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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11코스 : 연탄길
골목길과 달동네를 추억하며 걷는 길
* 총 거리 : 4.9km * 소요시간 : 1시간 55분
07시 51분 도원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면 마주 보이는 곳에 리본이 안내한다.
역사에서 나가 우측으로 간다.
인천세무서를 지나 옆길로 올라 대로에서 좌측으로
창영초등학교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탄생
창성할 ‘창昌’에 영예로울 ‘영榮’. 이름 그대로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교육의 첫발이자 명예로운 역사의 시작점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몰려든 외세는 조선인들을 지금의 동구 창영동 일대로 밀어냈다.
이후 1899년 개통된 경인선을 기준으로 마을은 위아래로 갈라졌다.
북촌과 남촌. 당연히 조선인의 몫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던 남촌이었다.
비루한 삶 속,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교육이었다. 남촌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07년 학교 문을 열었다.
창영초등학교의 전신前身,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개교 12년 뒤 창영초등학교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서슬 퍼런 대일항쟁기, 학생들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한다.
곧바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학생들은 교실이 아닌 거리로 나가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는 인천 만세 운동의 시작이자, 독립을 향한 외침이 인천 전역으로 퍼지는 기폭제였다.
교육을 통해 희망을 찾고자 했던 당시 조선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자부심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창영초등학교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가 설치됐다.
‘배다리 쇠뿔고개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김연숙의 시가 선명히 새겨진 비석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역사로 남아 학교를 지키고 있다.
금창동 행정복지센타
인천의 성량공장 아가씨들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에서는 성냥의 역사와 제조 과정 등을 살필 수 있다. 사진제공|조용식(여행작가)
노래처럼 인천에 성냥 공장은 있었을까. 성냥은 개화기인 1880년 한 승려가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왔단다.
이후 1886년 독일 마이어 상사가 인천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세워 성냥을 수입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10월 4일
금곡리(현 동구 금곡동) 배다리에근대 대량 생산설비를 갖춘 조선인촌㈜이 신설됐다.
최대 성냥 소비지인 서울을 지척에 민둔 인천은 성냥 생산의 메카가 됐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의 성냥 전시물.
일자리는 차고 넘쳤을지 모르지만,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일부 소녀는 성냥개비 머리에 쓰인 백린의 맹독이
턱부위를 괴사시키는 천형을 겪기도 했다.
경제 ‘일방통행’은 사람의 피·땀·눈물을 갈아 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광복 이후 인천엔 대한성냥·인천인촌·인천성냥 등 성냥공장만 10곳이 넘었다.
그러나 성냥은 1980년대 라이터의 불티나는 유행에 사그라지기 시작됐다.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의 성냥 전시물.
성냥의 롤러코스터는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냥의 역사와 제조 과정 등을 살필 수 있다. 그 위치는 조선인촌이 있던 자리다.
사진제공|조용식(여행작가)
책방거리로 접어든다.우측으로
송림동 상가 거리
송림동 달동네 모습,이제 재개발로 비어있는 상태다.
송림근린공원 가는 길
송림배수지
송현배수지는 인천 최초로의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 시설로 1905년 중도(中島) 박사에 의해
경인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다.
1910년 10월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이 준공되어 노량진과 인천 사이에 32.64km의 수도관이
설치되었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 5,000㎡로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서 급수받는
지역은 동구 일원 및 중구 일부 지역이다.
저수능력은 20,000톤으로 준공 당시와 비슷하다.
현존하는 배수지 건물로는 제수변실과 23단의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계단, 철제 정문 등이 있고,
정문은 화강석 초반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의 주두로 이루어져 있다.
제수변실은 배수지에서 배수관의 단수 및 유압조절기능을 담당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로서 원통형이며,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 구조로 되어있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앞에 스탬프가 있다.
수도국산 박물관 공사중이라 들러보지 못하고,가림막옆으로 가다 송현솔빛주공 아파트로 내려선다.
아파트 중간에서 좌측으로 나가야 하는데 길을 잃고 차도로 내려와 멀지 않은 동인천역으로 향한다.
09시 50분,동인천역 도착..11코스를 마무리 하고 따끈한 커피한잔 하며
잠시 쉬었다 12코스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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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제12코스 : 성창포길
우리나라 근대문화를 만나는 길
* 총 거리 : 5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인천 구도심인 동구 송현동의 한 골목엔 '혼수', '예단', '한복' 등이 적힌 낡은 간판이 줄지어 있다.
혼수용품을 판매하는 점포 90여개가 모여 있는 '중앙시장 혼수특화거리'다. 1980~90년대
예비부부 등 손님들로 북적이며 번성했던 이 거리는 200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썰렁한 전통혼수거리 상가
네가 왜 거기 서 있어..ㅎㅎ 배다리 사거리 굴다리 아래 말 한 마리가 서 있다.
굴다리 사거리에서 에서 참외전路 신호를 건너 율목동으로 직진
신포 국제시장 가는 길..
전에 몇번 갔었던 애관극장..이렇게 보니 더 반가운 그때 그 시절 그 극장 ㅠㅠ 몇몇 손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애관극장 조금 지나 인천교구청 안으로 들어간다.
인천교구청 역사박물관도 같이 있네요...인천 답동성당..유명하죠?
인천 중구 답동에 소재한 답동 성 바오로 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전면에 3개 종탑을 가지고 있고 각 종탑마다 8개의 작은 돌기둥이 8각의 종 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으며
각각의 종탑 아래에는 나무로 된 낡은 출입문이 있다.
벽면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으로 된 계단이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긴
아치형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 성당의 창문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성당 뒤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담쟁이덩굴로 덮여있는 낡은 담장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듯 정감이 있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성당을 둘러보고 내려와 지하상가 입구에서 우측으로 신호를 건넌다.
신포국제시장이다..먹거리가 많아 자주 들러 먹고가곤 했었지..
신포시장 유명세를 탄 닭강정집들이 시장 초입에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김구선생 동상
저 승용차 사이로 좌측으로
뵐 낯이 없네요..
청년 김구선생이 인천 교도소에 구속되어 있을때 노역을 하던 그 시절의 사진들
홍예문 옆 계단을 올라 좌측 자유공원으로 간다.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虹霓門)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石門)으로,
위치는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3가 20이며, 면적은 1,952.6㎡이다.
건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는데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공사를 진행할 때 예기치 못한 거대한 암석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 한다.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을 알 수 있는 문화재로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홍예문을 통과하면 폭이 좁은 2차선 도로가 지나며, 홍예문 위쪽 길에 서면 인천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홍예문을 올라와 자유공원 가는길..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맥아더 장군 동상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이 있는 이곳은 1888년(고종 25년)11월 9일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으로 1897년 조성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9년이 앞선다.
공원의 설계는 러시아 토목기사 시버틴이 담당했으며, 각국 공동조계 내에 위치하여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 청나라.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어울려
만든 '만국지계'가 들어섰다.
이들에 의해 1888년 만국공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며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 뒤편 응봉산 일대에 자리를 잡고있는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시 인천상륙작전 장소인 월미도에 세울 계획이였으나 당시 월미도는 미군 군사기지가 있어
일반인 접근이 어려웠단다.
대신 월미도가 보이는 만국공원이 동상 건립지로 낙점됐단다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침입하였을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백아더장군에게 공산 침략항전에 참가한 모든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맥아더장군의 지휘하에 결행하여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동상을 철거 하려는 무리들이 있어서 한심하다.
참 오랫만에 와 보는 자유공원이다...아이들 어릴때 손잡고 왔던 곳인데..
스탬프가 공원 시계탑 아래 있다.
공원에서 바라다 본 인천항과 전망대
140년의 수령,플라타너스 나무..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이다.
여기를 지나
이렇게 시내를 따라 걷고보니 볼거리가 참 많은 인천이란 걸 처음으로 느껴보는 유익한 시간이다.
인천 중구청
1876년,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근거로 부산, 인천, 원산 등 조선의 항구를 개방하면서 개항장에 일본인
거류지를 만들었고, 우정총국 개국 이전부터 자국민의 통신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우편국을 세웠다.
1894년에는 우편국이 29개로 늘어났고, 일본은 한국을 강탈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정보 전달
수단인 통신 시설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일제강점기, 역사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가문의 사랑과 결혼을 ‘우편’이라는 매개체에 담아
다채롭게 풀어내고자 한 ‘우정만리’. 일본의 조선 침략 도구로 사용되어 온 전화와 우편을 조선의
누군가가 오히려 조선 독립에의 씨앗으로 활용했다는 작은 상상으로부터 ‘우정만리’는 탄생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집배원 ‘혜주’는 마지막 출근길에 오른다.
편지배달을 마친 혜주는 가방속에서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발신인에 할아버지 함자
‘김계동’, 수신인에 아버지 함자 ‘김수혁’이 기재된 편지.
의아한 마음에.. 우연이겠지 하는 마음을 품고 주소지로 찾아가보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극은 시공간이 교차되어 흐른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혜주의 여정에 극은 마법처럼 펼쳐진다.
1930년. 20살의 수혁은, 벙거지꾼(집배원의 옛 이름)인 계동의 권유로 체신이원양성소에 다니고 있다.
삼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양성소에서 쫓겨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나간 우편 관리 현장 탐방을 겪으며 수혁은
벙거지꾼으로서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계동이 수혁에게 쓴, 장난섞인 암호편지 한 통이 독립군의 그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고 순사들에게 끌려가 큰 고초를 겪게 되는 이야기다.
지난 10월 인천고교 재경 동문회에서 주관한 문화행사로 국립극장에서 "우정만리" 연극을 관람하고,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1883년 인천을 개항한 후,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이 개설한 인천출장소가 전신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899년(고종 광무 3년)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지점은 일본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한 건물로 모래, 자갈, 석회를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건축 재료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와 만들었다.
1899년에 만들어진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창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환 거래규제, 무역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풍미, 자금성, 태화원, 태창반점, 신승반점 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가화만사성 주말드라마가 촬영된 곳
점심때가 되어가니 웨이팅이 시작되어 저 공화춘 2층에서 점심 해결하고 간다.
2004년 2월 현재의 공화춘의 이름으로 개업한 중국집.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4층 건물로 세워진 이 가게는 앞서 설명한 1908년에 개업하여 1983년에 폐업한 1번 항목의
공화춘과는 무관한 중국집이다.
1983년 원조 공화춘이 화교 배제 정책의 영향으로 문을 닫은 후, 1998년부터 "공화춘 재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현대라는 인물이 설립했다.
공화춘의 재건이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원조 공화춘에서 일하던 주방장 하(賀)모씨를 영입했으며,
이 뉴 공화춘은 2024년 현재 2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공화춘을 재영업할 공화춘의 재건을 내세웠고, 주방장 또한, 그때 그 주방장 까지 영입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원조 공화춘과는 무관한 식당이다.
인천역 앞에 서있는 차이나타운 거리 모습
11& 12코스 이른 시간에 마무리하고 12시 46분 출발하는 전철에 오른다.
인천둘레길을 완주하고...
2024년 올해 마지막 길로 지난 10/9일 걷기로 시작한 인천둘레길 걷기를 모두 마무리 한다.
지난 25일 크리스마스날 코스 순서를 바꿔 13,14코스를 먼저 걷고 오늘 11,12코스를 마지막으로
날씨는 춥지만 인천둘레길을 마무리 하러 출발이다.
마니산,장봉도 코스까지 총 16개 코스로 늘어난 인천둘레길은 광범위한 인천광역시에 외곽의
산과 해안 신 구 도심지역을 걸어 보는 길로 매우 의미있는 걸음이였다.
예전에 인천에서 10여년을 살면서 안가 본 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모든 지역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걷는 길이였기에 누구보다도 감회가
새롭고 즐겁고 재미있는 길이였고 그동안 변하고 발전된 인천의 모습들을 볼 수 있어
좋았고, 개항 100주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적산가옥 등등
현대양식 건물 모습들도 그대로 남아있고 우리나라 철도 역사가 경인선을
시작으로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하며
그 옛날 제물포항 모습과 하인천의 철도탄생역까지 알 수 있었고,
인천의 명물이 된 차이나타운 거리도 한중 수교이후 활성화 되어 지금은 대단히
번성하여 활기찬 모습이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옛 추억을 생각하며 줄을 서서 공화춘에서 자장면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는 기회도 있어 오랫만에 중국인이 만드는 자장면 맛도 보고
인천역에서 2024년 아쉬운 도보길을 끝낸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싯점에 시국도 어수선한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여객기 추락이라는 대형 참사까지 일어나고, 이 비상시국에 국가의 큰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민들을 마음과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총력을 다해 국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왜곡된 국정에 아쉬움만을 남기는 쓸쓸한 한 해의 끝자락이 아닌가 생각하며
너무나 엄청난 큰 사고에 먹먹하기만 해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떠 오르지 않는다.
돌아가신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빌며 황망함을 겪으신 유족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올 한해도 무사히 잘 보냈으니 내 년에도 무탈한 한해가 되길 기원하오며
여러분들의 한 햇 동아 보내주신 격려와 큰 성원에 깊이 감사 드리고
모든 분들의 건강과 무탈함도 함께 기원하며 2024년의 도보를 마무리 한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Happy New Year
여기까지....
2024.12. 28.
가곡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