포 앞으로 끌려와 집단학살됐다. 토벌대는 반년이나 지난 후에야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썩어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안덕면 동광리 출신 임문숙 씨(73)는 지난 가을에도 큰어머니, 어머니, 아내의 합동 무덤에서 벌초를 했다. 그러나 그 무덤에는 시신이 없다. 임씨가 섭섭한 나머지 빈봉분에 혼을 불러와 만든 '헛묘'일 뿐이다.
대정면 영락리에서는 지난 1993년 한 할머니가 80세의 일기로 작고했다. 그 할머니의 남편 송군옥은 바로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된 사람이었다. 그 할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눈이 멀어 40여년간 한맺힌 삶을 살았다. 주민 백문수 씨(68)는 어린 손녀가 눈 먼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길을 지나가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당국에서 시신 수습을 허용하자 송군옥씨의 아내는 남편을 찾으려 정방폭포 부근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미 시신이 문드러진데다 그 많은 시신중에 자기가족을 찾기란 불가능했지요. 다들 포기했지만 그 분은 울며 불며 열이 팡팡 나는 시신을 미친 듯이 모두 들춰보았습니다. 그러다 시신의 독이 묻은 손을 눈에 갖다대는 바람에 그때부터 눈이 멀어 40여년간 캄캄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겨우 움직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해변마을의 학살극
초토화작전의 학살극은 중산간마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개령(疎開令)에 따라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리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됐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본래 해변마을이 고향인 주민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보초를 서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끼니를 굶으면서도 토벌대의 밥상에는 고기반찬을 올려야 했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혐의가 있다며 총질을 했다. 보초서다 졸았다고 총살하기도 했다. 안덕면 화순리의 박갑송(당시 25세)은 밤새워 보초를 서다 이상한 물체가 보이자 큰소리로 수하를 했다. 술에 잔뜩 취해있던 토벌대는 자신을 놀래켰다며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함께 보초서던 한 사람은 목숨은 구했으나 심한 구타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정신이상자로 살다 얼마전 작고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성산면 시흥리의 박태수 할머니(당시 60대 중반)에게는 스물살 가량의 손녀 오아무개가 있었다. 오아무개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북청년단원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화가난 토벌대는 할머니를 대낮에 길가로 끌어내 총살했다. 안덕면 감산리의 강매옥(당시 19살)은 군인들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강매옥의 언니인 강경옥 씨(78)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중에서 '최 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교전 중에 숨진 무장대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주민들이었다. 무장대의 기습공격을 받은 직후엔 반드시 화풀이 학살극을 벌였다. 해변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는 50년 전부터 매년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마치 명절처럼 집집마다 제사를 지낸다. 사건의 발단은 1949년 1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일부 병력이 이동 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두명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노인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총살했다. 곧이어 2개 소대의 병력이 북촌리를 덮쳤다. 군인들은 모든 가옥에 불을 붙이면서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에 집결시켰다. 이때부터 자행된 학살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돼 남녀노소 약 300명이 숨졌다. 군인들은 '내일 아침까지 대대본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돌아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학살극을 치렀으니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거라는 사람들과 군인들의 행태로 보아 또다시 총살할게 분명하다는 사람들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런데 산으로 피한 사람들은 무사했지만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대대본부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총살됐다. 흔히 '북촌사건'으로 알려진 이때의 희생은 북촌리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북촌리 옆마을인 구좌면 동복리 주민들도 마을의 속칭 '굴왓'으로 끌려가 집단학살됐다.
집단광기
4·3 때 제주는 이미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집단 광기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잇따라 벌어졌다. 서귀면 서호리의 오방화 여인(당시 36세)은 물동이를 지고 가다가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얼굴 광대뼈 밑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오방화는 총에 맞은채 필사적으로 집을 향해 기어갔다. 오방화의 아들 김만오(당시 16세)는 깜짝놀라 어머니를 감싸 안았다. 그때 뒤쫓아온 군인들이 김만오의 뒤에서 총을 쏘았다. 총알은 엉덩이에서 사타구니까지 관통한 후 다시 그의 어머니의 허벅지를 뚫었다. 50년 세월 한을 삭히며 살아온 김만오 씨(66)는 취재반에게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날의 사건은 내 인생을 바꿔버렸습니다. 난 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흉칙한 상처에 약을 발라야 합니다. 일제 때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타메시키리(試斬)'란 악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새 칼을 만들면 과연 진검인지 그 성능을 시험하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을 베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에겐 칼을 쥐면 찔러보고 싶고, 총을 잡으면 쏘고 싶은 잔인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엔 그런 심리가 숨어있다가 난리가 나면 드러나지요. '4·3'이라는 난리가 군인들을 광기로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의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나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안 씨는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했다"고 말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마당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했다. 4·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됐다. 이 때 한 증언자는 내도한 국회의원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고 폭로했다.
서청의 만행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제주도민들이 4·3을 이야기할 때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서청의 만행은 4·3발발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 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을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됐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출신은 경찰들도 꼼짝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말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주둔 토벌대를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했다. 2연대가 들어오면서 서북청년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파견을 앞장서 독려했다. 미군 장교들 역시 이에 개입했다. 연대 내에 서청으로만 구성된 '특별중대'가 편성될 정도였다.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포, 구좌면 월정리, 한림면 한림리에서는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연일 총살극이 벌어졌다. 성산포의 속칭 '터진목'은 대표적 학살터이다. 한 증언자는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곳에서 보초서던 순경조차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다"며 "그 순경은 병을 고치려 무당 불러 굿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날의 사연들은 너무도 처절해 상상력을 압도한다. 비슷한 증언을 들었으면서도 언제나 머리가 쭈삣 서고 소름이 돋는다. 단순히 총맞아 죽은 희생은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애써 증언을 듣다가도 갑자기 가뿐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는 연로한 증언자를 대하면 은근히 걱정도 되고, '도대체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70)는 학교의 등사판이 없어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었다. 서청이 "폭도들 삐라제작을 위해 빼돌린게 분명하다"며 교사들을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홍 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하게된 가슴아픈 사연을 이렇게 털어놨다.
"서청이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도 있었습니다.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엔 그 냄새로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인데 한달만에 풀려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라는 서북청년단 간부와 결혼해 있더군요. 날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겁니다. 현재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정 선생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밖에도 더 이상 차마 글로 표현키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어떻게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었는가. 서청도 인간인데 갑자기 악의 화신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을 때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학살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의문은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도 역사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집단 광기는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집단광기로 몰아넣었는가. 도대체 누가 사설단체인 서북청년단에게 무기를 주어 학살극을 조장했는가.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살피는 것이 4·3진상규명의 열쇠라 할 것이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바로 이승만과 미군에 그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전과(戰果) 올리기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서도 19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은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때이다. 이무렵 토벌대는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오기도 했다. 그래야 전과(戰果)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 서청 출신 증언자는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주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25일 서귀면 주둔 토벌대는 작전을 마치고 내려올 때 길목인 서홍리를 들렀다. 서홍리 주민들은 그 때 토벌대의 손에 들린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 할머니는 "어떤 여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을 들고 내려오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전과를 확인시키기 위해 목을 잘랐다는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난 1992년 북제주군 중산간의 속칭 '다랑쉬굴'에서 시신 11구가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취재결과 그 유골들은 1948년 12월 18일 중산간에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던 토벌대가 굴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발견, 연기를 피워 질식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희생자 중에는 여자와 아홉 살 난 어린이가 포함돼 있었다.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따로 세웠다. 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비춰가며 젊은여자들을 불러냈다. 불려나온 15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들은 18일과 19일 이틀동안 총살했다. 한 유족은 "만일 사상문제를 구실삼는다면 18세부터 40세까지만 사상이 있으며, 유독 젊고 예쁜 여자들만 사상에 연루됐겠느냐"고 항변했다.
또 그즈음에는 '함정토벌'과 '자수사건'이 잇따랐다.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됐다.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수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주민들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하여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하모리에서 48명이 희생됐다. 주민들은 이를 '자수사건'이라 부른다. 조천면에서는 '자수'한 사람 150명 가량이 1948년 12월 21일 제주읍내 속칭 '박성내'로 끌려와 총살됐다. 토벌대는 몇몇 사람이 총에 맞은채 꿈틀대자 모든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성내에서의 학살극은 형살장에서 총에 맞고도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 씨(작고)에 의해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김 씨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에는 총알 자국이 움푹 파져있었다.
그무렵 무장대 협조자의 명단이 발각됐다며 집단총살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을 해야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앞서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양 씨는 "매에는 장사가 없다.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남원면 신흥리 주민들은 당시 김성홍 구장에게 '몰라 구장(區長)'이란 별명을 붙였는데 이 별명은 지금도 인근 마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김 구장에게 자꾸 주민들의 성향을 캐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이 희생으로 이어질게 뻔했기 때문에 구장은 '모른다'로 일관했다. 심지어 공문조차도 모른다며 처리하지 않았다. 그후 그에겐 '몰라 구장'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여졌다.
경기도 파주 출신인 김호겸 씨(82)는 4·3발발 직전 내도해 1951년 경남경찰국으로 옮겨갈 때까지 서귀포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는 등 사태 한복판에 있었다. 김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서청 출신 등 일부 경찰은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극구 말렸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무조건 주민을 잡아다 고문을 했고 '어수다, 모르쿠다(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하면 들녘으로 끌고가 총살했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에도 불구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습니다"
이상 살펴본 사건들은 모두 1948년 12월 중순부터 말까지 벌어진 사건들 중 일부이다. 이 기간동안 이같은 사례는 너무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토벌대는 왜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펼쳤을까. 자수사건이든 함정토벌이든 희생자들은 산중에서 잡아온 무장대가 아니라 멀쩡히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 이와 관련, 한 미군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고 분석했다(주한미군사령부, G-2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주둔 9연대는 12월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예비검속
1949년 봄 사태는 완화됐다. 약간의 희생은 이어졌지만 집단학살극은 그쳤다. 무장대는 궤멸했고 이제 '4·3'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는 또다시 큰 희생을 몰고왔다. 정부는 전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예비검속'했다. 제주에서는 과거 한 번이라도 토벌대에게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 또다시 대거 구금됐다. 무죄로 판명돼 석방됐다 하더라도 한 번 붙은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닌 것이다. 대정면의 한 공동묘지에는 이때 희생된 132명의 집단묘역이 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섯알오름 부근 일제시대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토벌대는 수년간 현장에 접근조차 못하게 했다. 유족들이 찾았을 때 이미 살이 썩고 뼈가 뒤엉켜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대충 뼈를 맞춰 무덤을 조성했다. 그리고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에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명명했다.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은 비록 유족들이 자기 조상을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뼈라도 남아있는 경우이다. 도내 곳곳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자 학살은 주로 배에 태워 바닷물에 빠뜨려 죽이는 방법이 동원됐다. 이들 유족들은 조상의 무덤도 없다.
이무렵 제주의 젊은이들이 대거 자원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3기와 4기는 대부분 제주출신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고향은 전쟁터보다도 무서운 곳이었다. 대정면 안성리의 이두생 옹(82)은 "오죽했으면 자원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나갔겠느냐"면서 "나는 당시 35살이라 징집대상이 아니었지만 부득불 우겨가며 육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승만과 계엄령
초토화작전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계엄령을 근거로 전개됐다. 무분별한 학살극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초토화작전 때는 전도에 걸쳐 동시에 집단학살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4·3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만큼 제주도민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용어도 드물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의 4·3증언 속에는 반드시 "계엄령 시절이니까…"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은 심지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쯤으로 계엄령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증언 말미엔 '시국 탓'이라 체념하며 애써 분을 삭인다. 실제로 토벌대는 총살극을 벌이며 "계엄령은 사람 죽이는게 계엄령"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그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계엄령이 선포된 11월 중순께 4·3이 발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할머니들도 많다.
아무튼 취재반은 계엄령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미궁에 빠졌다. 4·3취재에서 계엄령만큼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도 드물었다. 대부분의 4·3기록이 계엄령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언제 선포됐다가 해제됐는지,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우선 선포날짜가 제각각이다. 대부분의 국내서적은 10월 8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 날짜는 출처불명인데 언젠가 한 번 쓰여진 후 그에 대한 검증없이 새끼치듯 재생산된 듯하다. 미군보고서는 11월 17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계엄선포는 무근지설'이라며 부인하는 기사를 썼다가 곧 11월 21일에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보도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즉시 공고하고 국회에 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조차 그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은 당시의 혼란상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던중 취재반은 총무처 산하 정부문서보존소를 통해 계엄령과 관련된 두 건의 '대통령령'을 입수했다. 대통령령 제31호는 다음과 같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단기 4281년 11월 17일
국무위원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李範奭)
국무위원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국무위원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국무위원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국무위원 법무부장관 이 인(李 仁)
국무위원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국무위원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국무위원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국무위원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국무위원 교통부장관 허 정(許 政)
국무위원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국무위원 이윤영(李允榮)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전원의 친필서명이 들어간 이 문서는 1948년 11월 17일자로 계엄을 선포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계엄 해제에 관한 문서는 '대통령령 제43호'로서 "제주도지구의 계엄은 단기 4281년 12월 31일로써 이를 해지한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계엄선포 날짜는 오직 미군보고서만 정확한 것으로 판정났다.
그런데 과연 당시 선포된 계엄령이 합법적이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뿐이다. 당시 계엄령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제헌헌법은 분명히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했는데, 계엄 선포일은 물론 계엄 해제일까지도 '계엄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 공포됐다.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게 없으니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9연대장조차도 헷갈렸다.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등 제주경찰 고위간부직을 역임했던 김호겸 씨(82)는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계엄령은 모호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 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하라는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취재반은 이승만대통령이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1997년 4월 '불법 계엄령'이 기사화되자 즉각 법제처의 반론이 나왔다. 법제처의 반론인 즉, 일본 왕의 칙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도 시행됐던 일제의 계엄법이 바로 '4·3계엄령'의 근거라는 것이다. 요컨대 제주4·3 때의 계엄령은 그 때까지 계속 효력이 있는 일제의 계엄법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벌어졌던 '불법 계엄령'을 둘러싼 『4·3은 말한다』 제5권(1998년 4월 간행)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여기서는 한가지만 지적코자 한다. 제헌헌법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1919년 벌어진 3·1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해방 후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일제 식민지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계엄법을 4·3계엄령의 법적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궁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면, 이후에 제정된 계엄법이든 법제처가 근거로 삼는 일제의 계엄법이든 '자식이 사라졌다고 부모를 죽이라'거나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죽이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제주4·3 때 도민들은 재판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채 '즉결처형'됐다.
미군의 역할
당초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미군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활발히 벌어진 미군정 연구 성과는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었고 취재반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4·3과 관련해서는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증언자들에게 물어보면 '그 때 미군 구경도 못했는데 웬 미군 이야기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그즈음 국내에 소개된 미국학자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반란」이나 1988년 동시에 나온 두편의 석사학위 논문은 취재반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주한미군사령부의 이른바 「G-2 보고서」를 인용함으로써 미국측 자료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켜 주었다.
) 양한권,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서울대 정치학과, 1988)
박명림,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정치외교학과, 1988)
취재반은 이들 미국 자료를 입수한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4·3과 관련된 국내 자료는 매우 단편적인 것 뿐이었는데 이들 미군보고서는 매일 매일의 제주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4·3취재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 보고서는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인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에 유의를 해야한다. 또한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사소한 내용까지 시시콜콜하게 보고되던 것이 정작 엄청난 양민학살이 벌어졌던 초토화작전 기간의 것은 거의 누락돼 있다. 이는 미국이 보고서의 비밀해제를 선별적으로 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누락시켰을 것이라 추정된다. 4·3 뿐아니라 한국현대사 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자료들이다.
)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Hq, USAFIK, 「G-2 Weekly Summary」 (이상은 1986년 『미군정보보고서』(총 15권)라는 제목으로 일월서각에서 영인본으로 발행돼 나왔다. 이중 「G-2 Periodic Report」인 경우는 1989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도 영인본을 발행했다. 일월서각 영인본이 48년 12월까지의 내용인 반면, 뒤늦게 나온 한림대 영인본에는 49년 6월까지의 내용이 수록돼 있어 모두 4.3취재에 도움을 줬다)
Hq, USAFIK, 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 Semi-Monthly Report」(보통 CIC(방첩대)보고서라 불리는 이 문서는 1995년 역시 한림대에서 영인본으로 나왔다)
미군 자료로는 이밖에도 PMAG(임시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트 준장의 공한철과 『HUSAFIK』(주한미군사)가 있다.
미군보고서에 푹 빠져 샅샅이 훑어가던 취재반은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4·3의 결정적 고비마다 그 배후의 정점에 미군이 있었다는 의혹을 버릴 수 없었다. 1975년에 쓰여진 존 메릴의 「제주도반란」은 최초의 4·3논문이다. 그런데 존 메릴은 미국의 책임을 애써 외면했다. 취재반은 지난 1990년과 1992년 두차례 존 메릴과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존 메릴은 4·3이 미군정 시절에 발발한 데 대해서는 미군정의 실책을 인정했지만, 대량 인명희생을 가져온 초토화작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라는 점을 들어 미국의 책임을 부인했다.
) 『4·3은 말한다』제2권 부록 참조.
그러나 당시 주한미군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고려할 때 존 메릴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미군정이 끝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9일만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대통령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주한미군사령관은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무장할 것을 동의하며... 대한민국 국방군(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경찰 파견대를 포함함)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여전히 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재반이 각종 미군자료를 검토한 결과, 초토화작전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있었다.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8년 10월 9일자 임시군사고문단은 이렇게 보고했다.
"현재의 모든 장비와 지원, 그리고 계획된 작전은 최소한의 미군 개입으로 적절한 지휘계통을 통해서 한국인에 의해 조종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 5여단은 적절한 지원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따라 미군 고문관들이 한국인 채널을 통해 즉각적 수정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
'즉각적 수정조치'를 촉구하는 이 보고서가 나온지 이틀만인 10월 11일 제주도에는 5여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신설됐다. 토벌군 사령관이 연대장 급에서 여단장 급으로 격상한 것이다. 이어 10월 17일에는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때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는 포고가 발포됐다. 이처럼 강경토벌작전은 미군 고문관의 통제 아래 이뤄졌다.
위의 임시군사고문단의 보고서 보다 하루 앞선 10월 8일 미 6사단은 '제주해안에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잠수함이 발견됐다'고 보고했다. 이 내용은 며칠 후 국내언론에 보도됐다. 그런데 보도에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 그려진 깃발'이 어느덧 '인민공화국기'로 부풀려져 있었다. 제주도 사태를 북한과 연계시킨 것이다. 이는 즉각 강경토벌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괴잠수함 출현설도 제주도경비사령부 신설을 촉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전에도 미군보고서는 여러차례 괴선박 출현을 보고했는데, 보고 시점은 언제나 제주도 작전이 강경으로 치닫는 고비였다. 즉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직후인 1948년 8월 25일에도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이런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을 네가지 들었는데 "제주도 근해에 괴선박이 출현한 것"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그런데 미군은 4·3이 거의 마무리될 시점인 1949년 4월 1일에야 자신들의 정보를 스스로 부인했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한국해군정의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 정찰 및 해안마을에 대한 경찰의 빈틈없는 방어는 외부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이처럼 미군자료를 보면서 황당했던 경우는 한두번이 아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미군보고서에는 초토화작전 시기가 거의 누락돼 있는데 취재반은 그런 가운데 단 3건의 보고를 발견했다. 다음은 그중 하나이다.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76명의 반도들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5명의 여인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국립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가 그 작전을 감독했다. <논평> 4명의 미군사고문단 일행이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처형돼 있었고, 38명의 처형은 우연히 목격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이 학살극을 우연히 목격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초토화작전의 근거였던 계엄령 문제만 하더라도 그 날짜를 정확히 기록한 자료는 오직 미군보고서일 뿐이며 국내자료는 모두 틀리다. 그런데 미군도 '불법적인 계엄령'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같다. 미군은 제주도에 계엄령(martial law)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스스로의 보고서에 기록했다. 그러던 미군은 유혈사태가 어느정도 일단락된 때에 이르러서야 "계엄령이 선포된 바가 없다."는 놀라운 내용의 보고서를 남겼다.
"2월 5일 김동성 한국 공보처장은 지난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됐던 제주도 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는 한달 전에 해제됐지만 그 효력에 대한 공식적인 사전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논평>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령은 현 한국정부에 의해 선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의 초토화작전 방침은 4·3발발 초기에 이미 가닥을 잡고 있었다. 4·3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수행후 미국행 알선과 10만 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 연대장 시절에 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씨도 "CIC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자신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미 CIC 장교가 그 해 5월 김익렬 연대장에게 제안했던 초토화작전이 5개월만에 실제상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은 『4·3은 말한다』 제2권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미군은 또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단과 관련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의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미군자료를 읽다보면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미군은 보고서에서 줄곧 희생자들을 대부분 반도(叛徒)라고 표현하며 마치 교전 중에 대단한 전과를 거둔 것처럼 기록했다. 그러던 미군은 4·3이 다 끝난 시점인 49년 5월에 가서야 "반도의 대부분은 결백하다"고 기록했다.
"남한측 정보에 의하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제주도에서 보안군과 반도의 손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반도 1,075명 사망; 반도 3,509명 투옥; 반도 2,065명 자수; 반도로부터 자동소총 3정, M-1소총 23정, 카빈 26정, 일제 38식총 24정, 일제 44식총 4정, 일제 99식총 105정, 권총 8정을 노획했다. 작전중에 보안군 32명 사망; 17명 부상; 기관총 2정, M-1소총 4정, 카빈 8정을 반도에게 탈취당했다. COMMENT: 보안군은 섬 안쪽 산악지대의 모든 주민들을 자동적으로 반도로서 분류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이 보고서에 언급된 「반도」(rebels) 중 다수는 명백히 결백하다."
이 보고가 나온 다음날인 19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무사히 치러졌다. 만 1년전인 '5·10선거' 때 도민들이 보이코트했던 두 개의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인 것이다. 이어 5월 15일에는 마무리 토벌을 주도했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산됨으로써 사태의 전반부가 일단락됐다.
초토화작전의 배경
이제 논의의 초점은 '왜 이승만과 미군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는가'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이를 밝히기 위해선 당시의 국내정치 상황, 그리고 미·소간 냉전이 심화되던 국제정치 상황을 아울러 살펴야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사에 대한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는 미미하다. 현대사 중에서도 미군정 연구는 일부 이뤄져 왔지만 정부수립 이후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는 극히 드물다. 그런 가운데 1996년에 출판된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와 박명림(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강사)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취재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아무튼 초토화작전의 단서를 찾기 위해 대학살이 벌어진 1948년 11월 중순을 전후한 국내외 상황을 도표와 같이 일지로 정리했다. '왜 그 시기에 벌어졌나'라는 문제는 사건 성격을 파악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선 단편적인 일지 내용만으로 살펴본다면, '1948년 11월 중순'은 남북에 각각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한 통일운동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둘째,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돼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이 크게 위협을 받았고, 여수 14연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이다.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도 이 때였다. 셋째, 미·소간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군의 철수 문제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국내외에서 벌어지던 때였다.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런 국내외 상황들이 제주4·3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급기야 초토화작전까지 벌어지게 됐는가.
날 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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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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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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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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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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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독트린' 계기로 미소 냉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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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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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미군정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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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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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 이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계속 미군에 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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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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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군사고문단(PMAG)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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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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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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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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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김규식, 유엔총회에 전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 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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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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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연말까지 북한주둔군 철수할 것임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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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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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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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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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안 잠수함 출현설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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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군철수 연기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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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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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고문관, 제주작전에 미군의 효율적 개입을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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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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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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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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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군철퇴 긴급동의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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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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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대장 포고령 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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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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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 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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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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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연대 반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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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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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작전 개시. 중산간 방화와 무차별 학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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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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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특사 무초, 남한 혼란을 이유로 미군철수 연기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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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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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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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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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미군 계속주둔 요구 결의안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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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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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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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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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한국정부 승인하면서 미소양군 조속 철수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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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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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성, 미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 연기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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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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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북한주둔 소련군 철수 완료했음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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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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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대 제주 주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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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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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전투사령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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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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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철수, 6월말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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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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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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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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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전투사령부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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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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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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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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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프락치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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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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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안두희에게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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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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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철수 완료(군사고문단 5백명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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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위기
우선 군통수권자로서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이승만을 중심으로 국내 정치상황을 살펴보자.
학계의 연구성과를 종합해 보면, 한동안 이승만의 처지는 '정치적 위기'로 집약해 표현할 수 있다. 위기는 정부수립 전부터 시작됐다.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놓고 지배세력 간에 이권다툼 성격의 갈등이 빚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은 권력 분점을 위해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한민당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 발표 때 한민당이 철저히 소외되자 양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이에 앞서 국회는 이승만의 첫 국무총리 지명자를 거부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 앞에 닥친 문제는 산적했다. 반대세력을 물리쳐 정권을 안정시키는 일이 시급했고, 유엔으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이를 위해선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가 절실했다. 또한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떠오른 친일파문제, 통일문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러나 모든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회 내에서도 이승만은 열세였다.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은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친일파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는 해방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이미 경찰과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정이 일제경찰을 옹호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장에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는 협박장이 살포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1948년 9월 1일 마침내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과도 결별한 마당에 정치기반인 친일파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과 관련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수립 후 다시 분출한 통일논의도 이승만에겐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948년 9월 15일 김구와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전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10월 13일에는 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한 47명의 의원이 '외군철퇴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또 9월 15일 미군 일부가 비밀리에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는 피할 수 없는 대세였다. 이승만에게는 통일논의나 주한미군 철수 모두가 국가의 정당성, 존립 등과 관련된 심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소위 '여순사건'이 터졌다(10월 19일 발발). 미군의 진두지휘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됨에 따라 사태는 8일만에 마무리됐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쓰러뜨릴 기회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태를 사실대로 보고하거나 축소해야 할 터인데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사태를 과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항간에는 백범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라는 낭설까지 떠돌았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최대의 정적인 김구까지도 궁지에 몰아넣을 '호재'였던 것이다. 이미 해방정국에서도 보여줬듯이 이승만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세우는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군 내부에 숙군 선풍이 불었다. 11월 2일에는 대구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숙군의 속도와 강도를 높여줬을 뿐이다.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12월 1일 공포). 전날인 11월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은 '친일파 정국', '통일 정국'에서 급속히 '반공 정국'으로 변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일제 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등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살벌한 논리에 밀렸다.
국가보안법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 법에 의한 첫 상징적 희생양은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조작임이 밝혀지고 있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바로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섰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피습사건, 김구 암살사건과 함께 모두 1949년 6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비로소 권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철수는 바로 이런 일들이 있고 난 직후인 1949년 6월말 완료됐다.
이상 제주에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1948년 11월 중순을 전후한 국내 정치상황을 살펴봤다. 그러면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왜 이승만은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이라는 잔혹한 학살극을 벌였으며, 하필 '1948년 11월 중순'이라는 시기를 택했을까.
우선 초토화작전의 배경으로 여순사건이 거론된다. 여순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제주에서 강경진압을 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 시기 제주사건과 관련한 신문보도 내용을 보면,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는 10월의 상황보고와는 달리 여순사건이 끝난 후인 11월초에 접어들면 오히려 "반란은 완전 종식됐다."고 큰소리쳤다. 실제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전에도 토벌대는 노약자나 부녀자 등 저항조차 못하는 비무장 일반주민을 총살하기 일쑤였다. 실정이 이럴진대, 왜 11월 중순부터 더욱 가혹한 학살극을 벌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이승만이 여순사건을 구실로 여러 난제를 '정면돌파'해 정치적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여순사건이 초토화작전의 한 배경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는 미군철수 문제와 관련해 초토화작전의 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승만은 미군이 한국군의 지휘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군대 육성에 소홀히 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주한미군 철수를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은 11월 초 5만 병력의 훈련과 장비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국군'이란 명칭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약속했던 군사·경제 원조도 지지부진 했다. 더구나 그 당시 미국의 방침은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할 때를 대비, 그 전에 빨리 제주상황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세번째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유엔의 정부 승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했고, 유엔총회 회기 중에 정부가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혹시나 정통성 문제를 야기시킬지도 모를 국내문제, 특히 총선을 보이코트했던 제주도사태를 시급히 처리하려는 조급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제주도가 언론이 통제된 고립무원의 섬이라는 점도 꺼리낌없이 무차별 학살을 하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란 존재와 국내정세만을 놓고 초토화작전의 배경을 따지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흡하다.
미군철수
'제주4·3' 때 벌어진 초토화작전과 미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군이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의 현장에 있었고 배후의 정점에서 작전에 개입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미군과 초토화작전을 불가분의 관계로 묶는다.
박명림은 그의 석사학위논문 「제주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에서 미군이 초토화작전에 개입하게된 이유로 '상황론'과 '음모론'을 아울러 제시했다.
'상황론'은 당시 정황에 근거한다. 즉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요지는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무산된 점과 1949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군이 그리스민주주의군대의 온건한 정전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초토화전술을 구사한 것과의 유사성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4·3봉기는 오히려 미제국주의가 먼저 민중을 유도하여 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치는 작전으로서 계획적이요 의도적인 하나의 민중공격작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음모론의 경우 구체적 근거와 더욱 심화된 연구성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직은 '주장' 단계로 보인다.
아무튼 왜 미군은 초토화작전을 감행했을까. 취재반은 철수를 앞두고 있던 당시 주한미군의 처지에서 그 단서를 찾기로 했다. 그 무렵 소련은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말까지 북한에 주둔한 모든 소련군을 철수시키겠다면서 남한 주둔 미군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소련의 공세가 아니더라도 미국 역시 연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워싱턴 최고위급의 대한정책에서 내내 논쟁거리였다. 미군철수를 둘러싼 미국 내의 논쟁은 '왜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는가'라는 의문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러면 우선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추이를 학계의 연구를 바탕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세계전략은 1947년 3월 12일 발표된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주의 봉쇄정책을 천명한 트루만 독트린은 전쟁 종식 후 급속히 진행된 동원해제와 전쟁경제 해체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됐다. 냉전이 시작될 때 오히려 미군철수가 추진됐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는데, 이는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이 유럽에 한정됐고 한반도는 부차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곧 주한미군 장기 주둔을 주장하는 국무성과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군부(국방성, 육군성 등) 간에 지루한 논쟁이 시작됐다. 국무성은 이데올로기 격전장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소 대결에서 패배해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위신문제였다. 따라서 미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군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또 2차대전 동원체제 해제로 인한 병력감소와 군비삭감으로 더 이상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수 없다고 강력 주장했다.
이런 논쟁 속에서도 대한정책의 핵심은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해야 한다는 과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철수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있었다. 결국 국무성과 군부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의견절충을 벌인 끝에 양자간 타협안으로서 대한정책의 최종지침서 격인 'NSC-8'과 'NSC-8/2'가 발표된다. 미군철수 일지는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8일=미 대통령, 'NSC-8'을 승인함에 따라 1948년 12월 말까지 미군을 철수키로 잠정 결정
△1948년 9월 15일=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
△1948년 9월 19일=소련, UN결의에 따라 북한주둔 소련군을 연말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
△1948년 11월 12일=미국 특사 무초, 여순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면서 미군철수를 연기토록 요청
△1948년 12월 12일=UN총회, 대한민국을 승인하면서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
△1948년 12월 17일=국무성,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결정한 'NSC-8'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
△1948년 12월 25일=소련, 북한 주둔군을 완전 철수했다고 발표
△1949년 3월 23일=미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를 1949년 6월 말까지 연기한 대한정책지침서 'NSC-8/2'를 승인
△1949년 6월 30일=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완료
이상의 일지를 살펴볼 때, 우선 여순사건이 주한미군 철수 연기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1948년 12월 말까지 철수키로 결정한 'NSC-8'에 대해 국무성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철수시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벌어지던 시점에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1948년 11월 중순부터 개시)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의 입장과 국내외 정세를 바탕으로 '미군이 왜 초토화작전에 개입했느냐, 그리고 왜 11월 중순을 택했느냐'는 의혹의 단서를 찾아보자.
첫째, 국무성의 입장이 관철됐다는 추정이다. 국무성은 초지일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주한미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의 주장에 따라 철수가 결정됐고, 12월 말로 정해진 철수시한이 임박하자 강공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정에는 국무성이 과연 군부의 하부조직인 주한미군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따른다.
둘째, 조속히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던 군부의 입장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군부는 여순사건 등 한국 내 혼란을 국무성이 문제삼음으로써 이미 결정된 철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조짐이 보이자 '철수의 걸림돌'을 서둘러 제거하고픈 조급함이 있었을 것이다. 군부가 철수강행을 주장하면서 '여순사건이 해결됐음'을 강조한 점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셋째, 주한미군 차원에서 초토화작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다. 본토에서의 논쟁이 '철수 불가피론'으로 기울자 현지를 책임지고 있는 주한미군사령부, 특히 군사고문단으로서는 철수에 앞서 한국 내 문제를 서둘러 '정리'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미국내 철수논쟁의 핵심은 '과연 남한정부가 공산주의의 방벽이 될만큼 자생력을 갖췄느냐'는 문제였다. 국무성을 설득해야 하는 군부 역시 무조건 철수를 주장하던 초기와는 달리 남한정부의 자생력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따라 미군은 여순사건 진압과 숙군작업에 앞장섰고, 경찰과 경비대에 서북청년단을 투입했다. 1948년 11월 중순 제주도에서 전개된 초토화작전은 바로 이런 시점에 벌어진 것이다.
후유증
4.3을 연구했던 미국학자 존 메릴은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 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1988년 봄 취재반이 처음으로 현장 증언채록에 나섰을 때 이 표현은 너무도 무색했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이를 막았다. "이 하르방(할아버지)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지금까지 4.3으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거나 연구된 바는 없다. 여기서는 취재반이 10년간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몇가지 소개함으로써 그 흔적들을 드러내려 한다.
반발심도 '적당히'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 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오랜 기간 계속된 군부독재는 도민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4·19는 유족들이 한을 풀어낼 호기였다. 국회에 양민학살진상규명을 위한 특위가 구성됐고 희생자 조사도 벌였다. 그러나 곧 이어 발생한 5·16쿠데타는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진상규명에 앞장서던 사람들은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그 후 누구도 4·3을 입에 담지 못했다. 몇몇 문인들에 의해 4·3의 잔혹상이 폭로되긴 했지만 일부나마 유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40년이나 흐른 뒤였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러 사건발발 5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유족들의 피해의식은 상상을 넘어선다. 취재반은 한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 가급적 그 지역에서 발이 넓고 평판이 좋은 노인들을 찾는다. 그런데 이들을 취재하다가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취재반의 질문에 마을의 온갖 사건들을 증언하던 한 노인은 정작 자신의 어머니가 희생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취재반이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확인하면 그때서야 실토했다.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희생자 조사를 벌일 때도 많은 유족들은 신고를 기피했다. 농민들 보다는 공무원이나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신고를 기피했다. 그들은 연좌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자신이 겪었던 연좌제 피해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자식에게 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자신의 부모가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촌로였음을 강조했다. 사상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낳은 현상이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의 부모를 총살한 토벌대 보다 '사태를 유발시킨' 무장대를 원망했다. 심지어 위령제 때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의 위패가 보인다면서 자기 부모의 위패를 거둬가기도 했다.
그동안 유족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증언했을 때는 바로 '광주청문회'가 벌어질 때였다. 뒤이어 등장한 이른바 '문민정부'도 도민들에게 한가닥 기대감을 심어줬다. 그러나 그후 아무런 진상규명 조치가 없었고 걸핏하면 터지는 간첩사건도 유족들에겐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에 취재반이 증언채록에 가장 애를 먹었을 때는 바로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였다. 취재반은 유족들의 이런 심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인들은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가 한 증언이 문제가 될게 아니냐'고 걱정했다.
정면에서 진상규명 요구하는 일부 유족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말없는 다수'일 뿐이다. 이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곪아가고 있었다. 당시 아들을 잃었던 90대 할머니의 가슴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고 목에는 아기 주먹만한 혹이 나 있었다. 가슴을 치며 목으로 피를 토하다 보니 그리됐다는 것이다. 구좌읍 한동리의 한 할머니는 육지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10년간 경상도와 강원도를 헤맸다고 했다. 당시 유복자로 태어났거나 젖먹이이던, 현재 50대의 유족들중에는 혹시 아버지 사진이나 남아있을까하여 육지의 형무소를 찾고 있었다.
이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김종민, <제주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42 (1998)
4·3 이란
초토화작전 전야
중산간 초토화작전
해변마을의 학살극
집단광기
서청의 만행
전과(戰果) 올리기
예비검속
이승만과 계엄령
미군의 역할
초토화작전의 배경
이승만의 위기
미군철수
후유증
출처: 제주4.3사건 진상규명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http://www.jeju43.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