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상동(上洞), 수성들 위쪽 마을
개관
행정동이자 법정동인 상동은 1394년 수성현에서 대구현에 편입되어, 조선시대 때 대구부 수현내면(守縣內面)에 속했다. 1914년 달성군 수성면에 속했다가 1937년 다시 대구부에 편입됐다. 1963년 동구 상동이었다가, 1980년 수성구 상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봉덕동과 인접하고 있다. 상동은 약 500년 전 신천변 수성들에 형성된 농막촌으로 마을 개척 당시 진씨(秦氏)와 손씨(孫氏)가 많이 살았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지금의 수성로를 중심으로 신천 쪽에만 마을이 있고 동쪽은 집 한 채 없이 수성들만 펼쳐져 있다. 1970-80년대 이르러 수성로 동쪽 수성들이 개발돼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발전했으며, 서편은 한동안 예전 전통마을을 유지했다.
대구부읍지(1899) 방리조(坊里條)에 “수현내(守縣內)는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소속된 동이 셋이니, 상동·중동·하동이다”는 내용이 보인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넓은 수성들 가운데 남북으로 나 있는 들안길과 신천 사이에 약 130호 민가가 모여 있는 옛 상동이 보이며, 마을 북쪽에 옛 수성초등학교도 보인다. 상동교 남쪽에 있는 화성양로원(상동 667-40)은 영락양로원(서구 상리동)과 함께 대구에서 최초로 설립된 양로원이다. 문화유산으로는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야수정, 상동지석묘, 봉산서원 등이 있다. 지금의 상동교는 1994년 준공됐다.
지명 유래
상동이란 지명은 수성들 위쪽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며, 다른 말로 ‘웃골’, ‘위동’, 한자로는 ‘상촌(上村)’, ‘상동’이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 에는 상동의 지명으로 용두진(龍頭津·용두나루), 당상평(堂上坪·당말리들), 행광평(行光坪·행괭이들), 성남평(城南坪·성남들), 대천평(大泉坪·한들), 신당평(新堂坪·신당말리), 용두천(龍頭川·용두거렁), 지광정천(地廣亭川·지광정거렁), 지천(知川·지인덜거렁), 개불천(介佛川·개불거렁), 하주막(下酒幕·아래주막), 윤감사비(尹監司碑), 류보(柳洑), 덕보(德洑) 등이 등재되어 있다. 용두진은 우기에는 신천을 통한 수로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지금의 상동교처럼 신천 동서를 잇는 역할을 했던 나루로 보인다. 봄과 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가을과 겨울에는 다리를 설치했던 것 같다.
들안길, 먹거리골목
본래 들안길은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 너머까지 수성들을 가로지르는 약 4km 이르는 직선 길이다. 수성들 안쪽 한 가운데 나 있는 길이란 뜻에서 들안길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들안로로 불린다. 1970년대까지 들안로 주변은 민가 없이 오직 수성들만 있었고,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도시화가 시작됐다. 당시 수성못둑을 시작으로 들안길 인근까지 간이식당이나 선술집 등이 밀집해 포장마차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들안길 인근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속속 들어서면서 식당이 급속도로 늘어났고, 1990년대 ‘토지초과이득세’135) 도입으로 들안길에 본격적으로 대형 식당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대구시민들이 말하는 들안길은 ‘들안길 먹거리 골목’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 들안길 중 상동에 있는 들안길을 말한다.
135) 토지초과이득세는 건물을 짓지 않는 토지에 많은 세금을 물리는 제도였다. 이런 이유로 들안길 지주들은 건물을 지어 세금을 적게 내려 했고, 이에 주차장을 갖춘 넓은 식당이 필요한 식당업주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들안길 식당가가 형성됐다.
봉산서원(鳳山書院)과 일직 손씨(一直孫氏)
봉산서원은 수성구 상동(수성로 12길70) 주택가에 자리한 서원으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봉산서원은 조선 중기 대구 출신 문신이자 유학자인 문탄(聞灘) 손린(孫遴·1566-1628)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다. 손린은 세 차례 향시(鄕試·지방에서 치는 과거시험)에 장원을 하고 문과에 합격해 여러 벼슬을 지냈다. 하지만 광해군 때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한 정인홍에 맞서다 파직되어 고향 대구로 낙향, 이후 10년 동안 선비 명단인 ‘유안(儒案)’에서 이름이 삭제됐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길이 열렸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선비로서의 절도를 지켰다. 정묘호란 때는 의병장도 지냈다.
봉산서원은 손린이 살아 있을 때 수성구 상동에 건립한 봉산재(鳳山齋)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1766년(영조 42) 손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세워졌다. 1799년(정조 23) 사당을 금봉산(金鳳山·고산골, 효성타운 인근) 아래로 이건하고 봉암사(鳳巖祠)라 이름했다. 1844년(헌종 10) 봉암사를 봉산서원으로 승격시켰으나, 1864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1967년 경모재(敬慕齋)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가 199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봉산서원이 됐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북쪽에 강당 지행당(砥行堂), 동쪽에 사당 봉암사, 서쪽에 재실 송독재(誦讀齋), 남쪽에 솟을대문 지행문(砥行門)과 ‘문탄손선생유허비’가 있다. 대구부읍지(1899) 학교조에 “봉암사(鳳巖祠)는 대구부 남쪽 10리 하수서에 있다. 정조 기미년(1799)에 사우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동 은행나무
범어동 ‘은행나무’ 참고.
상동 지석묘(고인돌)군, 상동 청동기 마을
대구를 동서로 나누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신천변은 선사시대 유적의 보고다. 특히 과거 수성구 상동 지역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지석묘가 많았다. 하지만 1980년대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동 지석묘 중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다. 크게 세 곳인데 수성못 서쪽에 있는 ‘상동지석묘군’(대구시기념물), 정화우방팔레스아파트(옛 정화여고) 옆 ‘상동 청동기 마을’(수성구 향토문화유산), 달서구 두류공원 내 대구문화예술회관 정원이다. 이 세 곳에 있는 지석묘는 모두 과거 상동에 있었던 것들이다. 특히 수성못 서편 지석묘군은 대구지역 최초로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발견된 곳으로 대구의 신석기 문화를 처음 알린 곳이기도 하다. 1954년 항공사진에 상동, 중동, 하동으로 이어지는 수성들에 수십 기가 넘는 지석묘가 보인다.
수성들·한들
수성들은 수성구 상동·중동·하동(수성동)에 걸쳐 있는 넓은 들판 이름이다. 신천·범어천·수성못 등을 수원으로 하는 수성들은 물이 좋고 땅이 넓고 기름져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아온 곳이다. 과거 수성들에는 신천을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지석묘군(고인돌)을 들 수 있다. 수성들은 다른 말로 들이 크고 넓어 '한들'이라고도 불렀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 너머에 이르는 신천과 범어천 사이는 신천변에만 상동·중동·하동(수성동) 마을이 있고, 나머지는 오직 들만 펼쳐져 있다. 당시 수성들은 남북 약 4km, 동서 약 1.5km에 이르는 광대한 들판이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수성들에 대해 “과거 수성면 시대에 수성면의 제일 큰 들이라 하여 수성들이라고 불러왔으며 수성못의 몽리 지구는 500여 정보(150만 평)에 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수성동 수성들’ 사진 참조)
신천(新川)
대구 역사는 신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천 발원지는 두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정산 자락에서 발원해 우록동을 관통하는 물줄기가 신천 본류이며, 비슬산 북동쪽에서 발원해 가창댐으로 흘러드는 용계천이 지류다. 두 물줄기는 용계리 가창교 남쪽에서 합류, 대구를 동서로 양분하며 북쪽으로 흘러 북구 침산동·산격동 일대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전체 길이 약 28km136)에 이르는 신천 주변에는 선사시대 이후 이 지역을 살다 간 이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 신천 바닥에는 1억만년 전 공룡이 남긴 공룡발자국도 남아 있다.(동신교 남쪽) 대구부읍지(1899)에는 신천에 대해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한 근원은 팔조령에서 나오고, 한 근원은 최정산에서 나온다. 사방산(四方山·가창댐 둑 북쪽) 앞에서 합류해 금호강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신천 물길을 두고 최근까지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다. 본래 신천 물길은 지금과는 달리 건들바위 네거리-반월당-달성공원 앞으로 흘렀다는 주장과 신천 물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란은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됐다. 2017년 대구시에서 (사)한국지역지리학회에 용역 의뢰한 결과 “신천 물길은 청동기시대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현재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두 주장 중 전자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잘못된 보고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천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최근까지 여러 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천이 대구부와 수성현 사이를 흘러 ‘사이천’, ‘새천’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할 때 음을 빌려 ‘새로울 신(新)’ 신천이 됐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37) 오래전부터 ‘이공제 향사’에서 불렸던 ‘이서공 격양가’에는 “새로 내어 신천”이란 가사가 보인다. 한편 상동 이공제비각에 있는 ‘군수이범선비’에는 신천을 동천(東川)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신천에 대해 “확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대구 성책 당시 성내에 합류하는 각계급 또는 배수구를 통합하여 딴 곳으로 합류토록 하였으므로 신성천(新成川) 또는 새내라고 부르다가 그 후 신천으로 불리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6) 상동교-침산교에 이르는 도심권 통과 구간은 약 12km.
137)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천숲(新川藪)
대구부읍지(1899) 임수조(林藪條)에 “신천숲은 대구부 동쪽 5리 하수서면과 동상면에 있다. 길이는 10여 리다. 영조 무술년에 판관 이서(李漵)가 신천 범람으로부터 읍기(邑基·도심)를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고종 무진년(1868)138)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우고 이공제라 하였다.”란 기록이 보인다. 지금의 봉덕동-이천동-대봉동으로 이어지는 신천 서쪽 제방 위에 조성된 숲이다.
138) 순조 무진년(1808)의 오기로 보인다. 이공제비는 지금까지 모두 3기가 조성됐다. 처음 조성된 1778년(정조 1) 비는 사라졌고, 1797년(정조 21)과 1808년(순조 8) 조성한 2기는 수성구 상동 이서공원 내 이공제비각에 있다.
신천언(新川堰)
조선 후기 조성된 신천 제방을 말한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신천언은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정조 무술년(1778)에 판관 이서(李漵)가 향교터와 읍터에 홍수 염려가 있어 신천 일대에 높이 약 2척, 길이 10여 리로 제방을 쌓았다. 제방 위에 언홍정(堰虹亭)을 만들었는데 신축년(1781)에 바람을 만나 쓰러져 버렸다. 무진년(1808)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우고 이공제(李公隄)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비석은 현재 상동교 옆 이공제비각(李公隄碑閣) 내에 있다.
참고로 이서가 세웠다는 정자 언홍정 위치는 지금의 봉덕동 래미안 웰리스트 아파트(봉덕동1631, 1632) 일대로 추정된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지금의 상동교에서 동신교까지 이어지는 신천 좌우는 모두 평지다. 다만 래미안 아파트가 자리한 곳만 독산(獨山) 형태로 작은 구릉(고도 약 72m)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상동교에서 동신교까지 이어졌던 옛 이공제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곳에 상동보가 있어 물이 많았고, 제1·2용두암이 있는 등 신천 일대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욱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야수정(倻叟亭)
야수정(상동 140-4)은 수성구 상동에 있는 진씨(秦氏) 문중 재실로 대구시문화유산자료다. 고종 때 군수를 지낸 야수(倻叟) 진경환(秦京煥) 선생이 1900년경 건립한 정자 겸 재실이다. 야수정은 한국과 일본 양국 건축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최초 건립 당시 야수정은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을 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었다. 후일 개인 살림집으로 사용되면서 뒷부분 전체를 반 칸 정도 증축해 현재는 겹집의 형태를 보인다.
본래 건물의 평면구성은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1칸 방, 2칸 대청, 1칸 방, 1칸 마루였다. 나중에 뒤쪽으로 2칸과 1칸 방을 증축해 형태가 변했다. 앞쪽에 설치된 반 칸 규모의 툇간은 방과 대청을 자유롭게 연결해 실내 동선을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건물 아랫부분에 적벽돌을 쌓고, 장마루를 깔았으며, 방과 마루 앞쪽 창호는 대부분 유리를 끼운 미서기문이다. 천장도 일본식 천장인 우물반자 천장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20세기 초에 새롭게 등장한 건축양식으로 우리 전통 건축양식이 일본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 변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1954년 항공사진에도 논밭 가운데 방형 울타리에 둘러싸인 야수정이 보인다. 주변 민가들과는 달리 야수정은 경내에 무성한 나무 등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다.
이공제 비각(李公隄碑閣)
이공제 비각은 수성구 상동교 북동쪽 신천변 이서공원 내에 있다.(상동 182-3) 비각 내 3기의 비는 대구시유형문화유산이다. 이서(李漵,1776-1778)는 조선 후기 정조 때 대구 판관을 지낸 인물로, 1778년(정조 2) 신천에 제방을 쌓아 수해로부터 대구 도심을 지켜낸 명판관이다. 당시 대구부민들은 이서가 쌓은 제방을 중국 송나라 소식이 축조한 ‘소공제’에 빗대 ‘이공제(李公隄)’라 부르고, 순차적으로 이서의 공을 칭송하는 3기의 ‘이공제비’를 세웠다. 1778년 처음 세운 비는 사라졌고, 지금은 1797년(정조 21), 1808년(순조 8)에 세운 2기만 남아 있다. 본래 비각은 수성교 옆 방천시장 제방 위에 있었는데 2000년 9월 현 위치로 옮겼다.
현재 비각 안에는 이공제비 2기와 군수 이범선 불망비 1기가 있다. 이 중 이공제비 2기는 둘 다 한 때 사라졌다 다시 찾은 사연이 있다. 정면에서 봤을 때 맨 왼쪽에 있는 비는 1797년에 세운 비다. 이 비는 오랜 세월 옛 대봉동사무소 뒤 하수구에 두 동강 난 상태로 버려져 있다가, 1972년 수성동 주민 조태조 여사(당시 36세, 수성2가 273-5번지 거주)의 기도 덕분에 세상에 다시 나타날 수 있었다. 2010년 이공제 향사 때 조태조 여사가 이공제비를 찾게 된 사연을 편지지 5장에 자필로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현재 수성문화원에 남아 있다. 자필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조태조는 기도를 통해 비석 어른(이서)으로부터 “내가 동사무소 뒤 하수구에 묻혀있으니 나를 찾아 다시 제사를 모셔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조 여사는 실제로 동사무소 뒤에서 조각난 비석139)을 찾아냈고, 철끈으로 엮어 보수한 후 예전처럼 다시 제사를 모셨다. 이전에는 배병만 씨가 제사를 모셨고, 비석을 되찾은 이후부터는 우호영씨가 맡았다. 당시 우호영140) 씨가 제사 때 불렀던 소리가 있었는데, 나중에 덕수 이씨 문중에서 가사를 일부 각색했다. 이후 어느 때인가 이 소리에 ‘이서공 격양가’란 제목을 붙였다.
이서공 격양가 가사는 현존하는 2기의 비문을 모두 참고해 작사한 것이다. 총 603자로 구성된 짧은 가사지만 가창에서 발원해 대구를 관통하는 신천 물줄기 흐름, 대구 읍성 구조, 신천 범람 피해, 제방축조 과정, 공사관계자 명단 등이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서공 격양가
정월이라 보름날에 쾌지나 칭칭나네 판관이공 신위전에 격양가를 불러주세 / 대구젖줄 신천물이 가창정대 발원하야 용계동에 모여들어 용두방천 감아돌아 / 건들바위 굽이굽이 남문앞을 돌아흘러 동산앞에 부디쳐서 달성성곽 옆을따라 / 달서천에 달라더니 사대문안 낮은지대 비만오면 물바다라 사대문은 어디멘고 / 남문이층 낙서루요 동편에는 진-동문 서편에는 달-서문 북쪽에는 공-북문 / 성의둘레 2124보 스물네측 높은성곽 경상감영 공자사당 물에잠겨 가옥침수 / 물에잠겨 전답수몰 백성들에 애환속에 수천년을 지냈구나 / 판관이후 도임하여 백성고충 살필적에 치수공사 해야하나 관아창고 비었으니 / 경비염출 어이할꼬 노심초사 판관이후 손출천금 내어놓고 경시방제 설계하니 / 고을백성 모여들어 어기영차 가래질로 흙을파서 도랑내고 방구구불러 뚝을쌓고 / 물길도려 신천내니 장하고도 장하도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무지개같이 굽은내를 / 한일자로 곧게하여 새로내어 신천이라 백성들이 감읍하야 방천이름 이공제라 / 항주자사 소동파가 서호에다 뚝을쌓아 소공제라 하였더니 판관이후 쌓은뚝을 / 이공제라 하였구나 이공제비 높이세워 자손만대 기리고자 비석돌을 세울적에 / 도감역에 라성휘요 도유사에 오-명복 공임에는 김치황등 도목수는 김성옥이요 / 석수는 김-석추 각수는 김복수라 허유면이 글을쓰고 열두살난 이학철이 / 전면대사 크게써서 무진오윌 세웠구나 군수이후 치적있어 이공제비 옆에다가 / 영세불망 비를세워 두분같이 모셔두고 정월이라 대보름날 제를올려 칭송하네 / 우리대구 무궁발전 국태민안 하여주소 쾌지나- -칭- - 칭 나 - - 네- - - - -”
한편 1808년(순조 8) 조성한 가운데 있는 이공제비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 비 역시 한동안 사라졌다가 1987년 신천대로 공사 때 수성교 서쪽 땅속에서 발견됐다. 또한 비 앞면에 새겨진 ‘李公隄’ 세 글자가 당시 ‘12세 이학철(李鶴喆)’이라는 어린이가 썼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비 뒷면에 새겨진 ‘前面大字十二歲李鶴喆書(전면대자12세이학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정월 대보름날 이공제 비각에서는 이서공 향사가 봉행된다. 언제부터 향사를 지냈는지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이공제 비각이 방천시장 제방 위에 있었던 1990년대까지는 방천시장 상인들에 의해 정월대보름날 행해졌으며, 2000년 9월 비각이 현 위치로 옮겨지고 몇 년 후부터 수성문화원에서 주관하고 있다.
139) 현존하는 이공제비는 2기(1797년, 1808년)인데 이때 발견된 비는 1797년 조성된 비다.
140) 조태조 여사 기록에는 ‘우호영’, 덕수 이씨 문중 기록에는 ‘우호이’로 되어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