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화암사 정밀실측조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달동네에 위치한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았다. 문을 열면 보이던 화암사의 고요한 경내와 주변의 싱그러운 숲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황산가스와 도시의 온갖 먼지로 가득한 뿌연 하늘이 보였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이곳이 나의 작은 살림집이고 가까이에 일할 처소가 있다.
실측한 자료를 기름종이에 옮기는 일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도면작도를 캐드로 작업하던 때가 아니라서 모든 그림은 오로지 손으로만 진행하였다. 선배들은 자기가 조사한 건물 도면을 그렸다. 트레이싱페이퍼에 작도한 것을 도판에 깔고 그 위에 기름종이(트레팔지)를 덮어 깐다. 기름종이는 장기간 도면을 보관하는데 유용하며 트레이싱페이퍼에 비해 변형이 덜한 장점이 있다. 투명도는 트레이싱페이퍼에 미치지 못하나 밑에 깔린 그림에 밀착시키면 선명하게 보인다. 실측도면을 트레팔지에 옮겨 그리는 작업은 ‘로트링’이라 블리는 특수 펜으로 그린다. 로트링의 펜 굵기는 0.15mm부터 0.5mm까지 다양하다. 도면을 그릴 때 주선은 굵은 펜을 사용하고 부선은 가는 펜을 사용해야 한다. 한 장의 도면을 그리면서 다양한 로트링을 바꿔가며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완성된 도면이 살아난다. 촉이 워낙 가늘다 보니 조금만 무리해 힘을 주면 휘어져 버린다. 하루 종일 로트링 작업을 하다 보면 잉크가 새어 나와 손에 묻기도 하고 도판에 묻기도 한다. 손에 묻는 거야 문제 될 것 없지만 납품할 도판에 잉크가 묻으면 낭패다 그럴 때를 대비해 로트링 전용 지우개를 곁에 두고 수정하곤 하였다.
내가 그릴 도면은 화암사 경내에 위치한 구조물 중 석조물과 극락전 내부에 설치된 닫집과 우화루 내부 투시도 등이다. 이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것은 닫집이다. 닫집은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한 그림이다. 다만 완성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축소도면을 그리는 과정은 각고의 인내가 요구되었다. 원본을 유리창에 붙여놓고 스케일로 일일이 재서 다시 모눈종이에 그림을 옮기고 그걸 다시 트레이싱페이퍼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종이에 로트링으로 그려 완성하였다. 매일매일 똑같은 작업을 보름동안 진행하였다. 닫집 도면은 나중에 장기인 선생님 저 문화재용어사전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 내부 닫집 앙시도 및 우화루 내부 투시도
(국가유산청 자료 / 완주 화암사 정밀실측조사보고서-1985/새한건축/그린이 카페지기)
입사 후 일년 반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선배들은 내게 건물에 대한 도면작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직 도면을 그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린 도면을 보고 한 선배는 건축도면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두고 선배들끼리 옥신각신 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다수의 의견에 의해 아직 도면 배울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고건축(설계)이란 것이 도제식으로 후배를 가르쳤다. 그러니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도면 그리는 법을 알지 못한다. 선배들의 결론에 낙심한 나는 한동안 고건축을 그만두려고 고민하였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서 경복궁을 찾았다. 사무실과 경복궁과의 거리는 도보로 십여 분이면 갈 수 있었다. 원래는 표를 끊고 들어가야 하지만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경복궁 내에 위치해 있었다. 업무상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 고궁 뜰을 걸었다. 경복궁은 맘이 심란할 때면 혼자서 자주 들리곤 하였기에 낯설지 않았다. 지금은 상당 부분 경복궁 건물들이 복원되어 규모면에서 그때에 비할 바 아니다.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지도 않았다. 혼자 걸으며 사색하기에 좋을 정도였다. 내가 선택한 직업에 회의를 갖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오후 세시가 되었다. 아무런 말도 않고 자릴 비운 사무실에선 나의 빈자리를 보고 지금 쯤 선배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였다. 한편으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과 고건축이 아닌 처음 생각했던 일반건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하였다.
두세 번의 방황 끝에 사무실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마침 경기도 오산에 누님이 살고 계셨다. 누님께 자초지종을 말하고 오산에 위치한 일반건축사 사무소에 취직을 하였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 오산에서 꽤 잘 나간다는 설계사무소였다. 새로운 각오로 출근한 사무실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예닐곱 명의 기사들이 각자 자신의 업무를 보느라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들이 그린 도면은 청사진이라는 종이로 옮겨야 한다. 말하자면 건축주와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도면인데 청사진기라는 기계에 감광용 종이 위에 트레이싱페이퍼에 그린 도면을 겹쳐서 기계의 롤러에 집어넣는다. 종이가 롤러를 타고 돌아가면서 암모니아 액체를 지나면 감광지에 도면이 찍혀 나온다. 말하자면 현상된 필름을 사진으로 인화하는 과정과 같은 원리다. 이 과정에서 심한 암모니아 냄새가 난다. 눈이 따끔거리고 목이 컬컬해진다. 사무실 선배들은 청사진으로 그림을 뽑아내는 것을 ‘청사진 굽는다’고 했다. 청사진 굽는 곳은 길 건너에 있는 별도의 창고 건물이다. 나는 매일 큰길을 무단으로 건너 다니며 청사진 굽기를 하였다. 창고는 기계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공간은 비어 있어서 청사진을 굽다 잘못된 종이가 나오면 종이를 공중에 던지고 종이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쳐대며 손가락으로 찢는 놀이를 하였다. 한참 그 짓에 빠져있다 보면 몸에서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그러다 문득 문화재보수를 위해 실측하러 다니던 생각이 나곤 했다. 서울을 떠나 한적한 장소에 위치한 문화재를 찾아 발품을 팔며 쏘다니던 날들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그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먼저 사무소에 근무하며 가깝게 지내던 선배와 안부전화를 하였다. 이야기 말미마다 선배는 똑같은 말을 했다. 방황 그만하고 얼른 돌아오라고 그러면 난 대답대신 그냥 웃었다. 오산 사무소에 근무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도면작도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다. 매일 청사진을 굽거나 신축부지조사에 다녀오거나 발이 부르트도록 등기소를 들락거렸다. 배우고 싶은 도면은 이곳도 마찬가지로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속된 말로 시다바리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점차 이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건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염치가 있어야지 선배에게 전화도 못하고 속만 끓였다. 그러다 용기를 내고 선배에게 넌지시 사정을 말하였더니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고건축 사무실은 그동안 변한 개 없었다. 내 자리도 비워둔 채 그대로였다. 심지어 내가 쓰던 도구들도 제 위치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마치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주었다. 오히려 그게 난처할 지경이었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살 곳을 찾아야 했다. 먼저 살던 달동네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매일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싫고 오래된 한옥 문간채로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서울 만리동에 이모님 댁이 있다. 염치 불고하고 이모님 댁 이층에 있는 빈 방을 세로 얻어 들어갔다. 처음 몇 주는 이모님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나 맘이 영 편치 않았다. 주일이면 이모님 손에 이끌리다시피 하여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예배를 드렸다. 그곳에서도 난 여전히 혼자였다. 일층은 이모님 식구들이 사는 살림집이고 한 귀퉁이는 각종 곡물을 파는 가게였다. 이모부님은 평상시 나와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쌀 배달을 나가거나 가게에서 종일 혼자 지내시곤 하셨다. 반면에 이모님은 순복음교회 구역장 역할을 하시느라 동분서주하였다. 지금도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몇째 안 가는 대형교회다. 그곳에 적을 두고 계신 이모님의 구역장은 대단한 위세를 자랑할 정도였다.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열정으로 구역장을 할까 궁금하였다.
이모님 첫째 아들 그러니까 나완 이종사촌 격인 형님이 장가를 들었다. 하필 신접살림을 이모님 댁 이층에 차렸다. 내 방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은 신혼 방이다. 밥은 일층에 내려가 해결하고 낮엔 형수님 혼자 집에 계셨다. 나야 아침 일찍 출근해 밤이 돼야 돌아오는 생활의 연속이니 형수님 얼굴 뵐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형수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 날 자다가 무슨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깼다. 어디서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귀신인가 뭔가 하는 생각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벽 저쪽에서 들렸다. 이종사촌 신혼 방에서, 난 벽에 귀를 대고 그 소리의 출처를 알고자 했다. 여자의 나지막한 앓는 소리가 발작처럼 나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온몸의 말초신경이 곤두서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음소리가 들리면 ‘또 시작이군’ 속으로 궁시렁댔다. 내 나이 스물한 살 철근을 씹어 먹어도 될 나이에 여자의 교성을 듣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누님 댁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누님도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까지 들어가 얹혔으니 얼마나 고단하셨을지 그땐 생각도 못하였다. 주말이면 어린 조카 둘을 데리고 놀아주었다.
다시 돌아온 사무실 선배들은 여전히 내게 도면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작심하였다. 나 스스로 도면작도법을 터득해야겠다고 그래서 매일 야근을 핑계대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모두가 돌아가면 빌딩 출입문 셔터가 잠긴다. 할 수 없이 외부 비상계단으로 퇴근할 각오를 하고 사무실 출입구 등을 소등하였다. 그러면 수위 아저씨가 모두가 퇴근한 걸 알고 일층 출입구 셔터를 내리는 소리가 주르륵하고 들렸다. 그때부터 선배들이 그려놓은 도면들을 함속에서 골라내 벽에 붙여놓고 따라 그렸다. 간단한 건물부터 시작해 점차 복잡한 건물을 따라 그렸다. 얼마 지나자 도면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그렇게 석 달 가까지 남몰래 도면작도법을 익혔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지간한 건물은 혼자서도 그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때가 고건축에 입문하고 만 이년이 될 무렵이었다. 선배들은 여전히 나의 도면작도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나름대로 열심히 배웠다. 어지간히 도면을 배우고 나서 이번엔 내역산출 과정을 독학으로 터득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역산출이란 게 초등학교 실력의 산수 정도면 누구나 다 계산할 수 있는 정도였다. 다만 전문적인 부분이 들어갈 뿐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나름 도면작도에 자부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선배들에게 도면 그릴 기회를 달라고 일부러 요청하진 않았다. 군대 입대 전까지 도면작도라도 제대로 배워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생각이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잠시 돌아왔다. 마침 농사철이어서 아버지께서 소를 앞세우고 논을 갈고 계셨다. 나도 뭔가 돕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도 경험해 본적 없는 쟁기질을 해보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한 번 해보라고 내주셨다. 의기양양하게 쟁기를 잡고 아버지가 하던 대로 “이려이려” 하고 소를 몰았다. 그러자 소가 앞으로 나아갔다. 쟁기 날에서 흙이 스르르 옆으로 부서졌다. 어 이게 되네 속으로 기뻐하는 것도 잠시 소가 갑자기 가던 방향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잘 나가던 쟁기질도 제멋대로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내게 한 마디 하셨다. “야 이놈아 그게 쉬워 보였냐 뭐든 배워야 하는 법이여 배우면 다 쓸데가 있다니께” 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늘 듣던 소린데 그날 논에서 말씀 하셨던 그 말이 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복직했지만 마음속에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특히 종교적 갈등이 심하게 일어났다. 난 일찍이 기독교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완전한 신자는 아닐지라도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했다. 직장에선 여전히 말단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교회에선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며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살았다. 그런 내가 절간에 들어가 보수할 대상을 실측하고 돌아와 그림을 그리고 하는 일이 과연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할 일인가 싶었다. 지금도 그 갈등은 내 속에 앙금처럼 남았지만 그때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쟁기질하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내일 직장 그만둘지라도 근무할 동안은 최선을 다해 배우자 배우면 언젠간 제대로 써먹을 날 있을 게다’ 실제로 그랬다 여러 번의 방황을 하면서도 근무태도는 늘 진지했고 열심이었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선배들과 소장님은 날 기특하게 여겼다. 요즘 애들 같지 않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