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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시ㆍ소설문학사 및 비평사 정리 자료 정리자료 ◈ 서정, 실험, 제 목소리 담기(김용직) ◇ 순수와 기법인식 - 시문학파의 시 ① 주요 구성원 :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② 경향 : ㉠ 반이데올로기 순수 서정의 추구 ㉡ 표현매체인 언어에 대한 깊은 관심 ③ 창간호 편집 후기 - 박용철 한 민족의 언어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口語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文學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文學의 成立은 그 민족의 言語를 完成시키는 것이다. ④ 시문학 창간호 수록 작품 : 사상과 관념의 배제 ㉠ 김영랑 -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어> ㉡ 정지용 - <이른 봄 아침> <따리아> <京都鴨川> <船醉> ㉢ 이하윤 - <물네방아> <老狗의 回想曲> ㉣ 박용철 -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싸늘한 이마> <비나리는 밤>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⑤ 시문학 이전의 시단 : ㉠ 카프 - 이데올로기의 편향 ㉡ 국민문학파 - 시의 질적인 차원 확보 미흡, 민족 표방, 시조 부흥운동 ◇ 실험주의의 시 - 모더니즘의 갈래 ① 한국 시단의 모더니즘 : ㉠ 영미계의 이미지즘, 주지주의 ㉡ 전위성과 실험성이 강한 초현실주의계의 모더니즘 ② 김기림 : ㉠ 1933년에 시론인 <시작에 있어서 주지적 태도> 발표 ㉡ 미래파, 초현실주의, T.S. 엘리어트와 T. E. 흄의 혼거 상태 지양 ㉢ 시창작에 지성의 도입 ㉣ 선명한 시각적 심상을 중시한 <기상도> 발표 ㉤ 정지용, 신석정, 김광균, 장만영 등을 같은 유파로 분류 ③ 이상과 : 자동기술법 이론의 초현실주의 시도 ④ <三四文學> : ㉠ 발간 연대를 동인지의 제호로 함 ㉡ 동인 - 이시우, 한천, 조풍연, 신백수 ◇ 생의 본바탕 탐구 - 서정주, 오장환, 유치환 ① 서정주는 <시인부락> 창간호에 <문둥이> <獄野> <대낮> 발표 ② 오장환은 <시인부락> 창간호에 <城壁> <溫泉地> <雨期> <暮村> <鯨> <魚肉> <旌門> 등 발표 ③ 유치환 : <조선문단> 1936년 1월호에, 인간과 그 생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식을 담은 <旗> 발표 ◇ 제 뿌리에 새 호흡 담기의 시들 ① 현대적인 감각과 전통문화의 결합 - 신석초와 <시학> 동인들, 백석, 이용악 ② 신석초 : ㉠ 이육사, 윤곤강 등과 <시학> 동인으로 활동 ㉡ 전통 문화에 관심을 둔 <검무랑> <바라춤> 등 발표 ③ 백석 : ㉠ 신석초가 상층 문화의 전통적인 제재를 노래한 것과 달리 백석은 서민적인 삶의 토속적인 제재를 노래 ㉡ 시집 《사슴》에 수록된 <주막> <여우난골族> <가즈랑집> <夏沓> <오금덩이라는 곳> 등 ④ 이용악 : ㉠ 궁핍한 식민지 현실을 형상화 ㉡ 첫 시집 《분수령》의 <북쪽> <낡은 집> 등 ㉢ 카프와 관계를 맺지는 못하였지만 프로문학의 맥락을 간직함 - <두메산골> <오랑캐꽃> 등 ㉣ 해방 이후 임화, 김남천 등이 주동한 문학가동맹에 가입 ◇ 30년대 한국시의 그림자 ① 문인보국회를 통한 친일문학의 강요 ② <문장>의 발간과 추천제 실시 -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이한직, 김종한, 김상옥, 이호우 등을 시단에 배출 보완자료 ◈ 1930년대의 시문학사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점차 사상 검열을 강화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신문, 잡지 등 발표 지면의 확대와 문인의 수적 증가 등 문학 활동 기반이 확충됨에 따라 활발한 문학 활동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양한 문학 양식이 나타나며, 예술적 기교가 발달한다. 그러나 말기에는 일제가 검열을 강화함에 따라 문학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이 시기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목적문학이 퇴조하고 순수문학이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그 요인으로는 일제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KAPF 맹원의 1․2차 검거), 문학의식의 성숙, 외래 사조의 영향(모더니즘) 등을 꼽을 수 있다. 《시문학파》와 《구인회》는 이러한 문학적 흐름에 부응하여 나타난다. ◇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의와 한계 시문학파는 1930년대에 《시문학》을 창간하여 순수 서정시 운동을 펼친 시인들을 말한다.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 등이 이에 속하며, 이후 《문예월간》 《문학》 등의 잡지 간행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외국시의 지나친 영향을 받아 방향감각을 상실, 모방과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 시단을 재건하려는 방편으로 순수 서정시를 통하여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심미적 세계를 개척하였다. ① 순수 서정시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시로 형상화하였으며, ②심화된 정감을 한국적인 운율로 재구성하였고, ③ 시어의 특질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창작을 하였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시대적 사명에 대한 자각을 뒤로한 채 시 자체에만 매달렸다는 점과 그 결과, 개인적인 감상주의에 젖은 시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 모더니즘 유파의 시문학사적 의의 한국의 모더니즘 유파는 1930년대 서구 현대시의 흐름과 밀접히 연관된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주지주의, 다다이즘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김기림․김광균 등이 선도하였다. 이 유파는 감성 위주의 음악성에서 지성 위주의 회화성으로 전이된 감수성의 혁신과 시의식의 변모를 통해서,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 즉 식민지 도시의 외관 속에 자리잡고 있는 기만성과 비애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 모더니즘 유파의 문학적 한계 한국의 모더니즘 시운동은 범세계적인 사고와 관습에 빠져, 오히려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내용의 결여를 가져온다. 감각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방법적인 측면만 중시함에 따라 시의 내용에서 깊이를 지니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은 인간의 감정을 경시하고 감각적 표현에 치중하였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특히 식민지 현실을 외면한 채 너무 기교에 치우쳐서 민족적 정서와 현실 인식을 상실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 생명파의 시문학사적 의의 모더니즘 시운동이 내용의 깊이를 결여한 채 형식화되던 시기인 1930년대 중반에는, 《시인부락》의 동인인 서정주, 유치환 등을 중심으로 생명파가 나타난다. 생명파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찾아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의미를 시를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다. 즉 인간적인 문제와 생명성의 탐구에 주력했다. 이들 유파는 목적성을 강조한 프로문학, 순수 서정과 언어의 예술적 조탁을 강조한 시문학파, 감각적 기교에 흐른 모더니즘 등 앞 시기의 시적 경향 모두를 비판한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과 삶의 고뇌를 노래함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 청록파의 시문학사적 의의 청록파는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영원한 생명의 고향인 ‘자연’을 추구하였다. 청록파는 인간 생활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노래했던 생명파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비인간화된 세계에 대한 반동을 지향했다. 그들은 어두운 현실 아래 빼앗긴 고향을 노래하였으며, 그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노래하고, 역사의 전통을 발견하여 하였다. 청록파는 현실에 침묵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미의 재발견, 국어미의 순화 및 생명의 원천에 대한 진지한 탐구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일제말 암흑기의 시단과 해방 후 시단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구인회 1933년 문단작가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 등 9명이 결성하였다. 얼마 후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이상․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김환태로 교체되어,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3~4년만에 해체하였다. ◇ 모더니즘 문학 현대주의 또는 근대주의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성의 도덕과 권위를 부정하고 기계 문명과 도회적 감각,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사조이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은 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 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대두한 1930년대에 영미(英美)의 주지주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사조로 불린다. 김기림이 시의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기술주의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소설에서는 최재서와 이상이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 ◇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 한국 문학에서는 1931년경 프로문학의 퇴장과 일제강점기 군국주의의 대두를 계기로 나타났으며, 일명 주지주의라고 일컬었다. 김기림이 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시작(詩作) 자체의 의식성을 강조하는 시의 기술주의를 주장하면서 형태화하였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운동을 벌였으며, 그 특징은 ① 정서적 우세에서 지성적 우세로, ② 현실에 대한 초월적 태도보다는 비판적 적극성을, ③ 청각적 요소에 대하여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소설에서는 1934년 최재서가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고, 실제로 이상의 작품을 중심으로 심리주의적 경향을 비평하면서 전개되었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문인들로는 프랑스의 P.발레리, 영국의 T.E.흄, T.S.엘리엇, H.리드, A.L.헉슬리 등의 이론과 작품의 영향을 받은 정지용․김광균․최재서․이양하 등이 있다. 김기림의 《기상도》(36)는 엘리엇의 《황무지》의 영향을 받은 당시 모더니즘의 대표작이며, 김광섭․김현승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50년대의 김수영․박인환․김경린 등과 ‘후반기’ 동인들에 의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전개되었다. 60년대의 ‘현대시’, ‘신춘시’ 동인들은 30년대의 모더니즘시가 상실했던 상징적 내면의식과 초월의식을 형상화하려 했다. ◇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전개 양상 한국의 모더니즘은 1920년대 전반의 낭만주의가 보여준 주관적 감정의 과잉, 1920년대 후반기 신경향파의 내용편중을 배격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1930년대의 시문학파에 대해서도 감정과 음악성에 치우친 경향을 비판하였다. 지적인 태도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함에 따라 감정 위주의 음악성에서 지성 위주의 회화성으로 전환하였으며, 감각적 언어에 의한 표현의 선명성을 추구하였다. 지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은 주지주의와 혼용되는 개념이나,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은 이미지즘, 주지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 모더니즘의 일반적 특징 ① 감성, 음악성보다는 지성, 회화성을 강조하며 ② 시각적 이미지와 공감각적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③ 현대 도시 문명 또는 이국적 성격의 소재가 자주 사용되고 ④ 문명 비판적 성격 및 강렬한 cosmopolitan 의식 등을 들 수 있다. ◇ 정지용과 모더니즘 정지용은 감정을 가능한 한 절제하고, 객관적 사물에 대한 감각 그 자체를 투명하게 부각시키려 한 감각과 절제의 시인이다. 서구의 이미지즘에 전통적인 정서를 결합시킨 점에서, 정지용의 시는 정신은 한국적․전통적이면서 표현은 가장 감각적․현대적인 시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하였던 김기림, 김광균 등의 모더니스트와는 구별된다. 정지용은 동양적 흐름 위에서 서구 이미지즘을 수용한 이미지스트로서,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오장환의 시 세계 오장환의 시 세계는 크게 세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성벽》과 《헌사》에서 보여 주는 비애와 퇴폐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지향의 세계, 둘째는 《나 사는 곳》의 향토적 삶을 배경으로 한 순수 서정시의 세계, 셋째는 《병든 서울》이 보여 주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세계이다. 그의 문학은 과거의 관습과 전통의 계승을 부정하고 서구적 취향에 몰두하였다가 다시 고향을 발견하는 도정으로 구성된다. 해방 이전의 오장환의 시 세계는 순수 모더니즘의 성격에 훨씬 가깝다. 관련된 기출 문제 2000년 기출 10-1. 1920년대의 시와는 그 경향을 달리하는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특성을 다음 <조건>에 따라 4가지 이상 쓰시오. (3점) [조건 : 위(김기림의 <세계의 아침>)의 시를 참고하여 내용, 표현 두 영역에서 각기 두 가지 이상을 제시할 것.] ⇨ ․내용 : ① 자본주의 도시 문명 및 근대 문명의 수용 ② 전통의 일탈 및 새로운 세계 지향 ③ 감상성을 배제한 개관적 지성 ④ 편내용주의(이념 지향성) 지양, 순수 서정 옹호 ․표현 : ① 새로운 표현 기법을 중시한 형식주의적 태도 ② 음악성보다는 사물의 객관화에 따른 회화성 중시 ③ 시어의 새로운 사용(외래어 및 문명어) ․시적 경향 : 1920년대의 시문학이 지녔던 감상성이나 편내용성(이념성)을 벗어나 이성 중시(주지주의) ◇ 1930년대 시문학사 관련 기출문제 33. 다음 글이 지지하고 있는 문학적 입장과 가장 가까운 것은? (2008년) 기술은 우리의 목적에 도달하는 도정이다. 표현을 달성하기 위하여 매재를 구사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거기는 표현될 무엇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으로 예술 이전이라고 부르는 표현될 충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 구체적으로 시에 들어가 논의하자. 우리가 우리의 정신 가운데 귀중하다고 평가할 만한 상념이나 정념의 성립을 알았다 하자. 우리늬 정신의 산맥 가운데 가끔 가다 불끈 일어서는 이 고봉을 흔히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반 거기 신비의 옷을 입힐래서가 아니라 그 성립을 자유로 조종할 수도 없고 또 예측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중략> 우리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한자리에 모아놓으면 그 의미를 가지고 또 음향을 가진 단어들은 충돌하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여서 그 한 단어의 의미나 몇 단어의 의미의 논리적 총화로서만은 측정할 수 없는 미묘하고 무한히 전파해 가는 효과를 우리 심리에서 일으킨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강조시킨 것은 분명히 현대시의 공적이다. 그러나 필자가 고집하는 관점은 이것이 우성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발을 규정하는 목적 없이 그저 무엇이든 만들어 보리라는 목적밖에는 없이 이것 저것을 맞추다가 ‘아, 이것 그럴 듯하구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 속에 성립된 어떤 상태를 표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의 길로 가는 것을 말함이다. - 박용철, 「기교주의설의 허망」 - ① 감정을 초극하는 절대 이성이 시적 체험의 주체가 된다. ② 시는 시적 체험보다 시적 표현이 본질적인 언어 형식이다. ③ 체험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조탁이 반드시 필요하다. ④ 시적 체험이 자연 발생적으로 표출되는 순간에 시적 언어가 완성된다. ⑤ 시적 표현은 정교한 설계도와 같은 논리적 정확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시문학파의 문학적 지향점 알기 : <보기>의 지문에서 “표현을 달성하기 위하여 매재(媒材-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박용철의 주장은, 시적 표현의 방법으로 언어의 조탁을 중시한 시문학파의 문학관을 잘 보여준다. <박용철, 1930년대 기교주의 논쟁> 우리문단에 있어 1930년대는 다양한 성격과 양식들의 한국시의 등장으로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는 전대의 민족주의 성향의 시문학이 쇠퇴하고 새로운 이념과 정서를 향유하는 시문학이 널리 유행하였다. 크게는 세 갈래의 시적 경향이 상호 경쟁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 첫째로, 전대의 민족주의 문학과 경쟁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보다 더 전투적인 형태를 띔과 동시에 한층 이론적 무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시문학』 창간과 더불어 순수시를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으로서, 이들은 언어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이념이나 사상을 배제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프로문학과 대립적인 관점에 선다. 세 번째는 모더니즘 문학의 등장이다. 대륙 침략을 위한 한반도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의해 어느 정도 식민지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식민지적 근대 도시문명의 징후가 나타나는데, 도시적 감성을 기초로 하여 일군의 새로운 시인들이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 급격히 그 세를 얻었다. (김윤태, 「1930년대 한국 현대시론의 근대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1999) 이들 세 가지 경향은 1935년 카프의 해산을 계기로 전반적인 문학적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탈정치 혹은 탈이념으로 급격히 선회하거나 순수주의 내지 예술주의로 자리 잡게 된다. 그와 아울러 1935년을 고비로 위의 세 가지 시적 경향은 그 이론의 체계를 더욱 정비해가면서 상호 논쟁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박용철과 임화의 논쟁은, 임화가 주로 김기림의 <오전의 시론>을 조선시사적 입장에서 비판한 <담천하 시단일년>에 대해 박용철이 다음과 같이 비난한데서 발단되었다. 임화가 기교주의를 "우리 시단의 거의 횡포에 가까운 지배자이었던 프롤레타리아 시의 통렬한 부자유 가운데서 시는 언어의 기교라는 태도를 조선적인 방법으로 번역해 가지고 나오는 교활한 조류가 점진적으로나마 번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라고 한 데 대해, 박용철은 '문단 헤게모니를 위한 무용한 적개심의 발로'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을 불시에 당하고 가만히 있을 임화가 아니었거니와, 이에 대한 임화의 반박문 속에 박용철의 문단적 위치가 드러난다. 이에 대하여 박용철은 <시단시평 - 기교주의설의 허망>에서 답변하고 있다. 그는 임화의 논리의 혼란과 무정견을 비난하고 있다. 브레몽의 순수시, 아폴리네르의 형태시, 또는 쉬르레알리즘을 기교주의라 볼 수 없다고 박용철은 주장한다. '자동기술 같은 수법이 표시하는 것과 같이 순수내용주의의 일면'이라 했고, 김기림이 규정한 기교주의에 비판을 가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임화를 공격하였다. 그는 "김기림씨의 기교주의의 시론이라는 것은 필자가 전력을 경주해서 격파하려던 다년간의 숙제로 그러나 실지에 성수하지 못한 대상 그것"이라 하여 스스로의 입장을 명백히 했다. 박용철의 순수시론-시적변용 1930년대 소설사 정리 자료 정리자료 ◈ 소설 경향의 몇 가지 흐름(장량수) ◇ 제한된 현실에서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실현 ① 이태준 : ㉠ 구인회의 회원으로, 카프의 비문학적인 정치주의에 반대 ㉡ <가마귀> - 유미주의적 색채 ㉢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형상화 - <실락원 이야기> <촌띄기> <꽃나무 심어 놓고> ㉣ 삶에의 강한 의지를 형상화 - <토끼 이야기> <농군> ㉤ 현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전통적인 삶의 가치의 소중함을 형상화 - <복덕방> <돌다리> ② 채만식 : ㉠ 식민지 현실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 - 풍자 문학 ㉡ <레디메이드 인생> <明日> <치숙> <태평천하춘> <탁류> ③ 박영준, 이무영의 농민문학 : ㉠ 박영준의 <모범경작생> ㉡ 이무영의 <제일과 제일장> <흙의 노예> ㉢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와 같은 농촌 계몽소설 ◇ 괴로운 현실에서의 도피, 외면 ① 이효석 : ㉠ 1928년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 - 동반자 작가 ㉡ 동반자 작가 청산 후 성애에의 탐닉 - <豚>(1933), <들>, <메밀꽃 필 무렵> <粉女> <花粉>: 인간과 동물의 동일시 기법 ② 김유정 : ㉠ 1930년대 한국농촌의 풍속도 ㉡ <소낙비> <봄 봄> <동백꽃> <만무방> - 웃음 속에 담긴 짙은 페이소스 ③ 유진오 : ㉠ 1932년까지 대표적인 동반자 작가 - <여직공> <밤중에 거니는 者> ㉡ <김강사와 T 교수> -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시민적 리얼리즘의 세계 ㉢ <창랑정기> - 유년에 대한 회상을 통한 현실 도피 ④ 이상 : ㉠ 도착적 성의 세계 - <날개> <봉별기> ㉡ 정통 심리주의 소설의 경지로 보기는 어려움(*필자의 견해에 공감할 수 없음) ⑤ 박태원, 김남천 : 소시민의 세태적 삶의 관찰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 최재서는 ‘리얼리즘의 확대 심화>에서 높게 평가 ㉡ 김남천 - 미완의 1부작인 <대하>를 통해 외래문물과 개화사상을 수용하는 과정과 서도 서민들의 생활상을 형상화 ◇ 역량있는 신인들의 등장과 그들의 그 후 ① 김동리 : ㉠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 1936년 동아일보에 <산화>가 당선되어 문단 데뷔 ㉡ <바위>(1936),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② 김정한 : ㉠ 1936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사하촌> 발표 ㉡ 일제 말기에 절필 후 1966년 <모래톱 이야기> <축생도> <수라도> <인간단지> 등 발표 ③ 안수길 : ㉠ <조선문단>을 통해 1935년 <적십자병원장>으로 문단 데뷔 ㉡ 황도문학기에 친일적 성격을 띤 <벼> <목축기> 발표 ㉢ 1959-1967년에 5부작 역사소설인 <북간도> 발표 ④ 황순원 - ㉠ 1936년 시인으로 문단 데뷔 ㉡ <별>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보완자료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고, 다시 중국에 진입하여 결국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하는 도화선을 만든 시기이다.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으며, 카프 맹원의 1.2차 검거를 통해 검열이 강화됨에 따라 작품의 창작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작품 창작에 변화를 가져온다. 작가들은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순수문학의 이름 아래 사회성이 거세된 예술성 위주의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또는 역사적 소재를 택하여 작가의식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거나, 농촌 현실에 눈을 돌리는 소극적인 항거의 방향으로 변모한다. ① 채만식은 <치숙> <레디 메이드 인생> 등의 단편과, 《탁류》《태평천하》등의 장편을 발표하는데, 작품 속에서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우회적인 풍자의 수법을 주로 사용한다. ② 동반자 작가였던 이효석과 유진오 역시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배제한 채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 이효석은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돈(豚)> <석류> <산> <분녀> 등의 단편을 통해 성의 육감적인 에로티시즘과, 서정적인 문장 표현을 이룩한다. 유진오는 <김강사와 T교수>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낙향한 뒤 은둔자의 삶을 그린 <창랑정기>를 발표한다. ③ 이상은 <날개> <동해(童孩)> <봉별기> <종생기> 등을 통해 자학적인 자의식의 세계에서 심리적 심층을 파고 든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④ 김유정은 <소나기> <동백꽃> <산골 나그네> <금따는 콩밭> 등을 발표하는데, 주로 벽지 농촌의 소박한 인물의 해학적인 행동과 토속적인 어휘 구사를 통해 향토색이 짙은 문학 세계를 이룩한다. ⑤ 1930년대 중반에는 ‘브 나로드’의 기치 아래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저널리즘의 도움으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며, 작품의 창작에도 영향을 미쳐 농민문학 또는 농촌소설로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창작된다. :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이기영의 <고향> 등은 넓은 의미에서 이러한 범주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⑥ 이무영은 작가 자신이 농촌 생활의 체험을 소재로 ‘흙의 문학’ ‘귀농문학’이라고 불리우는 <흙의 노예> <제1과 제1장> 등을 통해, 박영준은 <모범 경작생>을 통해 농민문학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기도 한다. ◇ 풍속소설novel of manners 세태․인정․풍속을 중심으로 전개된 소설로서, 시정소설(市井小說) 세태소설이라고도 한다. 이 유형의 소설은 그 시대에 타당한 인간적 진실을 나타내기보다는, 사회의 어떤 단계의 추이 양상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작품 속의 사건은 이미 일어났던 것이라는 데 특징이 있으며, 작중인물의 생동감 있는 행동이나 정신적 갈등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 우리의 소설문학에서는 1936년경부터 이러한 풍속 세태를 묘사한 문학이 나타났는데, 박태원의 《천변풍경》, 채만식의 《탁류》 등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 현대소설사 관련 기출문제 40. 다음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학적 입장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2008년 기출] (가)《천변풍경》은 도회의 일각에 움직이고 있는 세태인정을 그렸고 <날개>는 고도로 지식화한 소피스트의 주관세계를 그렸다. 그러나 관찰의 태도 및 묘사의 수법에 있어서 이 두 작품은 공통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주관을 떠나서 대상을 보려고 하였다. 그 결과 박씨는 객관적 태도로써 객관을 보았고 이씨는 객관적 태도로써 주관을 보았다. 이것은 현대 세계문학의 이대(二大) 경향-리얼리즘의 확대와 리얼리즘의 심화를 어느 정도까지 대표하는 것이니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 있는 문제를 제공한다. (나) 현대 우리들이 대하고 있는 일상적 현실은 그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라는 곳에 부진실한 금일의 사회현상이 있다. 그 일상적 현실은 현실적 진실을 의미하는 현실이 아니고 일종의 가상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의 문학작품이 그 부진실한 가상의 세계를 순객관적으로 ‘막이 가리지 않은 눈’으로 본댔자 그것이 리얼리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부진실한 일상적 현실에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실에 대질적(對質的)으로 현실을 추구하는 데서만 금일의 리얼리즘은 참된 리얼리티-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리얼리즘이 ‘안티-휴먼’의 경향이겠는가, 그와 반대로 휴머니즘을 반려로 하는 것이겠는가는 어느덧 명백해진 사실이 아닐까. 프로 휴머니즘…… 이것은 금일 리얼리즘의 유일한 진취의 길이며 거기에서 금일 리얼리즘은 비로소 심화되고 발전되리라고 생각한다. ① (가)에서 리얼리즘은 관찰 태도의 문제이지 제재의 문제가 아니다. ② (나)에서 리얼리즘은 주관적 판단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그리는 태도를 말한다. ③ (가)와 (나) 모두 현실적 진실과 묘사의 수법을 리얼리즘의 조건으로 강조한다. ④ (가)의 입장에서 보면 채만식의 《태평천하》는 세태인정을 풍자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을 심화시킨 작품이다. ⑤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대질적으로 현실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녔으므로 리얼리즘 작품이다. 1930년대 비평사 정리 자료 ◈ 농민문학론 농촌의 자연 지방색, 농민의 생활 실태를 그린 문학. 농민 스스로 창작한 문학도 농민문학이라 일컫는다. 한국에서 농민문학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30년대 초이며, 안함광이 《조선일보》에 <농민문학문제>라는 글을 실어 조선의 특수사정 때문에 조선의 프로문학은 농민문학을 거치지 않고는 수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백철 역시 《조선일보》에 <농민문학문제>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는데, 빈농과 농촌 현실을 문학의 주제로 삼고, 빈농을 계발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안함광과 의견을 함께 하였으나 방법론에 있어서 대립하였다. / 1930년대 소설 가운데 농민문학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이기영의 <고향>, 김정한의 <사하촌>, 김유정의 <동백꽃>, 이무영의 <흙의 노예>와 <제1과 제1장>, 박영준의 <모범경작생> 등이다.
◇ 농민문학론의 대두와 배경 ① 카프의 일원으로 농민문학 문제를 제일 처음 거론한 사람은 김기진이다. ② 권환은 「하리코프대회 성과에서 조선 프로예술가가 얻은 교훈」에서 농민문학 문제를 조선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한다. ③ 농민문학을 거론한 사람으로 안함광, 김기진, 박철, 송완순, 권환, 유해송 등이 있다. ④ 농민문학론 논쟁의 발단은 안함광의 「농민문학문제에 대한 일고찰」에서이다. 그는 이 글에서 첫째, 하리코프대회 및 일본근황을 소개하고, 조선혁명의 성격에서 농민문학운동을 무시하지 말며, 둘째, 노농계급의 동맹에서 농민문학에 대한 노동자문학의 헤게모니를 관철할 것이며, 셋째, 농민문학은 빈농계급을 대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⑤ 백철은 안함광이 ‘빈농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을 말한 것은 ‘기계적 좌익주의적 편향(결과적으로 우익적)’이라고 비판한다. ⑥ 안함광은 농민문학을 프로문학에 종속되는 일개 범주의 문학이라고 파악하고 농민문학을 고립적으로 농민계급에 국한시켜 이해하면 농민문학의 계급적 성격이 약해지고 결국에는 혁명전선에 동맹계급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어렵게 된다고 주장한다. ⑦ 안함광은 농민문학의 창작방법문제를 「농민문학문제 재론」에서 제일 먼저 제기함 ⑧ 1931년 교조적 창작방법론으로 최고의 평판작인 권환의 「목화와 콩」, 김남천의 「공장신문」속에 이러한 요소가 있음을 발견한다. ⇒「목화와 콩」은 일제가 공업원료의 조달을 위해 한국 농촌에 실시한 남면북양 정책에 반대해 관청직원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그린 단편소설인데 이 소설은 실천적 요구의 과중한 무게가 실리게 되면서 전망과 현실의 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그 결과 구체적 현실에 기반두지 않은 ‘전망의 과장’이라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 최재서와 주지주의 비평 ① 1935년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체되며, 프로문학의 퇴조로 만들어진 문학현실의 공동화현상은 최재서의 급속한 등장을 용이하게 하였고, 최초의 논문은 「미숙한 문학」이었다. ② 최재서는 엘리어트와 흄의 영향을 받아 서구적 주지주의 탐닉하고, 휴머니즘을 중시하였다. ③ 최재서의 문학론이 ‘지성론’에서 ‘모랄론’으로 다시 ‘휴머니즘’으로 변모한다. ④ 최재서의 또 다른 방법론은 리얼리즘론이다. ⑤ 리얼리즘은 ‘인생과 사회의 진실성을 표현함으로써 생명을 삼는 문학’으로, 어빙 배빗은 리얼리즘이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낭만주의’라고 정의함 ◇ 임화의 리얼리즘 비평론 ① 임화는 반영론에 입각한 리얼리즘론을 전개하였다. ②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당래할 조선문학을 위한 신제창」에서 표현된 임화의 낭만주의 리얼리즘론의 조선적 구체화로써 제기된 것이었다. ③ 낭만주의론은 곧 극복되면서 주체-객체 간의 올바른 관계에 기초한 리얼리즘론으로 구체화되는 계기는 「사실주의의 재인식」「주체의 재건과 문학의 세계」「현대문학의 정신적 기축-주체재건과 현실의 의의」에서이다. ④ 그의 소설론은 저서 「본격소설론」에서 ‘본격소설’이란 세태소설이나 내성소설과는 달리 인물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면서 성격의 발전이 그려진 소설이다. 그래서 그는 본격소설을 중심으로 한다. ◇ 김남천의 문학론 ① 김남천은 카프가 해산되면서 조직적 지도중심을 상실하게 되자 고발문학론을 제시하였다. ② 고발문학론은 결국 주관주의적인 논리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시 모랄론을 도입한다. ③ 김남천의 소설론은 세태․풍속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④ 김남천의 문학을 고발문학론 또는 관찰문학론이라고 한다.
◇ 안함광의 문학론 ① 1930년대 동반자문학논쟁, 농민문학논쟁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임화와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을 주장한 193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카프 계열 이론가이다. ②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의식의 능동성을 구현하게 해 주는 결정적 계기이자, 부르주아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별시켜 주는 핵심의 원리로 파악한다. ③ 소설론은 주로 성격의 창조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다. ④ 「문학의 성격」「로만논의의 제과제와 「고향」의 현대적 의의」등의 저서에서 그의 소설론은 혁명적 로맨티시즘론에 기초하여 픽션론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⑤ 안함광은 ‘의식의 능동성’을 구현하는 것을 리얼리즘론의 중심적 문제로 제기한다. ◇ 현대소설사 관련 기출문제 37. (가), (나)와 관련한 문학사의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2011년] (가) 문학이라는 것도 하나의 제도적인 것으로 도입되었던 만큼, 그것을 논하는 기본항이 이식 문학(론)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계급주의 문학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카프도 그러하였고, 방향 전환(1927. 9) 이후에도 그러하였지만, 계급주의 문학론 자체가 이식 문학의 성격을 가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논의하는 일도 다분히 도식적이자 추상적인 것에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사냥개)(1925)라든가 <지옥순례>(1926), 심지어 <홍염>(1927)조차 그러하였고, 이들 작품을 두고 벌어진 내용ㆍ형식 논쟁이라든가 창작 방법론은 위의 소설들처럼 추상적ㆍ도식적이라는 운명에 떨어졌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 사정이 썩 달라지는데, 그것은 <농부 정도령>(이기영, 1926)을 비롯한 상당한 자생적인 바탕 위에 나온 창작이 가능했음에서 말미암았다. 한편 계급주의 문학 이론이 도식적ㆍ추상적인 레벨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과학의 수준에로 올라간 점이야말로 1930년대 비평의 근대적 성격을 결정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른바 ‘물 논쟁’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 김윤식, <우리 비평의 근대적 성격> (나) 물론 그것은 나의 태만이 그때그때의 전환 단계에 있어 그의 슬로건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창작 이론을 잘 소화하지 못한 때문이라 하겠지마는 여하간 나의 작품에 그것을 구상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많은 동지들은 그때그때마다 우수한 이론을 소개, 해석하고 비판함에 따라서 나 자신도 맞장구를 쳐 왔지만 다시 창작의 붓을 들고 생각해 볼 때는 도무지 어떻게 써야만 할지 버젓한 슬로건을 놓고도 마치 日暮途窮한 旅客과 같이 향방을 모르고 있었다. 참으로 어떻게 써야만 목적의식적이요, 변증법적 창작 방법이라?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만 이 슬로건들에게 가위를 눌리고 말았던 것 같다. 그것은 변변치 않으나마 소위 신경향파 시대의 나의 작품이 목적의식기 이후의 작품보다 형식적으로는 다소간 우월한 점이 있다는 것이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나는 그때도 이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우익적 경향이 무서워서 감히 발표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금일에 이르렀다. - 이기영, <사회적 경험과 수완>(1934) ① 카프 작가들은 이론과 실제 창작 사이에서의 간극으로 인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② 1920~30년대 카프의 주요 이론적 논쟁은 내용ㆍ형식 논쟁을 거쳐 창작 방법론 논쟁으로 이어졌다. ③ 이기영은 생경한 이념이나 도식적인 전망을 앞세우는 대신에 구체적 현실성과 형상성을 확보해 갔다. ④ 궁핍 체험의 묘사에 치우친 최서해의 작품이나 계급적 시각이 생경하게 노출된 박영희의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는 이식 문학론의 구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⑤ ‘물 논쟁’ 이후의 카프 문학 이론은 교조적 지도 비평에서 벗어남으로써 1930년대 박영희와 최서해의 문학적 변모를 촉발시켜 그들의 새로운 농민 문학 형식 창출을 견인했다. 카프 문학의 전개에서 박영희와 최서해의 문학적 변모는 1930년대가 아니라 1920년대 후반의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 ◇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 카프 제2차 방향전환은 1930년대에 도쿄에서 활약하던 안막(安漠), 김남천(金南天), 임화(林和), 권환 등(무산자파)이 볼셰비키를 제창하며 방향 전환을 주도하였다. 제2차 방향전환은 밖으로는 신간회의 해체에 자극받았고, 안으로는 김기진의 대중화론에 대한 소장파의 반대로 비롯되었다. 김기진의 대중화론이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맞추려 한다는 점을 비판한 소장파의 견해는 '투쟁하는 계급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제2차 방향전환을 '볼셰비키화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하며 예술운동 전 부문에 걸쳐 확대하여 전문적, 기술적 전국동맹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재조직 중지, 검거사건, 역량부족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1927년에 발간한 기관지 '예술운동'도 폐간되었고, '전선', '집단' 등을 발간하려 했으나 원고 압수, 검열 등으로 발행하지 못하였다. ◇ KAPF의 해체 과정과 논쟁사 KAPF의 해체 과정은 1931년 8월에서 10월에 있은 조선공산당협의회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은 이래 조직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런 와중에 예술대중화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이 제기되었다. 송영, 이기영, 한설야, 김남천, 이북명, 임화, 권환 등이 정치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카프 1차사건을 계기로 조직 활동이 정체되었다가 1934년부터 '전주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 송영 등 23명이 체포되는 2차 검거사건을 겪으면서 카프는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이 시기는 각종 논쟁으로 프로문학 이론의 전성기를 영글게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조직 철학의 위상을 도모한 자체 내의 논쟁으로는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의 내용과 형식 논쟁, 아나키스트와의 논쟁, 목적의식 논쟁, 〈낙동강〉(조명희)의 평가를 둘러싼 논쟁, 대중화 논쟁, 농민문학논쟁, 물 논쟁, 창작방법 논쟁 등이 그것이다. 내용․형식 논쟁은 박영희의 작품을 둘러싸고 김기진과 박영희, 양주동 등이 참가한 논쟁으로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은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인다는 원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무정부주의자와의 논쟁은 목적의식론과 함께 전개되어 무산계급의식을 드높이면서도 예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 쪽의 주장에 대해 문학의 정치성 여부를 논쟁하였으며, 물 논쟁은 김남천과 임화 간의 10여 년에 걸친 이론 논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카프는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 등이 조직에서 이탈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지도부인 임화와 김남천은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을 받았다. 카프 지도부는 맹원들의 서면 동의를 받아 마침내 1935년 5월 21일 경기도 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소련의 라프(RAPP)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을 받아 임화, 안함광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를 벌였고,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이 이때의 대표작이다. 임화 역시 엥겔스의 '발자크'론을 인용하여 주체 재건의 리얼리즘론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 내용․형식 논쟁 김기진은 박영희의 <철야>, <지옥순례> 두 작품을 실감난 묘사 부족, 주인공의 자기 해부정신 결핍을 이유로 비판한 다음,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석가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히어 놓은 건축이 있는가?”(<문예월평, 산문적 월평>, 조선지광, 1926년 12월)라며 계급투쟁에 대한 추상적 설명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군의 그 '실감'은 사회적 표준도 없이 누구의 작품이고 묘사가 부족해서 실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보면 확실히 군의 논지는 예술지상주의적 초계급적 개인주의적“(<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 조선지광, 1927년 1월)이라고 못을 박고 소설건축설을 비판하고 문학도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한 톱니바튀에 불과하다는 문학치륜설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권구현, 양주동으로 확대되면서 '내용․형식 논쟁'으로 확대되지만 김기진의 자진 철회로 끝난다. ◇ 아나키스트와의 논쟁 아나키스트계열의 중심인물인 김화산은 "의식적으로 선전효과를 고려에 둔 예술은 실제 전선상에서는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한다. 진실로 예술이 선전적 효과를 나타냄은 수단의식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된 예술의 힘-그것이다.“(<계급예술론의 신전개>, 조선문단, 1927년 3월)라고 주장하는데, 카프(윤기정, 한설야, 조중권, 임화)들은 "아나키스트를 좌익 문예가의 가면을 쓰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를 주입코자 하는 예술파”(임화, <착각적 문예이론-김화산씨의 우론 검토>, 조선일보, 1927년 9월 4일)라고 주장한다. ◇ 임화와 김남천의 ‘물 논쟁’ 1933년 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을 행사키 위해 조선의 병참기지화 및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모든 합법운동을 금지시켰다. 공산주의 활동은 물론 그 유사단체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카프도 안팎의 정황으로 인해 위축이 되며, 조선의 문단 현실은 사실상 개인적인 창작활동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태였다. 김남천이 2년 여의 옥살이 끝에 출소하며, 그는 감방을 나오자 곧 옥중기인 <물!>을 그해 5월 20일에 탈고하여 '대중'지 6월호에 발표한다. 임화는 난처해진다. 35명이 기소되었으나 17명이 피검, 재판에 회부되어 임화를 포함한 16명이 석방되었지만 김남천 혼자 두 해 동안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이념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감옥 생활의 생리적 현상을 감당하는 데는 인간적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으므로 한 방울의 물 앞에 자존심을 건 자신의 철학도 이념도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는 처절한 심경이 그 작품의 골자였다. 그러나 임화는 이를 기회로 잡았다. 1933년 조선일보 '6월중의 창작'이라는 논문을 통해 향후 10여 년에 걸칠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 임화는 이기영의 <서화>를 극찬하며 상대적으로 김남천의 <물!>을 혹평했는데 이는 카프 서기장으로서의 임화가 취할 수밖에 없는 카드였다. 작품 이전의 행동(실천)을 정치가의 성급함으로 치부하여 김남천식의 독불장군적 실천은 카프 전체와 유리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 후로 이론과 실천, 그에 따른 창작의 수순에서부터 임화는 '주인공, 성격, 사상'의 수순(김윤식, <임화 연구>)으로 갔고 김남천은 '세태, 사실, 생활'의 수순으로 노선을 탔으며 어느 시점에선 서로 교차하기도, 바꿔 타기도 하며 이른바 그들의 '물 논쟁'을 1930년대의 논쟁의 텃밭에다 이식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