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정리를 하다 장롱 깊숙이서 시어머니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일부러 찾으려 했던 건 아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터라 있는 자리를 새삼 확인하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사진은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를 대비해 미리 찍어 둔 영정사진입니다.
작년인가 그러께인가 교회의 어르신들 모임에서 단체로 촬영한 것인데, 사진이 나온 후 어머님이 저희 부부에게 맡기셨으니 잘 보관하고 간수할 책임은 남편의 다섯 남매 중 막내인 저희에게 있습니다. 사진 속 어머님을 가만 들여다보니 “한복을 차려입고 오래서 모두 곱게들 하고 왔더구만 나는 그냥 입던 대로 찍었다. 다음에라도 한복 차림으로 오면 다시 해 준다는 데 마다했어.”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그때 어머님은 ‘에이, 이깟 게 무슨 영정사진이 될라구, 찍어준다니까 찍었지, 난 아직도 멀었다, 멀었어.’ 라고 자신만만해 하시며 평상시 차림으로 촬영을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온화하고 엷은 사진 속 어머님의 미소와 평안한 표정 어디에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당겨 체감하는 비장미 같은 것은 읽히지 않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영정사진을 장만하심으로써 지상의 과제를 마무리하신 듯, 혹은 마지막 선물을 받으신 듯 기분 좋아하셨고 홀가분해 하셨습니다.
12년 전 마흔 다섯 한창 나이에 세상을 하직해야 했던 친정 오빠가 자신의 영정으로 쓸 사진을 고르려고 사진첩을 뒤적이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간암으로 투병 중이던 오빠는 진통제에 의지해 가며 올케를 앉혀 놓고 서류 등을 간수하고 처리하는 방법 등을 일러주며 신변 정리를 하면서 자신의 영정사진까지 올케에게 건넸습니다. 그때 저는 오빠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해 보는 자체가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승에서 영영 작별해야 할 오빠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 무렵 한국에 가 있던 저는 삶의 마지막 갈피를 헤집어 끄집어든 사진이 하필이면 여권용이었던 것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오빠는 아마도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암 선고를 받기 직전, 올케와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나 본데 가혹하게도 그만 여권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빠가 죽은 후 한동안 저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월은 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오빠의 마지막 세상 연수였던 45세를 제 자신이 넘기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부쩍 더 들었습니다. 마치 일찌감치 죽음과 ‘쇼부’를 봐놓고 나머지 시간을 살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동기를 잃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에 직면하려는 제 나름의 반응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제게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영정용으로 쓸 만한 사진이 있는가를 살피는 버릇이 새로 생겼습니다. 제 속에서는 3년 단위로 영정사진을 폐기하고 새로 만드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완전 파파 할매가 되었는데 나이 50인 지금 사진을 쓸 순 없을 테니 살아있는 동안 3년마다 영정 사진을 바꿔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얼핏 기괴한 습벽 같지만 죽음을 대비하여 사진을 챙기고자 하는 이유는 죽어서도 예쁘게 보이고 싶다거나 장례를 치를 가족의 일을 덜어주자는 친절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3년 단위로 죽음을 정비하는 일은 같은 간격을 두고 삶을 돌아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3년을 단위로, 살아가는 일에 닦고 조이고 기름을 치며 보살피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제게 영정사진을 고르는 일은 유한한 생에 대한 제 나름의 각성이자 정기점검인 셈입니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돌아본 날, 정오 무렵 산책길에서 너무나 뜻밖에도 영구차 행렬을 만났습니다. 꽃으로 덮인 관을 모신 리무진과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자동차들을, 십 수년 만에, 그것도 큰길도 아닌 호젓한 동네 골목에서 보았으니 그대로 서서 우두망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필 그때 그 자리에서 장례행렬을 만났는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묘한 상황이라 어쩌면 하나님이 영정사진을 찍고 있는 제게 ‘잘 하는 짓’이라고 격려하는 사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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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다르네요, 우선 죽음이라는게 생각하고싶지않습니다. 나중에 후회할려나?
사실 생각한다고 해서 실감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피안의 세상으로 떠나 간 사람의 영정은 살아 있는 이들의 기억의 갈피에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곱게 차려 입고 찍은 영정은 친근함이 덜 묻어 나더이다.
색바랜 사진첩 속에서 가장 친근하고 기억하고픈 사진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 생각이 드네요.
매일 매일 죽음을 대면하고 사는 삶이 었으면 소홀함이 없을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정 사진이란 게 대부분 어색하다는 생각을 저도 하고 있는데 의견을 주셨네요....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 죽음을 아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거기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짐승이 사람보다 더 낫다 싶습니다....
3년 단위로 영정사진을 새로 만드신다고 하니, 글을 쓰시는분이라서 일까요?
삶과 죽음에 대해 보통 우리네 보다는 남다른 깊은 생각을 하시는거 같네요.
사실 저는 죽음에 대해 유난히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하는 가정, 먼저 간 이들 생각 등등... 잘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죽음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과 무관하게 사는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느누구도 죽음을 비켜갈순 없고, 그 죽음을 새로운 시작, 하나님곁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과 쉼을 얻는
아름다운 영생의 기쁨, 천국의 소망이, 하나님을 믿는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기뻐하고, 이땅에서 주어진 삶을 감사히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때, 이미 우리 마음안에서
천국이 시작되는건 아닐까요. 영정사진을 준비하신다는 마음이 참 겸손하시고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아마 나이가 한참 많이 드셔도, 참 곱고 예쁘게 나이드실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더 나이들고 더 늙었을 때 님의 말씀처럼 곱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이 하실 일, 우리는 그저 주어진 오늘만을 살 뿐이겠지요.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낯설고 솔직히 두렵고, 무 인것만 같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 새로운 시작임을 믿어야 겠지요.
웃자고 하는 말로 잘살고 잘죽자고합니다. 말은 쉬운데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살아오신 과거가 보통사람이 흔히 겪는것 하고는 다른, 아픔이 많아서 일까요?
아님, 경험으로 얻어진 깨달음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남다른것일까요?
많이 생각하게되고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 맞다고 하던데요... 자신의 죽음이 궁금하다면 지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나를 보면 안다고도 하구요. 살아온 그대로 죽는다고 하니까요... 욕심많고 집착많고 번민이 많은 삶이었다면 죽음도 그 연장선에서 맞는다고 하고, 그 반대라면 죽음 또한 담백하게 찾아온다고 하니...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저도 천년만년 살 것만 같아요.^^ 아무리 애를 써봐도 죽음을 실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글의 내용도 좋지만, 보통사람은 마음에 있는것도 표현이 잘 안되잖아요. 얼마나 잘쓰시는지 놀라워요. 감사합니다
과찬이지만 듣기 좋습니다.^^ 글을 쉽게 쓸수록 공감도가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쓰기 위해서는 우선 정직하고 솔직해야 하겠더군요. 그러면 마음 속 표현이 수면 위로 떠오르구요.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네요.정말 건강해서 제건강 을 염려하던 올케가 올초 병명도없이 가버렸습니다.그후로 가방속도..서랍도 더 정리하구 살려 노력합니다.제가 정리가 잘안되는 사람 이거든요..주님이부르시면...근데 왜크리스찬이라면서 두려울까요~
저도 최근에 친구를 암으로 잃었습니다. 정말정말 건강하고 잘 웃고 살 뺀다고 고민하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리하고 사는 것, 주변 정리하는 것 그것 정말 중요합니다. 자꾸 버리고 새로 사지 않는 것. 제가 잘 하는 거지요.ㅎㅎ
저도 거북이님이랑 비슷한 의문이 항상 있어요. 믿음의 함량이 좀 딸리는지...
죽음에 대해 솔직한 느낌을 갖는 것, 그것도 잘 죽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 이것만큼 솔직한 게 있을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출한번 하려해도 준비가 필요한데,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정말 필요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