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성 선생 흉상(韓有星 先生 胸像)
서울 송파구 잠실석촌호수를 바라보는 고 한유성 선생 흉상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공원에서...)
(아래) 한유성 선생 흉상 옆으로 서울놀이마당으로 들어서는 쪽문
송파를 빛낸 얼굴, 고(故) 한유성(韓有星) 옹(서울 송파구 석촌동 출생, 1908. 7.13~ 1994. 3. 23)은 서울을 대표하는 송파의전통민속문화인 ‘송파산대놀이’와 ‘송파다리밟기’를 계승 발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분이다.
1973년 고 이충선 옹, 고 문육지 옹, 고 김윤택 옹, 고 이범만 옹, 고 허호영 옹과 함께 국가지정중요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89년 서울특별시지정 무형문화재 제3호인 송파다리밟기놀이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에 고인의 업적과 숭고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1999. 7. 28. 송파구청장
한유성 공원에서 부친을 그리워하는... '포엠포엠'발행인 한창옥 시인
잠실 인간문화재 한유성 선생을 기리는 ‘한유성 길’과 ‘잠실석촌호수' 풍경
(위)잠실 레이크팰리스 아파트 정문 앞 400m4차선 길이 ‘한유성 길’로 명명되었다(1994년)
잠실 롯데월드 뒤 서울놀이마당 정문 옆에 '한유성 길' 명명 기념비
이 길은 석촌호수 서호 송파놀이마당 건물에 연한 길이다.
고 한유성 선생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인 ‘송파산대놀이’와 서울특별시지정 무형문화재 제3호인 ‘송파다리밟기놀이’의 인간문화재였다.
송파구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길을 한유성 길이라 명명했다.
(위)석촌호수 전경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1973년 11월 11일 지정)
송파산대놀이(松坡山臺놀이)는 송파 지역에서 전승되던 탈놀이로, 놀이꾼들이 탈을 쓰고 재담, 춤, 노래, 연기를 하며 벌이는 연극적인 놀음이다. 송파는 한강변의 5강(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의 하나로서 송파진(松坡津)으로 불리던 곳이며, 조선왕조 후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 15곳 중의 하나인 송파장을 이루어,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연희자의 한사람인 허호영(許浩永)의 말에 의하면 약 200년 전부터 송파산대놀이가 창성되었으나 중도에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부터 송파에 거주하는 허윤(許鈗)에 의해 구파발 본산대 연희자 윤희중(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하여 재건하고, 그 뒤 연중행사로 정월 보름ㆍ단오ㆍ백중ㆍ추석에 놀았는데 7월 백중에는 크게 놀았다고 한다. 1924년에는 큰 규모의 산대놀이 모임을 송파에서 열었는데 이때에 구파발ㆍ아현ㆍ퇴계원ㆍ의정부ㆍ노량진 등지에서 20여명의 이름있는 연희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듬해 한강대홍수로 송파마을이 유실되자 주민들은 가락동과 돌말이[石村]에 정착하면서 산대놀이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에서 전수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같이 그 주제를 보아서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계통의 중부형(中部型)의 한 분파이다.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백중·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송파마을은 경기일원의 상업근거지로, 약 200년 전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때에 산대놀이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는 놀이형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는 전체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 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하고, 가면을 배열해 놓고 고사를 지낸다. 놀이내용의 구성이나 과장·춤·탈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개의 탈과 춤, 배역이 옛 형태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즉 양주별 산대놀이에서는 이미 사라진 화장무 춤사위가 남아 있고, 해산어멈·신 할미·무당의 탈이 남아 있어 이들 탈들이 맡은 역이 따로 있다. 바가지, 소나무껍질, 종이 등으로 만든 탈 33개가 사용되며, 놀이형태는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동작이 곁들여진다. 송파산대놀이는 옛 형태를 지닌 민중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송파다리밟기(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호, 1989년 8월 16일 지정)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하는 놀이로 자기 나이만큼 개울가 다리를 밟으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모든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복도 불러들인다는 신앙적인 풍속에서 나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는 관념이 강한 것은 다리(脚)와 다리(橋)의 발음이 같은데서 생긴 민간신앙이며, 언어의 유희성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다리밟기’는 답교 또는 ‘답교놀이’라고도 하며 강릉지방에서는 ‘다리 빼앗기’라고도 한다. 다리밟기놀이는 양반에서부터 서민까지 구분 없이 즐겼으며, 다리밟기를 할 때에는 사대문도 닫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장안에 있던 다리는 몇 개 되지 않아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해지자 양반층에서는 서민과 어울리기를 꺼려 하루 전날인 14일 저녁에 다리를 밟아 ‘양반다리밟기’라 하였고, 부녀자들은 16일 저녁에 다리를 밟았다고 한다. 무리를 지어 다리밟기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 혼잡한 가운데 여흥으로 기분을 돋우던 것이 점차 그 성격이 변하여 놀이패가 따로 조직되면서 연희성을 띠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송파다리밟기’는 뛰어난 가무가 특색이다. 다리밟기놀이는 고려 때부터 행하여졌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며 우리민족의 생활감정이 담겨 있는 민속놀이이다.
1988년 인터뷰 글 중에서
“내가 오늘날까지 송파산대놀이와 인생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부인 오용묵(70)씨의 뒷받침 덕분이지요.”라고 한씨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당시 공연료는 대부분 무료여서 내 돈과 추렴금으로 공연료를 메워 갔던 것이다. 그는 또 일제 말 강제징용을 피해 다니기 위해 4~5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해방은 그에게 송파산대놀이의 재기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한씨가 일생 중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6ㆍ25동란 3개월 동안이었다고 한다.
“내가 해방 후 대한 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아서 반공전선에 헌신하였는데 6ㆍ25동란이 일어나서 채 피난을 가지 못한 나는 지하의 지옥 같은 3개월을 숨어 다니느라고 때로는 많이 굶주림에,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겪는 고난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송파산대놀이의 과장과 그 내용도 양주별산대놀이와 대동소이하여 다같이 본산대의 분파임을 말하여 주나 위에서와 같은 몇 개의 탈과 배역의 차이에서 송파산대놀이가 고형을 지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놀이 순서를 보면 거리굿, 서막으로 고사가 있고,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중, 제3과장 연잎과 눈꿈적이, 제4과장 8먹중, 제1경 북놀이, 제2경 곤장놀이, 제3경 침놀이, 제5과장 노장, 제1경 파계승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바리놀이, 제6과장 샌님, 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샌님과 미얄할미, 제3경 샌님과 포도부장, 끝으로 지노귀굿이 있다는 것이다.
한유성선생은 그가 65세 되던 해, 생애 최고의 해를 맞이했다.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고 한씨는 이범만, 이충선, 허호영, 김윤택 등과 함께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허호영은 해제되었고, 김윤택, 이범만이 사망, 현재 보유자 3명을 비롯, 전수교육 이수자 20명 및 전수생 8명, 일반회원 등 다수가 전승보존에 힘쓰고 있다. 한유성 선생은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내각 수반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제7회, 제8회, 제13회, 제19회, 제22회, 제24회, 제26회, 제37회 대회에 참가, 장려상과 공로상, 문공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또 1972년 11월 국립극장에서 1회 정기발표공연 후 현재까지 매년 1회의 정기공연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에서는 문화예술축전행사의 하나로 공연에 참가했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갖고 올바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건강의 비법이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마음 안정법’이라고 할까. 한씨는 요즘도 풀을 쑤어 톱밥, 종이, 화장지로 떡을 뭉쳐 얼굴에 바른 후 10~15일 마른 후 환지 붙여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거처가 아파트이기 때문에 제작물을 보관키 어려워 주문을 받을 경우, 이 가면제작을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때로는 일본인등 외국인으로부터 주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선생은 슬하에 아들 3명, 딸 2명등 모두 5남매를 두고 있다.
한 선생은 송파산대놀이에 인생을 걸고 살아온 보람은 무엇일까?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오히려 흥겹고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임으로써 이겨내고 다스리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이 놀이판은 개개인의 기쁨이나 고뇌가 한데 어우러져 공동의 관심사로 전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경력】
1920년 : 광성보통학교 졸
1963년 :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참가 내각수반상 수상
1966년 : 제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장려상 수상
1967년 : 제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공로상 수상
1972년 : 제13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 송파산대놀이 문공부장관상 수상 / 국립 극장에서 1회 정기발표 공연
후 현재까지 매년 1회 정기 공연
1973년 :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 받음
1975년 : 각 대학 탈춤반 지도공연 시작
1978년 : 인간문화재연합회 공연(현재는 인간문화재 대제전으로 공연됨)
1979년 :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
1981년 :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공부장관상 수상
1983년 : 제2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
1981년 : 민속촌 공연 이후 현재까지 매일 초청 공연
1985년 :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답교놀이 문예진흥원장상 수상
1986년 :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 공연 참여
1986년 : 제2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송파답교놀이 예총회장상(장려상) 수상
1988년 :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