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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을 넘게 이곳을 다녀가도 직소폭포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산정호수는 매번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 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천양희 시 <직소포에 들다> 가운데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직소폭포까지는 2.2km, 왕복 4.4km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쉬이 다녀올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의 풍광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선인봉, 실상사 터, 봉래구곡, 산정호수, 선녀탕, 분옥담 등 폭포로 가는 길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는 비경의 연속이다.
이 산길이 다소 짧다고 여겨진다면 재백이 고개를 넘어 내소사로 가거나 월명암을 올라 남여치까지 이르는 길을 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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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 선생의 유허지와 우동리 당산
이 일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이 20여 년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던 장소로, 우리 나라 실학의 태동지라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이다.
당산나무가 거룩한 우동리는 반계 유형원이 살던 곳이라 하여 반계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유형원의 아호인 반계는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물이름에서 딴 것이며, 마을 이름도 예전에는 우반동이었으나 일제 때 우동리로 되었다고 한다. 지금 당산나무가 있는 주변 논 사이에 선생의 집터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고, 냇물 건너 맞은편 산기슭에 그가 공부를 하며 『반계수록』을 썼다는 집이 있다.
반계 유형원(1622~1673)은 조선 효종, 현종 때에 산 실학의 선구자다. 원래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랑을 지냈고 아버지는 검열을 지냈으나 그가 두 살 때 아버지는 죽고 북인 계열인 할아버지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몰락했다. 15살 때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과 함께 원주로 피난길을 떠났다가 암담한 나라의 현실과 비참한 민중의 생활을 목격했다. 피난 생활이 끝나자 그의 할아버지는 정계와 발을 끊고 부안으로 낙향했다. 반계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현실을 몸소 겪은 후 효종4년(1653)에 그의 9대조인 유관(柳寬)의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하사한 땅)가 있던 이 곳 우반동에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조부가 터를 닦아놓은 이곳으로 낙향, 우반동 송대 밑 대숲에 자리 잡은 집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만 권의 책에 묻혀 평생 야인으로 지내며 학문에 전념했다.
1670년, 저술을 시작한 지 근 20년 만에 토지 문제, 관리의 문제, 군대 문제, 그 밖에 여러 가지 국가 당면과제에 관해 서술한 『반계수록』26권을 완성했다.
이 저서에는 그의 사상과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개혁하고 부국(富國)․부민(富民)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 건설 방안이 주된 내용으로 담겨 있다. 반계선생의 개혁사상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鄭若鏞), 이재(滯齋) 황윤석(黃胤錫)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동리 당산
보안면 우동리 마을 입구에는 수령 300여 년쯤 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 둥지 속에는 높이 2.46m 되는 입석이 안기듯 박혀 있는데 원래 나무 옆에 세운 입석이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 둥지 안으로 파고 든 특이한 형상이다.
그 입석과 나란히 7m 높이의 솟대(이 지방에서는 '짐대'라고 부른다)가 서있다. 솟대 위에는 오리가 앉아 있고, 잘게 자른 대나무 가닥들을 달아 깃을 표현했다. 그리고 솟대 아래 밑둥에는 줄다리기 줄을 감아 놓았다.
이렇듯 원형이 잘 보존된 우동리 당산제는 정월대보름날 온 마을 사람들에 의해 축제분위기 속에서 치뤄진다. 당산제 순서는 줄다리기 줄을 꼬아 만들고, 돈 후, 남․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고 짐대옷입히기(용줄감기) 순으로 진행한다.
내소사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 아래에 위치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았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고종 때 관해선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통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내소사만이 남아 있다.
소래사였던 이름이 언제부터 내소사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당연합 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 절에 들러 시주했기 때문에 소래사가 내소사로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은 없다. 성종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소래사라고 적혀 있으므로 내소사로 된 것은 그 후의 일일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600m 가량이 전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잘 자라 터널을 이룬 전나무 아래로는 드문드문 산죽이 깔려 더욱 청신하다. 침엽수 특유의 맑은 향을 맡으며 이 길을 걷는 동안 웬만큼 속이 시끄러운 사람이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듯하다.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마음의 먼지를 떨고 부처의 세계로 가는 마음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만큼이라들 하는데, 이 길이야말로 그 말을 실감하게 한다. 천왕문 바로 앞에는 잠시 단풍길이 이어진다. 단풍나무가 시작되는 곳에서 길은 왼쪽으로 조금 깎이고, 되돌아보면 일주문도 전나무 숲길에서 약간 비스듬히 앉았다. 이 작은 꺾임들이 있음으로 해서 길은 몇 배나 더 그윽해졌다. 전나무길을 거의 다 벗어난 곳 왼쪽 기슭에는 부도전이 있다.
사람들은 안의 것과 밖의 것을 가르고 밖의 것을 밀쳐내려고 담을 쌓곤 하지만, 내소사 천왕문 좌우의 야트막한 돌담은 단절감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끌어안음을 느끼게 한다. 절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진다. 두 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만나게 되는 수령 950년 된 나무는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문 바로 밖에 선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짝을 이룬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중흥하면서 칠성각, 산신각 등 민간신앙들이 절 안으로 끌여들여지지만 당산나무까지 들어온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독경을 하며 입암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
입구의 전나무 숲길과 천왕문 좌우의 얕은 돌담, 대웅보전의 꽃살문이 아름다운 내소사는 오래된 절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구석구석 정성들인 손길이 배어 있고, 그러면서도 근래에 유행하는 무조건 크고 번쩍거리게풍에도 물들지 않은 사랑스러운 절이다. 한껏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곳이다.
전나무 숲과 당산나무
내소사에는 수령이 약 5백 여년이 되는 느티나무(할아버지 당산)와 높이 약 20m, 둘레 7.5m의 약 천여년 쯤 되는 느티나무(할머니 당산)가 있으며, 봉래루 앞 마당 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거목 "보리수"가 자리하고 있다. 절 입구 울창한 전나무 숲길은 전나무 향기 가득한 매력적인 산책로다. 더욱이 전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일주문 앞까지 단풍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을이면 단풍 나들이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내소사 대웅전
지정일 : 1963. 1. 21
소재지 :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유자 : 내소사
시 대 : 조선 인조11년, 고종2년 중건
재 료 : 목재
수 량 : 1동
규 모 : 정면3간, 측면3간, 단층 팔작지붕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으로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건실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짜은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연꽃과 국화꽃 등 각기 다른 꽃살무늬를 조각한 전면의 창호는 정교한 공예품이며, 길게 뻗어 나온 쇠서(牛舌: 나무를 소의 혀 모양으로 다듬어 기둥 위를 장식함)들의 겹쳐진 모습과 추녀 밑을 장식하는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겉모양의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 반자를 댄 천장에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더불어 법당 안에 화사함을 뿌린다.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춰 세운 것으로 그 공력과 기술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하고, 단청이 없어 더욱 자연스러운 고찰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상 뒤편 벽에는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잘 안 보이는 곳에 있어서 관심을 덜 받는 듯 군데군데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어 내버려두면 더 많이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대웅전 꽃살문양
대웅보전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일 것이다. 연꽃이며 국화꽃이 가득 수놓인 문은 그대로 화사한 꽃밭을 이룬다.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비바람에 씻기고 나뭇결만 남아, 오히려 하나하나 새기고 파서 절집을 장엄하려 한 간곡한 정성만이 오롯이 드러난다. 꽃무늬는 간살 위에 떠 있으므로,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이 또한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내소사의 한 면모인 듯하다. 엄숙함이나 장중함보다는 다정함 쪽에서 바라보아야 할 건물이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이 대웅전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경내에는 이 외에도 고려 동종, 법화경절본 사본, 영산회 괘불탱화 등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설선다와 요사, 삼층석탑 등의 지방유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 대웅보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쪽 천장의 공포 한곳에 목침 한 개가 비어 있다. 그리고 동쪽 단청에도 유독 한 곳에는 단청칠이 없어 부자연스러운 곳이 보인다. 공포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덩이만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이 그 중 한 개를 감추자, 나무깎기를 마치고 토막 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면서 일을 포기하려 했다. 청민선사는 그 부족한 한토막은 이 절과 인연이 안되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꿔 절을 지어달라고 사정했다. 후에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 탄 재목을 쓸 수 없다 하여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했다. 그래서 지금도 법당안에 오른쪽 윗부분 공포 내5출목의 목침 한개가 비어 있다. 그 옆에도 빈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청의 유무를 가지고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없었던 곳은 단청이 칠해져 있을 것이고, 지은 다음에 나중에 없어진 부분은 단청도 없을테니 말이다.
관음조의 전설
법당이 세워진 후 전각에 단청(丹靑)을 하고 벽화를 그릴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벽화를 그릴 터이니 벽화를 그리는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달이 다 되어도 화공이 나오지 않고 기척이 없자, 호기심 많은 이 절의 선우스님이 살짝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화공은 없고 오색 영롱한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들어오는 스님을 보더니만 단청 한 곳을 마무리하지 못한채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법당 좌우에 쌍으로 그려졌어야 할 용과 선녀 그림이 오른쪽에는 그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목수는 호랑이가 현화(現化)한 대호선사(大虎禪師)이고 벽화를 그린 관음조는 관세음보살의 현화라고 한다. |
내소사 고려 동종
지정일 : 1963. 1. 21
소재지 :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소유자 : 내소사
시 대 : 고려시대
재 료 : 동
수 량 : 1구
명문에 따르면 이 범종은 1222년(고려 고종 9)에 제작된 종으로, 원래는 내변산 청림사의 종으로 만들어졌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4년(1853)에 이곳 내소사로 옮겨져 봉안되고 있다. 높이 1.3m, 직경 67cm의 전형적인 고려 후기 종으로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범종(梵鐘)은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맑은 소리로 부처의 말씀 곧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제작되었으며 절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반드시 비치하고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사실적인 용뉴가 있다. 종뉴 아래의 종신(鐘身)에는 이중여의두문(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와 화려한 모란당초문(牡丹唐草紋)의 상·하대(上·下臺)가 있고,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당초문의 유곽(乳廓) 아래에는 4개의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있는 모습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구름 위에 양각된 삼존상(三尊像)이 있는데, 두 뺨이 볼록한 선정인(禪定印)의 본존불은 활짝 핀 연화좌(蓮華座) 위에 앉아 있고, 좌·우협시상(左右脇侍像)은 입상(立像)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다.
이들 위에는 운미(雲尾)가 길게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장식을 흩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한층 장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처럼 내소사 종은 종신형(鐘身形)은 신라(新羅) 종형(鐘形)을 따르나 고려 후기 종의 특징인 입상 화문대를 갖추고 있으며, 표면의 묘사수법은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고려 후기 종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범종각
불전사물 (佛殿四物)
사물(四物)을 치는 순서 : 법고(法鼓) → 범종 → 목어 → 운판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본래(本來) 대중을 모으고 때를 알리기 위하여 쳤으나, 점차 조석 예불이나 의식(儀式)을 치를 때 치게 되었다. 치는 횟수에 따라 의미(意味)가 다르다.
28번은 부처로부터 6조 혜능(慧能:638∼713)까지 이어진 법맥(法脈)이 28명이란 뜻이다. 33번은 불교(佛敎)의 세계(世界), 곧 33천을 의미(意味)한다. 108번은 백팔번뇌(百八煩惱)를 타파하고 지옥(地獄)에서 고통(苦痛)받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의미(意味)이다.
종소리가 지옥으로 울려 퍼지라는 의미(意味)에서 종 입구는 아래를 향한다.
법고(法鼓) : 축생(畜生) 즉, 육지를 걸어다니는 길짐승을 제도하기 위해
불법(佛法)을 전하여 중생의 번뇌(煩惱)를 물리치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함축적인 의미로 예불(禮佛)을 알릴 때 친다.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 것과 같이 삼천대천세계에 불법(佛法)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이다.
치는 방법 - 두 개의 북채로 심(心)자를 그리면서 두드리는데, 이는 심자형(心字形)의 소리를 중생계 속으로 전하려는 의미이다. 몸통은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면은 한쪽은 수소, 다른 쪽은 암소 가죽을 대야 소리가 잘 난다고 한다.
목어(木魚) :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북송(北宋) 때 물고기 모양의 목어 사용. 물고기가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불안면학(不眠勉學)을 일깨우고 게으름을 경계하기 위한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 통설이다. 선종(禪宗)에서 사찰 규범 지침서로 삼았던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하면,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었으며, 이를 두드려 수행자의 잠을 쫓고 어둡고 혼미(昏迷)한 정신상태인 혼침을 경책(警責)하였다. 초기에는 사찰 경내의 무리를 모으기 위한 신호 소리를 내는 데에 사용하였다. 사용 시기 : 새벽과 저녁 예불할 때, 큰 행사를 치룰 때.
운판(雲板) :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전체적인 모습이 뭉게구름 형태, 구름무늬 모양의 넓은 판.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 부엌이나 재당(齋堂)에서 대중에게 끼니를 알리기 위해. 한국 - 부엌에서 운판을 많이 사용하다가 차츰 불전의 사물로 바뀌어 조석예불을 할 때 치는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로 사물이란 원래 절에서 불교의식 때 쓰인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범종(梵鐘)의 네 악기를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뒤에 이것이 변하여 북·징·목탁·태평소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북·장구·징·꽹과리의 네 가지 민속타악기로 바뀌어, 일반적으로 사물놀이라고 하면 이 네 종류의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과 그 음악에 의한 놀이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 음악과 놀이는 1978년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농악연주단체에 의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그후 점차 보급되어 지금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1년에는 세계종합예술제에 초빙되어 연주, 세계적으로 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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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영산회 괘불탱화
지정일 : 1997. 8. 8
소재지 :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소유자 : 내소사
시 대 : 1700년
재 료 : 10.50m×8.17m
수 량 : 1점
이 불화는 야외에서 큰 법회나 제를 지낼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괘불(掛佛)로서, 1700년(숙종 26)에 제작된 영산회상 괘불탱으로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괘불은 각 존상의 광배 안에 존상의 명칭을 적어 놓아 이후 다른 괘불의 존상 명칭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괘불은 길이 10.50m, 폭 8.17m로 본존불인 거대한 석가불은 중앙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른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배부근으로 올리고 서있다.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앞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뒤쪽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및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등이 모두 석가모니를 향하여 시립하고 있는 4보살 7존 형식구도를 이루고 있다.
각 존상의 형태는 둥근 얼굴에 다소 원만한 체구를 표현하여 부드럽고 원만하며 양 뺨과 눈자위, 턱밑, 손과 발바닥 등은 옅은 분홍빛으로 표현하여 매우 밝은 표정을 보여 준다. 불상의 경우 높고 뾰족해진 육계에 계주가 선명하고 각 상의 이목구비는 장식적인 면을 띠고 있다. 선은 윤곽선을 굵게 처리하여 경직된 점이 있기는 하나 귀와 콧 속의 털까지도 묘사하는 등 정밀함과 함께 유려함이 남아 있으며, 전반적으로 홍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색상은 금색을 사용하지 않고 연한 하늘색과 분홍색 등 비교적 밝고 명랑한 중간 색채를 많이 사용하여 화면에 경쾌함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숙종 26년(170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콧속의 털까지 묘사하는 선의 정밀함, 화려한 옷의 무늬와 채색으로 더욱 돋보이는 작품으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각 인물마다 명칭이 있어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설선당과 요사
설선당은 조선 인조 18년(1640년) 청영대사(淸映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요사도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 듯하고, 우측은 요사체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현재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설선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간략화된 주심포 맞배지붕집으로, 넓이는 112㎡(34평) 규모이다. 건물 동쪽 측면 한 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서 거대한 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설치하였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넓이는 230㎡(69평) 규모이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현재 승방과 식당 및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마루로서 식료품이나 기타의 물건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시설해 놓았다.
이 설선당과 요사를 연결해 주는 건물이 북쪽끝과 남쪽 끝에 2동이 있어서 회자형 건물을 이루는데, 설선당 동쪽과 요사의 서쪽 서까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루를 끼워서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하였다. 그 북쪽 연결 건물은 설선당의 높은 대지와 요사의 낮은 대지를 연결하는 관계로 2층 건물의 내부 마당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1칸 두고, 다른 1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남쪽 연결 건물 2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고 남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채석강
수성암 단층이 겹겹이 넓직하게 쌓인 해식단애가 신비로운데, 국내 한 교수는 "채석강은 미국의 그랜드 케니언 등 규모가 큰 퇴적암층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퇴적구조가 많이 발견돼, 길이는 길지 않지만 학술적으로는 세계적인 퇴적암 관광지가 될 수 있다" 고 말한다.
채석강의 명칭은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뱃놀이를 하며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약 1㎞에 걸친 채석강의 장관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흰 모래사장이 격포해수욕장이며, 이어 북쪽 용두산을 돌아 펼쳐지는 약 2㎞의 해안절벽이 적벽강이다.
채석강은 하루 두차례 물이 빠지면 들어갈 수 있는데, 간조때는 물 빠진 퇴적암층에 붙어있는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간조때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노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채석강은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말한다. 흔히 강으로 오해되기 쉬운데 강이 아니고 바닷가의 절벽이다. 채석강이 끝나는 북쪽에는 격포해수욕장이 있고, 닭이봉 꼭대기에는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위도와 칠산 앞 바다를 볼 수 있다.
수성당
지 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58호
지정일 : 1974. 9. 27
소재지 :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
소유자 : 부안군
규 모 : 당집1동(4평)
수성당은 격포해수욕장 해변을 따라서 적벽강 여울목으로 들어가면 '죽막' 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동네 바닷가 벼랑위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를 다스린다는 여해신(女海神)이 그의 딸 여덟을 데리고 와서 전국 각도에 또는 서해 각 섬에 시집 보내고 막내딸만을 데리고 이곳 수성당에 살았다. 계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칠산바다를 거닐면서 수심을 재어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도록 해 준다고 한다. 이런 여해신을 인근의 주민들이 모시는 해신당이 이곳 수성당이다.
수성당에서는 매년 정월 초사흩날 대제를 올리고 풍어와 어부들의 무사고를 빈다. 이곳 여해신을 '수성할머니', 또는 '개양할미'라고도 부르는데, 이 수성당이 칠산바다(변산반도 앞의 서해바다를 일컬음)를 수호한다는 바로 그 '계양할미'를 모시는 해신당인 것이다. 내륙지방에서 모시는 당산신이 주로 남성인데 비해 해안지방에 모셔진 신은 여성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수성당 주변은 성스러운 곳으로 함부로 접근이 금지되었으며, 절벽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1960년대 초까지 '개양할미'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외부인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없어져 버렸다.
칠산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적벽강 여울골 위에 자리잡은 이 당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1804년(숭정 기원 후 사갑자)이라는 상량문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이 때부터는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랑을 다스리고 풍어를 바라는 해안마을 사람들의 소망과 관련시켜 볼 때 이 보다 훨씬 전부터 당집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성당으로 가자면 격포해수욕장을 지나, 안쪽으로 후박나무가 가득 자라는 해양 종묘배양장의 철망 담을 끼고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야 한다. 거기서 다시 바라다보이는 바다 쪽 언덕 끝, 시누대가 푸르싱싱한 곳까지 오르면 끝에 수성당이 있다.
망망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또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들 쪽에서 보더라도 가장 눈에 잘 띌만한 깎아지른 수십 길 낭떠러지 위다.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인근 군부대의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수성당 앞 벼랑을 따라서는 철조망이 쳐 있고 군대 참호와 벙커도 있지만, 근래에는 폐기된 듯 벙커의 구멍 앞에는 잡초가 웃자라있다. 서해 어부들의 안녕을 걱정하고 보살피느라 바다를 굽어보는 수성할머니의 집과 또 다른 이유로 바다를 지켜보기 위해 설치되었을 군대의 벙커. 재미있는 대비이다.
다시 짓고 또다시 지으며 수백 년 전승되어왔을 신당 건물은 앙증맞은 단칸 기와집으로, 벽에는 흰 칠이 되어있고 들보와 서까래는 샛노랗게 칠해져 있다. 예전에는 할머니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빈 마루뿐이다. 사방 벽 윗부분에는 예전 장터에서 볼 수 있던 혁필과 비슷한 기법의 글씨가 씌어 있다. 들보에는 숭정 기원 후 4갑자(조선 순조4년 1804) 6월 10일 신시에 건립했고, 그후 도광30년에 2차 상량을 했으며, 일제 때인 소화15년(1940)에 3차 상량을, 그리고 서기 1973년 4월 18일에 다시 상량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으로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고 또 당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바로 이곳이야말로 바다의 수호신이 자리 잡을 만한 곳이라는 기분이 저절로 생긴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은 이 부근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삼국 시대의 제사터를 발견했다. 발굴 당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부터 어업 및 해상 교통과 관련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대마골 여우골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깊은 절벽이 굴처럼 파여 그 시커먼 속으로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며 밀려 들어왔다가 설렁설렁 나가곤 하는데, 간 작은 사람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운 기운이 돈다. 그러나 이곳에는, 왜구가 다가올 때면 철마가 짓쳐나가 황금부채를 부쳐서 모조리 침몰시키고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면 역시 부채로 부쳐서 구해주었다는 든든한 전설이 깃들여 있다.
다시 나오다 보면 바로 옆이 적벽강 가는 길과 적벽강은 채석강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경치는 적벽강이 훨씬 뛰어나다.
적벽강
적벽강은 전라북도기념물 제29호(해안선 약 2km, 291,042㎡)로,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죽막(竹幕)마을을 경계로하여 북쪽을 적벽강이라 하는데, 죽막마을 앞에 있는 천연기념물인 후박나무 군락(천연기념물 123호)이 있는 지선의 연안에서부터 수성당이 있는 용두산을 돌아 절벽과 암반으로 펼쳐지는 해안선 약 2Km를 말하며, 남쪽은 격포해수욕장을 포함한 채석강이다.
적벽강 단애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적벽강에서 따온 이름으로, 중국의 적벽강만큼 경치가 뛰어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질형성은 채석강과 비슷하고 붉은색 암반, 특히 형형색색의 수석이 깔려 있어 일품이고, 수많은 해식동굴과 세로형 줄무늬를 온몸에 간직하고 있어 아름답다.
적벽강은 이름 그대로 기묘한 형상의 붉은색 암반과 높은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노을질 무렵의 햇빛을 받아 반사할 때 진홍색으로 물들어 찬란한 절경을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 죽막마을의 후박나무 군락 앞 해안의 암반층에 형성된 석물상은 문자 그대로 바위 하나하나가 만물의 형상을 갖추고 있어 석물상이라고 하는데 바윗돌들은 사람의 모양 또는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어, 어느 것은 아낙네의 유방과도 같고 또 어떤 것은 토끼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이 곳을 찾는 탐방객들을 경탄에 몰아 넣고 만다.
궁항 전라좌수영세트장. 영상테마파크
격포항에서 빠져나와 500m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진입한다 . 전라좌수영 세트장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했던 곳으로 주변해안경관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해넘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세트장 앞 바다의 경치와 몽돌해안. 갯바위는 쉬어가고 싶은 충동과 함께 별장을 갖고 싶은 지역이다
바로인근에는 대한민국 요트의 요람 .부안군 요트선수단이 훈련하는 요트장이 있다. 궁항포구에서는 각종 고기잡이배가 드나들고 봄철이면 쭈꾸미를 찾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금구조각공원
이 조각공원은 부안읍에서 격포항을 향하여 변산 해수욕장을 지나고 거의 격포에 이를 즈음 마포마을을 지나 왼쪽 도로로 약 2.5km 지점인 변산면 도청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조각공원은 1965년 김오성에 의해 세워져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공원이다. 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작품은 40여종으로, 알몸인 여체가 20여종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작품이 주는 이미지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마치 3막5장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작품 중에「농부의 손」「유한과 무한에 대한 사유」또는「서쪽하늘」「밤하늘의 별자리」「강언덕」「분수령」등의 우수작품들도 있어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 조각품들은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큰 것은 2m50cm나 된다. 또 이곳에는 별자리를 연구하는 천문대가 있어 체험관광을 할 수 있는 관광명소로 알려지면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주변에 있는 격포항, 채석강, 수성당, 적벽강의 명소와 연계관광이 가능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