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초기불전연구원 / 편집:cafe.daum.net/mobuddhism
위빠사나선
사마타란 무엇인가
위빳사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남방 수행의 두 핵심 용어인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사마타와 대가 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samatha는 √śam (to be quie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원 의미는 ‘고요함, 맑음’ 등이다. 모든 해로운 상태[不善法]가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止로 옮겼다. 이 단어는 삼매(samā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8가지 선정의 경지(samāpatti, 等持) ― 네 가지 색계 禪(아비담마에서는 5禪으로 나눔)과 네 가지 무색계 禪 ― 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 cittassa 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사마타/禪/삼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숙지하고 있어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혼란없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첫째, 禪의 경지는 결코 깨달음의 경지(출세간)가 아니라는 것이다. 禪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이요 과정이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을 보는 데도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 할 명제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禪은 사마타의 경지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마타만으로는 결코 번뇌를 멸할 수가 없다.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안으로 들여다봐서(內觀 = in-sight = vipassanā) 번뇌를 꿰뚫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야 하겠으나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위빳사나(내관)는 禪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禪이 없이 위빳사나만 닦는 것을 숙카 위빳사나(sukkhavipassana, 마른 위빳사나)라고 부르며 경에 나오는 혜해탈(慧解脫, 빤냐 위뭇띠, paññā-vimutti)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禪(특히 무색계禪)과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 해탈한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俱分解脫, 우바또 바가 위뭇띠, ubhatobhāga-vimutti)이라 부르는데 초기경(M65/i.439; M70/i.477)에도 나타나는 술어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禪定수행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으며 선정을 닦은 사람은 반드시 번뇌멸을 위한 내관을 닦아야 해탈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같이 닦은 자는 신통을 갖추지만 위빳사나만 닦아서 해탈한 자는 신통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번뇌멸이라는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행법이라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북방의 간화선이 묵조선을 묵묵함에 빠져있는 경지로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4/5禪이 바탕이 되어야만 다음의 四處 즉 무색계 四禪에 도달할 수 있다. 무색계선은 모두 색계 4/5禪을 닦아야 도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까시나 수행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4장의 까시나 수행편을 참조할 것)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무색계선을 제4/5선에 포함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셋째, 이런 수행을 『청정도론』에서는 사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이 없이는 번뇌멸의 위빳사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없는 위빳사나는 사실 불가능하다.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고서 어떻게 미세한 번뇌를 관찰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꿰뚫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위빳사나를 강조하는 주석서들에서도 카니까 사마디(kha.nika-samādhi, 刹那三昧)라 하여 어떤 식으로든 禪定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자세한 것은『아비담마 길라잡이』9장 §29의 해설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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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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