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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조실 천운(天雲) 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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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대담∥성찰과 희망 3 ∥대흥사 조실 천운(天雲) 스님 "모든 종도에게 감투욕심 안 나도록 교육적 방안을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다.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언, 다시말해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모든 중생을 위해 걸림없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이 선언은 이후 삼라(森羅)를 포섭한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제자만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세간의 일상용어로서 세인들의 보편적 사고방식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5월이다. 룸비니의 꽃내음이 만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다시 맞았다. 이즈음, 우리시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갖추고 탄생 선언을 올곧이 실천하고 있는 한 노(老)스님을 찾아뵈었다. 큰스님을 친견하는 일은 시공간을 초월해 몹시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는 환희심만큼이나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큰스님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섰다. 큰스님을 뵙고자 서울 강서구 가양동 홍원사에 도착한 시간은 4월 15일(2005년) 저녁 7시. 당초 16일 오후 광주 향림사에서 뵙기로 약속돼 있었으나, 일제시대 〈불교시보〉를 창간한 김대은(金大隱, 1899~1989) 스님의 16주기 기일(16일)을 맞아 큰스님께서 이날 상경한다는 기별을 접하고 하룻밤 주석하게 될 홍원사를 찾은 것이다. 홍원사(주지 원명)는 시내 아파트단지를 주변에 두고 있는 주택가 속 포교 일번지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사찰은 ‘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근본불교수행도량'을 대표하는 수사찰로, 서울 동작구 대방동과 강서구 가양동에 법당을 두고 있다. 근본불교수행도량은 근본불교의 정통수행법인 위빠사나 선수행과 우리나라 전통수행법의 비교연구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적합하고 합리적인 수행체계를 정립하고, 아울러 근본불교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한국불교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단체이다. 현재 홍원사 외에도 부산에 백련사와 미국 뉴저지에 원적사를 두고 근본불교 수행을 통한 불법홍포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모저모의 생각을 정리하며 당일 홍원사에 도착하니 다음날 대은스님의 기제를 준비하는지 대중의 손길이 몹시 바빴다. 필자는 먼저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후 큰스님이 머물고 있는 방사를 찾아 친견의 예를 갖췄다. 때맞춰 큰스님이 상경했다는 소식을 접한 인연 있는 스님들의 친견례도 더불어 분주하게 이어졌다. 몇몇의 대중스님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 대담을 지켜보았다. 큰스님과의 대담이 잘 이뤄질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앞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중설법처가 된 대담현장 “無有定法의 이치를 알라" 기우였다. 아니, 중생심의 발로였을까. “불교는 심심미묘법(深深微妙法)이라 했습니다. 과학적 바탕 아래 철학을 세우면서 수행과 정신적 이념을 추구해야 합니다. 스님네들은 물론이거니와, 불교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도 수행하는 속에서 사람도 만나고 취재도 하고 글도 써야 하는 거지요." 그랬다. 천운스님은 ‘어린아이들의 부처님'답게 너무도 천진(天眞)하게 주어진 시공간을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필자의 질문에 앞서 불교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덕분에 질문 첫머리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대담 내용의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취재차 큰스님을 찾는 불교기자들의 사고와 행동거지를 일러주고 있는 듯싶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본지가 기획한 대담도 대담이거니와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큰스님의 답변은 곧 법문이 되었고, 그 자리는 그대로 설법처가 되었다. 필자 또한 마치 다섯 비구 혹은 천이백 대중이 되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법륜(轉法輪)을 경청하는 듯했다. “불교의 요체는 깨침과 자비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시교(五時敎)에 따라 49년간 고구정녕 말씀하신 내용이지요. 따라서 적어도 불제자라면 금강경에 나오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소유(無所有)를 뜻하는 바, 이는 곧 인연법을 말하는 것으로 무유정법에 들면 상대를 위한 자비심이 자연스레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깨침과 자비가 일체가 되는 겁니다." ‘왜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근본도리를 말하고 있음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 수행의 지중함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문제인식의 골자였다. 그것은 비움이요, 집착을 버리는 일이었다. 내친 김에 교단 현실을 바라보는 일단의 생각을 여쭸다.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교의 목적은 성불에 있고, 성불의 목적은 중생구제에 있습니다. 중생구제는 곧 자비의 실천이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성불도, 자비의 실천도 모두 주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종단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부처님께서 수행에 들어가는 문(門)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게 곧 율법입니다. 일반대
중생의 감성을 꾸짖음이었다. 깨치지 못하면 감성이 들어간다는, 출가수행자의 비이성적 범계행위(犯戒行爲)를 질타하고 있음이었다. 수행의 문이 계율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계·범계를 능사로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수행을 무너뜨린 근본원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큰스님의 지적은 불도를 수행하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말씀하시는 걸로 이해됩니다. 삼학의 겸수를 통해 비로소 불도수행을 완성시킨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수행, 즉 깨침의 근본이 율법이라면 지혜란 자비를 행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상대를 부처로 알고 부처 대접하듯이 하는 걸 말하는데, 부처님처럼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버린, 보다 이성적인 생각과 삶을 곧 자비라 하는 겁니다. 서양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는 마누라 때문에 고생했고, 예수는 탄생에 대한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으며, 공자도 서자로 태어난 설움으로 오랜 세월 유행(遊行)한 끝에 세상을 통달했지만, 이들 성인들은 모두 다분히 감성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부처님은 감성적인 삶을 이성적인 삶으로 바꾼 깨침의 지혜를 보여준 분입니다. 수행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가수행의 목적을 깨침과 자비에 두고 있음이었다. 이는 곧 계정혜 삼학의 실천을 통해 수행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실천과 다름 아니었다. 천운스님의 일평생이 그랬으며, 또 그렇게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 끝없는 복지원력, 불국토를 꿈꾸다 사실이 그랬다. 천운스님의 중생구제 복지원력은 끝이 없어 보인다. 광주 향림사를 축으로 사회복지법인 향림원을 설립해 어린이집·유치원·불교대학·장애인복지관·노인복지관·신협·출판사 등 10여개 복지관련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 예토를 불국토로 승화시키는 길목에 천운스님은 그렇게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출가의 궁극적 목적이자 불교의 기본덕목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분입니다. 특히 비구로서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키워 사회로 배출한 보살의 삶을 살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평생 내 자신에게 배움을 준 세 분이 계신데, 한영·지암·서옹스님이 그분들입니다. 득도수계(得度受戒)의 인연을 심어준 한영스님께는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는 용맹정진의 교훈을, 수행의 불꽃을 피워준 지암스님께는 '나라와 종단이 없으면 수행도 할 수 없다'는 애국·애종심을, 지계청정(持戒淸淨)의 지중함을 깨우쳐준 서옹스님께는 돈오돈수의 선지(禪旨)를 확실히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교학의 거두 한영스님의 하심(下心)을, 대중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암스님의 교화력을, 의단타파(疑端打破)에 일가견을 이룬 서옹스님의 선지(禪智)를 금생에 다 배웠으니 내 복이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게지요. 죽는 날까지 여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보은(報恩)하는 길이라 다짐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아이들을 돌보고 복지활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것도 보은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제 마음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천운스님이 ‘아이들의 부처님'으로 거듭난 배경이다. 6.25 한국전쟁 직후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36년 전 광주시내에 향림사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운스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은 2백여 명. 이들 중 10%에 해당하는 20여명이 사문(沙門)의 길을 걷고 있다. 화엄사 주지 당시에는 35명을 동시에 출가시켜 성철스님께 '중 공장장'이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천운스님이 회고한 바와 같이 수행의 문을 열어주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해준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과 지암(智庵) 이종욱(李鍾郁, 1884~1969) 스님은 근·현대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인재양성과 포교의 현대화를 주창한 한영스님은 광복과 더불어 조선불교 제1대 교정에 추대된 분이며, 지암스님은 1941년 근세 최초 합법적 교단인 ‘조선불교조계종'을 설립해 지금의 총무원장격인 초대 종무총장과 광복이후 교단정화운동 당시 대처승측의 분규수습대책위원장을 역임한 분이라는 점에서 근․현대불교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지암스님의 경우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조계종 탄생의 산파임엔 틀림없으나, 항일운동가인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물론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예민한 사안이나 그래도 큰스님의 견해를 듣고 싶어 조심스레 여쭸다. ―지암스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최근 독도문제 등 일제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친일파 논란도 재론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은사스님을 놓고 말들이 많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광복이 되자 김구 선생이 귀국길에 올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입니다. 당시 불교혁신동맹 청년단원이었던 강석주·김어수 등이 김구 선생 마중길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은사스님을 친일파라 하여 종무총장 자리에서 끌어내린 주역들입니다. 헌데, 김구 선생이 마중 나온 불교계 인사들과 악수하다가 은사스님이 보이지 않자 까닭을 물었고, 친일파라 하여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는 대답을 듣더니 진노했다는 겁니다. '지암스님은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해준 불교계 대표적 인사'라는 김구 선생의 설명이 뒤따랐고, 그 후 김어수 등은 은사스님을 찾아 참회했다고 들었습니다. 용성·만공·한암·구하·성월·대은스님 등이 모두 은사스님을 좋아했는데, 독립자금을 모아준 스님들이라고 합디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요령을 좌우로 흔들며 옴마니반메훔을 외면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뜻으로 서로 교감했다고 하더군요." 천운스님의 회고는 밤을 새도 끝나지 않을 듯싶었다. 근래 들어 불거진 친일파 논란 때문인지 지암스님에 대한 회상은 자연스레 일제통치 당시로 모아졌다. 그래서였을까. 교단정화운동, 즉 비구-대처승 분규 당시 지암스님의 행보와 관련한 일단의 생각을 거듭 여쭸으나, 대답은 매번 일제시대 당시로 돌아가곤 했다. 그것은 은사스님에 대한 친일파 논란에 큰스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반증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김구 선생의 귀국 시 발언내용은 그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나 신빙성 있는 자료를 아직 확보하지 못한 게 교단안팎의 실정이다. 하여, 지암스님의 항일운동 관련여부는 천운스님의 회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근·현대불교사의 고증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교육만이 수행회복 지름길" 교단현실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대담을 이쯤에서 갈무리해야 할 듯싶어서다. ―한국불교에, 조계종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살펴야 하겠습니까? “교육입니다. 사실 사찰주지는 수행과 멉니다. 모든 종도에게 감투욕심 안나도록 교육적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총무원장스님께 제안한 바 있는데, 종단 내 모든 선거법을 바꿔 돈 안들고 정쟁에 휩쓸리지 않는 방안과 종단차원의 수익사업을 벌여 은사나 문중이 못하는 종도교육을 총무원에서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는 요청이 그것입니다. 이는 '나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불교를 살리고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는 한영스님과 지암스님의 유훈이었고, 나 또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마음으로 어린아이들을 키워낸 것입니다. 종단의 미래는 예서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든 속가든 핵심은 교육이었다. 출가수행자가 반드시 찾을 게 견처(見處)인데, 이는 수행의 기본이요 교육에서 비롯된다는 큰스님의 사자후였다. 천운스님은 1929년 음력 11월 24일 전북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한정마을에서 함평 이(李)씨 집안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속명은 ‘등인(灯寅)'이나 '정인'이라고 불렀다. 부친의 함자는 재우(載友), 달리 종협(鐘挾)이라고 칭했다. 모친은 묘금도 유(劉)씨 각심성(覺心誠) 보살이다. 한의사였던 부친이 어느 날 졸다가 무등산에서 번진 산불이 몸을 휘감는 꿈을 꾸었는데 태몽이었다. 부친은 정인을 3년이나 늦은 1932년 1월 1일생으로 출생신고했다. 완고한 한학자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졸업 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수년 후 또래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 정인도 늦게나마 진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할아버지 반대로 무산됐다. 공부하고픈 마음에 가출을 시도했고, 정읍서 얼마간 헤매다 비구니스님을 만나 따라나선 곳이 내장사였다. 예서 당대의 대강백 한영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왜 왔느냐'는 한영스님의 물음에 전후사정을 말씀드리니, 노스님께서 중학교에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한영스님의 그림자가 되어 절 생활에 습(習)이 들면서 불교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영스님께 축발수계(祝髮受戒)하기에 이른다. 1946년, 나이 18세였다. 가출이 그대로 출가로 이어진 것이다. 이듬해 한영스님께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시봉에 들어간 지 3년, 1948년 한영스님께서 입적했다. 한동안 만행하다가 월정사 지암스님을 찾아 사자(師資)의 인연을 청하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한국전쟁 당시 4년간 군생활을 마친 후 지암스님을 다시 시봉했다. 그 세월이 15년이다. 선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한 후 송광사·용암사·도갑사 등 제방선원을 찾아 ‘무(無)'자 화두를 들고 수선정진(修禪精進)에 힘쓴 때가 이즈음이다. 마침내 혜안(慧眼)을 얻으니, 1961년 세납 33세였다. 그 후 화엄사 주지를 역임하고 대흥사에 1년 정도 머물렀다. 그 때의 일이다. 하루는 꿈에 샘에서 물을 떠 마시다가 잠을 깼다. 그날 광주 어느 절에서 법문을 요청해왔다. 며칠간 법문을 설하고 거마비로 5천원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산자락에 터를 잡으니 그 터가 바로 꿈에서 샘물을 마시던 그 곳이었다. 지금의 향림사다. 그즈음 은사 지암스님이 입적했다. 1969년의 일이다. 향림사를 세우면서 지역포교는 물론 복지정토 구현에 본격 앞장서기 시작했다. 매년 부지를 사들여 지금까지 6천여 평을 확보했다. 현재 향림사 대중은 대략 1백50여명. 복지관련 시설에 종사하는 종무원만도 50여명에 이른다. 이들의 자녀교육비는 향림사서 일체 부담해주기 때문에 걱정 끝이다. 불국토가 따로 없음이다. 천운스님은 요즘 지역 노스님들께 가사·장삼 등 옷가지를 보시해 주고 있다.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노스님들을 초빙해 공양도 올릴 계획이다. 최근에는 《금강경 강설》등 10여권의 책을 발간해 인연 닿는 대중에게 나눠줬다. 총 4집에 이르는 법문집을 출간해 보시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사진작가 장명확=20여년 전인 대학 1학년 때 사진미학을 강의한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지금도 참구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불교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개인전 2회, 그룹전 30회. 사진에세이 [귀향]을 펴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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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17일 15:29:09 / 수정 : 2006년 11월 17일 15:4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