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동(獐下洞)
-장하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안산동 관할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장곡리(獐谷里)였다가 조선 말기 장상리(章上里)와 장하리(章下里)로 분리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곧이어 4월 1일 군내면이 수암면(秀岩面)으로 통합ㆍ변경되어, 시흥군 수암면 장하리로 되었다. 1965년 벌말이 장하1리, 원후마을이 장하2리로 분리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시승격을 하면서 시흥시 장하동(章下洞)으로 되었다가,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거 안산시로 편입되어 안산시 장하동이 되었다. 1995년 7월 26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안산시의회 의결을 거쳐 장하동(獐下洞)으로 한자를 고쳤다.
• 군웅나무터
장하동(원뒤) 마을회관 자리에 3백 년 된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군웅제를 지냈다. 1950년대에 자연사하였다.
• 긴배미
채나뭇골 아래에 있는데 논이 길어 ‘긴배미[長畓]’라 부르고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곳이다.
• 꽃두래봉
원뒤 서쪽, 당재봉 남쪽에 있으며 원뒤와 양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일명 ‘꽃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 당재봉
원뒤 뒤(북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원뒤 주민들이 산 중턱에 사당을 짓고 마을의 안정을 위해 당제를 지냈다. ‘당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 뒷골
원뒤 동북쪽으로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 부른다.
• 목다리[木橋]ㆍ장하교(獐下橋)
벌말 남쪽으로 송장산 앞(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본래 나무다리[木橋]인데 일제 말엽에 새로 가설했다. 현재는 장하교라고 하며 1953년에 준공되었으며 길이 8m, 교폭 6m이다.
• 벌말[坪村]
본래 마을과 개다리 사이에 취락이 있었는데,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넓은 벌판이 되자 조선 말엽에 이르러 이곳 벌말[坪村]에 곤양배씨(昆陽裵氏), 풍양조씨(豊壤趙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등이 차례로 정착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 병풍바위①
벌말 입구 다리에서 북쪽 개울을 따라 약 70m 지점에 있는 바위이다.
• 병풍바위②
당재봉과 꽃두래봉 사이에 있는 큰 바위로 가운데에 구멍(1자 가량)이 있는데, 장수가 소변을 볼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 비성거리
목다리와 벌말 초입 사이에 비석이 있어 ‘비석(碑石)거리’라 불렀다가 비성거리로 변음되었다. 이들 비석은 1960년대 초에 4-H구락부 표시 및 마을 이정표로 사용했다.
• 사직단터[社稷壇址]
벌말 뒷산 정상에 있으며, 조선시대 안산군에서 지신(地神)과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한발이 있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현재 벌말 주민들은 벌말 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장하리 63번지에 있는 우물물을 떠다가 이곳 사직단터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우물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사직단은 안산시 장하동과 와 시흥시 조남동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시흥시 향토유적 제15호 조남동 사진단지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안산군 사직단지’를 ‘조남동 사직단지’로 이름을 바꾸어 향토유적으로 잘못 지정한 것으로 바로잡아야 할 과제이다.
• 사탯말우물
원뒤와 탑골 사이에 있는 우물로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당제에 정한수로 쓰일 만큼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우물이다.
• 삼형제바위
똑같은 모양의 바위가 셋이 있다. 품골 뒷산 정상에 있다.
• 새밭머리들
원뒤 장바다들 개울(안산천) 건너에 있는 들로 약 6천여 평에 이른다.
• 서낭당
원뒤 탑골 밑(남쪽)에 서낭이 있었다 하여 ‘서낭당’이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는 논이다. 일명 ‘돌무더기’라 칭하기도 한다.
• 선녀개울
원뒤 뒤(북쪽)에 있는 개울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선녀가 목욕하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 송장산
목다리 옆(서쪽)에 있으며, 송장이 누운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다. 뱀이 많아 일명 ‘뱀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랫고개
벌말 서편으로 이 고개를 넘으면 원뒤에 이른다. 시멘트포장과 비포장 소로이다.
• 앞고래실논
원뒤 앞(남쪽)으로 장바다들 내에 있는 논으로, 비옥하다.
• 양찰배미
원뒤 가게 밑(동쪽)에 있는 약 5백 평 정도의 논으로, 본래 위토여서 제사에 쓰기 위해 양찰벼만 심었다고 한다.
• 옥배들
원뒤 개울(안산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장하동과 양상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논인데, 이곳 둑에 소나무와 큰 구덩이가 있어 주민들이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 용당골[龍堂谷]
벌말과 조남동 방화마을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 중엽에 용씨(龍氏)가 큰 부자로 살았던 곳이다. 용당골[龍堂谷]은 외딴 산골이므로 도둑과 강도 등에 시달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 원뒤[院後]
고려시대 남양 지방에서 개성·인천·서울을 가려면 반드시 이 마을을 거쳐야 할 만큼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행려자(行旅者)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지금의 조양목장 밑(동쪽)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안산군 역원(驛院)조에 보면 “雙鹿院 在郡南五里”라 하여 이 원명이 쌍록원임을 알 수가 있는데, 쌍록원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쌍록원이 생긴 후 안산군수를 지낸 이동직(李東直 : 신평이씨)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뒤[院後]’란 마을 명칭은 쌍록원 뒤[院後]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 뒤에 있는 우물에서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우물제[井祭]를 지내오고 있다.
• 쌍록원 터[雙鹿院址]
원후(院後)마을이 있어 원(院)의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원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출장 여행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였던 숙박소이다.
쌍록원은 고려시대에 건립되어.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점차 쇠퇴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는 군에서 남쪽으로 약 2㎞ 되는 곳에 있었으나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 원앞논
쌍록원과 송장산 사이에 있는 논으로, 원(院) 앞에 있어 ‘원앞논’이라 했다.
• 탑골[塔谷]
원뒤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안양 한국병원 농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안산김씨의 사패지로 조선시대 중엽에 김진사라는 사람이 충청도에서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 들끓어 스님에게 이를 하소연했다. 스님은 골짜기 뒤의 산이 가재혈이라 이 혈을 끊으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그 후 가재혈의 발 되는 곳을 끊으니 과연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일 이후 김씨네는 망해 이 탑골[塔谷]을 떠났다고 한다. 골짜기 안에 있던 안산김씨 선대 묘 앞의 탑은 일제 때 없어졌다.
• 탑골고개
원뒤 탑골 안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 원뒤 사람들이 안산 서촌西村(현 시흥시 군자동)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고개이다. 비포장 소로로 마루턱에 서낭이 있었다.
• 품골[品谷]
벌말 용당골과 웃버대로 넘어가는 고개(보대고개)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 품씨가 살았다고 하여 품골이라 한다.
• 향교산(鄕校山)
당채봉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조선시대 안산향교(安山鄕校)에서 관리했던 산이라 하여 향교산(鄕校山)이라 하였다.
• 흔들바위
매봉 정상의 바위로 큰 바위 위에 또 바위가 있어 ‘흔들바위’라 칭한다.
• 장바다(대)들
벌말 목다리에서 남쪽으로 월피동 초입에 이르는 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왔으나 조선 말엽의 간척지공사로 인해 이곳 일대가 농경지로 변모되었다. 바닷물이 길게 들어와서 장바다라는 설과 옛날에 큰 장이 서던 곳이라서 장바다라는 설이 있다.
• 채나뭇골
민정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던 백남훈白南薰(1885~1967)의 묘터와 조양목장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다랑치논으로 5마지기 가량 된다.
• 저잣거리
조선시대에 장마당이 형성되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