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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다세계(Many Worlds)
-실재로서의 가능 세계와의 시적 동맹
박대현(문학평론가)
환상을 넘어서: 물리학의 인식론
1957년 물리학자 존 휠러의 제자였던 휴 에버렛은 닐스 보어의 파동함수 붕괴라는 코펜하겐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휴 에버렛은 마음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까지도(아니 그 이후로도) 물리학계는 닐스 보어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존 휠러는 자신의 제자인 휴 에버렛의 이론에 큰 매력을 느꼈으나, 에버렛의 연구 주제가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에버렛의 ‘다중 우주(multiple univrses)’ 개념이 닐스 보어의 권위를 해친다고 생각해서 무척 곤란해했다. 그래서 존 휠러는 닐스 보어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코펜하겐을 방문하기도 하고, 에버렛과 함께 (닐스 보어를 대신한) 페테르센과 에버렛의 박사 논문 주제에 대한 의견을 편지로 교환했으나, 닐스 보어의 승인을 얻는 데 실패한다. 결국 휴 에버렛의 논문은 4분의 3이 잘려나간 채 최종 제출되고 만다.
휴 에버렛은 자신의 이론에 ‘보편적 우주 파동 함수(Universial wave function of the universe)’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코펜하겐 해석의 파동함수 붕괴를 정면 반박하고자 했으나, 4분의 3이 잘려나간 최종 논문의 제목은 ‘양자역학의 상대적 상태 이론(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이었다. 보어에게 거슬릴 만한 내용은 최대한 삭제했으나 휴 에버렛의 세계관을 이루는 토대는 남아있었다.이후 휴 에버렛의 논문이 지닌 중요성을 간파한 이는 브라이스 디윗이다. 디윗은 10년 동안 묵살되던 에버렛의 양자역학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 디윗은 에버렛의 이론을 ‘다세계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으로 명명하고 그의 박사논문 원래 원고를 복원하여 출판한다. 그 출판물이 바로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The Many-Worlds Interpretation of Qunatum Mechanics)’이다.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통해 물리학자들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하이젠베르크의 진술 속에서도 물리학적 구체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확률 파동이라는 개념은 뉴턴이 이론물리학을 정립한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완벽하게 새로운 개념이었다. 수학이나 통계역학에서 확률을 언급하는 행위는 실제 상황에 대한 지식 부족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사위를 던질 때 손의 세세한 움직임이 어떤 식으로 주사위의 낙하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특정 숫자가 나올 확률이 6분의 1이라고 말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보어, 크라머스, 슬레이터의 확률 파동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통계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능태potentia’라는 오래된 개념에 정량적인 정의를 덧붙인 셈이다. 이는 실제 사건과 사건의 개념 사이에 중간 지대를 만들어서, 가능성과 현실 사이에 기묘한 물리학적 현실을 성립시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는 ‘현실태’와 한쌍을 이루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선택된 세계와 선택되지 않은 세계를 현실태(energeia; actuality)와 가능태(dynamis; possibility,poteniality)로 명명하여 구분한다. 이 세계에서 실현된 많은 것들은 현실태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가능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실현되지 못한 가능태는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무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왔으나, 휴 에버렛에 의해 물리적 실재로 격상된다. 즉 다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다세계 속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실현되지 못한 가능태의 세계는 무한한 다세계 속에 물리적으로 실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은 선포하고 있다.
다세계 해석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적 세계관에서조차도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인식론이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왔던 평행우주에 대한 사유가 물리학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자는 단순히 물리학자로서만 머물지 않는다. 브라이스 디윗(B.S.DeWitt)이 존 휠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물리학자는 스스로 인식론자(epistemologist)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한계를 넘어선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은 이 세계가 단 하나의 세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물리학계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인식론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세계 해석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환상문학이라고 치부되어왔던 문학의 한 징후를 ‘다세계 해석’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2. 다세계와 가능 세계의 실재성
시인은 단 하나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가능태의 세계를 욕망한다. 존재와 비존재,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빌려 말하자면 현실태와 가능태를 포괄하는 세계를 욕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다음 문장을 상기해보자.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이를 이야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운문을 쓰느냐 아니면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헤로도토스의 작품은 운문으로 고쳐 쓸 수 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율이 있든 없든 그것은 역시 일종의 역사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시인’이 물론 오늘날의 시인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현실화된 가능태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태의 세계에 주로 복무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현되지 아니한 가능태는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형상을 부여받았으나 그 형상의 세계는 결코 실재한다고 보기 힘든 가상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세계 해석 속에서 세계의 가능태에 주목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각기 다른 우주 속에 실재의 세계를 재현해내는 직관적 투시의 역량으로 격상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각각의 세계들 속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주체들을 연결하고자 하는 문학적 주체의 욕망이다. 이를테면,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알버트의 말을 생각해보자.
모든 허구적 작품 속에서 독자는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를 버리게 됩니다. 취팽의 소설 속에서 독자는 모든 것을—동시에—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들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증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기묘한 문학적 주체는 단지 환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 실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문학의 주체뿐만 아니라 독자들 역시 모든 가능성들을 동시에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대단한 형이상학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각기 다른 모든 ‘나’의 주체들을 연결하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을 살아가는 ‘나’의 주체들을 상상하는 것은 주체의 분열이 아니라 주체의 확장이다. 이는 매우 원대한 욕망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시단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징후를 드러냈음은 물론이다.
내 방에는 세 개의 시계가 있네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네 문 옆의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가까웠네 밖에 나가보니 모두들 우산을 쓰고 있었네 나만 비를 맞네 비는 수은으로 내 몸에 스며드네 방에 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안심했었네 수은독을 견디기 힘들었네 약속 장소는 너무 멀었네 택시를 잡았네 운전사는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보며 운전하네 그는 마구 달렸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물먹은 성냥은 켜지지 않았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속 말을 거네 알 수 없는 변성화음이었네 그는 앞차를 받았네 그래도 계속 나를 보네 택시에서 내렸네 다른 택시를 잡았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네 담배 연기는 오로라처럼 피어오르네 담배 연기가 아름다운 것을 처음 느꼈네 그는 외눈박이였네 약속 장소 반대 방향으로 가네 운전기사와 다퉜네 그는 담배 연기를 싫어했네 구토하네 나 그 냄새 견디기 힘들어 택시에서 내렸네 수은은 계속 내리네 다른 택시를 또 잡았네 그는 내 눈동자가 은색이라 하네 믿지 않았네 그 운전자는 눈이 네 개였네 거북하지 않았네 그는 약속 장소에 왔으니 내리라고 하네 생각해보니 그에게 약속 장소를 말한 적 없네 그는 요금을 받지 않네 내려보니 내 방이었네 방에는 아무도 없었네 침대 위의 시계는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네 거울을 보네 눈동자가 없었네 놀라지 않았네 벽에 걸린 시계는 약속 시간이 지났네 우산을 쓰고 다급히 나갔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있지 않네 모두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네 모두들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네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도 나를 태우지 않네 눈이 없는 노파가 나에게 얘기 하네-슬픔 동심 광기를 슬픔 동심 광기를 너에게 슬픔 동심 광기를 너에게 주노라 슬픔 동심 광기를-자기에게 눈을 달라 하네 나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한번 간절하게 부탁하네 갈등 끝에 한쪽 눈을 주기로 했네 왼쪽 눈을 주었네 노파는 오른쪽 얼굴로 받네 약속 장소까지 걷기로 했네 우산이 거추장스러웠네 우산을 버렸네 잠시 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 나 우산을 찾으러 돌아갔지만 누군가 가져갔네 택시를 잡았네 운전기사의 두 개의 눈이 나를 안심시켰네 그는 나에게 담배를 권하네 그의 손등에 눈이 하나 있었네 약속 장소를 잊지 않고 얘기해주었네 그는 다 왔으니 내리라고 하네 내 방이었네
세 개의 시계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네
-정재학, 「세 개의 시계」 전문(어머니는 눈물로 밥을 지으신다, 2004)
정재학의 이 시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세 개의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의 다른 시 「반조(返照)」에서 신비롭게 형상화했던, “그곳에는 다른 차림의 시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와 같은 다른 시공간의 세계에 대한 시적 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는 ‘세 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문 옆의 시계”, “침대 위의 시계”, “벽에 걸린 시계” 등이 그것이다. 각 시계는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는 물론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문 옆의 시계”를 따라 밖에 나가 마주한 세계는 “모두들 우산을 쓰고 있”고 “나만 비를 맞”고 있는 세계다. 수은이 비가 되어 내리고 약속 장소는 너무 멀고 여러 번 갈아 탄 택시 운전사는 외눈박이거나 네 개의 눈을 가진 세계다. “침대 위의 시계”는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아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약속 시간이 지나”버려서 화자는 “우산을 들고 다급히 나갔”으나, “문 옆의 시계”가 보여주었던 세계의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지 않”아서 “모두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세계다. “모두들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눈 없는 노파가 눈을 달라고 하는 세계, 택시 운전기사는 두 개의 눈을 가졌으나 손등에 눈을 하나 달고 있는 세계. 기이하고 기묘한 환상으로 점철된 세계는 무의식이 드러나는 꿈의 세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꿈’은 언제나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매개 장치다. 시와 꿈의 친화성은 그 둘이 지닌 압축, 전위, 상징화 등의 특징에서 비롯되지만, 시와 꿈 모두 다른 세계를 향해 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이 둘은 다른 세계를 향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낸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은 항용 무의식적인 환상이 지배하는 꿈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므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시의 상상력이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환상의 이미지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다른 세계를 향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이다. 시인은 세 개의 시계, 즉 세 개의 세계 바깥으로 추방당한 상태다. 시인은 끝내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그것은 정말 한낱 ‘꿈’이었던 것인가. “세 개의 시계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 무의식적 환상이 아니고서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탐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김참의 시를 보자.
방 안에 드러누워 소설책을 읽어본다 중간쯤을 펼쳐보니 소설 속의 여자는 해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맴돌며 날아다니는 정오가 지나자 여자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그림 속에는 붉은 태양 노란 해바라기 푸른 지붕의 집들이 있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 속 푸른 지붕의 집 마당에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그림 속의 남자는 항아리 위에 부엉이와 까마귀와 미루나무를 그려 넣고 있다 여자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백사장에 누워 당근 주스를 마시는 사이 그림 속 남자는 항아리를 들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간다 아궁이 안에는 비밀통로가 있다 남자는 비밀통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 박쥐들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궁이 밖으로 빠져나가 어두워진 남자의 마당을 날아다닌다 그림 속에서 달이 뜨고 별똥별이 떨어지고 개들이 컹컹 짖는다 당근 주스를 다 마신 여자는 기지개를 켜고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후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려다 달라진 자신의 그림에 흠칫 놀란다
남자는 하수도 뚜껑을 열고 비밀통로 바깥으로 나온다 부신 햇살에 눈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노란 해바라기 피어 있는 낯선 해변이다 그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걸어간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며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있다. 나는 책을 덮는다. 졸음이 쏟아진다 정말 따분한 소설이다 마감이 다가온 원고를 쓰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켜고 글자들을 찍어나간다
방에 누워 오래된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의 여자는 해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여자 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 속에 는 붉은 태양 노란 해바라기 푸른 지붕의 집들이 있습니 다 여자가 그리는 푸른 지붕의 집에는 까무잡잡한 얼굴 의 김참 씨가 항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부엉이와 까마귀가 앉아 있는 미루나무를 항아리 위에 그리고 있 습니다 여자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백사장에 누워 당 근 주스를 마시는 사이 그림 속의 김참 씨는 항아리를 들 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궁이 비밀통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박쥐들이 붉은 눈을 깜빡 거리며 아궁이 밖으로 빠져나가 어두워진 김참 씨의 마당을 날아다닙니다 그림 속에서 달이 뜨고 별똥별이 떨 어지고 개들이 컹컹 짖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멈추고 당근 주스를 마셔본다 아궁이 속으로 사라진 남자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나는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집 밖으로 나와 하수도 뚜껑을 열고 하수도 안으로 들어간다 소설 속의 남자와 김참 씨가 열었던 하수도 뚜껑을 찾아 악취가 코를 찌르는 하수도 내부를 돌아다닌다 마침내 나는 열린 하수도 뚜껑을 발견하고 지상으로 올라간다 바깥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노란 해바라기 피어 있는 해변이다 모든 것이 낯설다 나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여자의 그림을 흘끔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김참, 「미로여행」 전문(미로여행, 2002)(번호 및 밑줄-인용자)
위 시는 뫼비우스띠와 같은 상호간의 메타 구조를 보이고 있다. 안팎이 서로 물고 이어지는 서사 구조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의 화자인 ‘나’는 소설책을 읽고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그 그림 속에 나오는 남자는 항아리를 만든다. 하지만 이 간단한 장면은 시공간적으로 뫼비우스처럼 얽혀 들어감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서로 분리되어야 사건의 층위가 얽혀 있는 것이다. 이 시에 존재하는 세계의 차원은 세 가지로 나뉘는 것이 마땅하다.
· 1세계: 소설 책을 읽는 화자인 ‘나’의 현실 세계
· 2세계: 여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소설의 허구 세계
· 3세계: 여인의 그림 속에서 항아리를 만드는 남자의 세계
그러나 이 세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얽히게 된다. 우선 2세계와 3세계의 연결. 3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 속의 남자는 자신을 그리고 있는 “여자 옆을 스쳐지나며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세계와 3세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것이다. 남자가 “하수도 뚜껑을 열고” 나온 “비밀통로”는 뫼비우스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뒤틀린 연결점이다. 뿐만 아니라 5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세계와 2세계의 연결도 이루어진다. 화자인 ‘나’는 역시 1세계와 2세계를 이어주는 연결점인 “하수구 뚜껑”을 열고 소설 속에 나오는 여인의 해변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소설책에서 보았던 그림을 실제로 보게 된다.
이 시의 비밀은 소설책과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책의 여인도 그렇거니와 그림 속의 남자 역시 자율적인 개체로 존재한다. 그림 속의 남자가 정적인 그림 속에 영원히 감금되지 않고 그림 속 세계를 빠져나와 여인과 같은 차원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자율성 때문이다. 그림 속 여인 역시 소설책 속에서 자율적인 개체로 존재하는데, 2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림 속 남자가 일으킨 변화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당근 주스를 다 마신 여자는 기지개를 켜고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후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려다 달라진 자신의 그림에 흠칫 놀란다”는 것. 이 “흠칫 놀란다”는 행위는 소설 속 인물인 여인이 확보한 자율성에 대한 증좌다.
이러한 자율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4연에서 보듯, 시인 ‘김참’(실제 시인의 이름이다)이 만든 화자 ‘나’가 오히려 시인 ‘김참 씨’를 서술한다. (시인이 만든 화자가 시인 ‘김참 씨’를 서술하는 기묘함이란!) 시인 김참이 창조한 1~4연의 화자 ‘나’는 5연에서 그림 속의 남자와 4연에 등장하는 ‘김참 씨’의 행방을 알아보려 소설 속 여인의 해변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 ‘나’는 시인 김참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인 개체로 존재한다.
‘나’, 소설 속의 여인, 그림 속의 남자, 이 시를 쓰고 있는 실제 시인 ‘김참’ 사이에는 실재(reality)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통로”와 “하수구 뚜껑”은 1,2,3세계뿐만 아니라 1세계의 화자가 서술한 또다른 세계(4연)를 연결하는 미지의 통로가 된다. 이 미지의 통로를 통해서 실제 시인 김참, 시의 화자(나), 소설 속의 여인, 그림 속의 남자에게 가해진 실재의 위계는 제거되고 이들 모두 동등성의 차원에 기반한 자율적 개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가장 높은 실재성을 확보한 것은 시인 김참이다. 그다음이 시인 김참이 만들어낸 화자 ‘나’, 그다음이 소설책의 여인, 그다음이 소설책 그림 속의 남자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화자 ‘나’가 ‘김참 씨’를 서술하는 것으로 그 위계를 전복한다. 이 과격한 전복성에 환상성을 부여함으로써 모순적인 장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언급한 바 있는 무의식의 비논리성과 무시간성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초현실주의적 해석의 자동화된 습속을 드러낼 뿐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가능 세계(가능태)의 실재성을 감지하는 일이다.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 세계는 이 세계의 우주 가지(branch) 속에서는 현실화되지 못했으나, 다른 세계에서는 현실화된 실재로서의 세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능 세계들은 분기된 각각의 차원 속에서 실재한다는 것이 휴 에버렛 이후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는 다세계 해석의 세계관이다. 가능 세계들은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 장르를 통해서 상상되고 형상화된다. 그것은 이 우주 가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가능 세계에 대한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다른 우주 가지에서는 실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단지 무의식적 환상의 세계를 좇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무의식적 욕망은 현실 세계와 가능 세계를 연결함으로써 비존재의 모든 존재성을 이 세계로 견인하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심층 깊숙이 자리잡은 존재론적 욕망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3. 가능 세계와 시적 동맹의 윤리
최하연의 시집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2018)에는 독특한 시집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해설을 쓴 시인 최규승은 최하연의 시 「암흑과 빛 사이에 놓인 불투명한 것들을 한꺼번에 깨무는 방법」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남기고 있다.
부분 인용된 이 시의 첫 연은 ‘행간’ ‘욥’ ‘고래’와 각각 연관된 세 개의 이미지가 충돌한다. 물론 사실적인 묘사는 아니다. 상징이나 환유로 읽힐 수 있겠지만 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환상이 아닌 사실, 각각의 이미지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어느 순간 화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다차원적 사실.
차원 A에서는 “이불을 펴고 욥이 잔다”. 차원 B에서는 화자가 ‘침묵’하며 내려다보고 있는 글(또는 책)이 있다. 차원 C에서는 “고래가 헤엄치고” “파도”가 일어난다. 이들 세 차원은 하나의 차원으로 합쳐진다. 그 결과, 낯선 이미지들이 충돌해, ‘가을 나무’와 ‘여름 나무’가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시공간에 놓이게 된다. 각각의 차원을 시인은 ‘행’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 진술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극이 너무 크고 비유기적으로 결합되어있는 최근의 시들에 대한 시론적 관점을 제공한다. 해체주의적 세계관은 오랫동안 탈주체 혹은 주체 분열을 반복해왔다. 최규승은 탈주체와 주체 분열에서 벗어나 매우 드넓은 세계관 속에서 최하연의 시를 해석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현실이 하나의 차원으로 합쳐짐으로써 발생하는 다차원적 사실‘들’의 결합된 이미지. 비유기적 이미지의 시를 해체나 환상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로 보고자 하는 시도는 현대시가 더 이상 단일한 차원에 감금되지 않고 여러 차원들을 종횡무진하며 세계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분열적 주체나 환상적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확장을 시도하는 주체의 출현이다. 과거의 과격한 모더니즘 시들이 협애한 주체와 세계의 공간을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시의 주체는 파괴의 틈새로 생성된 새로운 공간의 이미지들을 세계의 실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진지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겠다. 탈중심의 시대 속에서 주체와 세계를 해체하는 것이 시적 윤리였다면, 이후로는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가능 세계들과의 시적 동맹을 맺는 것이 시적 윤리가 되었다고. 이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또다른 ‘나’의 주체들과 ‘세계’들과의 시적 동맹이 아닐 수 없으며, 지금의 현실태를 벗어나 어떤 가능태(가능 세계)를 현실화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시의 윤리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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