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3장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6, 32)
종교의 진수
“종교의 진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진정한 종교의 진수입니다. 종교에서 다른 것들은 장사에 불과합니다.”
원수와 친구가 되라는 명령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인 ‘황금률’로서 간디뿐만 아니라 공자, 붓다, 힐렐 같은 위대한 사상가와 성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제자 중궁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인(仁)은 문을 나서면 그 누구라도 큰 손님을 대하듯 모시는 것이며(出門如見大賓), 사람을 대할 때 신에게 큰 제사를 드리듯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使民如承大祭)이다.
이어서 “인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붓다는 마음의 가장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브라흐마비하라(Brahmavihara)’라 했는데,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이는 한자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다.
첫번째마음은‘마이트리(maitri)’다. 마이트리는‘참된사랑’이라는 뜻으로,히브리어의 ‘헤세드(hesed)’나 그리스어‘아가페(agape)’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참된 사랑은 그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한다. 중국불교에서는 마이트리를‘자(慈)’로번역한다. ‘慈’는 위에‘현(玄)’이 두개 겹쳐 있고, 아래에‘심(心)’이있다.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해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두번째 마음은‘카룬나(karuna)’다. 카룬나는 상대방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과 능력으로 영어로는‘컴패션(compassion)’이다. 컴패션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카룬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이 마음을 가지려면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중국 불교에서는 카룬나를 ‘비(悲)’로 번역한다.
세 번째 마음은 ‘무디타(mudita)’이다. 무디타는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능력이며,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노력이다. 중국 불교에서는 무디타를 ‘희(喜)’로 번역한다.
네 번째 마음은 ‘우펙샤(upeksha)’다. 우펙샤는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중국 불교에서는 우펙샤를 ‘사(捨)’로 번역한다. 사(捨)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람의배경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사람을 그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가?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원수는 과연 누구인가?
유대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미쉬나(Mishnah)』를 정확히 이해하고 행동한다고 자부하던 율법교사 한 명이 몰래 예수를 찾아가 묻는다.
랍비!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당신도 랍비 아닙니까? 모세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율법교사가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너의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는 “당신의대답이 옳습니다. 가서 그렇게 행하면 살것입니다”라며,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실천하는데 영생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다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율법교사가 간과한 ‘레아’의 정의를 새롭게 시도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말한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
착한 사마리아인과 황금률
무명의 사마리아인은 길을 가다 피투성이가 된 이방인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를 도왔다. ‘측은한 마음이 들다’의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는 ‘내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느끼다’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예수가 유대인들을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로도 사용됐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14, 14)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