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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13. 친정 곳에 묻힌 ‘미성부(未成婦)’ 박씨 자매
전통마을 혹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중 세거지에는 반드시 ‘선영(先塋)[선대 조상의 묘가 모여 있는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560년 내력의 묘골 역시 마찬가지다. 마을 입구 사육신기념관 뒤편에 묘골 박씨 문중의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선영 바로 아래에 두 기의 묘골 박씨 자매의 묘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점을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이들 자매 중 언니는 이미 혼례를 치룬 ‘출가외인(出嫁外人)’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풍속에 의하면 여성이 시집을 가면 당연히 시댁의 선영에 묻혀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간 언니와 그렇지 않은 여동생이 친정 곳 선영 아래에 나란히 묻혀 있으니, 여기에는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이 있다. 여자는 혼례를 치르고 시집으로 출가(出嫁)를 하면 더 이상 친정집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평소 별 생각 없이 써왔던 말인데 지금 다시 보니 참 정 떨어지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나 출처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본 바는 없다. 하지만 짐작컨대 이 말은 임난 이후인 조선 후기에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처가살이’가 우리의 전통적인 혼례문화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며느리가 시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위가 처가로 장가를 들었다는 말이다. 이른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솔서혼(率壻婚)’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서류부가혼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중기의 혼례문화는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변하게 된다.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이른바 ‘부류시가혼(婦留媤家婚)[며느리가 시댁으로 시집을 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에는 까닭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성리학적 예서(禮書)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법이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 정착해간 탓이다.
주자가례의 정착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전통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른바 ‘처가살이’, ‘각성(各姓)마을’, ‘윤회봉사(輪回奉祀)[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심]’, ‘남여균분상속제(男女均分相續制)[아들 딸 구분 없는 동등한 상속제도]’ 같은 고유의 전통이 ‘시댁살이’, ‘동성(同姓)마을’, ‘종자봉사(宗子奉祀)[맏아들이 제사를 모심]’, ‘종자중심상속제(宗子中心相續制)[맏아들 중심의 상속제도]’ 등으로 변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출가외인은 죽어서도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긴 지금도 출가외인이 죽으면 시댁의 선영에 묻히고, 또 시댁의 제삿밥을 먹으니 이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면 분명 출가외인임에도 시댁이 아닌 친정집 선영에 그 체백(體魄)이 묻힌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묘골의 순천 박씨 선영에도 이런 예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출가외인’라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2. 아직은 며느리가 아니다, 미성부(未成婦)
미성부의 뜻은 글자 그대로이다. 아직은 며느리가 아니란 의미이다. 좀 더 설명을 하면 혼례는 치렀지만 며느리로서 치러야 할 예법상의 모든 절차를 다 마치지 않았다면 며느리로서는 아직 ‘미성(未成)’이라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문헌자료에 나오는 ‘미성부’ 관련 내용을 몇 가지만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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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가 시댁의 사당에 인사를 올리기 전에 죽은 경우는, 그 친정집에서 장사를 지낸다.예기(禮記)
▪ 혼례를 올렸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부도(婦道)[며느리의 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신부(新婦).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대게 먼저 남편의 마음을 얻어야 시부모를 뵐 수 있기에, 혼인 다음날에 시부모를 뵈었다. 두세 달이 되어야 시부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니, 그제야 비로소 조묘(祖廟)[조상의 사당]에 알현(謁見)[인사를 올림]하는 묘현(廟見)을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은 너무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둘째 날에 시부모를 뵙고, 셋째 날에 사당(祠堂)에 알현한다면 편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원균·송은석,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 증자(曾子)가 물었다. “여자가 아직 사당에 알현하지 못했는데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조부의 사당으로 옮기지 않고,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사당에 부[祔·죽은 사람의 신주를 조상의 신주 곁에 의지케 하는 것]하지 않으며, 신랑은 상장(喪杖)을 짚지 않고, 짚신을 신지 않으며, 임시 거처에 머물지 않고, 여자 집으로 돌려보내 장사 지내니, 아직 성부(成婦)가 되지 않았음을 보임이다.”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
▪ 내가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이 선생[퇴계(退溪) 이황(李滉)]께 여쭙기를 “장가든 뒤에 신부가 한 해를 넘기고 돌아오거나 혹은 여러 해를 묵은 뒤에 돌아올 경우, 문에 들어와 시부모에게 절을 한 다음 그 즉시 사당에 참배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상고 때 반드시 석 달을 기다리게 했던 이유는 완전한 부인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옛날과 달라서 비록 시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부인으로서의 도를 닦았거나 혹은 자식을 낳은 뒤에 비로소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석 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신부가 사당을 알현하는 옛 법을 또한 취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옛 법의 취지를 보존한다는 의의를 취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였네.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으로 생각해 보면, 처음 시집에 돌아와 문에 들어선 즉시 사당에 나아간다는 것 또한 너무 급한 것 같으니 문에 들어와서 시부모에게 인사드리고 하룻밤 재계한 뒤 사당에 알현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네. 정구(鄭逑), 한강집(寒岡集)「채몽연과의 문답」
▪ 물었다. “후세의 시속에는 친영의 예가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며느리가 해를 넘겨 시댁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미성부(未成婦)로 대우한다면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갈암(葛庵)[이현일(李玄逸)]이 말했다. “옛날과 지금은 예의 실천에 다름이 있고, 또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친영의 예가 없다. 그래서 며느리가 시부모를 뵙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 만약 옛 예법에 따라 조부에게 부(祔)하지도 못하면서, 남편의 배위로 삼는다면 그 모양새가 예법에 맞지 않고 매우 난처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변통해야 하니, 이른바 예는 마땅함을 따른다는 것 아니겠는가?” 류장원(柳長源), 상변통고(常變通攷)
▪ 문) 여자가 혼례를 올렸지만 친영(親迎)하여 시가에 가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으며, 또 사당에 배알하지도 못하였다면, 이것은 아직 며느리가 되지 못한(未成婦)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장례에서 대상까지 누가 주관할 수 있으며, 또 축문에는 마땅히 그 남편의 이름을 써야 합니까?답) 옛날에 친영한 지 삼 개월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며느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친영의 예가 폐해졌기에 고금의 마땅한 도리가 다르니, 아마도 하나의 범례로 논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복추(張福樞), 사미헌집(四未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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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문집 권39. 정구와의 문답. 붉은 선 안이 미성부에 대한 퇴계 선생의 답변이다.
요즘 혼례문화의 시각에서 이 ‘미성부’를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는 그 당시의 역사와 문화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을 참고해보면 전통시대에는 여성이 혼례를 치르고도 일정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정식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를 ‘미성부(未成婦)’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3.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박씨 자매
어려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묘골 박씨 문중 선영에는 박팽년 선생의 증손자인 박연손 이하 직계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박순 부부와 박일산 부부의 묘는 선영 앞쪽 파회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다.] 근래에는 다른 곳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옮겨와 평장(平葬) 형태로 조성한 묘가 더해졌다. 그래서 지금 이 선영에는 수 백 년 내력의 옛 묘소와 함께 최근 조성된 평장묘가 각각 상단과 하단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묘골 박씨 선영의 아래쪽 끝단이 되는 축대 바로 아래를 잘 살펴보면 두 기(基)의 묘(墓)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묘가 이 글의 시작에서 말한 바로 그 ‘이상한 묘’이다.
사실 이 두 기의 묘 중 한 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묘 앞에 ‘의인순천박씨지묘(宜人順天朴氏之墓)’라 새겨진 묘비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묘비를 마주보고 서면 바로 우측에 묘가 하나 더 있다. 이 묘는 묘비도 없는데다가 봉분이 낮은 탓에 유심히 잘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래서 무심코 바라보면 ‘의인순천박씨지묘’만 눈에 들어올 뿐, 곁에 있는 이 묘는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이 두 묘는 묘골 박씨 문중의 어느 자매의 묘인데, 문중에서는 ‘박씨 부인 순절묘(殉節墓)’로 알려져 있다. 이 묘와 관련하여 사육신과 묘골의 유적[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1988]에 소개된 내용을 그대로 한 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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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朴氏夫人) 순절묘(殉節墓)
묘골 중산(中山) 감찰공(監察公) 휘(諱) 종남(宗男)의 묘 밑에 묘 2위가 있는데, 이는 총관공(摠管公) 휘(諱) 충후(忠後)의 따님의 묘다. 임진[1592년] 5월 18일 왜병이 묘골을 포위하자 두 자매는 낙동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묘전에서 좌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종택(宗澤)에게 출가하여 신행(新行) 전이었고 후에 정려(旌閭)되었다. 우편은 출가 전인 동생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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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즉슨 이렇다. 이 묘는 박팽년 선생의 5대 종손인 부총관공 박충후의 두 딸의 묘라는 것이다. 자매는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해 벼랑에서 뛰어내려 자결을 했다. 당시 언니는 인근 고을의 전의 이씨 문중의 이종택(李宗澤)과 혼례를 치른 후였다. 이종택은 전의 이씨 대구 입향조인 이필(李佖)의 손자로 선무랑 군자감 참봉을 지냈으며, 임란 때 하빈 지역 의병대장이자 달성 하목정의 주인인 낙포 이종문의 동생이었다. 어쨌든 언니 박씨 부인은 임란 당시 아직 신행을 가지 않고 친정인 묘골에 살고 있다가 그만 동생과 함께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일은 훗날 세상에 알려져 박씨 부인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열부정려가 내려진 것으로 전한다.
현재 묘골 박씨 선영 아래에 있는 언니 박씨 부인의 묘비 전면에는 ‘의인순천 박씨지묘(宜人順天朴氏之墓)’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의인(宜人)’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정·종 6품 문무관(文武官)의 처에게 내린 작호(爵號)이다. 박씨 부인의 남편인 이종택의 품작이 종6품 선무랑(宣務郎)이었으니 그 부인의 작호는 당연 ‘의인박씨’가 되는 것이다.
구봉산 탁대. [사진출처: daum지도]
묘골 구봉산 탁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진에서 처럼 강 건너 성주땅은 물론 멀리 가야산까지도 보인다.
참고로 대구지역 옛 선비의 문집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해 초토화된 묘골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하긴 앞서 살펴본 ‘난 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亂後人家百不存]’로 시작되는 오음 윤두수의 시만 봐도 당시 처참했던 묘골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도 남음이 있다. 박씨 자매가 투신한 장소는 묘골 인근 낙동강변 구봉산의 ‘탁대바위’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탁대바위를 다른 말로 ‘자매바위’라고도 하며, 탁대가 두 조각이 난 것도 자매가 투신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4. 에필로그
달성 하빈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묘골 박씨’와 ‘전의 이씨’ 문중은 조선 후기 대구를 대표했던 ‘24문중’의 일원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쉽게 생겨나지도 또한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이들 두 문중의 문세(門勢)는 조선시대를 넘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말인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박씨 부인 정려’가 그것이다. 묘골 박씨와 전의 이씨는 지역사회에서 대단한 문세를 유지하고 있는 문중이다. 그런 만큼 선조의 업적과 유적에 대한 관심도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박씨 부인에게 열부정려를 내렸다는 기록은 보이는데, 그 정려가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필자가 나름 확인해본 결과 박씨 부인의 정려각은 하빈이 아닌 낙동강 건너 고령 땅 다산 상곡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정려각은 1900년대 초까지도 존재했으나 이후 어느 때인가 사라져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령 상곡에도 전의 이씨 세거지가 있는데 낙포 이종문의 차남인 다포 이지화의 후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제넘지만 한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지금이라도 박씨 부인의 정려각을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정려 사실에 대한 분명한 근거자료만 있다면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게다가 묘골 박씨요, 전의 이씨 아니던가!
의인순천박씨지묘. 뒤로 보이는 석축 위가 묘골 박씨 선영이다.
봉분 너머로 비가 보이는 오른쪽 묘가 미성부였던 언니의 묘이며, 봉분이 나지막한 왼쪽 묘가 처녀였던 동생의 묘이다.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끝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한다. 현재 친정 곳인 묘골에 묻혀 있는 ‘의인순천박씨부인’의 묘사는 누가 지내고 있을까? 답은 친정이 아닌 시댁인 전의 이씨 문중에서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미성부 박씨 부인’도 체백은 비록 친정 땅에 묻혔으나 혼은 어쩔 수 없이 시댁 귀신이 되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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