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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서울,서울,서울', '서울여자',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 당신마저도 나를 버리신 서울이 싫어졌어요.’ 김수희 노래도 한잔 술에 마이크를 잡으면 곡조가 잘 넘어가고, ‘서울이란 낯선 거리 헤매 도는 인생입니다.’ 방실이의 서울여자도 부담 없이 구성지게 불러제낄 수 있다.
서울여자.
내 이름이 희경(姬京)이다.
계집희자 서울경자. 우리 어머니가 돈을 주고 작명소에서 지었다는 이름인데 곰곰 생각해봐도 아무런 깊은 의미도 없이 그저 서울여자 일뿐이니 차라리 영희(榮喜)나 미자(美子)라는 이름이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으나 결혼한 후 한 번도 서울에 입성을 못한 서울여자(嬉京)이다.그러니까 작명소에 지어준 이름대로도 내 운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이름값도 못한 셈이다. 더군다나 서울서 나고 자랐어도 서울 땅 한 뼘도 건지질 못했으니 사실 서울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요새 아이들은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곳에서 자랐으니 그애들은 무엇으로 유년을 채워서 오십년쯤 뒤에 어떤 것을 기억하게 될까?
똑같은 건물, 똑같은 구조, 똑같은 상가에 있는 치킨집, 비디오가게, 무슨 마트. 그렇게 자라서 무슨 상상력으로 화가가 되고 글을 쓰고 혹은 노래를 지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모처럼 서울에서 모임이 있었다.
딸네 집에 짐을 풀어놓고 반가운 사람들과 명동에서 만나서 떠들다 신세계백화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때여서 식당가는 몹시 붐볐는데, 내 또래 할머니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참동안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서야 물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 서울 할머니들이 있었다.
명품 핸드백에, 윤기 나는 컬의 부드러운 헤어스타일, 알록달록한 블라우스에 흰 바지. 그 나이에도 구슬달린 샌들을 신고 몸놀림과 웃는 모습도 밝고 우아했다. 새삼스럽게 대형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슬포 5일장에서 만원주고 새로 볶은 퍼머에 그나마 제주도에서는 품질 좋은 상품이 들어오는 이마트에서 구입한 효도 샌들. 천원에 세 켤레씩 하는 흰 양말, 물방울이 소나기처럼 찍힌 어지러운 무늬의 파란 티셔츠. 딸이 학교 다닐 때 쓰다 두고 시집간 갈색 가죽가방.
봄 내내 고사리를 꺾느라 사정없이 새까맣게 탄 피부에 우리 집 손님들이 정원에서 바비큐를 할 때마다 염치없이 얻어먹은 흑돼지구이와 소주 덕분에 XXL 사이즈를 입어야 하는 뚱뚱한 몸매.
아. 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 할머니들은 문화센터에서 오전수업을 끝내고 점심을 먹는 것인지 내내 그날 수업 얘기를 반찬삼아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실버를 위한 밸리 댄스, 해외여행 영어 초급반, 장기 해외여행을 위한 영어 중급반, 흘러간 팝송 부르기 교실, 실버 테라피 요가 등등등.
얼핏 보기만 해도 여유 있는 할머니들이 우아하게 여가를 즐기는 모습에 괜시리 울화가 치밀었다.
아아, 바로 이 여자들이 서울여자들이구나.
장을 보러 아현시장에 나왔다가 어릴 적 살던 곳이 코앞이라 가보았다. 아현동 로터리에서 한성 중학교 쪽으로 더듬어 올라가며 많이 변했을 거라고 미리 예상을 했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한성 중학교가 그대로 있어서 그 담 옆에 있던 우리 집의 위치를 가늠할 수가 있었는데 모두 다세대 주택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옆 사거리, 지금 북아현동 동사무소가 서있는 곳. 거기쯤일게다. 그 비포장 사거리에 큰 우물이 있었다. 꿈에라도 그 우물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길가에 <큰우물1로>라는 팻말이 있어서 어쩌면 그 후에도 우물이 존재했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거리에 망연히 서서 오십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갔다.
우물가에는 늘 양철통이 혼잡스럽게 줄을 서있고 물을 퍼올리는 여자들로 붐볐다. 둥근 양철 바케스에 물을 가득 담아 물지게에 두통씩 매달아 지고 좁은 골목을 올라다니던 사람들. 매일 다섯지개씩 물을 길어다 주는 아저씨가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냈으니 그 시절에 벌써 물을 사다 먹은게다.
그 아저씨를 부를 때면 조무래기들도 ‘어이 북청 물장수’라고 반말을 했다. 우물 밑으로 도로에 접한 기와집은 담이 아주 낮아서 키 작은 우리들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술집이었다. 나무 대문 안쪽으로 술청이 있었고 그 옆으로 은밀한 방이 줄지어 있었다.
그집 딸 옥자는 나와 한반이었고 우리 집에 종종 놀러왔는데 우리 어머니는 ‘술집 아새끼’라고 옥자와 못 놀게 하셨다. 그 집 앞 평상에서 한복을 입은 갈보들이(그때는 다 그렇게 불렀다) 여름에는 여배우 최은희 얼굴이 찍힌 부채질을 하며 깔깔댔고, 어떤 색시는 술 먹다 말고나와 붉은 갑사 치마 말기를 풀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도 했다.
담 너머로 색시들과 손님들이 니나노하며 질탕하게 노는 것을 애들과 구경하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종아리를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기도 했다. 색시들이 우물가에 나와 ‘씨서리’라도 하고 나면 우리 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숙자언니는 똥이라도 밟은것처럼 바닥에 두레박으로 퍼올린 물을 바닥에 끼얹으며 침을 뱉었다.
“드런 것들..”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빼기에는 빙수장수, 번데기 장수, 칡뿌리를 썰어 파는 장사치와 설탕을 녹여 만든 뽑기나 달고나 장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끔씩 산발한 머리로 한여름에도 군용잠바와 몸뻬바지를 입고 햇볕에 누워 이를 잡던 덕순이. 아이들만 보면 아무나 ‘덕순아’라고 부르며 땟국 흐르던 얼굴에 유독 흰 이빨로 웃어대던 미치레기 덕순이. 지금 생각하면 6.25때 덕순이라는 딸을 잃고 실성해버린 불쌍한 여자였던 것을. 꼬챙이로 찢어진 고쟁이를 들추던 사내애들 옆에서 나도 따라 낄낄 웃었다.
학교 앞에 있는 허름한 개나리 미장원에는 언니집에 더부살이 하던 짝꿍 영순이가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파리채를 쥐고 어린 처제를 때리던 그애 형부도 생각난다. 미장원에서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다 내가 들어서면 공중에 고무줄로 매달아놓은 돈 바구니에서 지폐 한 장을 슬쩍 훔쳐내어 호떡이나 번데기를 사주며 씽긋 웃던 착한아이. 조금 모자라서 시험을 볼때면 언제나 답을 보여주었는데 그 보여준 답조차 제자리에 적지 못해서 꼴지만 하던 애였다. 그애 언니는 내가 가면 공부 잘하는 친구 왔다고 반가워하며 ‘우리 불쌍한 영순이랑 사이좋게 지내라’며 울먹이곤 했다.
그애도 6.25때 부모를 잃었을 것이다.
학교 뒷길로 움막 같은 집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같은 반인 ‘양키’라는 애가 살았다. 고무줄놀이에도, 땅따먹기에도 끼워주지 않던 혼혈아 양키. 그애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도 모두들 양키라고만 불렀기 때문이다. 푸른 눈에 갈색머리칼, 하얀 피부였지만 그애 할머니는 검은 당목치마에 꼭 버선을 신겨서 보는 이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애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가난한 집 애들이 그렇듯이 물감도 없어 미술시간엔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했다.
병뚜껑에 싸구려 염료를 넣고 말려서 물감 대용품으로 팔던 ‘에노구’. 고학년이 되어서 그리는 수채화 시간에 필요한 물감이었는데 그 질 낮은 에노구 로도 양키는 푸른 들판에 목장이 있고 한가로이 양떼가 노니는 그림을 싸구려 도화지가 찢어지지 않게 잘도 그렸다. 나는 특히 그림에는 둔치여서 양키가 대신 그려주곤 했다.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건물 좁은 통로에 비닐깔개를 씌운 좁은 평상이 있고 손바닥마한 마당 옆으로 깨진 플라스틱 화분에 봉숭아꽃이 상추 몇 포기와 함께 자라고 있다. 할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콩을 까며 한가롭게 잡담을 하고 있을 뿐 집집마다 괴괴하다. 젊은 것들은 다 일하러 가고 늙은이들만 남아 깨진 화분에 흘러간 꽃을 키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곳. 그럴듯한 삼 층짜리 다세대 건물이어도 삶의 복작거림과 가난의 누더기를 다 감추지 못했다
내가 살 때도 좋은 동네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슬포 바닷가 게딱지집 만큼도 못되는 동네였으니, 그래도 모슬포 게딱지 판자집 앞에는 돈 주고 살 수없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어서였다.
신세계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니는 할머니나 이곳 아현동 주택가 비좁은 골목에서 퍼질러 앉아 콩 까던 할머니도 다 서울여자였다.
전철을 타고 분당에 갔다.
친구가 요새 뜨고 있다는 동탄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았는데 중도금 대출문제로 모델하우스에 간다고 했다.
무심코 따라 들어간 모델하우스 안에는 40평부터 102평까지의 아파트들이 꾸며져 있었다. 친구가 일층에서 대출상담을 받는 동안 별 생각 없이 이층에 있는 집 내부를 구경했다. 곳곳에 정장을 입은 예쁜 직원이 상냥하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흰 대리석으로 꾸며진 그곳은 말 그대로 으리으리했다. 안방을 구경하고 나올랴치면 그 안에 또 방이 있고, 그 방 안쪽에 화장실과 연결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엄청나게 큰 주방 옆으로 술집에서나 보던 룸(Bar)이 있는가 하면 뒤쪽으로는 세탁기나 김치냉장고 같은 것을 넣어둘 수 있고 싱크대까지 갖춘 더 큰 부엌이 있는데다가 그 옆에는 다용도실이 또 붙어 있었다. 거실 옆으로 또 다른 응접실이 있어서 도대체 방이 몇 개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니 나같은 사람은 ‘사람도 못찾을라’ 쯧쯧 혀를 차며 구경했다.
인간이 먹고 자고 싸고 쉬기 위한 공간이 이렇게 크고 많아도 될까? 요즘같은 핵가족화 시대에 도대체 몇 명이나 이집에서 산다고?
베란다마다 연못과 꽃나무가 있으며 영화나 음악만 따로 감상할 수 있는 방, 헬스기구가 놓여있는 운동용 방까지 보고서야 눈이 빙빙 돌아갔다.
그 집 가격이 이십삼억이라고 써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곳은 볼 엄두도 나자 않아 조용히 빠져나왔다.
도로를 건너 학교 운동장이 보이기에 터덜터덜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았다. 학교는 수업중이어서인가 조용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것 같다.
집 한 채가 23억이라니, 그것도 아파트 한 채 가격이라니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구나. 그런데 웬 돈 많은 사람이 그리도 많아 그걸 사려고 사람들이 복작대고 있었을까? 평생 아끼고 성실하게 살면서 애들 잘 키워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었는데. 이래봬도 서울여자인데, 나도 악착같이 서울에서 부대끼며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살았으면 저런 집 한 채 가질 수 있었을까? 이십 삼억 짜리 집을 사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면 나는 세상을 헛살았지 싶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내가 고사리 꺾고 노루새끼 쫓아다니다가 세상이 이렇게 변한지도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한 조카는 2년이나 취업재수를 해서 간신히 시청 공무원이 되었다. 얼마 전 8급으로 진급했다기에 축하하며 “너 월급 올랐지? 이모 맛있는 것 좀 사줘라” 하며 농담을 했더니,
“이모, 에이. 많이 벌기는요. 연봉 천오백이에요”
연봉 천오백이면 월 120쯤 되려나?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 마친 건강한 남자가 정직하게 일해서 받는 돈이 120만원인데 그 돈으로 장가도 가고 자식도 낳아 키우고 집도 사야 되고 어떤 이는 부모도 모시거나 동생 학비도 보태야 한다.
이것이 현실인데 우리 모두는 묘기를 부리듯 멀쩡한 척 살고 있다. 반듯한 직장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집 한 채 값이 이십삼억씩 한다면 아무리 작은 집도 몇 억은 할테고 그걸 언제 모아서 어린 새끼들 데리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부자는 많다.
땅 부자도 있고 사업체를 경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사업체는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라도 창출하지만 몇 식구 사는 집이 그렇게 비싸다면, 또 그런데도 그 많은 사람이 사려고 몰려든다면 세상이 뭔가 거꾸로 돌아간다는 아득함에 한치 앞이 안보였다.
지하철 타고 제주도로 내려오기 위해 김포공항역에 내릴 때였다.
표를 사서 전철역 안으로 들어갈 때 넣었던 표를 챙겨가지 않아서 언젠가 한번은 내릴 역 출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가방을 홀랑 엎으며 끙끙대며 표를 찾았었다. 결국 출구 가로대 밑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으니 그 후론 몇 번이고 표를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역에서 표를 넣고 나오는데 안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옳다구나. 기계가 고장났네? 내 표가 안 나오다니 항의를 해야겠다. 누굴 촌 것으로 보는 거야? 역무원을 큰소리로 불러 항의했다. 그동안 들고 나며 화살표가 있는가 없는가로부터 표를 넣는 곳인지 카드를 대는 곳인지 매번 헷갈려 약 올랐던 앙갚음도 속내음에 있어서였다.
“들어간 표가 안 나오는데 고장 났으면 빨리 고쳐야죠!!”
역무원 젊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지금 이 역에서 내리신거 아니에요?”
“그래요. 여기에 표를 넣었는데 들어가기만 하고 안 나온단 말이예욧”
“에이, 아주머니. 내리시는 곳에서 넣었으니 안 나오죠. 서울에서 전철 처음 타세요?”
아참. 나는 타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거였지.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고 열적게 무안했다.
“뭘 쳐다봐요? 시골 사는 할머니가 다 그렇지. 뭔놈의 기계가 이렇게 많은지 정신이 헷갈리는구먼.”
뎁다 성질을 부리며 보따리를 들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건너보는 역무원을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왜 우습게 보이슈? 내가 이래봬도 이름이 서울여자란 말이오! 헌디 전철도 제대로 못타니 이참에 이름이나 바꿔야 할 것 같네그려..”
첫댓글 서울여자여! 현실입니다. 그래도 건재하십니다. 역무원에게 큰소리라도 꽥 지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