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소시집|김백겸
대전 금강은 청주 미호천과 만나 세종 합강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외 4편
금강변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는 사이클cycle인생이여
하늘아래 바람이 불고, 길가에는 난해한 기호처럼 쑥부쟁이 꽃들이 피었는데 지하세상의 황천처럼 금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뭉게구름의 그림자가 바닥에 잠겨있는데 몽상의 코끼리가 밀림을 향해 걸어가다가 무너지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금강은 흐르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은 호른 악기처럼 구부러진 한 낮의 시간을 돌아서 몸도 없고 정신도 없는 허공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로보로스Ouroboros-금강이 사행천으로 흘러가면서 한반도 백두대간 서쪽 평야에 지층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금강 변 플라타너스는 카발라Kabbalah-생명나무의 지문指紋처럼 잎을 피우고 떨어뜨리는 놀이를 계속 했습니다
별들의 간섭 파장이 포루투나Fortuna-운명의 여신이 디자인한 방황 인생을 지나 암흑 스페이스로 흘러갔습니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는 순간의 물고기들을 먹으며 살이 쪘기에 영원이 지나가지 못하는 지금 현재의 바늘구멍-죽음을 후회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
메가시티 여행자는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네
KAL기자 이륙을 하자 인천공항의 건물과 길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보잉 747기는 검은 황새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서울의 건물과 길들은 문명의 기판 위에 세워진 거대한 회로였는데 학교와 공장과 아파트가 회로안의 콘덴서와 칩들처럼 대지에 박혀있었다
비행기 고도가 올라가자 메가시티 서울은 추상으로 사라져 점이나 선분으로 나타나는 중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관계의 거리에 관한 해석이었고 ‘인간의 문명은 기호의 집합이다’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올라오는 중
인간의 도시는 퍼지 네트워크의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태양의 도시’라는 몽상
메가 시티 여행자가 몽상을 불태우니 인간의 문명은 기호와 에너지의 회로에 갇혀 돌아갔다
지상의 도시에는 길이 거미줄처럼 뻗었고 상하수도의 배관과 전기통신망을 흐르는 물과 불의 에너지가 순환을 계속했다
공장과 회사는 상품과 용역을 생산하고 폐기된 가전제품은 종말처리장으로 실려갔다
아이들은 산부인과 병실에서 태어나고 수명이 다한 노인은 영구차에 실려 화장터와 공원묘지로 갔다
메가 시티 여행자가 생각해 보니 세상은 불도佛道인지 노도老道인지가 돌아가는 퍼지 회로의 다차원 네트워크라는 뜬금없는 몽상
창 밖에는 태평양 위로 편서풍이 그치지 않고 불어서 이미지와 관념들이 구름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여행자의 몽상
뇌 안에는 편식의 습관과 사랑의 스타일을 만드는 감각의 홍학 떼들이 무의식의 캄캄한 해변가를 돌아다니는 풍경
인간의 뇌가 몸 밖의 세계 모델을 인식하는 수신기인지 영사기인지 뇌 과학자들의 논란이 있었던가
검은 우주에는 불타는 은하수들이 꿈나라 동산의 회전목마처럼 시공간의 회전 운동을 만들어 냈는데 원융무애圓融无涯가 달마도의 후광처럼 빛을 뿜는 풍경
아파트 베란다에는 목향 장미들이 앙코르와트의 압사라absara 미녀들처럼 피어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학인은 안내인의 설명으로부터 걸어 나가 홀로 태양이 들고 있는 회랑의 부조를 쳐다보고 있었지
태양은 검은 유리처럼 빛나는 돌 벽으로부터 그 옛날의 왕궁 연회를 비천飛天하는 연꽃처럼 피워내고 있었지
학인은 코브라 무늬의 피리소리와 표범 가죽으로 만든 북소리를 듣고 있었던가
학인은 마노와 황금 팔찌를 찬 압사라 미녀들이 무드라mudra동작으로 암시하는 -옥타브가 다른 세상의 춤을 보고 있었던가
학인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쌍둥이 강- 꿈과 현실이 서로 만나는 현재에서 당황한 마음이었던가
학인은 압사라 미녀들이 다양한 체위로 성전性殿의 벽을 수놓은 인도 고미술집을 꺼내 본다
현실의 왜곡과 꿈의 왜곡이 겹쳐 인도 최고의 미를 드러냈다는 압사라 미녀
학인이 압사라 미녀와 동침한다면 황금 여자를 소유한 아라비안나이트의 마신魔神이 부럽지 않을 거라는 몽상
학인은 다르마darma 학교에서 낙제 후 21세기 한국을 환생지로 택한 브라만 수행자였을까
구루 라마크리슈나가 말했지- “세상에는 여인과 황금의 마야가 전부이다. 수행자가 경전을 깊이 배우고 책을 여러 권 펴내도 여인과 황금을 바란다면 그를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지옥과 극락이 한 몸인 클라인klein병의 입구-크메르 제국의 후궁에서 화밀花蜜의 쾌락을 향유하는 몽상
*클라인klein 병甁: 병의 입구와 출구가 같아서 2차원 도형의 뫼비우스 띠처럼 3차원의 도형이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공간.
--------------------------------------------
화참畵讖은 매화역수梅花易數 꽃잎처럼 금강변 산책길에 떨어져 있네
아내가 IMF 때 컴퓨터 학원 파산 후 수학 과외선생으로 근근히 풀칠하던 시절
학인이 집 팔아 메인 빚을 정리하고 잔여 빛을 청산하는 인생을 불평하던 시절
친구 아버님이 결혼 전 사주를 봐주시면서 “시인 성공보다는 재물에 인연이 있어, 나중에 돈 벌겠네”- 놀라운 예언이 틀린 것을 불평하던 시절
친구 아버님이 원자력연구소 삼십년 회계부서 자금관리를 학인의 수입으로 잘못 판독한 해석을 불평하던 시절
갑자기 서울 원자력병원 파견에서 대전 연구소로 복귀하게 된 학인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하이텔 역학동호회에서 알게 된 자미두수 전문가를 사무실로 초대했지
학인도 명리를 독학 했으나 좀 더 객관적인 그림을 위해 전문가에게 해석을 부탁한 것은 처음
독신으로 역학 공부만 한다는 삐쩍 마른 사십대 후반 여자는 학인의 생년월시를 묻고 A4 복사지에 자미두수 명반을 그려냈다
그리고 학인이 무작위로 뽑은 12장의 타로 카드를 자미두수 12궁에 배치했다
시간의 선천 계획과 현재 공간의 잠재적 우연성을 결합해서 적중률을 높이는 자신만의 비법이라나
“12월 정화丁火신약身弱이 재관財官이 무거워 고생하시네요, 을목乙木편인偏印에 마음을 의탁해 학문과 예술을 공부하시나 용신用神은 목木이 아닌 화火입니다”
처음 듣는 해석에 아마추어 학인은 당황했지
내 일간日干인 화火가 용신用神이라니, 관운과 재운과 학문과 재능의 조력대신 오로지 나를 의지하는 자수성가 팔자란 말인가?
“하지만 타로-자미두수가 암시하는 올해 운수는‘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입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좋은 대운大運으로 진입 하십니다”
전문가 선생의 이 점단占斷은 드라마틱하게 들어맞았다
연구소로 복귀하자 건축 사업가 고교동창이 기획한 사이언스빌 63평 저택에 무료로 4년 입주를 하게 되고 과학기술정보연구원으로 재 파견 나가 독방의 작은 업무와 남는 시간에 원하던 책들을 보았으니
출장 감정인지라 당시에는 후한 액수였던 수수료를 주자 기분 좋게 악수하고 돌아가던 전문가선생은 학인이 집무실 입구에 걸어놓은 복사본 액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리 액자의 그림은 고흐의「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전문가 선생이 돌아서서 정색을 하고 VIP 고객을 쳐다보더니 “욕심이 많으시네요” 일침을 놓고 갔던 기억
전문가 선생이 고흐 그림을 게시한 학인의 무의식으로부터 뽑아낸 화참畵讖을 한참이나 생각했지
시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추사의 세한도처럼 자신을‘외롭고 높고 쓸쓸한’신독愼獨에 두어야하는가
학인의 무의식은 그 옛날 대흥동 충남도지사관사의 검은 지프차가 달려간 신작로를 입신양명의 길처럼 바라보고 있었던가
전문가 선생의 점단占斷이 소강절의 매화역수가 떨어뜨린 꽃잎처럼 잠깐 빛난 얼굴이었다가 세찬 시간의 바람과 함께 날라 간 인생의 황혼
전문가 선생의 진단이 맞다면 학인의 트라우마는 고흐의 밤하늘 별빛들이 아를의 강에 꽃불처럼 드리워진 화려한 현실이거나 화려한 시 이겠구나
현실이 화려해질 가망성은 별로 없으니 시라도 화려해져야겠다는 생각
학인이 죽은 후 호랑이 가죽무늬 같은 이름이라도 남겨야 인생의 분노가 눈을 감을 것 같으니 말이지
---------------------------------------------
소년이 커서 늙은 소년이 되었지
서울로 가는 KTX 강철바퀴는 시간의 무서운 노래를 부르고 늙은 아이는 태평양보다 깊은 상념에 잠긴다
백일몽에 잠긴 학인이 잠깐 존 순간 학인은 붉은 밭의 고랑이 있는 벌판을 맨발로 가고 있었지
현실의 꿈에서는 기호를 경작하는 21세기 시인이었고 꿈속의 현실에서는 고구마 농사를 경작하는 조선시대 농부였었지
생각하니 학인은 컴퓨터에 기호를 뿌려 시를 경작하고 있으나 전생에서는 대지의 기호-작물을 경작하던 현실인이었지
문화-경작culture은 인간의 이상한 백일몽이었으니 고대 암각화에 기록한 상형문자처럼 기호 문명이 인류의 영생 환상이었지
늙은 소년이 몽상하니 대학 시절 대흥동 집에서 사흘 밤낮을 길길이 뛰었던 큰 무당의 공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생각
죽은 어머니의 치마에 내린 예언이 모두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생각
조상 중에서 제일 힘센 증조할아버지는 시천주侍天主주문으로 도통한 동학교도
무당들의 점괘에 언제나 일번으로 나오는 분
사업 확장의 보험이 필요해서 사흘간 굿 비용을 댄 둘째 누님에게 증조할아버지의 신탁이 떨어졌다는 전언
“도통의 길을 걸어야 사업이 번창하리라”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들을 밥 먹기보다 좋아하고 아들의 출세와 미래가 오직 관심이었던 어머니에게도 공수가 떨어졌다는 전언
“병석의 남편이 몇 년 내 귀천歸天하지 않으면 아들의 자손에게 해가 있으리라”는 전언
죽은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당이 말한 두 번째 예언을 생각난 듯 전했지
아들의 마누라가 둘이라고 하더라
어머니가 또 둘째 누님을 부추겨서 동네 행사가 된 퍼포먼스를 벌렸구나
당시에 무당의 큰 굿을 미신으로 경멸했던 대학생 아들은 웃고 넘겼던 사건
둘째 마누라가 말년의 정부인지 늙은 아이의 아니마인지 궁굼했으나 지금까지 현실처지가 바뀌지 않았으니 후자인 모양
그 때 큰 무당은 몇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사흘 낮 사흘 밤을 환상에 감겨 예언의 풍선을 불었던가
무당은 하늘의 프로그램을 엿보는 해커
맹렬히 빨라지는 북소리에 작두를 타고 쌍칼을 던지며 트랜스transe 상태로 하늘의 다른 시간으로 진입했다는 상상
별들의 프로그램-운명이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바닥을 드러냈다는 상상
스릴과 공포를 먹고사는 예언들이 청산가리를 먹은 물고기처럼 일제히 배를 뒤집고 현실의 시간 위로 떠올랐다는 상상
현실의 시간에서 소년이 거지로 잠들었는데 꿈의 시간에서 늙은 왕자로 깨어나는 스토리가 시간의 미궁을 장자의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상상
꿈의 거울과 현실의 거울이 서로를 중중 무한으로 반사하면서 죽은 어머니가 전한 무당의 예언이 외나무다리의 원수처럼 실현되는 상상
그날 밤 큰 무당의 직관은 마호메트처럼 시간의 일곱 하늘을 뛰어넘었을까
염라대왕의 비망록을 훔쳐본 학인의 일생은 예언의 고통과 쾌락을 저울질하며 살았지
둘째 마누라가 사포와 이청조李淸照와 달의 여신-다이아나를 합성한 모습의 뮤즈일지도 모르기 때문
그날 밤 샤먼의 세계목에서 지상으로 하강한 이상한 예언들이 대흥동 집 마당에 붉은 눈물처럼 떨어졌기 때문
늙은 소년은 꿈속에서도 종종 세종 아파트의 집주소를 잃어버리고 대전시 대흥동 집으로 귀가하는 몽상가
그 때 무당이 작두에서 추던 무서운 춤이 늙은 소년의 운명을 밟고 있다는 생각
꿈을 깨어라, 늙은 소년아
네 인생의 블랙박스는 검은 자물쇠의 암호로 잠겨있다
너는 스마트폰의 일정을 체크하며 자본시장의 궤도와 회로를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기차의 전복만이 네 인생을 녹물이 두꺼워지는 삶의 감옥으로부터 구할지 모르지
KTX의 쇠바퀴가 부르는 노래가 카산드라의 절규 같기도 하고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erae가 물레를 돌려 뽑아내는 행복과 저주의 노래 같기도 하구나
종착역이 어디인지 모르는 스페이스 여행자가 창밖을 보니 KTX는 푸른 산의 초록 울타리를 지나 캄캄한 터널 구간으로 진입 하네
----------------------------------------------
신작소시집|김백겸
시작 노트
인간의 의식이란 하루 십만 가지의 아이디어가 흐르는 마음의 어두운 바다를 강력한 서치라이트로 비쳐 도대체 어떤 사건들이 자아와 환경사이에 일어나는지를 보는 상태. 동시에 인간의 의식이란 보는 자-주체가 사건의 주연 배우이면서 동시에 비판하는 관객. 시란 시인이 무의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기호 물고기들인데 그 기호를 보는 독자는 관객의 비판 의식으로 참여하는 경매인. 시가 제 값을 받고 현실-의식의 생선 시장에 팔리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 혹은 필연이 필요한가?
-----------------------------------------------
김백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지질 시간』『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비밀정원』외.
-시론집『시적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기호의 고고학』 등.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