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사·분석 방향 |
○ 국내 참고문헌 및 성북구문화원의 자료를 통한 조사
▮주요내용 |
○ 성북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데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성 밖의 숭신방․인창방에 속하는 지역이었음(『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지도』)
○ 조선시대 성북구 일대는 맑은 계곡과 얕은 언덕을 끼고 복숭아 재배로 생업을 유지하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한경식략』), 농경지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못하여 포목의 표백과 메주 쑤기, 채석 등의 제조업이 발달하였음
○ 도성에서 현재의 길음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미아리고개를 포함하여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음
○ 조선 후기 북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 길목인 성북지역에 어영청을 세우고 외곽 경비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백성을 이주시키게 되었음
○ 조선 후기 경제발달로 인하여 현재의 의정부시 호원동 일대인 누원이 한양으로 가는 물화가 거치는 위성도시로서 번창하였으며, 누원과 도성을 잇는 길목에 있던 미아리 고개를 포함 성북 일대가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
○ 해방 후 1949년 서울시 관할구역 정비와 함께 성북구가 신설되었으며, 당시의 동대문구 돈암동, 안암동 1~5가, 종암동, 성북동,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석관리, 장위리, 번리, 우이리, 수유리, 월곡리, 미아리, 정릉리)이 성북구가 되었음
목 차
1. 성북구의 지명 유래와 역사 1
2. 성북 지역 동별 역사 및 지명 유래2
1) 돈암동2
2) 길음동3
3) 종암동6
4) 월곡동7
5) 장위동8
6) 석관동10
3. 성북구 관련 연구11
□ 참고문헌
1. 성북구의 지명 유래와 역사
□ 성북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데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성 밖의 숭신방․인창방에 속하는 지역이었음(『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지도』)
○ 조선시대 성북구 일대는 맑은 계곡과 얕은 언덕을 끼고 복숭아 재배로 생업을 유지하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한경식략』), 농경지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못하여 포목의 표백과 메주 쑤기, 채석 등의 제조업이 발달하였음
○ 도성에서 현재의 길음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미아리고개를 포함하여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음
□ 조선 후기 북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 길목인 성북지역에 어영청을 세우고 외곽 경비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백성을 이주시키게 되었음
○ 영조 41년(1765년), 포목 표백의 권리인 마전하는 권리를 주민에게 주어 이주를 유도하였음
○ 조선 후기 경제발달로 인하여 현재의 의정부시 호원동 일대인 누원이 한양으로 가는 물화가 거치는 위성도시로서 번창하였으며, 누원과 도성을 잇는 길목에 있던 미아리 고개를 포함 성북 일대가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
□ 해방 후 1949년 서울시 관할구역 정비와 함께 성북구가 신설되었으며, 당시의 동대문구 돈암동, 안암동 1~5가, 종암동, 성북동,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석관리, 장위리, 번리, 우이리, 수유리, 월곡리, 미아리, 정릉리)이 성북구가 되었음
○ 1962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을 편입, 당시 서울시 전체면적의 17.6%를 차지하는 구가 되었음
○ 1973년 도봉구 신설로 인하여 성북구가 축소되면서, 성북동,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 안암동, 정릉동, 종암동, 상월곡동, 하월곡동, 장위동, 석관동이 남았으며, 1975년 동대문구 보문동 일부가 성북구 보문동으로, 도봉구 미아동 일부가 성북구 길음동이 되었음
2. 성북 지역 동별 역사 및 지명 유래
1) 돈암동
가. 지명 유래
□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는 병자호란 때 오랑캐(되놈)가 도성에 침입하면서 넘었던 고개라고 하여 되너미 고개, 되너미재(혹은 적유령(狄逾嶺))라고 불렸으며, 이 고개 이름이 한자로 돈암현(敦岩峴)이 되었음
○ 미아리 고개는 본래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로 도성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힘든 장애물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평탄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경사가 몹시 심하여 밥을 되먹는 고개라 하여 되너미 고개라고 불렸다고도 함
○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과 치열한 접전이 치루어졌던 곳으로, 공산군 퇴각 당시 남한 인사들을 강제 북송하고 일부는 학살하던 장소로서 이후 유명 트로트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음
나. 역사
□ 성북구의 중부에 위치하여 있으며 현재 돈암1동, 돈암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음
연도 |
연혁 |
1894년 |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 돈암리 |
1911년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 |
1914년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
1936년 |
경성부 숭인면 돈암정 |
1943년 |
서울시 동대문구 돈암정 |
1950년 |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
□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속하는 성저십리지역으로,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 1914년 경기도 고흥군 승인면 돈암리, 1943년 동대문구 돈암정(일본식 동명), 광복 후 1949년 성북구 신설로 인해 성북구 돈암동이 되었음
※ 조선시대의 서울은 좁은 의미로는 도성 안을 일컫지만, 넓은 의미로는 성 밖 10리까지도 포함하여 성저십리라고 불렀음
□ 돈암동은 지형이 긴 골짜기로 되어 있어서 예로부터 절이나 신당이 자리 잡는 곳이었으며, 성북구에서 가장 일찍부터 인구가 집적하면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성장하였음
□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6년 서울 시내 최초의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영등포와 더불어 돈암 지구가 선정되면서 신시가지로 발전하게 됨
○ 시기상 태평양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아 가장 집중적으로 신속하게 구획정리가 이루어졌으며, 주로 경성부내의 관청, 회사, 은행, 학교, 공장 기타 각종 단체의 중류 이상 근무자를 목표로 택지분양이 진행되었음
□ 돈암 지구의 인구 급증 원인으로 당시 도시빈민인 토막민의 유입이 크게 작용하였음
○ 일제 강점기 조선토지조사사업 시행과정에서 농경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도시슬럼을 형성한 것이 토막과 토굴로서 돈암정은 고지대 구릉지에 위치하여 홍제정, 신당정과 함께 대표적인 도시 변두리 빈민주거지였음
○ 1934년 일제는 토막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돈암 지구의 500호 정도의 토막민을 수용하였음
○ 태평양전쟁 발발로 토막민들이 대거 강제징용 당하면서 1942년을 기점으로 토막민들은 자취를 감추게 됨
□ 해방 후 1949년 지정된 성북구 돈암동은 지금보다 넓은 지역을 포함한 동으로, 한국 전쟁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이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산록 지역이 돈암동으로 남게 됨
2) 길음동
가. 지명 유래
□ 골짜기가 길게 놓여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 비가 많이 오면 일대가 물이 많이 차고 길이 질다고 하여 ‘기리미골’, ‘지리미골’, 또는 ‘질음골’로 불린 것이 한자화하여 길음동이 되었다고 함. 또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많고 고와서 좋은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함
나. 역사
□ 성북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으로, 현재 길음1동과 길음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져 있음
□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 미아리, 1950년 성북구 미아동, 1975년 성북구 길음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연도 |
주요사건 |
1864년 |
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 편입(『육전조례』, 고종 4년(1867년)발간) |
1912년경 |
미아리 공동묘지 설립(1958년 경기도 벽제로 이장) |
1914년 |
경기도 양주군 숭인면 미아리로 재편 |
1937년 |
숭인공립보통학교 개교(현재 숭인초등학교) |
1941년 |
전차노선 확장으로 현 돈암동 태극당 앞까지 연결 |
1945년 |
숭덕초등학교 개교 |
1946년 |
길음동 최초의 공설시장인 미아시장 설립 |
1950년 |
한국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에서 공산군과의 치열한 접전지이 이루어졌으며, 남한 인사들이 강제북송 되기도 하였음 |
1955년 |
중구 양동 화재 화재민 및 종로구 사직동, 효창공원, 후암동 일대 철거민 정착 |
1960년대 |
정릉천을 지나는 다리를 중심으로 길음시장 형성 |
1960년 ~1966년 |
1960년 초부터 진행된 도심 도로 확장사업의 일환으로 미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함께 길음교도 확장되었음 |
1967년 |
숭인시장 설립 |
1970년대 초 |
삼양로~노원교 간 도로 확충과 포장 공사(1977년 완공) |
1975년 |
서울시 성북구 길음동으로 명명 |
1978년 |
상습 교통정체 해소를 위해 미아삼거리 입체 교차로 건립 |
1979년 ~1981년 |
정릉천변 무허가 주택 철거 |
1980년 |
정릉천 복개공사로 정릉천 옆 세검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었음 |
1985년 |
길음초등학교 설립 |
1988년 |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대까지 채석장이었던 장소에 신안아파트 설립 |
1997년 |
하월곡동 88번지 성매매집결지 정비 |
1999년 |
1989년 착공된 내부순환로 개통. 총길이 22km로 성산대교 북단에서 정릉터널을 지나 동부간선도로까지 연결되는 순환고속화도로임. |
1994년 |
재개발 사업을 통한 구역 정리 시작 |
2002년 |
길음뉴타운 지정 |
2003년 |
길음시장 및 숭인시장 현대화 사업 추진, 길음뉴타운 길음1구역 준공완료 |
2006년 |
길원초등학교 설립 |
2007년 |
길음1동과 길음2동이 길음1동으로 통합되고, 길음3동과 하월곡동 일부가 길음2동으로 재편 |
2008년 |
미아시장 철거,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 |
서울역사박물관, 『길음동』, 2009, pp.55-57 재구성.
□ 현재 길음동은 조선시대 도성 밖 적유현(현재의 미아리고개) 너머의 작은 마을 미아리가 위치한 곳으로, 혜화문을 나와 누원(현재의 의정부) 방향으로 가던 길가에 형성된 마을이었음
□ 조선시대에는 현재 길음1동 돌산 등지에서 건축용 석재를 채취하고, 왕실이나 궁방의 매장지이기도 하였음
○ 길음1동 돌산은 국도채석장으로서 1970년대 후반까지 채석이 이루어졌으며, 궁실 매장지들은 1960년대 이후 택지 개발과 함께 이장이 이루어졌음
□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게 되었으며, 미아리 산25번지와 산34번지 일대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설치되었음
○ 1930년에 총 462,200㎡ 면적으로 완공되었으며, 이후 길음동 지역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인식되었음
○ 또한 일제강점기 빈민들의 토막촌이 길음교 일대를 포함하여 정릉천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제사 공장과 방직 공장 등 공업시설과 중간기착지로서의 마구간 등도 들어섰음
□ 1950년대 중후반부터 공동묘지 위에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인구밀도가 높아짐
○ 도심지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정착하여 무허가 주택을 지어 살기 시작하였음
○ 또한 중구 양동 화재민 1,600가구(8,300여명), 종로구 사직공원 조성으로 발생된 효창공원, 후암동, 청계천 일대 철거민들의 이주가 이루어졌음
□ 1958년 미아리 공동묘지 이장으로 인하여 인구가 급증하게 됨
○ 먼저 정착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친척이나 가족 등의 연쇄 이주 현상이 일어남
○ 인구 급증과 함께 길음시장, 미아시장 등 개설로 동북부 일대 상권의 중심이 됨
□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1970년 성북구 미아 제1동으로, 1973년 도봉구 미아 제1동, 1975년 성북구 길음동이 되었으며, 1977년 길음동은 길음1동, 인수동은 길음2동, 송천동은 길음3동이 되었음
3) 종암동
가. 지명 유래
□ 현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북바위로 불렀으며, 한자로는 종암(鍾岩) 또는 고암(鼓岩)으로 부른 것에서 연유됨
○ 북바위 전답은 논과 밭의 소출이 많기로 유명한 곳으로 이를 모르면 진정한 농부가 아니라는 민담들이 내려오고 있으며, 농부들이 이곳에서 소나기를 피한 후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물난리가 난다는 전설도 있음
□ 종암1동의 옛 이름은 ‘안말’로서 경주 김씨와 경주 정씨의 집성촌이었으며, 현 숭례초등학교 앞 쪽을 큰 해창, 뒤쪽은 작은 해창이라 칭했는데 이는 부근에 조선 중기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의 묘가 있는 데에서 유래하였음
□ 종암2동의 옛 이름은 ‘모랫말’ 또는 ‘모랫골’로서 이는 물이 맑아 빨래터로 사용되었던 정릉천 주변이 언제나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모래밭이었기 때문이라고 함. 또한 이곳 모래는 소금기가 전혀 없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양질의 모래여서 하수구관이나 전봇대에 사용되었음
※ 2007년 12월 30일 종암1동과 종암2동이 통합되어 종암동이 되었음
나. 역사
□ 구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종암동 1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음
연도 |
연혁 |
1867년 |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동계(『육전조례』) |
1894년 |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문외계 대종암․소종암 |
1911년 |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소종암 |
1914년 |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 |
1936년 |
경성부 숭인면 종암정(대종암리와 소종암리 통합) |
1943년 |
서울시 동대문구 종암정 |
1950년 |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
1970년 |
종암1동과 종암제2동으로 분동 |
2007년 |
종암동으로 통합 |
□ 종암동은 야산의 능선을 끼고 임야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일찍이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쉼터나 땔감 조달 지역이었음
□ 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하해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산비탈에 정착하면서 나무들이 남벌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미아리와 종암동을 잇는 국군의 서울방어 저지선이 바로 이 능선이었으므로 포격전에 의해 나무가 불타서 1960년대 말부터 조림 및 식수 사업이 실시되기까지 민둥산이었음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가 1939년 종로구 명륜동에서 성북구 종암동 19번지로 이전하여, 안암동 보성전문학교와 함께 성북 지역 발전에 기여함
○ 경성고등상업학교는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에 의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된 후 1975년 관악구에 이전되기 전까지 종암동 지역 개발에 기여하였으며, 현 부지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가 있음
4) 월곡동
가. 지명 유래
□ 현 하월곡동에 있는 천장산의 형세가 반달과 같아서 그 산 근방 마을을 다릿골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함
○ 다릿골의 위쪽을 ‘웃다릿굴’, 아래쪽을 ‘아랫다릿굴’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각각 현재의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이 되었음
□ 조선시대 지방에서 올라온 소 장수들이 주막이 밀집해 있던 이 지역에 달밤에 도착하여 숙박을 한 후 달이 채 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소의 가격을 흥정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함
○ 현재 하월곡동에 있는 모래마을은 정릉천에서 내려오는 모래가 이곳에 쌓였다는 데서 유래하며, 율곡, 밤골, 배나무골 등 과거 월곡동에 있었던 마을 이름에서 보듯이 주위 자연환경에서 유래한 이름이 많았음
나. 역사
□ 구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월곡1동과 월곡2동의 2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음
연도 |
연혁 |
1751년 |
한성부 동부 인창방 미아리계 다릿굴 또는 교곡(橋谷) (『도성삼군문분계총록』) |
1867년 |
한성부 동부 숭신방 월곡리계(『육전조례』) |
1894년 |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소문외계 월곡상리․월곡하리 |
1914년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
1950년 |
경기도 성북구 상월곡동․하월곡동 |
2007년 |
경기도 성북구 월곡1동, 월곡2동으로 정비 |
○ 월곡동은 동대문 밖을 나와 성북역을 거쳐 원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주막이 밀집해 있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신근솔’이라는 우거진 솔밭과 수려한 경관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함
○ 경원선 철도의 부설을 시작으로 걸어서 이곳을 지나가며 주막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으며,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함
□ 1950년대 서울로 편입된 후부터 인구의 팽창으로 농지가 사라졌으며, 철거민들이 유입되기도 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재개발되어 주택단지들이 들어서게 되었음
5) 장위동
가. 지명 유래
□ 마을 뒤에 장위산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 한편, 조선 시대 초에도 장위리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고려조 때 마을에 명신(名臣)이 있어 오랫동안 벼슬을 한다고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음
○ 조선시대 말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윤용구(1853~1936)가 을미개혁 이후 수차례 대신으로 임명되고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하여 장위산인이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를 찾기도 함
□ 현 장위동 일대는 웃말, 아래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있던 곳임
○ 웃말은 이 지역 위에 있는 마을, 아랫말은 이 지역 아래에 있는 마을, 간대마을(간대말)은 이 지역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며, 활량리는 한량리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때 이 마을에 주막이 많아 한량들이 많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임
○ 명덕굴은 명덕(明德)고을의 와전된 말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장위산인 윤용구의 형이 이곳에 살았고 또 그 윗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나. 역사
□ 구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위1동, 장위2동, 장위3동의 3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음
연도 |
연혁 |
1751년 |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어제수성윤음』, 『도성삼군문분계총록』,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
1867년 |
동부 숭신방 장위리계(『육전조례』) |
1894년 |
동서 인창방 동소문의계 장위리 |
1911년 |
경성부 인창면 장위리 |
1914년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 |
1950년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
1970년 |
장위동에서 장위1동과 장위2동으로 분동 |
1977년 |
장위1동과 장위2동을 분동하여 장위3동 신설 |
1978년 |
상월곡동 일부가 장위동에 편입 |
1985년 |
장위동 일부가 석관동에 편입 |
□ 조선시대 이 지역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을 재배하고 특산물은 없었음
□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땅이었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가에서 매도하고 택지로 바꾸어 현재와 같은 주택지가 되었음
□ 현 장위동 91번지 일대에는 동구다리가 있었고, 76번지 자리에는 징검다리가 있었으며, 남령재 문 밖에 큰 섬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하마(下馬)하는 곳이었다고 함
6) 석관동
가. 지명 유래
□ 이 지역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지맥이 검정 돌을 꼬치에 꿰어놓은 형상이라 돌곶이 마을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 경종의 능인 의능 안치된 후 '돌곶이 능말'이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石串)’이 되었음
○ 1950년 지도에는 석곶동이라고 표기되기도 하였음
나. 역사
□ 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관동 1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음
연도 |
연혁 |
1661년 |
『조선왕조실록』에 ‘석관’이라는 지명이 출현. 이후 1736년, 1747년 각각 ‘석관현’이라는 지명이 실려 있음(‘석곶현’이라고도 표현. 『광여도』, 『사신금표도』) |
1751년 |
한성부 동부 인창방 장위리 |
1894년 |
한성부 동부 인창방 동소문외계 석관리 |
1911년 |
경성부 인창면 석관리 |
1914년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 |
1950년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
1975년 |
석관1동과 석관2동으로 분동 |
2007년 |
석관1동과 석관2동을 석관동으로 통합 |
□ 석관동 지역은 장위동 지역과 함께 조선시대 초부터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의릉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천장산 쪽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
○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산 밑은 전곡과 호박 재배가 잘되었으며, 경치가 좋아 살기가 좋았다고 함
□ 1960년 이후부터 인구 집중 현상에 따라 농토가 사라졌으며, 현재 대부분이 주택가가 되었음
3. 성북구 관련 연구
□ 국내에 발표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종암동, 월곡동, 장위동, 석관동의 지명 및 역사에 대한 연구자료는 다음과 같음
제목 |
지은이/발행자 |
년도 |
성북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
1993 |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
성북문화원 |
1998 |
서울의 잊혀진 마을 이름과 그 유래 |
국학자료원/서울문화사학회 |
1999 |
성북 주택재개발 백서: 종암구역 주택재개발 사업 |
서울특별시 성북구[편]/ 서울특별시 성북구청 도시개발과, |
2002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
2008 |
길음동 |
서울역사박물관 |
2009 |
지명이 품은 한국사: 지명 유래 서울ㆍ경기도 편 |
이은식/타오름 |
2010 |
<참고문헌>
『길음동』, 서울역사박물관, 2009.
『성북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1993.
『성북 주택재개발 백서: 종암구역 주택재개발 사업』, 서울특별시 성북구[편], 서울특별시 성북구청 도시개발과, 2002.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지명 유래 서울ㆍ경기도 편』, 타오름, 2010.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8.
성북문화원 홈페이지 <http://www.tour.isbcc.or.kr/index.php>.
장위2동 홈페이지 <http://jw2-dong.seongbuk.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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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월 성북구의회 의원 김일영, 주민의 어려고 불편하곳은 개선해주고, 민원은 끝까지 해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일부를 의정보고서에 담아보았습니다★***김일영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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