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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한강 로드 탐방프로그램, 한강 유람단 자료집
글, 사진 : 대구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
(010-9417-8280, 3169179@hanmail.net)
일러두기
이 자료집은 달성문화도시센터에서 주최하는 ‘2023 한강 로드 탐방프로그램, 한강 유람단’ 참가자에게 제공되는 책자다. ‘한강 유람단’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큰 선비 한강 정구 선생의 유적과 스토리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강 선생은 유학계에서는 전국적 인지도를 지녔지만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한강 유람단’의 목적은 우리 지역에 산재한 한강 선생 유적과 스토리를 통한 ‘한강 정구 선생 바로 알기’다. 이 자료집은 ‘한강 유람단’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탐방에 앞서 아래 제시된 몇 가지 ‘key word’는 꼭 읽어 보기 바란다.
○ 본 자료집은 학술자료가 아닌 탐방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자료다. 따라서 전문용어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쉽게 풀어 쓸려고 노력했다.
○ 한강 유람단의 ‘한강(寒岡)’은 짧게 발음한다. 서울의 ‘한ː강(漢江)’은 길게 발음한다.
○ 한강 선생 유적으로는 ‘도동서원’, ‘사양정사’, ‘이락서당’을 탐방한다.
○ 한강 선생 스토리 유적으로는 ‘봉산욕행’에 나타난 금호강·낙동강 일원을 탐방한다.
○ 옛 선비들이 즐긴 ‘선유문화’와 ‘구곡문화’ 현장은 유람선과 차량을 타고 탐방한다.
○ 도동서원 : 김굉필과 정구 두 선생을 모신 서원. 보물·사적·유네스코 세계유산. 1604년 한강 선생 주도로 건립.
○ 사양정사 : 한강 선생이 제자를 양성하며 마지막 7년을 보내고 운명한 곳.
○ 이락서당 : 한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대 대구 선비들이 건립한 서당.
○ 봉산욕행 : 한강 선생이 중풍 치료를 위해 46일간 동래온천을 다녀온 일.
○ 선유문화 : 옛 선비들이 즐긴 뱃놀이 문화. ‘금호선사선유’, ‘낙강상화대선유’
○ 구곡문화 : 옛 선비들이 9곳 경승지를 즐긴 문화. ‘운림구곡’, ‘와룡산구곡’
‘한강 정구’ 그는 누구인가?
조선 중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선비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는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한강, 시호[諡號·훌륭한 이가 죽은 뒤 임금이 내리는 호]는 문목(文穆)이다. 경북 성주 출신으로 20대 초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고, 도동서원 건립과 사액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사헌[검찰총장]으로 있던 1608년(선조 41) 66세 때, 관직을 내려놓고 성주로 낙향했다. 1612년(광해군 4) 70세 때 고향 성주를 떠나 칠곡 노곡정사로 거처를 옮겼다. 1614년(광해군 6) 노곡정사 화재로 평생의 저술 및 서책이 모두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같은 해 72세 노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에 정착했다. 1617년(광해군 9) 75세 때 사수동에 ‘사양정사’를 건립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1620년(광해군 12) 1월 78세를 일기로 사양정사에서 운명했다.
우리나라에서 한강 선생 위상
한강 선생을 수식하는 대표적 표현으로는 ‘퇴계·남명 두 선생의 학맥을 이은 인물’, ‘퇴계의 3대 제자 중 한 명’, ‘조선 실학(實學)의 시원(始原)’, ‘예학(禮學)과 심학(心學)의 종장(宗匠)’, ‘대구 유학의 중시조(中始祖)’ 등이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영남학파를 낙동강 상류(또는 동쪽) 퇴계학파, 낙동강 하류(혹은 서쪽) 남명학파로 분류할 때, 낙동강 중류를 ‘한강학파’로 분류할 만큼 조선 중기 우리나라 유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대구·달성에서 한강 선생 위상
한강 선생을 일러 ‘대구 유학의 중시조[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조상]’라고도 한다. 대구 유학계는 16세기 중기까지는 존재가 미미했다. 전국적 인지도를 지닌 유학자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말 대구 유학계에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한강 정구라는 걸출한 스승 아래에서 이름난 유학자들이 하나, 둘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강 선생으로부터 공부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대구·달성권 제자로는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괴헌 곽재겸, 태암 이주, 연정 류요신, 낙애 정광천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했던 16세기 말-17세기 초 대구·달성의 유학은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Tip : 한강 선생이 대구에 끼친 영향력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356명이 등재된 한강 선생 제자록을 보면 된다. 대구에서 최소 300년 이상 살아온 성씨 문중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선조 중에 한강 선생 제자가 있기 때문이다.
2. 대구·달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강 선생 유적
한강 선생 작품,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동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 두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도동서원이 처음 창건된 것은 1568년(선조 1) 지금의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다. 이때 서원 이름은 도동서원이 아닌 마을 이름을 딴 ‘쌍계서원’이었다. 쌍계서원은 1573(선조 6)년 사액서원이 됐지만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됐다. 이후 쌍계서원을 도동서원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한강 선생의 역할은 매우 컸다.
‘도동서원중창사적기’에 의하면 현풍읍 쌍계리 쌍계서원을 지금의 구지면 도동리로 옮겨 도동서원으로 재탄생시킨 주역은 한강 선생이었다.[도동리에 처음 건립될 때는 ‘보로동서원’이었다가 이후 사액을 받을 때 도동서원이 됐다] 기록에 의하면 한강 선생은 도동서원 터 잡는 일과 건물이 들어설 구획 나누기에 특별히 고심했다고 한다. 또한 도동서원 교칙을 제정하는 등 요즘 말로 시행·시공·감리·준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강 선생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선생은 도동서원 건립 직후 곧바로 사액을 추진해 1607년(선조 40) 조정으로부터 사액서원의 명도 받아냈다. 이후 도동서원 창건 74년 뒤인 1678년(숙종 4)에는 한강 선생 자신도 외증조부인 한훤당 선생이 모셔진 도동서원 사당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럼, 지금부터 도동서원에 남아 있는 한강 선생 흔적을 한 번 살펴보자. 그나저나 한강 선생은 자신이 주도해 건립한 도동서원이 400여 년 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을 아셨을까?
1617년 7월 20일, 21일 도동나루
도동나루는 도동서원 바로 앞 낙동강가에 있는 나루다. 30-40년 전만 해도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 오사리를 오가는 배가 다녔고, 지금도 어로작업을 하는 어부의 선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1617년 7월 20일 밤 9시-11시 사이, 도동나루에 한강 선생이 있었다. 중풍 치료를 위해 제자들과 함께 뱃길로 부산 동래온천으로 향했던 ‘봉산욕행’ 46일차의 첫날 일정이 이곳에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이날 한강 선생은 이른 새벽 대구 북구 사수동 사양정사에서 가마를 타고 출발해 달성군 세천리 지암에서 배로 갈아탔다. 이때 선생이 탄 배는 도동서원 소유의 배로 도동서원 원장 곽근이 수일에 걸쳐 꾸미고 정비한 배였다. 봉산욕행 46일간 한강 선생을 수행한 제자 석담 이윤우는 봉산욕행록이란 기록을 남겼다. 봉산욕행록에는 도동나루에 도착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동쪽에서 올라와 강물이 금빛 물결을 이뤘다. 이경[21-23시]쯤 산 아래를 바라보니 불빛이 보였다. 도동서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노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가니 도동서원 원장 곽근이 거룻배를 타고 와 선생을 맞이했다. 선생이 들어가 서재 윗방에 자리를 잡으셨다. 이날 지나온 물길은 대략 150리였다.
도동나루에서 바라보이는 ‘관수정’와 ‘낙고재’
도동나루에서 도동서원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많은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은 유서 깊은 자연부락 도동마을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 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시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마을 뒤편 가장 높은 곳에 회화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고가 한 채가 있다. 관수정(觀水亭)이다. 이 정자는 한강 선생과 여헌 장현광의 제자인 김굉필의 5세손 사우당 김대진이 1624년(인조 2) 건립한 것이다.[지금 건물은 1883년(고종 20) 건립] 그 아래 마을회관 뒤편에도 고가가 한 채 보인다. 관수정보다 먼저 건립된 낙고재(洛皐齋)다. 이 역시 김대진이 건립한 것으로 김굉필의 아버지 절충장군 김뉴의 재실이다.[지금 건물은 1955년 건립]
한강 선생의 제자였던 김대진이 건립한 관수정과 낙고재. 두 고가 역시 한강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현풍군읍지(1899)와 한국의 서원유산(한국서원연합회, 2014)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낙고재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5세손인 사우당 김대진이 창건했으며,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이 강학, 휴식소로 삼았던 관수정과는 30보 떨어져 있다. (현풍군읍지)
○정구는 서원 가까운 곳에 정자 낙고재를 짓고 거처하면서 도동서원의 설립을 사실상 주도했다. (한국의 서원유산)
위 내용을 종합하면 관수정과 낙고재는 평소 한강 선생이 찾았던 곳이자, 도동서원 설립 당시 한강 선생이 거처했던 곳이 된다. 사실 한강 선생은 도동서원, 관수정, 낙고재 건립 이전에도 이곳을 자주 왕림했을 것이다. 서원 바로 뒤에 외증조부인 김굉필의 묘소와 김굉필의 셋째 딸이자 한강 선생 자신의 할머니가 되는 서흥김씨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한강 선생이 심은 400년 ‘은행나무’
도동서원 입구에는 도동서원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수령 400년 은행나무가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서원·향교·서당 같은 유교 관련 건물을 짓고 나면 곁에다 은행나무를 심는 문화가 있다. 이는 2,500년 전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수업했다는 ‘행단강학(杏壇講學)’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한강 선생이 도동서원 건립을 기념해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한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400년치고는 나무가 너무 굵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정도 굵기면 수령 700-800년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또 하나는 나무의 모양이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자라는 대부분의 은행나무와는 달리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누워 자란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도동서원에 모신 두 선생이 워낙 큰 어른이라 은행나무도 고개 숙이고 자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사람들은 나무 심는 것을 가리켜 덕(德)을 심는 것이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무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심는다. 한강 선생은 자신이 심은 은행나무가 400년 후에 이렇게 크게 자라 도동서원 랜드마크가 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고개 숙이고 들어오라, ‘환주문’
도동서원 외삼문 수월루(水月樓)는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1849년(헌종 15) 작은 규모로 처음 세워졌다가 화재로 소실, 1974년 지금의 모습으로 건립한 것이다. 도동서원 진짜 출입문은 수월루 뒤편에 있는 작은 문, ‘환주문(喚主門)’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조선시대 중부영남권 최고 서원인 도동서원 출입문치고는 작아도 너무 작다. 높이도 169cm, 폭도 1m에 불과한데다 바닥 한 가운데는 커다란 연꽃 돌까지 박혀 있다. 그래서 환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 위아래를 살피고, 양팔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야 겨우 통과할 수 있다. 문을 왜 이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한강 선생의 숨은 의도가 있다.
이곳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 공손한 자세로 고개 숙여 위아래를 살피고, 옷자락을 앞으로 가지런히 해야 이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Tip : 환주문은 위치 또한 절묘하다. 도동서원 강당과 사당의 가운데 문을 모두 열어놓고 수월루 아래에서 환주문을 올려다보면, 저 멀리 문과 문 사이로 사당에 모신 한훤당 선생의 위패가 보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현판, ‘사액’ 현판과 ‘퇴계’ 현판
도동서원 중정당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 안쪽과 대청 바깥 처마 아래다. 안쪽에 걸린 현판은 검정 바탕에 흰색 글씨, 바깥 현판은 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다. 안쪽 현판은 조정으로부터 받은 사액 현판이며, 바깥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모각[복제]한 것이다. 이처럼 도동서원에 두 개의 현판이 걸린 것도 한강 선생 작품이다.
1604년(선조 37) 한강 선생 주도로 도동서원이 건립되고 이어 선생은 조정에 사액을 요청했다. 그 결과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으로 사액의 명이 내려왔다. 하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사액에 따른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다. 선생은 더 이상 사액 현판 봉안과 위패 봉안을 미룰 수 없었다. 한강 선생은 경상도 관찰사와 함께 사액 현판 제작과 봉안을 경상감영에서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 결과 1610년(광해군 2) 도동서원 사액 현판은 조정이 아닌 경상감영에서 제작하게 됐다. 당시 명필로 이름난 경상도 도사 배대유가 사액 현판 글씨를 썼다. 이렇게 제작된 사액 현판이 도동서원 중정당 대청 안쪽에 걸린 현판이다. 그렇다면 도동서원 중정당 처마에 걸린 퇴계 선생 현판은 또 무엇일까?
도동서원에 임금의 명으로 내려온 사액 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계 선생 글씨를 모각한 또 다른 현판을 건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유는 퇴계 선생 현판 바로 아래 걸려있는 일명 ‘도동서원액판하’, 혹은 ‘한강선생수서’로 알려진 작은 나무 액자에 기록되어 있다. 액자의 글은 한강 선생이 작성한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퇴계 선생은 한훤당 선생을 기리는 서원 건립에 관심이 많았지만 성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만약 도동서원 건립 때까지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도동서원은 선생께서 시로 읊으셨던 ‘서원십영(書院十詠)’ 중 하나의 서원이 됐을 것이며, 친히 현판 글씨도 써주셨을 것이다. 감히 이런 뜻을 담아 선생께서 평소 써 놓으신 글자 중에서 ‘도·동·서·원’ 넉 자를 구해 현판으로 제작해 걸었다. 선생의 옛 글씨와 임금께서 내려 주신 것이 안팎으로 빛 날 것이니···
이처럼 도동서원에 걸려있는 두 개의 현판. 한강 선생의 노력으로 걸리게 된 소중한 현판이다.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백미
한강 선생 작품인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정형이자 백미로 잘 알려져 있다. 도동서원 건축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대표적인 특징을 들라면 ‘위계’, ‘대칭’, ‘소박’을 들 수 있다. 위계성은 서원이 들어선 땅과 그 땅 위에 세워진 서원 건축물의 위상이 앞에서 뒤로 가면서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산비탈에 세워진 도동서원은 경사를 조절하기 위해 대지를 모두 18단으로 조성했다. 앞에서 뒤로 가면서 터와 건물의 높이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대칭성은 서원 공간의 앞뒤를 잇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 건물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성은 건축물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건축과 불교건축의 가장 큰 차이다. 불교건축은 종교적 장엄미를 중시해 건물 규모와는 상관없이 모든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하지만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건축은 그렇지 않다. 작지만 큰 뜻을 담은 환주문, 웅장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중정당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재·서재 건축양식에 담긴 비밀
도동서원 강당 아래 좌우에 있는 작은 건물이 동재와 서재다. 동·서재는 지금의 학생 기숙사에 해당한다. 동재는 상급생, 서재는 하급생이 기숙했다. 얼핏 보면 두 건물은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차이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동재는 방문 밖에 앉아 쉴 수 있는 쪽마루가 있고, 서재는 없다. 둘째, 동재 마루는 통풍이 잘되는 나무 벽에 창이 있지만, 서재 마루는 흙벽에 창이 없다. 셋째, 동재 마루 기둥은 고급 기둥인 원기둥[두리기둥]인 반면 서재 마루 기둥은 각기둥[네모기둥]을 사용했다. 넷째, 동재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지만, 서재는 정면에 있다. 이처럼 동·서재 건축양식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둔 것은 이유가 있다. 누가 사용할 건물이냐에 따라 그에 걸맞은 위계를 부여한 탓이다. 그 옛날 서재 학생들은 쪽마루에 창 달린 마루 벽이 있는 동재를 매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강 선생은 학생들의 마음까지 읽었던 심리학자이자 건축학자였다.
환주문·거인재·거의재·중정당
우리나라 전통건축 특징 중 하나는 건물마다 이름을 붙인다는 점이다. 당호(堂號)·재호(齋號)·헌호(軒號)·문호(門號) 같은 것이다. 도동서원 역시 마찬가지다. 도동서원 외삼문에 해당하는 누문은 수월루(水月樓), 출입문은 환주문(喚主門), 동재는 거인재(居仁齋), 서재는 거의재(居義齋), 강당은 중정당(中正堂)이라 이름하고, 각각의 건물마다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다. 도동서원 건물 이름을 지은 이도 한강 선생이다.[중정당과 환주문은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 때와 동일하며, 거인재와 거의재는 도동서원으로 중창할 때 한강 선생이 이름 한 것이다]
한강 선생이 이름 한 도동서원 건물명의 특징은 서원에서 익혀야 할 ‘성인의 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선생은 성인의 도에 이르는 핵심 키워드를 ‘중정’, ‘인의’, ‘정(靜)’으로 설정했다. 이는 염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배우는 단계의 선비는 먼저 정[마음을 고요히 함]을 바탕으로 인·의를 닦은 후, 중·정이란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서원을 출입하는 이는 늘 나의 주인인 마음을 불러 일깨우고[환주문], 먼저 서재[거의재]에 거하면서 의를 닦고, 이후 동재[거인재]에 거하면서 인을 체득한 후, 성인의 도[중정당]에 이르러야 하느니라
Tip : 도동서원 사당에는 현판이 없다. 2019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사당에 현판이 없는 곳은 함양 남계서원과 달성 도동서원뿐이다. 한강 선생은 외증조부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사당에 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중정당 앞뜰에 박힌 ‘자라머리’
기록에 의하면 한강 선생은 못 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성리학은 말할 것도 없고, 예학·의약·산수·풍수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이 있었고 저술도 많이 남겼다. 도동서원에는 한강 선생이 풍수지리에 밝았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몇 점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정당 앞뜰 바닥에 박힌 자라머리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이 자라머리는 도동서원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터를 잡고 세운 건물임을 알려주는 증거다.
풍수지리에서는 도동서원이 자리한 터를 자라[오], 목[항], ‘오항혈(鰲項穴)’이라 한다. 낙동강변에서 도동서원을 바라보면 서원 뒤로 박을 엎어 놓은 듯한 반원형 산이 보인다. 풍수에서는 이 산을 자라 등껍질, 도동서원이 자리한 터를 자라목으로 본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터는 자라 등과 목은 갖췄는데 자라 머리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돌로 자라머리를 조각해 끼워 넣었던 것이다. 이로써 2% 부족했던 불완전한 오항혈이 완전한 오항혈이 될 수 있었다.
조각보를 닮은 중정당 기단과 용머리, 세호
한강 선생은 건축에다 예술도 접목 시켰다. 중정당 석축 기단을 보면 알 수 있다. 돌을 다듬어 쌓은 중정단 기단은 제법 높다. 그런데 기단을 구성한 돌을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돌의 재질도 다르고 색도 다르다. 게다가 돌의 모양도 4각·6각·8각·10각·12각형 등 다양하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일하기 좋게 4각형 돌을 사용해도 될 것을, 굳이 여러 모양의 돌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문양을 연출했다. 마치 조각보를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모자이크 작품, 테트리스 게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기단을 공들여 쌓은 것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내구성을 고려한 것이다. 잉카제국의 수도 페루의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일대는 석벽과 12각형 돌로 유명하다. 지진으로 이 지역 대부분의 유적이 무너져도 석벽만은 끄떡없었다고 한다. 석벽이 도동서원 기단처럼 4·6·8·10·12각형 돌들이 서로 물고 있어 지진을 견뎌낸 것이다.
중정당 기단엔 또 다른 볼거리도 있다. 4기의 ‘용머리’와 2기의 ‘꽃+세호’ 조각이다. 기단 바깥으로 돌출되어있는 용머리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 강당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세상에 크게 쓰이기를 기원하는 ‘등용(登龍)’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전통적인 ‘용 사상’에 근거해 서원 앞 낙동강물을 다스림과 동시에 화재 방지를 기원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세호(細虎)’는 돌에 조각한 작은 호랑이로 예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해 주로 무덤 앞 망주석에 새겼다. 그런데 망주석에 있어야 할 세호가 난데없이 도동서원 중정당 기단에도 새겨져 있다. 세호 역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다람쥐로 볼 때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땅속에 묻어 참나무를 번식시키듯 자손 번창을 기원한다고 본다. 도롱뇽으로 볼 때는 도롱뇽이 물과 육지를 자유롭게 오가듯,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물을 도롱뇽의 힘을 빌려 오간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풍수지리에서는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해 무덤을 등지고 섰을 때 왼쪽 세호는 위를 향하고, 오른쪽 세호는 아래로 향하는 것을 좋은 표식으로 본다. 중정당 세호도 건물을 등지고 섰을 때 좌상우하(左上右下)로 되어 있다. 한편 도동서원에서는 이러한 해석과는 별개로 세호를 중정당 계단 사용법으로 해석한다. 위로 향한 세호 곁에 있는 동쪽 계단은 올라갈 때, 반대편 서쪽 계단은 내려갈 때 사용한다는 식이다.
Tip :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4기의 용머리 중 왼쪽에서 두 번째 용머리만 400년 전 본래 것이고 나머지 3기는 근래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오리지널 용머리 3기는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봉산욕행’ 때 한강 선생은 어느 방에서 1박을 하셨을까?
1617년 7월 20일, 한강 선생 일행은 도동서원에서 봉산욕행 첫날밤을 보냈다. 이날 한강 선생은 도동서원 어느 방에서 1박을 하셨을까? 이에 대해 봉산욕행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들어가 서상재(西上齋)에 자리를 잡으셨다.
여기서 ‘서상재’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몇몇 봉산욕행록 번역본에는 이를 ‘서재(西齋) 윗방’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서재에 있는 윗방’이 된다. 도동서원 서재 거의재(居義齋)는 정면 3칸 건물로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서부터 1칸 대청, 2칸 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방은 칸수는 2칸이나 내부에 벽이 없는 통 칸으로 하나의 방이다. 그러니 윗방, 아랫방 구분이 없다. 한강 선생이 정말 이 방에서 하루를 묵으셨을까? 글쎄?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격이 높은 방은 중정당 서쪽 방인 원장님 방이다. 당시 도동서원 원장 곽근은 한강 선생 제자로 한강 선생 추천으로 원장이 되어 8년을 원장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한강 선생의 숙소를 중정당에 딸린 아래채, 그것도 동재보다 격이 낮은 서재에다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서상재’는 서재 윗방이 아니라, 원장님 방인 ‘중정당 서쪽 윗방’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한강 선생이 제정한 도동서원 교칙, ‘도동서원규목’
모든 조직에는 회칙·정관 같은 조직 운영을 위한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사립 중·고등학교[2019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도동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은 사립대학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인 서원도 마찬가지다. 서원에서는 이를 ‘규목(規目)’ 또는 ‘원규(院規)’라 한다. ‘도동서원중창사적’에 따르면 ‘도동서원규목’은 한강 선생이 직접 제정한 것으로 우리나라 서원 규목 중에서 가장 상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동서원규목’은 도동서원 중정당 벽에 게시되어 있다. 지금의 규목 현판은 1918년 제작한 것이다. 규목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다.
○근향사(謹享祀) : 봄·가을 향사[제사]를 잘 모시라. 향사에 7번 불참하면 명단에서 삭제하라.
○존원장(尊院長) : 원장을 존중하라. 원장은 함부로 자주 교체하지 말라.
○택유사(擇有司) : 유사[실무 책임자]를 잘 채용하라. 원장과 원중이 상의해서 고른다.
○인신진(引新進) : 신입생은 향사 때 논의해서 영입하라. 20세를 넘긴 자라도 원하면 양몽재(養蒙齋) 입학을 허락하라.
○정좌차(定座次) : 강당에 앉을 때는 순서를 정해 앉으라. 평시에는 나이순으로 앉으라. 양몽재생은 남쪽에 앉으라.
○근강습(勤講習) : 공부를 열심히 하라. 겨울·봄에는 사서오경과 성리서를 읽고, 여름·가을에는 역사서·자서·문집 등을 읽어라. 양몽재생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되 소학을 가차 없이 교육한다.
○예현사(禮賢士) : 어진 선비를 예로써 모셔라. 지역에 은거한 현인, 지조 있는 선비는 예로써 영접하고 스승으로 모신다.
○엄금방(嚴禁防) : 금하는 바를 엄격히 지켜라. 장자·열자·노자·석씨[불교]의 서책, 바둑·장기는 서원에 들이지 말라. 무사나 잡술에 종사하는 이도 서원에 출입할 수 없다.
위 규목 내용 중 ‘인신진’, ‘정좌차’, ‘근강습’ 조목에 ‘양몽재’란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양몽재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학교를 말한다. 조선시대 중부영남권을 대표하는 명문 사립대학교에서 어린이를 가르친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도동서원 부설 사립 초등학교, ‘양몽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가 있듯이 도동서원에도 도동서원 부설 초등학교인 ‘양몽재(養蒙齋)’가 있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인 한강 선생은 고등교육은 물론 초등교육에도 관심이 컸다. 이는 도동서원에 설치됐던 양몽재를 통해 알 수 있다. ‘도동서원규목’은 도동서원 건립과 동시에 한강 선생이 직접 제정했다. 이 조목 중에 양몽재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도동서원 건립 당시 양몽재도 함께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혹 나이가 20세를 넘었더라도 원하면 양몽재 입학을 허락하라’, ‘양몽재생은 남쪽에 앉으라’, ‘양몽재생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되 소학을 가차 없이 교육한다’는 조목 등을 참고하면 한강 선생은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도동서원을 건립할 때 부설 초등학교인 양몽재도 같이 세웠다니 한강 선생은 정말 큰 교육자였다.
양몽재생은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은 뒤에 잠자리에 든다. 소학 읽을 것을 명하되 그 과정을 세워 가차 없이 훈계한다. 읍하고 절하는 것이 법도가 있고 겸손한 말씨 등, 배움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 예의를 잘 익혀야 진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도동서원규목 ‘근강습’ 중에서)
Tip : 도동서원에는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건물이 두 채가 있다. 양몽재와 향현사(鄕賢祠)다. 향현사는 고을의 어진 선비를 모신 별도 사당이다. 1695년(숙종 21) 건립된 향현사는 규헌 곽승화, 대암 박성, 낙천 배신, 원개 4위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양몽재와 함께 훼철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음양의 조화, 도동서원 담장
도동서원 안과 밖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은 수월루가 아닌 환주문이다. 환주문에서 시작되는 도동서원 담장은 일반적인 전통 담장과는 조금 다르다. 황토와 돌 외에도 수막새, 암키와 등을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맨 아래에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황토로 담을 쌓았다. 황토담은 일정한 높이를 두고 ‘ㅡ’ 형 암키와를 마치 시루떡 팥고물처럼 한 켜씩 좌우로 길게 배열해 놓았고, 그 사이로 군데군데 둥근 수막새를 끼워 넣었다. 단정하면서도 규칙성이 있어 보이는 이 담장에는 음양사상이 담겨 있다. 황토 담장 표면에 안정감 있게 좌우로 배열된 암키와는 음, 드문드문 박혀 있는 둥근 수막새는 양을 상징한다. 이처럼 평범할 수 있었던 담장에도 철학적 의미와 시각적 아름다움을 담아낸 것이 도동서원 담장이다.
Tip : 도동서원 담장은 강당, 사당과 더불어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중정당 뒤 바닥에 설치한 낮은 굴뚝의 비밀
도동서원 중정당에는 이상한 굴뚝이 두 개 있다. 굴뚝은 아궁이에서 발생한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다. 연기가 잘 빠져나가야 아궁이에 불도 잘 들어간다. 그래서 굴뚝은 높이 설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동서원 중정당 굴뚝은 높이기는커녕 건물 맨 아래 기단에다 설치했다. 왜일까?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중에는 굴뚝을 높이지 않고 건물 아래 기단부에 설치한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바닥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건물 표면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다. 연기가 코팅하듯 건물을 감싸면서 방충·방수 같은 건물 보호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여유 있는 집에서 아침 저녁 피워 올린 밥 짓는 연기를, 마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굴뚝을 낮게 설치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특별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함이다. 주로 정자 등에서 발견되는 굴뚝 형태로 연기를 구름으로 대치하기 위해서다. 정자 주변을 감싼 연기를 이용해 정자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도동서원 중정당 굴뚝은 위 세 가지 이유 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 양력 4월 10-20일 경이면 중정당 뒤편 꽃 계단에는 꽃들의 제왕이라 불리는 모란이 만발한다. 상상을 한 번 해보라. 바닥에 설치된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아래부터 위로 차례대로 꽃 계단을 가득 메운다. 구름 가득한 가운데 탐스러운 모란꽃이 보인다. 그 뒤로 선현을 모신 사당 내삼문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정말 한강 선생은 이런 것까지 계산해 굴뚝을 바닥에 설치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설사 우연이라 해도 놀라운 건 사실이다.
우리나라 유일, 담장에 설치한 ‘감’
감(坎)은 향교나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마지막 절차인 망료례(望燎禮)에 사용되는 작은 시설물이다. 통상 감은 사당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사당 왼쪽 땅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작은 구덩이 형태도 있고, 제사 때 임시로 항아리나 기왓장으로 감을 설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땅바닥이 아닌 담장에 감을 설치한 예는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도대체 도동서원 감은 어떤 이유로 땅바닥이 아닌 담장에다 설치한 것일까?
감은 제사에서 신에게 올린 폐백[선물]과 축문을 불살라 묻는 곳이다. 이러한 절차를 ‘망예례’ 혹은 ‘망료례’라 한다. 지금은 서로 통용해서 사용하는 용어지만 이 둘은 차이가 있다. 망예례는 폐백과 축문을 그냥 땅에 묻는 것이고, 망료례는 불사르는 것이다. 이 두 절차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조선시대 임금이 있었다. 영조 임금이다. 영조는 신에게 올린 폐백과 축문이 땅 아래 있는 감에 묻혀 지저분해 지는 것이 보기에 불편했다. 고민 끝에 영조는 “앞으로는 감 위에서 폐백과 축문을 불태우고[망료], 그 재를 감에 묻으라[망예]”는 명을 내렸다.
한강 선생은 예학에도 밝아 ‘예학의 종장’으로도 칭한다. 선생도 영조 임금처럼 땅바닥에 설치된 감 안에 어지럽혀져 있는 폐백과 축문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도동서원 감은 지상에서 1.5m 정도 높이의 담장에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망료례 때 축관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기 위해 쭈그려 앉을 필요도 없고, 재가 물에 젖어 더럽혀질 걱정도 없다. 영조 임금이 진즉에 도동서원 감을 알았더라면 전국 향교와 서원의 감은 도동서원처럼 벽에 설치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강 선생은 150년 뒤를 내다봤던 것 같다.
사당 안 400년 전 벽화 두 점
도동서원 사당 안에는 여타 다른 서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벽화 2점이 있다. 사당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좌·우 벽 상부에 각각 한 점씩 있는데, 사당 창건 당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 벽화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로 김굉필의 시 ‘선상(船上)’, 오른쪽 벽화는 ‘설로장송(雪路長松)’으로 그의 시 ‘노방송(路傍松)’을 벽화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400년 된 벽화임에도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보존상태가 너무 완벽하다. 이는 벽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됐고, 햇빛이 들지 않는 실내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누가 그린 작품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도동서원 측에 따르면 이 벽화는 조성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회화 문화재로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도동서원 사당은 담장·강당과 함께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벽화는 건물과는 별개 문제다. 사찰 문화재 경우 법당과 그 내부에 있는 불상·탱화 등이 각각 별도 문화재로 지정되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도동서원 사당 벽화를 두고 떠도는 풍문이 있다. 10년 가까이 도동서원 해설사로 근무 중인 필자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만약 풍문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정말 ‘대박’이다.
“한강 선생 작품이라는 말도 있던데···, 한강 선생은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니···”
조정으로부터 허락받은 ‘경봉조명’ 네 글자
‘축문(祝文)’이란 게 있다. 제사에서 신에게 올리는 글이다. 축문은 신에게 올리는 술과 마찬가지로 제사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다. 도동서원 향사 축문은 한강 선생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도동서원 축문에는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문장 하나가 있다. 바로 한강 선생의 요청으로 조정으로부터 허낙을 받아낸 ‘경봉조명(敬奉朝命)’ 네 글자다.
‘경봉조명’은 ‘조정의 명을 공경이 받든다’는 뜻이다. 축문 첫머리에 “조정의 명을 공경이 받들어···” 라는 말을 넣음으로써 도동서원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임금의 명을 받들어 향사를 올리는 특별한 서원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한강 선생은 ‘경봉조명’ 네 글자를 도동서원 향사는 물론 한훤당 선생 종택 제사 축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의 허락을 받아냈다.
Tip : 임금도 조정도 다 사라지고 없는 지금은 ‘경봉조명’ 네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도동서원 뒤편 한강 선생 할머니 묘
도동서원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한훤당 김굉필 선생 묘소가 있다. 그런데 한훤당 선생 묘소 가는 길에 이런 이정표가 보인다. ‘한훤당 셋째 딸의 묘’. 이분이 한강 선생의 할머니다. 한훤당 선생의 셋째 따님은 성주 사람 정응상에게 출가해 정사중을 낳고, 정사중과 성주이씨 부인 사이에서 한강 선생이 태어났다. 다시 말해 한훤당 선생의 셋째 따님은 한강 선생의 친할머니이고, 한훤당 선생은 한강 선생의 진외증조부가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셋째 따님은 성주로 출가했으니 묘소 또한 성주 시댁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구 달성 친정 부모님 묘소 아래에 있다. 어찌된 일일까?
셋째 따님의 어머니이자 한훤당 선생의 부인인 정경부인 순천박씨는 평소 셋째 딸을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셋째 딸을 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이러한 사연이 시댁에까지 알려져 결국 셋째 따님은 친정 부모님 묘소 아래에 묻힐 수 있었다. 셋째 따님의 효행과 관련해 지금까지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병든 친정어머니를 위해 성주에서 죽을 쑤어 가슴에 품고 도동까지 오면 죽이 적당히 식어 친정어머니가 드시기에 알맞았다고 한다.
2. 400년 전 ‘봉산욕행’을 따라
앞서 도동나루 이야기에서 ‘봉산욕행’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1617년 7월 20일 한강 선생 나이 75세. 선생은 중풍 치료를 위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 동래온천에 간 사실이 있다. 전체 일정은 46일이었다. 동래로 내려가는 길은 뱃길을 이용하고, 한 달간 온천욕을 한 후, 다시 대구로 돌아오는 길은 육로를 이용했다. 이때 선생의 제자 석담 이윤우는 46일간 선생을 수행하고 봉산욕행록이란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에는 46일간의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중 대구 달성 지역을 금호강과 낙동강 뱃길로 통과한 1-2일차 일정을 한강 선생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617년 7월 20일 이른 새벽 대구 북구 사양정사.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한강 선생이 가마에 올랐다. 어둠이 걷힐 무렵 선생은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금호강가 지암에 이르러 준비된 배에 올랐다. 배는 금호강과 낙동강 합류 지점에 있는 부강정[강정유원지 디아크가 있는 곳]을 지나 금강 여울[달성습지 인근]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배가 원당포·노다암[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와 마주 보고 있는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낙동강변]에 이르니 천막을 쳐놓고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배를 멈추고 사람들을 배에 오르게 해 술 한 잔씩을 하고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오랜 가뭄 끝이라 강물이 얕아 배가 자주 바닥에 걸렸고, 오후에는 역풍을 만나 사공들이 내려 배를 끌었다.[논공읍 일원] 점심때쯤 덕산[논공읍 남리 덕산나루]을 지나 쌍산·수문[현풍읍 성하리]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다. 90세 노인 나세겸이 영파정[현풍휴게소 뒤편 낙동강 언덕. 영파정은 사라지고 지금은 공신정이 있다]에서 한강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 노를 재촉하다 지나쳐 버렸다. 이 일로 선생이 몹시 안타까워했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에 물든 강물이 금빛으로 빛났다. 21-23시 경 도동나루에 도착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사당과 한훤당 묘소를 참배한 후 배에 올랐다. 어목정[구지면 도동리와 마주 보고 있는 고령군 개경포 인근에 있었던 정자.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과 부래정[구지면 오설리와 마주 보고 있는 고령군 예곡리에 있는 정자]을 지나고 대암[구지면 대암리]에 이르자 10여 명이 거룻배를 타고 인사차 들렀다.
Tip : 한강 선생 ‘봉산욕행’ 1-2일차는 대부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금호강과 낙동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기간에 등장하는 지명·유적 중 사양정사, 쌍산, 수문, 원당포, 노다암, 도동나루, 도동서원, 한훤당 묘소, 부래정[2014년 복원], 대암 등은 지금도 남아 있다. 부강정, 어목정은 사라졌으며 영파정 자리에는 공신정[영월엄씨 재실]이 대신 남아 있다. 지암도 일부는 확인이 가능하다.
3. 한강 선생 마지막 유적 ‘사양정사’
조선 중기 사양정사가 있었던 대구 북구 사수동은 2000년대 초 대규모 택지개발로 현재는 아파트가 즐비한 신도시가 됐다. 택지개발 당시 향토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이곳에 한강 선생 마지막 유적인 ‘사양정사’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한강 선생 마지막 유적이었던 사수동에 선생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을 했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2014년 사수동에 약 13,000평에 달하는 ‘한강근린공원’이 조성되고, 공원 안 섬뫼숲 정상에 사양정사를 복원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일에 앞장섰던 이들은 ‘사수동 주민일동, 사수동 발전협의회, 금호택지개발 주민대책위원회, LH한국토지주택공사, 달구벌 얼찾기 모임, 청주정씨 문목공파 대종회, 칠곡향교’ 등이다.
뜻 있는 대구시민들이 지켜낸 ‘사양정사’
한강 선생은 만년에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1614년(광해군 6) 선생 나이 72세 때다. 사수동은 본래 사빈(泗濱)이라 불렸는데, 선생이 ‘사수(泗水)’로 고쳤다.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 곡부를 흐르는 강으로 ‘공자’를 상징하는 단어다. 1617년(광해군 9) 선생 나이 75세 때 이곳에 사양정사를 건립했다. 사양정사는 선생 사후 30년이 지난 1651년(효종 2) 사수동 주민들에 의해 ‘사양서당’이 됐다가, 1694년(숙종 20) 칠곡군 지천면 신동[웃갓]으로 옮겨 ‘사양서원’이 됐다. 하지만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강당만 보존된 채, 현재는 ‘사양서당’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사양서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수동 사양정사는 어떻게 됐을까?
조선 숙종 때 신동으로 옮겨진 사양정사는 이후 사수동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양정사가 지금처럼 대형 누각으로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2014년이다. 이때 사양정사를 옛 모습대로 복원하지 않고 지금처럼 누각으로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관리상의 문제와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400년 전 한강 선생이 건립한 최초의 사양정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모습은 ‘한강연보’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다음은 한강 선생 이력을 연도별로 기록한 ‘한강연보’ 1617년[75세]에 나타난 관련 기록이다.
사양정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사양병수(泗陽病叟·사수 북쪽에 사는 병든 노인)라 했다. 세 칸 규모의 집을 세웠다. 서쪽 두 칸은 서재(書齋·책을 두는 방)로 이름을 지경재(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이름을 경회당(景晦堂)이라 했다. 남쪽 행랑채는 누각인데 이름을 망로헌(忘老軒)이라 했다. 이것을 모두 합쳐 사양정사라 이름했다.
누각 형태로 복원된 지금의 사양정사도 정면 3칸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경회당(景晦堂)’ 현판이 걸려있다. 옛 건물에 걸려있는 현판은 결코 허투루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수백 글자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을 단지 한 두 글자로 압축해 놓은 것이 건물에 걸려있는 당호(堂號) 현판이기 때문이다. 사양정사는 ‘사수 북쪽에 있는 정사’란 뜻이다. 이는 ‘산남수북(山南水北)’에서 유래한 말로 산은 남쪽이 양이요, 물은 북쪽이 양이란 의미다. 또한 사양정사에 걸린 세 개의 현판 글자에서 ‘경(敬)’은 퇴계 이황, ‘의(義)’는 남명 조식, ‘회(晦)’는 회암 주희[주자]를 상징한다. 이황과 조식은 한강 선생의 스승이고, 주자는 선생이 마음속으로 경모하며 스승으로 삼은 중국 남송시대 성리학자다.
Tip : 사양정사 주변으로 작은 인공 실개천이 흐른다. 이는 한강 선생이 설정하고 경영했던 성주 대가천 ‘무흘구곡’을 형상화한 것이다. 실개천 주변으로 선생의 시와 글을 새긴 10개의 시비가 설치되어 있다. 공원 한편에는 연못과 정자도 있다. 이는 선생이 평소 금호강가에 있는 관어대(觀魚臺)에 올라 물고기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주의 이치를 관조했다는 관어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우리 할배를 찾아보자
한강공원 입구에 ‘한강근린공원’이라 새긴 큰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 뒷면에는 무려 356명의 성명이 ‘가나다’ 순으로 본관과 함께 새겨져 있다. 표지석 제일 상단 ‘한강선생급문제현(寒岡先生及門諸賢)’은 한강 선생 제자 명단이란 뜻이다. 이쯤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아보자. 대구에서 최소 300년 이상 살아온 성씨 문중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선조 중에 한강 선생 제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한강공원에 있는 ‘한강선생급문제현’ 표지석을 한번 살펴보라. 친절하게도 ‘가나다’ 순에 본관까지 기재 되어 있어 찾아보기도 쉽다. 표지석 앞에서 자신의 할배를 찾아보는 재미가 제법 솔솔하다. 4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상당수 대구시민이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 선생과 인연이 닿는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놀랍다.
‘한강연보’에 기록된 한강 선생 마지막 모습
한강 선생은 1620년(광해군 12) 1월 5일, 향년 78세로 사양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강연보’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종 순황제(穆宗純皇帝) 48년, 광종 정황제(光宗貞皇帝) 원년, 광해 12년 경신(1620), 선생 78세
○ 1월 1일 선생의 병세가 위급해졌다.
○ 5일 갑신일 아침 가례회통(家禮會通)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예설(禮說)[오선생예설분류. 한강 선생이 편찬한 예서] 교정에 참여한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종이가 벽에 바르게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바르게 붙이게 했다. 유시[17-19시]에 이르러 돗자리가 바르지 않다고 연이어 세 번 말했으나 기운이 약하고 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선생께서 손으로 돗자리를 가리킨 뒤에야 곁에 있는 사람이 그 뜻을 알고 선생을 부축해 자리를 바르게 했다. 조금 뒤에 선생께서 지경재에서 운명했다. - 이전 해인 기미년(1619)에 가야산 북쪽 모서리가 무너졌다. 5일인 이날 아침에는 사수(泗水) 가의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끼는 이변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운명할 조짐이라고 말했다.
4. 한강 선생을 추모하며 건립한 ‘이락서당’
2010년경만 해도 성서에서 달성군 다사읍으로 넘어가는 강창교 초입 오른쪽 산기슭에 대숲에 둘러싸인 고가가 한 채 있었다. 2011년 고가는 사라지고 같은 자리에 새롭게 단장한 새 한옥 한 채가 세워졌다. 이락서당(伊洛書堂)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25년 전,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두 선생을 추모하며 ‘9문중 11촌 30인 선비’가 건립한 이락서당. 이번에는 이락서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 두 선생을 기리다
이락서당은 지금으로부터 225년 전인 1798년(정조 22)에 건립됐다. 당시 조선은 영조에 이은 정조의 선정으로 이른바 조선의 문예부흥기, 르네상스기였다. 대구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문예부흥기를 보냈다. 이는 성주의 한강 정구, 구미의 여헌 장현광 같은 대학자들이 대구 선비들과 학문적 교류를 맺은 결과였다. 조선시대 대구 문풍은 16세기 중반 매암 이숙량, 송담 채응린, 임하 정사철, 계동 전경창 같은 1세대 학자들에 의해 나름 학맥의 기초를 쌓았다. 이후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대구권 학맥을 하나로 대통합한 이가 바로 한강 선생이며, 한강 학맥을 이은 대구 대표 선비가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이다. 당시 대구 문풍은 한강 선생을 정점으로 신천 동쪽은 손처눌, 서쪽은 서사원이 주도했다. 이들이 쌍두마차가 되어 활동한 17세기 전후 시기가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대구 문풍이 가장 화려하게 꽃핀 전성기였다. 퇴계학과 남명학을 흡수해 ‘한강학’을 창출해낸 한강 정구.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당시 대구 선비들의 영원한 스승이었던 낙재 서사원. 바로 이 두 선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이락서당이다.
이락서당은 서원이 아닌 서당으로 사당·동재·서재 없이 강당과 대문채만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며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정면에서 강당을 마주 보았을 때 대청을 기준으로 오른쪽 방은 ‘모한당(慕寒堂)’, 왼쪽 방은 ‘경미재(景彌齋)’다. ‘모한’은 한강 선생을 사모한다는 의미이며, ‘경미’는 낙재 선생을 사모한다는 뜻이다.[서사원은 낙재라는 호를 사용하기 전에 ‘만오당(晩悟堂)’ 또는 ‘미락재(彌樂齋)’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처럼 이락서당은 모한당, 경미재 두 현판만 봐도 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Tip : 예전 이락서당은 지금과는 달리 건물이 지면에서 제법 높이 있었다. 그래서 앞이나 옆에서 바라보면 마치 누각처럼 보였다.
이락서당 keyword, ‘9문중 11촌 30인의 선비’
‘9문중(門中) 11촌(村) 30인(人)의 선비’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0여 년 전에도 대구에는 많은 성씨 문중과 그들의 세거지가 있었다. ‘9문중’은 9개 성씨 문중, ‘11촌’은 11개 마을, ‘30인 선비’는 말 그대로 30인의 선비를 말한다. 그런데 ‘9문중 11촌 30인’이란 키워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이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으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은 대구 제자들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최초 이락서당을 창건한 ‘9문중 11촌 30인’의 성씨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성주도씨 15명(서재·서촌), 광주이씨 3명(상지), 전의이씨 3명(상곡·하당), 순천박씨 2명(묘동), 달성서씨 2명(남산), 함안조씨 2명(원대), 밀양박씨 1명(덕산), 일직손씨 1명(수성), 광산이씨 1명(슬곡)
Tip : 11촌의 현재 동명이다. 서재(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서촌(달서구 용산동), 상지(칠곡군 지천면 신동), 묘동(달성군 하빈면 묘동), 남산(중구 남산동), 원대(서구 원대동), 덕산(청도군 각북면 덕촌리), 수성(수성구 상동), 슬곡(달성군 논공읍 씩실)
학문의 연원을 밝히다 ‘이락연원록’
이번엔 서당 이름 ‘이락’에 대해 알아보자. 9문중 11촌 30인의 선비는 세상을 크게 봤다.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에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신유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락’에까지 소급 적용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도통론이란 유가의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오는 계통을 말한다. 시대와 학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도통은 다음과 같다.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주돈이→정호·정이→주자’. 이 중 정호·정이는 형제간으로 정명도·정이천이라고도 하고, 한데 묶어 ‘정자’라고도 한다. 다른 말로는 ‘이락’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이 중국 하남성의 이수와 낙수라는 강 사이에서 학문을 했기 때문이다. 성리학 창시자 주자는 요·순에서 시작해 정자에 이르는 이러한 도통을 이락연원록이란 글로 정리했다.
이락서당의 내력을 밝힌 ‘이락서당기’에는 “달성의 이수는 금호강이요, 낙수는 낙동강이다. 서당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 이락서당이라 명명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은 이락이란 이름이 이락연원록에서 유래됐으며, 공자와 맹자의 학문이 이수와 낙수를 통해 이곳 이락서당까지 그 연원이 이어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락’, 비록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이래서 당호[집의 이름]의 함축성·상징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Tip : 이락서당 창건 225년이 지난 지금도 ‘9문중 11촌 30인’의 후예들은 대를 이어 ‘이락서당계’를 이어가고 있다.
공자의 ‘영귀대’, 맹자의 ‘관란대’
225년 전, 9문중 11촌 30인의 선비는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 요·순에서 정호·정이, 주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도통을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정구·서사원’에까지 연결시켰으니 말이다. 공자와 맹자를 공부한 그들은 이락서당 주변에 공자와 맹자를 상징하는 이름 두 개를 남겼다. 하나는 이락서당 서편 금호강변 깎아지른 절벽에 이름 붙인 ‘관란대(觀瀾臺)’, 다른 하나는 서당 북쪽 궁산 ‘영귀대(詠歸臺)’다. 관란대는 맹자에서 취했고, 영귀대는 논어에서 취했다.
대구광역시 북부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호강은 낙동강 최대 지류로 전체 길이가 118km, 대구를 통과하는 구간도 42km에 이른다. 낙동강이 대구를 지나는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이는 곳으로 두 곳이 있다. 대구 북구 동변동 ‘화담(花潭)’과 달서구 이락서당 서편 ‘관란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동변동 화담은 접근이 쉽지 않아 대구시민들이 잘 알 수 없지만, 관란대는 그렇지 않다. 성서-다사를 잇는 강창교를 건널 때마다 보이는 절경인데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한강 유람단’을 거쳤던 이들은 이제 강창교를 건널 때마다 ‘이락서당’과 ‘관란대’가 저절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3. 옛 선비들이 누렸던 선비문화
‘선비’라는 단어는 참 매력적이다. 선비는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된 사람을 말한다. 때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면 ‘대부’가 되는 것이고, 때를 만나지 못해 시골에 살면 ‘시골 선비’ 이른바 ‘처사’가 된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포함한 단어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대부(士大夫)’다. 선비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즐겼다. 예를 들면 ‘선유문화·구곡문화·누정문화·동천문화·팔경문화·범국회’ 등이다. 이중 ‘한강 유람단’과 관련 있는 것은 ‘선유·구곡·누정·팔경’이다. 이번에는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선비들. 그들이 때를 기다리며 즐겼던 ‘선유·구곡’ 문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선비들의 뱃놀이 ‘선유문화’
선유(船遊)는 글자 그대로 뱃놀이다. 옛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틈틈이 산에서는 ‘유산(遊山)’, 강에서는 ‘선유’를 즐겼다. 그런데 선비들이 즐긴 선유는 일반적인 뱃놀이와는 달랐다. 선비들의 선유는 주로 스승·제자·동문이 함께 즐겼다. 시를 읊고 음주도 즐겼지만, 세속적인 뱃놀이처럼 배에 기생을 태우거나 술을 흥청망청 마시지는 않았다. 동시에 선유에 대한 기록이나 그림을 남겼다는 특징도 있다.
선유문화의 원조는 중국 소동파의 ‘적벽선유’다.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의 ‘풍월담선유’, ‘탁영담선유’, 한강 정구의 ‘용화선유’, ‘봉산욕행’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대구 달성에도 이런 선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유가 있었다. 바로 대구 달성에서 행해진 ‘금호선사선유’와 ‘낙강상화대선유’다. 앞에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한강 선생의 ‘봉산욕행’도 대구 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22년 전 금호강 하류에서 벌인 ‘금호선사선유’
금호선사선유(琴湖仙査船遊)는 ‘금호강변 선사에서 행한 선유’란 뜻이다. 금호강이란 이름은 ‘갈대밭에서 거문고[琴] 소리가 나고 호수[湖]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금호강 유역 중에서도 달성군 다사읍을 지나는 하류 약 2.5km 구간을 특별히 ‘금호’라 부른다. 금호강물이 이 유역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류하는 탓에 유속이 느려지고 수면이 넓어지는 것이 마치 호수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금호선사선유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22년 전인 1601년 3월 23-24일에 행해진 선유다. 한강 선생의 제자로 대구를 대표하는 선비이자 대구 임란 의병장이었던 낙재 서사원.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향인 달성군 이천리 금호강가에 ‘완락재’를 건립했다. 그리고 완락재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23인의 선비가 모였다. 그들이 개최한 선유가 금호선사선유다. 이날 선유에는 좌장 서사원을 비롯해 감호 여대로, 여헌 장현광 등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학파 선비들이 중심이었다.
지난 1992년, ‘금호선사선유도’란 시서화가 세상에 나타났다. 금호선사선유를 한 폭 한지에다 시·서·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선유가 있은 지 232년 후인 1833년 난파 조형규라는 화가가 완성한 작품이었다. ‘금호선사선유도’를 보면 상단에 제목 ‘금호선사선유도’가 있고, 그 아래에 참석자 23인 명단이 있으며, 명단 아래에 성명의 주인이 지은 시가 있다. 그 아래에 금호선사선유를 묘사한 그림이 있으며, 맨 아래에 금호선사선유의 내력을 적은 서문이 있다.
422년 전 금호선사선유가 열렸던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배가 출발한 곳은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이천삼거리 일대로 지금의 대구외곽4차순환선 다사 ic와 북다사 ic 중간쯤이다. 이곳에서 출발한 배는 금호강을 따라 하류로 이동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금의 디아크가 있는 강정유원지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이천리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금호선사선유는 보통의 선유와는 달리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선유였다. 임진왜란 때 지역 의병장 등으로 맹활약했던 대구 선비들. 그들이 스승 낙재 서사원의 완락재 낙성을 축하함과 동시에 이를 계기로 대구 문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다짐하는 회합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문을 하는 선비답게 선유 제목을 창대하게 뽑았다. ‘거문고 소리 들리는 금호에서 전설 속 신선 뗏목을 타다’. 전쟁 직후 힘든 시기였지만 스승·제자·동문과 함께 했던 선유만은 모든 것을 잊고 선사를 타고 하늘과 강을 오가는 신선놀음을 꿈꿨던 모양이다. 선유에 참석한 23인의 선비는 주자의 시 「무이정사잡영」 중 ‘어정시’를 차운해 시를 지었다.
중류에서 가는 대로 배를 맡기니, 저 하늘을 나는 신선 같아라
[금호선사선유시 마지막 구절, 반학헌 김극명(당시 최연소 21세)]
Tip : ‘선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타는 뗏목이며, 다른 하나는 예전 이곳에 있었던 선사암·선사재를 말한다. ‘한강 유람단’ 일정 중, 이락서당에서 사양정사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금호선사선유의 배경이 됐던 금호강 일부를 조망할 수 있다.
124년 전 화원동산 상화대에서 벌인 ‘낙강상화대선유’
‘낙강상화대선유(洛江賞花臺船遊)’는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99년 초여름. 대구 선비 80여 명이 모여 지금의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상화대 아래 낙동강에서 벌인 선유다.[상화대는 화원동산 낙동강변에 접해있는 바위벼랑이다] ‘낙강상화대선유’는 낮에는 상화대에서 시를 짓는 시회를 열고, 선유는 밤에 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낮에 열린 시회에는 모두 92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날 참석자는 임재 서찬규를 좌장으로 서우곤·서영곤·서갑수·우성규·우세동·이종기·이억상·최시술·박승동 등 달성서씨 문중원과 서찬규의 사우·제자들이 중심이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야말로 조선말 대구를 대표하는 선비들이 총 망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호선사선유를 시·서·화로 표현한 ‘금호선사선유도’가 있듯이 ‘낙강상화대선유’도 그림에다 기록을 더한 서화로 남아 있다. 선유에 참석한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이 그린 서화 두 점이다. 이 서화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4년 전 작품으로 100여 년 전 상화대와 선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그림은 가운데 두 채의 집[본래 이곳에는 금강정과 오류정이란 정자가 있었다]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동강, 우측에 바위 절벽으로 묘사된 상화대가 있다. 그림 속 낙동강에는 작게 표현된 몇 척의 배 사이로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된 배가 한 척 있다. 낙강선유를 즐기는 배다. 이 배에는 10여 명의 선비가 타고 있는데 한 선비가 손을 번쩍 들어 상화대를 가리키는 것이 마치 상화대 해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뱃머리에는 술이나 차를 담은 항아리도 보인다. 강변 쪽에는 돛을 내린 배가 몇 척 정박하고 있는데 아마도 사문진 나루인 것 같다.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도 보이는데 금호강, 진천천, 대명천, 천내천, 기세곡천 중 하나일 것이다.[그림 우측 하단에 연암(淵巖)이 보인다.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기세곡천 하류에 있는 바위로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또 몇 채의 집이 모여 있는 마을도 보인다. 상화대 인근 지금의 화원읍 성산리 아니면 구라리인 것 같다.
선비, 아홉 굽이 경승을 경영하다 ‘구곡문화’
구곡문화는 옛 선비들이 누렸던 문화로 같은 물줄기를 끼고 있으면서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 아홉 곳을 선정해 즐겼던 문화다. 과거 대구에 존재했던 구곡은 현재까지 6-7개 정도가 확인된다. 이중 연구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확인 과정을 거친 구곡은 4개다. ‘운림구곡’, ‘와룡산구곡’, ‘농연구곡’, ‘수남구곡’이다. 이중 ‘한강 유람단’과 관련 있는 구곡은 화원동산 상화대에서 대구 북구 사양정사에 이르는 ‘운림구곡’과 사양정사에서 달성군 매곡리 청천에 이르는 ‘와룡산구곡’이다.
Tip : 농연구곡은 팔공산 용수동에서 부인사 아래 신무동에 이르는 용수천 일대, ‘수남구곡’은 가창면 한천에서 백록동에 이르는 신천 상류 일대다.
사문진에서 사양정사까지 ‘운림구곡’
운림구곡(雲林九曲)은 조선 후기 대구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였던 경도재(景陶齋) 우성규[禹成圭·1830-1905]가 설정하고 경영한 구곡이다. 선생은 낙동강·금호강·진천천·대명천이 만나는 사문진에서 대구 북구 사수동까지 금호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곡을 설정했다. 그는 진천천[우성규], 금호강[한강 정구], 낙동강[이황] 물줄기를 따라 자신의 학문적 뿌리이자 이상인 정구와 이황을 연결 짓고 그 감회를 구곡시에 담았다. ‘운림’은 지금의 경북 칠곡군 지천면 웃갓[신동·상지] 마을의 옛 이름이다. 웃갓은 한강 선생을 기리는 사양서당[옛 사양서원]이 있는 곳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이언천’이 다사읍 박곡리 해랑교 북쪽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운림구곡은 전체 구간이 약 16km다.
○ 제1곡 용산(龍山)
화원동산 상화대 일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왕이 꽃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란 뜻에서 상화대라 이름 짓고, 아홉 번이나 왕래해 ‘구래·구라’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화원’도 꽃동산이란 뜻이다. 이 지역은 1899년 ‘낙강상화대선유’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 제2곡 어대(漁臺)
진천천이 금호강·낙동강과 합수하는 구라리 제방 끝에 있는 벼랑이다.[현 달성습지생태학습관 북동쪽] 진천천은 대구 앞산 달비골에서 시작해 우성규의 고향인 상인동 월촌과 진천동을 지나 어대 인근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우성규는 진천천이 금호강·낙동강과 만나는 어대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연원이 정구[금호강], 이황[낙동강]과 맞닿아 있음을 표현했다.
○ 제3곡 송정(松亭)
달성습지와 대명유수지 일원이다. 지금은 금호강 제방과 성서산업단지 조성으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이 지역은 큰비만 오면 지금의 성서 일대까지 모두 물에 잠기는 상습침수지역으로 ‘살미들’이라 불렸다. 산업단지 조성 이전만 해도 이곳에는 퉁두꼬·우뚬·잘래기·알뜸·등거티 등의 낮은 언덕이 이어져 있었다. 이 중 가장 높은 언덕이 ‘개상덤’인데 지금의 성서체육공원 내에 있는 언덕이다. 개상덤에는 지금도 당산나무가 있다. 송정은 이들 언덕 중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제4곡 오곡(梧谷)
성서공단 금호강변이다. 4곡을 읊은 시 첫 구절에 ‘사곡이라 외로운 오동 바위 곁에서’라는 표현이 있다. 아마도 130여 년 전 우성규 생존 시만 해도 이 인근에 오동나무 숲과 큰 바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 제5곡 강정(江亭)
디아크와 강정보가 자리한 죽곡리 강정마을 인근이다. 강정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유서 깊은 정자 부강정(浮江亭)에서 유래됐다. 이 일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신라시대 때 왕이 찾아와 노닐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강정은 다사팔경 중 하나인 ‘강정유림’으로도 유명했고, ‘서호병십곡’에서도 제1곡으로 다뤘다. 하지만 아쉽게도 부강정은 임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병자호란 이후 사라져 지금은 없다.
○ 제6곡 연재(淵齋)
강창교 대구 쪽 북편 산기슭에 있는 이락서당(伊洛書堂)이다. 이락서당 서편 금호강변에 ‘관란대’라 불리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다. 절벽 아래에 깊은 못[소]이 있고 그 위에 이락서당이 있어 연재라 칭한 듯하다.
○ 제7곡 선사(仙査)
다사에서 하빈으로 넘어가는 마천산 고개 초입 이천삼거리 일원이다. 이곳에는 과거 신라시대 때 창건한 고찰 선사암이 있었다. 선사암은 난가대·세연지 같은 고운 최치원 유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공간이었던 선사암은 유교공간인 선사재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일설에는 선사재 자리에 세운 것이 지금의 이강서원이라고도 한다] 1601년(선조 34) 서사원을 비롯한 선비 23인의 뱃놀이인 ‘금호선사선유’의 배경이기도 하다.
○ 제8곡 봉암(鳳巖)
해랑교와 맞닿아 있는 와룡산 용머리 일원이다. ‘U’ 형인 와룡산 안쪽 방천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0년 내력 문화류씨 세거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세거지가 있던 자리에 대구시위생매립장이 들어서 있다. 과거 방천리 앞 금호강변 넓은 백사장과 밤나무 숲은 대구시민의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 제9곡 사양서당(泗陽書堂)
사수동 한강근린공원에 있는 사양정사다. 사양정사는 한강 선생의 마지막 강학소이자 선생이 운명했던 곳이다. 2014년 사수동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될 때 섬뫼숲 일대를 한강 선생을 기리는 한강근린공원으로 조성하고 숲 정상부에 사양정사를 복원했다.
와룡산에서 금호강을 내려다보며 ‘와룡산구곡’
와룡산구곡(臥龍山九曲)은 근대 인물인 학암(鶴菴) 신성섭[申聖燮·1882-1959]이 설정하고 경영했던 구곡이다. 와룡산구곡은 제1곡 사수에서 시작해 금호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제9곡 청천에서 끝나는 약 7.5km 구간이다. 와룡산 구곡 아홉 굽이는 굳이 배를 타거나 일일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 와룡산 용머리 정상에 오르면 구곡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룡산구곡은 앞서 살펴본 운림구곡과 일부 중첩된다. 신성섭은 와룡산 구곡을 통해 한강 선생의 학문이 금호강을 따라 대구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음을 표현하고 있다.
○ 제1곡 사수(泗水)
대구 북구 사수동이다. 운림구곡 제9곡 사양서당과 같은 공간이다. 대부분 구곡은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설정된다. 그런데 와룡산구곡은 반대다.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설정되어 있다. 제1곡을 한강 선생 유적인 사수로 설정한 것은 한강 선생의 학문이 금호강을 따라 대구 전 지역으로 전파됐음을 나타낸 것이다.
○ 제2곡 송도(松濤)
사수에서 해랑교 방향 경부선 철도 교량 북쪽에 있는 언덕이다. 송도라 이름 한 것은 언덕 위 푸른 소나무 숲과 그 아래로 급하게 꺾어 흐르는 금호강 물결을 함께 이른 것이다. 한강 선생이 금호강을 내려다보며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이치를 살폈다는 관어대가 이곳에 있다.
○ 제3곡 해랑(海娘)
다사읍 방천리와 박곡리를 잇는 해랑교 일원이다. 지역민들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옛 징검다리를 ‘도깨비 다리’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해랑어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한 여인이 외동딸 해랑을 데리고 이곳 박곡리에 들어와 주막을 열었다. 해랑이 자라 출가한 뒤 해랑 어멈은 강 건너 홀아비와 사랑을 나눴다. 밤마다 사람의 눈을 피해 금호강을 건너는 해랑 어멈과 홀아비를 위해, 해랑 부부는 남몰래 며칠 밤에 걸쳐 돌다리를 놓았다. 주민들은 갑자기 생겨난 이 다리를 도깨비들이 놓은 것이라고 도깨비 다리라 불렀다. 해랑교를 건너 박곡리로 가다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이 해랑마을[해랑포]이다.
○ 제4곡 용두(龍頭)
방천리 와룡산 용머리 일원으로 운림구곡 제8곡 봉암과 같은 지역이다. 용두 정상에 오르면 와룡산을 휘감는 금호강을 포함해 와룡산구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와룡이란 산 이름은 옛날 이곳 옥연(玉淵)이라는 연못에 살았던 용 전설에서 유래됐다. 옥연에 살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 여인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 때문에 승천하지 못한 용이 땅에 내려앉아 와룡산이 됐다는 전설이다.
○ 제5곡 학림(鶴林)
박곡리와 서재리 금호강변이다. 학림은 푸른 소나무 숲에 한 무리 학이 내려앉아 깃든 것을 말한다. 아마도 금호강까지 산줄기가 이어지는 박곡리 앞산, 혹은 서재1리 동산 북쪽 끝자락이 아닐까 싶다. 동래정씨 집성촌 박곡리에는 학과 벗한다는 ‘학우재(鶴友齋)’, 성주도씨 집성촌 서재리에는 용호서원·치경당 등이 있다.
○ 제6곡 계월(溪月)
달천리와 세천리 금호강변이다. 세천산업단지 조성으로 옛 모습은 사라졌다. 다행히 세천리 금호강변에 가지암(可止巖)이라 불리는 바위 벼랑은 일부 남아 있다.[봉산욕행 때 한강 선생 일행이 배에 올랐던 지암이 바로 이곳이다] 청주양씨 집성촌 달천리에는 묵정재, 능성구씨·김녕김씨 집성촌인 세천리에는 금회영각 등이 있다.
○ 제7곡 백석탄(白石灘)
이천리와 세천리 사이 금호강변이다. 동에서 서로 흐르던 금호강이 거의 90도 각도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이다. 지형 특성상 물살의 공격을 받는 이천리 쪽에 바위벼랑과 물돌이가 이는 큰 여울이 있었고, 백석탄이라 이름한 것을 보니 당시 바위벼랑이 흰빛이었던 모양이다. 이천리에는 추계추씨 문중 경로재·고동재·영사각과 달성서씨 문중 이강서원·앙모재 등이 있다.
○ 제8곡 선사(仙査)
다사에서 하빈으로 넘어가는 이천삼거리 일원으로 ‘운림구곡’ 제7곡 선사와 중복되는 지점이다. 최치원 유적인 선사암과 임하 정사철의 선사재가 있었던 곳이다. 1601년(선조 34) 서사원을 비롯한 선비 23인의 뱃놀이인 ‘금호선사선유’의 배경이기도 하다.
○ 제9곡 청천(晴川)
세천리와 매곡리 사이 금호강변으로 세천교 인근쯤 된다. 와룡산 용두에서 바라보았을 때 금호강물이 궁산 뒤로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부분이다. 와룡산 구곡시에는 ‘와룡이 여의주를 얻었다면 9만리를 마음대로 올랐을 것을’로 끝이 난다. 신성섭이 스스로를 승천하지 못한 와룡에 빗댄 듯 아쉬움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