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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6.04 03:06 | 수정 : 2013.06.04 08:46
- 송창섭 이코노미조선 기자
가장 막강한 학맥은 회원 수만 800명에 달하는 와튼스쿨(펜실베니아대) 동문회이더군요. 와튼스쿨 동문회는 ‘MBA 해병 전우회’로 불릴 만큼 조직이 탄탄하고 결속력도 끈끈합니다. 하버드대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비즈니스스쿨(경영대학원) 등은 물론 학부 졸업생 동문회, 박사과정 동문회, 최고경영자과정(AMP) 동문 모임이 별도로 꾸려져 있을 정도로 활동적입니다.
- 와튼스쿨(펜실베니아대)전경/ 와튼스쿨 홈페이지 캡쳐
이런 학교 네트워크를 넘어 이번 취재를 하면서 저는 지면(紙面)에 소개하지 않았지만, 재벌 오너들과 2~3세들의 학교생활과 그들만의 ‘도련님 문화’의 단면도 파악하게 됐습니다. 몇가지 특성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①성공 이룬 아버지·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
먼저 이들 재벌 2~3세들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하더군요. ‘경외’(敬畏)라는 말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구분하면, 두려움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가부장(家父長) 스타일의 아버지 밑에 있는 자녀를 떠올리면 될 듯 합니다. 모든 재벌 오너 자제들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상당수가 그런 고충을 토로하더군요.
아이비리그(Ivy League·미국 동부 명문대학) 대학을 졸업한 한 중견그룹 회장 아들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밝다가도 부친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굳어지곤 합니다. 심지어 같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친구들이 부친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내 앞에서 웬만하면 회사나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말라”며 정색하며 얼굴을 붉힌다는군요. 당연히 그런 모습에 친구들은 놀랐죠.
-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모건홀.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 캡처.
그래서 한번은 친구들이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유를 물어봤답니다. 그랬더니 이 재벌 2세는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통제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지금 만큼은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다”라고 말했답니다. 재벌가 특유의 엄한 가풍에다 어디만 나가도 ‘모 그룹 회장 자식이네’라는 소리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것이 너무 듣기 싫고 부담이 된다는 것이죠. 미국으로 유학 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는군요.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 말이죠.
여러 외국 대학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기업 2~3세 자제들은 평소 학교 내에서 자신의 신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 ‘누구 자식이네’라는 것이 공개되면, 학교생활이 너무 불편하고 피곤해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군요.
입학 전 제출하는 ‘에세이’에만 자신의 부모가 어떤 분이며,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게 된다면 가업(家業)을 이렇게 발전시키겠다는 식의 내용을 담을 뿐 학교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대부분 입을 다문다고 합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선일보 DB
②예의바르고 공손한 스타일, 외부 접촉 하지 않고 혼자 보내는 시간 많아
두 번째 특징은 거의 예외없이 ‘공손하다’는 사실입니다. 보수적인 가풍에서 자라다보니 상당수 재벌가 2~3세 자제들은 외형상 매우 예의 바르고 공손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재벌 2~3세들의 삐뚤어진 일탈적 생활과는 거리가 멀지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여러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동문들에게 이 부회장의 학창시절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혹시 가십거리라도 될 만한 일화가 있는지 확인해 봤으나, 동문수학한 대다수가 “이 부회장이 하버드대 학창시절 너무 조용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군요. 어떤 분은 이렇게 귀띔하더군요.
“수업에는 어느 누구보다 진지하게 참여했지만 그 외 시간에는 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보였어요. 자신이 잘못 처신하면 아버지에게 누(累)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겠죠. 그래선지 이 부회장은 지금도 국내에서 열리는 동문 모임에 절대 참석하지 않아요.”
③아버지 회사는 물론 한국행(行)도 꺼리는 2~3세들
마지막 특징은 졸업 후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2~3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일반인들이 보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굴지의 대기업을 물려받는 것이 부러운 일로 보이지만, 정작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즘 대기업 2~3세들은 초·중·고는 물론 대학·대학원까지 외국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던 이들이 졸업 후 조직문화가 경직된 한국 기업에 들어가 가업 잇기를 꺼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할 수만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진단하더군요.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회사로 들어가 말단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경영수업이야 제대로 받을 수 있겠지만 치열한 내부 경쟁은 물론, 성과에 대한 내·외부의 부담스런 시선까지 생각하면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닐 것입니다.”
최근 재벌 2~3세 상당수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 전 외국계 컨설팅사 근무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고충에서 비롯됐다는군요.
-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 조현상 효성 부사장. (왼쪽부터)
가급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본인 스스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 만한 역량을 쌓기 위해 시간을 갖고 준비하는 전략이지요. 글로벌 컨설팅회사 AT커니에서 일한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과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장남), 베인앤컴퍼니 컨설턴트 출신의 조현상 효성 부사장(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3남) 등이 이런 사례에 해당합니다. 지금도 국내 주요 컨설팅회사에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재벌 2~3세들이 상당수 근무 중입니다.
몇몇 대기업 오너들은 학업을 마친 자녀들을 당장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개인 사업을 직접 해보도록 권장하기도 합니다. 구자홍 LS미래원 회장이 그렇습니다. 구 회장의 아들인 구본웅씨는 스탠퍼드대 경제학과와 MBA 졸업 후 대학동기 3명과 함께 하버퍼시픽캐피털이라는 펀드를 운용한데 이어 지금은 벤처캐피탈 회사(포메이션8)를 세워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교에서 배운 벤처 관련 노하우와 기법을 잘 살려 그룹 성장을 측면지원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경영 능력을 키웠으면 하는 구 회장의 바람과 기대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취재과정에서 재계 오너나 CEO는 물론 고위 임원들도 외국, 그것도 미국 아이비리그나 서부 명문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농후해지고 있더군요. 실질적인 공부의 강도(强度)를 떠나 ‘어느 대학(또는 MBA)을 나왔네’하는 간판 중시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데, 이왕이면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등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문 대학을 졸업해야 나중에 이력서 한 줄을 쓸 때도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겠지요.
얼마 전 국내 굴지의 유통 재벌 3세가 하버드대의 정식 학위를 받지 않은 채 ‘단기 경영과정’을 수강했음에도 공시(公示)보고서 등 대외 이력에 하버드대를 졸업한 것처럼 기재했다가 큰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도 다 학벌을 중시하는 풍조로 말미암아 빚어진 웃지못할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