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4:1-14 (막 13:1-13; 눅 21:5-19)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심 찬송: 3, 27, 546장
교독문: 딤전 6:3-14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 가운데 화요일 오후쯤 되었다. 성전에 입성하셔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신 후, 그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셨고, 그 후 여인들의 뜰 앞에 놓인 헌금함 앞에서 두 렙돈을 넣은 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후 성전에서 나오셔서 감람 산으로 가는 도중 제자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예수님께 성전 건물을 가리켜 말하였다. 마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의 감탄에 대해 마가는 막 13:1에서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기록했고, 누가는 눅 21:5에서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들을 보면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함에 취하여 예수님께서 이 성전의 주인이 되실 것에 대한 기대를 한껏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하신다. 2절을 보면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멸망을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의 기대를 완전 무너뜨려버리신다.
사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세 번째 성전으로, 첫 번째는 솔로몬 왕이 세웠고, 두 번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 세웠고, 세 번째는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B.C. 20년부터 A.D. 65년까지 오랫 동안 지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아직도 건축 중이었는데, 이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시대의 성전이나 포로 귀환 후의 성전의 규모보다 약 3배 정도 크기가 더 크다. 그리고 성전을 둘러싼 제사장의 뜰(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는 곳)과 이스라엘의 뜰(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 그리고 여인들의 뜰(이스라엘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로 일자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이방인의 뜰로 둘러싸여 있다. 이렇게 규모 면에서 아주 웅장한 성전을 보면서 제자들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의 아름다움을 말했는데, 예수님은 갑자기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심판을 말씀하신다.
사실 예수님은 이 황폐함에 대해 성전을 나오시기 전에 마 23:38에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면서 이미 말씀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 황폐함에 대한 언급으로 제자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인데, 제자들은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신 후 자신들의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예수님은 감람 산으로 가신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는다. 막 13:3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찾아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멸망과 황폐함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질문한 것이다. 제자들은 두 가지를 질문하고 있다. 하나는 “어느 때에”이고, 또 하나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이다. 즉 언제, 그리고 어떤 징조로 그것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말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 그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방을 시켜 주시는 메시아가 오셔서 왕으로 등극하면 이때부터 종말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서 왕으로 등극하시기를 소망하였고, 등극 이후의 이스라엘의 영광, 그리고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했던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를 종말로 생각했느냐 하면, 구약의 예언을 따라 메시아께서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이 땅은 메시아 왕국이 될 것이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풀리게 될 것이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세상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구약에서 예언한 모든 것이 완성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종말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 24:5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가까운 종말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의 죽음 이후 성전이 무너질 것에 대한 예언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 때 있을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내용을 보면서 지금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를 세상의 사건들과 대조하여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내용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종말은 반드시 올 것이지만,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과 종말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종말이 가까울수록 이런 일이 더 일어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 사건, 그리고 재림 사건 사이의 모든 시대가 바로 종말을 바라보며 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한 사건을 통해 이것이 종말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먼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가? 5절은 거짓 선지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미혹될 것이다. 이런 사건은 교회 역사 가운데 늘 있어온 사건이다. 심지어는 종교개혁 당시에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음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그들의 신앙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일이 많이 있었다.
조지 폭스(Gorge Fox, 1624-1691)라는 구도자는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열아홉 살에 집을 나와, 4년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647년경부터 설교를 시작하여 ‘내면으로부터의 빛’에 의한 구원을 전하며, ‘진리의 벗’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퀘이커파(친우회, 또는 종교친우회)로 불렸으며,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조지 폭스가 아무리 구도자라고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가르침을 세우지 아니하고 독자적인 자신의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6-8절에서 난리, 대적, 기근, 지진 등을 말씀하신다. 자연적인 재해와 나라간의 전쟁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이 땅에 계속 있어온 것으로, 어느 큰 사건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종말의 증거요, 예수님의 재림의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 6절 마지막에 “아직 끝은 아니니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신 것이다. 사람들이 어느 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서 이 세상이 끝나고 나의 삶도 끝나 평안과 안식의 자리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소원일 뿐이지, 주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아닌 것이다.
세 번째는 9-12절에서 환난, 미움, 실족, 미혹, 불법, 사랑 없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특징은 사람의 성품이 악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지 않고, 즉 하나님의 공의와 인애를 실천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에게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은 이 세상이 멸망을 받아 마땅한 증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3-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24:13-14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의 특징은 바로 “인내”라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 언제 어떤 징조로 오실 지 알 수 없지만, 끝까지 믿음을 갖고 견디라는 것이다. 이런 견딤 가운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위하여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때에 예수님을 보내실 것이고, 이때 성도의 소망이 되는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가져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도가 사는 세상의 특징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의 특징이 무엇인가? 거짓 선지자에 속을 만큼 우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크게 생각하여 어느 누구하고도 다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조차 사랑이 식어질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특징이다.
이런 세상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성도가 두 번째 알아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이다. 그것은 어떤 징조라고 생각되는 것에 좌지우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징조들은 멸망을 가리키며, 이 세상이 멸망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지, 그 사건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징조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때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왕왕 어떤 목회자들이 큰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 오실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말하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욥기에서 배운 대로 인과응보의 논리에 빠진 것이요, 성경의 원리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을 오해하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수준이 저급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거짓된 현상들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들, 잘못된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른 믿음의 요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