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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이 그린 ‘바울의 아덴 선교’. |
기독교 박해하던 유대인 사울에서 바울로 환골탈태
가는 곳마다 교회 세우고 일일이 문안-교훈의 편지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 비움의 기독교’ 가르쳐
그리스도교를 오늘의 그리스도교로 만드는데 최대로 공헌한 사람이 바울이라 하는데 의견을 달리할 사람은 없다.
학자들 중에는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예수냐 바울이냐’ 하는 질문까지 한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났다가 유대인으로 죽었다.
그는 생전에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 퍼져나간 독립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창시자라 하는 주장도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물론 예수님이 없이 그리스도교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런 질문이 나온다고 하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많은 이들은 실제로 바울을 ‘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라 칭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금년 2008년을 바오로 탄생 2000주년 기념년으로 지키고 있다. 그리스어로 ‘파울로스’를 영어로는 ‘폴(Paul)’, 한국 개신교에서는 ‘바울’, 한국 가톨릭에서는 ‘바오로’라 발음한다.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유대인들의 반대와 박해도 더욱 커져갔다.
스데반 같은 이는 거리로 나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사도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나아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이 때 그리스도인 박해에 앞장 선 사람 중 지금의 터키 남단에 해당되는 다소(Tarsus) 출신의 유대인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소에서 지낼 때 그 당시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에 널리 퍼져 있던 밀의종교(密儀宗敎, mystery religions)와 접하고, ‘죽고 부활하는 신과 합일함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밀의종교의 가르침에 익숙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당시 유명한 유대인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으므로, 유대 전통에도 정통한 바리세파 지식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첫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칠 때 그들의 옷을 맡는 일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예수쟁이 박멸운동에 진력하다가 거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멀리 다메섹(Damascus)에 있는 예수쟁이들까지도 진멸하겠다고 정열을 불태웠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쏟아져 내려 그를 비추자 그는 땅바닥에 엎어졌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도행전』 9:4, 22:7, 26:14)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이 누구냐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이 왔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타난 것이라 확신했다.
다메섹으로 인도되어 가서 3일간 앞을 보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 후 거기서 아나니아라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안수를 받아 눈도 고치고 세례도 받았다.
이 엄청난 경험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옛 사울은 죽고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하는 새사람 ‘바울’(Paul)이 탄생한 셈이었다.
그는 당장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거친 바울은 생각을 정리하고 더욱 내실을 갖추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얼마를 지냈다.
그 후 그는 실로 위대한 그리스도교 전도자로 등장했다.
바울이 처음에는 그 당시 각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자처하고 이방인들 곧 비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어릴 때 받는 일종의 종교적 의례로서의 포경수술을 받는데, 이를 ‘할례’라 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이런 할례를 받는 등 우선 유대인의 규범을 준수하여 유대인이 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중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직접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앞장섰다.
이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대교의 분파로 여겨질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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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가 그린 바울의 초상화. |
바울과 그의 일행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당시로서는 ‘세상 끝’이었던 지중해 연안 전역을 세 번이나 전도 여행으로 다녔다. 『사도행전』의 거의 반 정도가 그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 후 교회마다에 일일이 문안과 교훈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이 나중 신약 성경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것들은 신약 성경에 들어있는 문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서 전통적인 계산으로 하면 신약 전체 27권 중 14권으로, 권수로만 따지면 신약 성경 반 이상에 해당한다.
배가 난파되는 일, 감옥에 갇히는 일, 매 맞는 일, 심지어 돌 맞는 일, 굶고 잠 못 자고 추위에 떠는 일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고린도전서 11:23-28) 감행한 바울의 열성적인 전도와 그의 깊은 신학 사상으로 그리스도교는 명실공이 유대교의 분파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엿한 보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울의 가르침 중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稱義)’, 종말관, 인간관 등 다양하여 한마디로 간추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 신비주의(in-Christ mysticism)’라 할 수 있다.
일상적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나는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던 할례를 두고서도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하였다(『갈라디아서』 6:15).
이런 새로 지음의 체험, 새로운 의식에 이를 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갈라디아서』 2:20).
바울은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신성(神性), 혹은 나의 본래면목을 깨닫고 신인합일의 종교적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르는 것을 중요시하고, 특히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1-2)고 하였다.
이른바 상대방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등,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리디아서』 3:28)고 하였다.
성서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과 조나단 리드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서 배워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1)하는 말이나,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만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4:34)하는 말 등 성경에 바울이 했다고 기록된 여성 차별 내지 여성 비하적인 발언은 가짜 바울(pseudo-Pauline), 후세 바울(post-Pauline), 반 바울(anti-Pauline)적 무리들이 ‘사실적이고 역사적 바울(actual and historical Paul)’을 변개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 나중 삽입하거나 첨가하거나 대치한 것이라 본다.
신약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바울이 유대인 예수의 실천적이고 단순한 가르침을 너무 그리스 철학에 맞추어 철학화, 신학화, 추상화해서 도리어 예수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의 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립보서2:5,6).
바울은 이처럼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강조하며 우리도 그렇게 나를 비워야 함을 역설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자기 비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비움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라 한다.
바울은 약 30년간 자기 나름대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다가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인 기원후 60년경 로마로 갔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 이 후 어떻게 되었다는 언급이 없지만, 전통적으로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인 64년경 체포되었다가 65년경 거기서 처형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의 삶과 가르침은 아직도 그리스도교의 기본 토대로 굳게 남아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