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4. 인조 임금의 성은을 입은 하목정, 보물이 됐다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지난 2019년 12월 30일. 대구 유교문화관광자원 관련해서 희소식이 있었다. 달성 하목정이 대한민국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된 것이다. 하목정은 인근 묘골 육신사와 더불어 달성군 하빈면을 대표하는 유교문화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묘골 태고정[보물 제554호]과 삼가헌[국가민속문화재 제104호]에 이어 하산리 하목정까지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니 축하하고 또 축하할 일이다.
과인이 명하노니 부연을 달도록 하라
하목정(霞鶩亭)은 임난 직후인 1604년(선조 37)경,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1566-1638) 선생이 창건한 정자다. 낙포 선생은 이 지역 벌족인 전의이씨 문중의 현조(顯祖)로, 입향조 예산현감공 이필(李佖)의 손자다. 선생은 임란 때 대구 하빈지역 의병대장으로 활략했다. 이때의 공으로 원종공신에 오르고, 사헌부 감찰·양천현감·군위현감을 지낸 후, 고향 하빈으로 물러나 하목당[하목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그런데 당시 이 하목정에 왕손(王孫)인 ‘능양군(綾陽君)’이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후 능양군은 인조반정으로 임금 자리에 올랐으니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바로 그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중앙관직에 나아간 낙포 선생의 장남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이 경연관으로 입시했다.[낙포 선생의 아들인 이지영과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는 1613년(광해 5) 증광문과에 함께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 인조는 능양군 시절 하목정에서 만난 적이 있는 수월당을 알아봤다. “그대는 나를 알아보시겠는가? 그대 집 하목당은 참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지어져 있더군. 그런데 왜 부연(附椽)을 달지 않았는고?” 수월당은 국법에 의해 사가(私家)에는 부연을 달 수 없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인조는 정자와 일반 집은 다르니 부연을 달도록 하라며, 내탕금[內帑金·임금 개인재산]으로 은 200냥과 자신이 다녀갔다는 정표로 ‘霞鶩堂’ 세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 현재 하목정 정면 처마에 걸린 ‘霞鶩堂’ 편액이 인조 친필 편액 모각품이며, 대청에 걸린 ‘霞鶩亭’은 번암 채제공의 글씨다.
‘附椽’도 맞고 ‘婦椽’도 맞다
전통 기와집 지붕은 서까래로 기초를 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는다. 이때 건물 기둥 바깥으로 빠져나온 서까래 부분을 처마라고 하는데, 이는 햇볕이나 비바람을 막기 위함이다. 처마 서까래를 잘 살펴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단면이 원형인 서까래 위에 바로 지붕이 얹힌 형태고, 다른 하나는 원형 서까래 위에 단면이 사각형인 또 다른 서까래가 놓인 형태다. 이때는 아래쪽 서까래에 비해 위쪽 서까래가 바깥으로 좀 더 길게 나와 있다. 전자는 처마가 하나라고 해서 ‘홑처마’, 후자는 처마가 2층이라 ‘겹처마’라 한다. 겹처마는 홑처마에 비해 처마의 길이가 더 깊고 더 길다. 따라서 지붕이 커지고 건물의 외형은 더 웅장해진다. 이것이 겹처마를 설치하는 이유다. 겹처마 위쪽 서까래를 ‘부연’이라고 한다. 아래쪽 서까래 위에 덧붙였다하여 ‘붙일 부(附)’, ‘서까래 연(椽)’을 써서 ‘附椽’.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부연을 찾아보면 같은 항목에 ‘附椽’ 외에 ‘婦椽’이라는 또 다른 한자 이름이 있다. ‘婦椽’은 ‘며느리 부’, ‘서까래 연’이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스토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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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손재주 좋은 목수가 있었다. 한 번은 나랏님의 부탁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게 됐다. 목수는 평소처럼 서까래로 쓸 나무들을 미리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서까래를 올리기로 한 날. 참을 챙겨 작업장으로 들어서던 목수의 며느리는 땅에 주저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울고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며늘아가! 큰일이다. 다듬어 놓은 서까래가 하나같이 다 짧구나. 도저히 서까래로 쓸 수가 없어.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에 며느리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아버님의 손재주는 나라 안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서까래가 짧으면 다른 서까래를 하나 덧대어 길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옳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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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며느리 서까래’, 곧 ‘婦椽’이다. 조선시대엔 일반 사가에서는 부연을 달지 못했다. 국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다, 전양군 불천위 사당
‘4대봉제사’. 이 말은 4대에 걸친 선조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 우리나라는 국법에 의해 고려시대와 조선전기만 해도 신분에 따라 봉제사 대수를 달리했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 주자가례가 정착되면서부터 신분에 따른 차이 없이 4대봉제사가 유행,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4대를 넘긴 제사와 신주(神主)는 어떻게 될까? 그 처리방법은 크게 ‘매주’·‘체천’·‘불천위’로 나뉜다. ‘매주(埋主)·매안(埋安)·조매(祧埋)’는 산소·사당 곁에 신주를 묻는 것, ‘체천(遞遷)·조천(祧遷)·천조(遷祧)’은 4대손 안에서 가장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의 집으로 신주를 옮기는 것, ‘불천위(不遷位)·부조위(不祧位)’는 신주를 사당 안에 그대로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이중 불천위는 매우 드문 예다. 대체로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큰 공훈을 세운 경우에만 불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종가(宗家)·종손(宗孫)이라고 칭하는 것이 불천위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집과 그 집의 맏이를 이르는 말이다. 하목정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눠진다. 서쪽에 정자인 하목정이 있고, 동쪽에 관리사가 있으며, 관리사 북쪽에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사당이 있다. 이익필은 낙포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자는 문원(聞遠), 호는 하옹(霞翁), 시호는 양무(襄武)다. 1703년(숙종 29) 무과에 급제했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금위우별장으로 도순무사 오명항과 좌별장 이수량과 함께 난 진압에 앞장서,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웠다. 난을 평정하고 개선할 때 영조 임금이 직접 남대문까지 나왔고, 선정전에서는 임금이 하사한 술을 받았다. 이때의 공으로 ‘수충갈성양무공신(輸忠竭誠揚武功臣)’에 오르고, ‘전양군(全陽君)’에 봉군됐다. 이후 전라병사,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 하목정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양무’라는 시호가 내렸다. 전양군 불천위 사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 창건, 지금까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약간의 전퇴[빈 공간]를 두었다. 사당 앞뜰에는 수령 200-300년은 족히 넘는 배롱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수 백 년 세월동안 사당과 함께 한 탓인지 묘한 기운이 감도는 배롱나무다.
에필로그
‘하목’은 저 유명한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서(騰王閣序)」에서 가져온 말이다. ‘저녁노을은 외로운 기러기와 함께 나란히 날아가고, 가을 강물은 아득한 하늘과 같은 색이로구나(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에서 ‘霞’와 ‘鶩’을 취한 것이다. 하목정을 지어 수많은 시인달사들을 불러 모았던 낙포 이종문. 선생의 아들로 이 지역 최고의 누정으로 이름났던 ‘부강정’을 경영한 다포 이지화. 그리고 낙포 선생의 현손으로 「하목정16경」을 짓고, 하목정 뒤 불천위 사당에 혼을 의지하고 있을 하옹 이익필. 이들의 면면을 보노라면 ‘霞李竗朴’ 혹은 ‘竗朴霞李’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