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미골 베풂 왕의 회갑 잔치
이 진 숙
sin6402@hanmail.net
집안의 종손이자 팔 남매의 맏이인 친정 오라버니가 올해 회갑을 맞이하였다. 몇 해 전 전원생활을 시작한 오빠는 결혼하지 않은 노총각이다. 어쩌면 오빠는 동생들을 너무 사랑해서 본인의 행복은 포기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오빠는 동생들에게 철마나 좋은 먹을거리를 보내준다. 해마다 이월이면 직접 채취한 고로쇠 물로 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린다. 봄이 되면 각종 산나물과 고사리도 삶아 정성스레 햇볕에 말려서 보내온다. 감자며 도라지, 더덕, 철마다 나는 무공해 식품들이 택배로 배달된다. 여름이 되면 옥수수를 보내준다. 그것도 모자라 옥수수를 삶아서 냉동고에 가득 채워둔다. 형제들이 모일 때면 마음껏 먹으라며 철 지난 옥수수를 내온다. 가을이면 들깨도 보내주고, 기름까지 짜서 보낸다. 동생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준다.
오빠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온갖 애를 다 쓰는 것 같다. 오빠는 아마도 동생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오라버니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친정이 늘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디 동생들뿐이던가, 조카들이 학교에 입학할 때나 졸업할 때, 결혼할 때도 뭐하나 소홀히 하는 게 없다.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까지도 잘 챙긴다. 본인은 결혼을 안 해서 웬만한 경조사는 그냥 넘어가도 될 법도 한데 늘 그렇게 챙긴다.
가난한 대가족임에도 늘 베풀며 사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오빠에게서 얼비친다. 그런 오빠를 위해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왔다. 우리 남매들은 오빠 몰래 회갑 잔치를 준비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조카들까지 다 모이기로 했다. 우리 팔 남매가 태어나 자란 곳 ‘들미골’이란 지명을 붙여 ‘들미골 베풂 왕’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가을이 익어가는 날 사랑을 가득 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팔 남매는 강원도 시골집을 향해 달려간다. 먼저 부모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시간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큰아버지, 큰외삼촌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조카들까지 다 약속 장소에 모였다. 형제와 조카들까지만 모일 생각이었지만, 고종사촌들도 꼭 불러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초대했다.
식순에 의해 주인공 입장이 있었다. 커다란 나비넥타이에 고깔모자를 쓴 주인공이 들어서자 함성과 함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감사장 전달식에 이어 마침내 주인공 인사말 순서가 되었다. 주인공은 답례 인사말을 못다 한 채 목이 메었다. 주인공의 두 볼 엔 뜨거운 용암이 흘러 내린다. 잠시 말을 잊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군다. 언제나 넘치는 사랑을 베풀며 살아온 인생이다. 그럼에도 ‘나는 동생들이나 조카들한테 늘 부족한 사람인데,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며 부끄럽다고 말한다. ‘결혼을 안 해서 자식이 없지만 나는 자식이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주인공의 눈물 앞에서 온 가족이 눈물바다가 될 뻔했다. 감동의 물결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다음 행사는 조카들에게 맡겼다. 조카들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회갑 잔치는 축제의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고종사촌들은 너무 보기 좋다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낸다. 연회장의 사장님도 많은 손님들을 접하지만 이런 가정은 처음 본다며 화목한 모습이 너무 부럽다고 한다. 케이크와 샴페인을 선물로 내오며 축하의 말도 아끼지 않는다. 종손자들까지 삼대가 한자리에 모여 사랑으로 하나 됨을 느낄 때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십여 년 전 건강상의 문제로 먼저 간 다섯째 남동생의 자리가 비어있어 마음 한편이 미어지고 저려온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과 의견이 일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와중에 결혼을 앞둔 아들이 갑작스런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준비하던 것을 중단할까도 고민했지만, 오빠의 은공을 기리며 힘내어 준비해 나갔다. 오십여 명의 티셔츠에 글자를 일일이 만들어 붙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알아보기 쉽게 배려하는 마음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그것 말고도 준비할 게 너무나 많았다.
오랜 시간을 힘들게 준비했는데, 병원에 입원한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참석을 못 해서 너무나 아쉽고 마음이 아팠다. 주인공의 색소폰 연주에 이어서 조카들의 편지 낭독이 있었다. 주인공은 조카들까지 나를 울린다며 또 눈시울을 적신다. 촛불 행진을 마지막으로 ‘들미골 베풂 왕’의 회갑 잔치는 막을 내렸다.
행사가 끝나자 그동안 혼자 기획부터 모든 준비를 맡아서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조카들까지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 받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마음이 하무뭇해진다.
다음날 아쉬움의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각자 삶의 터전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오빠는 한사코 마다하는 동생과 매제, 조카들에게 일일이 여비를 쥐여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행복한 순간순간들을 담은 사진이며 동영상들이 쏟아져 올라온다. 그중 오빠에게서 온 글이 눈에 띈다. 선물 증정식 때 이 선물은 꼭 혼자 있을 때 풀어보라고 했던 것이 있었다. 그건 축의금을 마다할 오빠를 위해 상자에 모두 담아 선물로 위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니 구구절절한 편지까지 들어있어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 오빠의 세 번째 눈물 편지였다.
생활이 아무리 풍족해져도 가족 간의 사랑이 빈곤하다면 어찌 가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잘 키워주고 가신 부모님께 새삼 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우리 팔 남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그 사랑이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익숙한 ‘들미골 베풂 왕’은 우리 가족들 마음속에 영원히 존경스런 ‘베풂 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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