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Myanmar; Burma) |
이전에 버마(Burma)로 알려졌던 미얀마는 세계에서 서구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외국 여행객들에게 미얀마는 과거부터 전혀 변하지 않은 사회, 정치, 경제의 바탕 위에 형성된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나라이다. 1962년 독재군부가 정부와 경제를 장악한 이래 미얀마는 사실상 바깥 세계와 연락을 끊었다. 90년대 초 외국인들에게 관광문호를 개방하였고, 최근에는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미얀마를 여행해야 하는가? 1962년 이래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는 군사 위원회의 최근 이름인 SLORC(국가 법질서 재건 위원회; State Law & Order Restoration Council)는 정말 지긋지긋한 이름이다. 통치집단으 로서 SLORC는 수세기 동안 미얀마에 존재했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초기 왕들부터 마지 막 왕인 티보오(Thibaw)까지 대부분의 미얀마 군주들은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절멸시키고 권력을 차지했다. 많은 점에서 미얀마는 여전히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보다 백년이나 뒤져있다. 20세기 초기까지만 태국,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행해졌던 강제부 역인 코르베가 미얀마에서는 여전히 실시되고 있다.
몇몇 그룹에서는 관광산업이 미얀마의 독재를 도와준다고 믿으면서, 외국인은 미얀마를 방 문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국제적인 방문은 난민이나 반 정부 활동가들에게만 초점을 맞춘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미얀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국제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뉴스매체도 1989년 외국인 투자와 관광을 개방할 때까지 35년 동안 미얀마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1990년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뽑혔지만 활동이 허가되지 않자, 이들이 망명하여 결성한 ‘버마연합 연방정부’에서는 ‘여행자들이 뿌리는 돈은 미얀마 일반인들의 경제 향상에 도 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SLORC의 금고만 채워주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미얀마를 여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싶어하고, 미얀마 인들의 곤경을 알리고 싶어하는 의식있 는 인사들과 조직들은 SLORC가 여행정책을 완화한 후에 큰 용기를 얻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민연맹(NLD)의 대변인 아웅산수지(Aung San Suu Kyi)는 ‘1996년 미얀마 방문의 해’ 때 외국인들은 이를 보이콧트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사정권이 있는 한 결코 방문해서는 안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얀마 방문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돈을 사용해서 미얀마 경제에 도움을 줄수록 미얀마의 독재정권은 더 오래 지탱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 다. 반대로 미시적이지만 마음씨 좋은 미얀마 사람들은 관광산업으로 그들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기 때문에, 관광업의 쇠퇴는 자동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패키지투어 필수조건(패키지 상품을 구입해야지만 미얀마 비자를 발급했었다)이 없어진 이래로, 많은 미얀마 사람들은 늘어나는 여행객들로부터 보통사람들도 돈을 벌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믿게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국민들에게 행해지고 있는SLORC의 공포정치를 지속시키고 바깥 세계로부터 미얀마를 격리하 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처음에 정부는 관광산업에 제약을 두었다. 론리플래닛 저자들의 생각은 만약 미얀마를 스스로 여행하거나 혹은 정부가 주선하지 않는 투어에 참가했다면 가능한 사전에 많은 정보를 준비해서 갈 것을 추천한다. |
국명: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 ; 1989년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명을 바꾸었다. 버마는 미얀마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이름이다) 면적: 671,000 sq km 인구: 4860만명(인구 성장율 2.1%) 수도: 양곤(Yangon; Rangoon; 인구 400만명) 인종: 버마인 65%, 샨족 10%, 카렌족 7%, 라킨족 4%, 그 외 친, 까친, 몬, 중국계, 인도계 등이 소수 민족으로 있음 언어: 버마어를 비롯하여 카렌, 친, 샨, 까친 등의 방언 종교: 테라바다 불교 87%, 기독교 5%, 무슬림 4%, 정령신앙 3% 정체: 군사 정부 수상 및 국가원수: 탄쓰웨 장군(General Than Shwe)
미얀마의 면적은 671,000 평방킬로미터이다(한반도의 3배). 태국과 방글라데시 사이에 끼여 있으며 북쪽으로 인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토의 중앙부는 넓은 강과 광활한 평야가 차지하고 있으며, 동쪽의 태국 국경과 북쪽으로는 산맥들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 있는 산맥은 히말라야 산맥의 가장 동쪽 끝에 해당된다.
미얀마 대부분의 농업지역은 2000 km에 이르는 아예야와디(Ayeyarwady) 강(이전 명칭은 이라와디- Irrawaddy) 주변의 충적 평야에 형성되어 있다. 아예야와디 강은 미잇지나(Myitkyina)의 북쪽 27 km 지점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른 다음 거대한 삼각주를 통과하여 양곤의 남서쪽에 있는 마르따반(Martaban) 만으로 들어간다(북부 안다만 해). 다른 주요 강으로는 친드윈(Chindwinn), 깔라단(Kaladan), 싯또웅(Sittoung)과 중국에서 시작하여 미얀마와 태국 국경을 따라 흐른 다음 모올라민(Mawlamyine)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타늘윈(Thanlwin)이 있다. 메콩 강이 미얀마와 라오스 국경에서 발원한다.
미얀마 북쪽에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 있으며, 미얀마와 티벳의 바로 국경에 있는 카까보라지(Hkakabo Razi)는 5889미터나 된다. 바간의 서쪽 라킨(Rakhine)쪽으로 3053미터의 빅토리아 산(Mt Victoria)이 솟아 있다. 비교적 건조한 평야가 양곤의 북쪽에 꽤 널게 자리잡고 있지만,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맥들이 미얀마의 중앙평야와 이웃 나라들을 분리시키고 있다.미얀마는 목재, 보석, 천연가스, 광물이 풍부하며, 이것들이 모두 미얀마의 군대인 땃마도오(Tatmadaw)의 돈을 만드는 원천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명 변경 1988년 소요 이래 정부가 마구잡이식으로 변경시킨 지명은, 과거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위해 실시된 것이다. 그 결과 국명도 버마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바뀌었다. 정부에 따르면 `미얀마'는 버마족의 나라로 인식되는 국가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채택되었다고 한다; ‘버마’는 ‘바마르(Bamar)’의 영어식 와전으로 버마족만을 뜻하는 단어이다. ‘미얀마’는 적어도 13세기의 마르코폴로의 저서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지명을 변경하면서 로마자 표기법이 일상적으로 국민들이 사용하는 발음에 가깝게 바뀌었다. Myanmar’라고 표기할 때 마지막에 있는 ‘r’은 단지 그 앞에 있는 모음 ‘a’를 길게 발음하기 위한 영국식 영어의 표기법을 따른 것으로 발음되지 않는다. ‘미얀마’를 사용하는 국영기업들은 전형적으로 그들의 상호에 `r'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Myanma Airways, Myanma Five Star Line, Myanma Timber Enterprise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우기는 5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지속된다. 그 이후 몇 달은 날씨가 꽤 좋은 편이다. 사실 만달레이(Mandalay)에서는 밤에 꽤 추우며, 깔로오(Kalaw)에서는 거의 얼음이 얼 정도이다. 2월 중순부터 우기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는 꽤 기온이 많이 올라간다. 미얀마 인들의 신년은 4월이며, 이 때가 가장 더운 계절이다. 미얀마 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때 쉬면서 놀고, 물싸움을 한다. 11~2월이 미얀마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게절이다.
몬(Mon)족이 이 지역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현재 태국까지 미쳤었다. 몬족은 현재 미얀마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버마족들이 티벳 고원에서 9세기 경 북쪽으로 이주해 오자 보금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아노라따(Anawrahta) 왕이 1044년 바간(Bagan)의 왕위를 계승하고, 1057년에 타똔(Thaton)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미얀마 역사에서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빼앗아 온 전리품들은 바간을 전설적인 도시로 만들었으며, 그는 또한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미얀마 문자를 만드는 것을 지원했다. 비록 정령신앙인 nats를 믿고, 그런 믿음이 생활 속에 반영되고 있지만, 오늘날 미얀마 인구의 90%가 불교도이다.
아노라따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허영심을 반영하는 엄청난 규모의 바간 건설에 돈과 힘을 부은 결과 13세기에 미얀마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287년 당시 13,000 개의 파고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간을 쿠빌라이칸이 약탈함으로써 그 멸망이 앞 당겨졌다. 14세기에 미얀마의 역사는 이 웃 국가인 시암과의 전쟁, 그리고 연속적으로 발생한 작은 종족 간의 싸움으로 얼룩졌다.
유럽인이 아시아에 왔을 때도 미얀마 인들은 교역보다는 싸움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미얀마 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 간의 싸움이 결과적으로 이웃 벵갈에 있는 라즈(Raj)를 침범하게 되었고, 영국이 그들의 식민 영토를 조용히 유지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3번에 걸친 침입(1824, 1852, 1883년) 끝에 영국은 모든 미얀마를 차지했다. 영국은 철도를 놓고, 미얀마를 세계 제일의 쌀 수출국으로 만들었으며, 큰 티크 시장도 개발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실수는 많은 중국인과 인도인을 이주시켜 상업적인 마인드가 덜 한 미얀마 인들을 착취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처럼 미얀마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들에 의해 처음으로 해방의 기회를 가졌지만 인도네시아에서처럼 그들은 곧 쫓겨났다. 전쟁 중에 생긴 30인 동지회(Thirty Comrades)가 전쟁 후에 아웅산(Aung San)을 지도자로 하여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1947년 아웅산은 대부분의 장관들과 함께 암살 당했다. 1948년에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지만 미얀마의 통일은 힘들었으며, 각 분파로 갈라진 부족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곳곳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우누(U Nu)가 독립 직후 ‘Social Nibbana’를 목표로 하는 불교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시도하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하지만 1962년 네윈 장군이 이끄는 좌익 군대가 정권을 장악했다. 정권이 무너진 후 우누는 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네윈은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도입했지만 미얀마는 계속 퇴보했다. 네윈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국유화 했으며, 심지어 구멍가게도 국유화가 되었다. 그 결과 미얀마는 경제적으로 아주 빨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얀마 인들은 자연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그들의 경제가 비틀거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미얀마의 무너진 경제는 오랜 동안 고통을 받은 후에 1987년과 1988년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으며, 국민들은 무능력하고 오만한 정부에 대해 더 이상의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대로 변하여 길로 나섰으며, 네윈의 사임을 주장했다. 1988년 7월 마침내 네윈이 사임했지만, 그 다음달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대모대와 군사정부 지지자 간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여 6주 동안 3천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했다.
네윈의 국민연합당(이전의 버마 사회주의학습당)은 정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시위는 그를 이은 두 명의 대리인이 통치하는 동안 계속 되었다. 세 번째로 정권을 차지한 네윈의 계승자는 1988년 9월 군사쿠테타를 통해 정치 일선에 나섰으며, 그 쿠테타는 네윈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새로 생긴 국가 법질서 재건위원회(SLORC)는 육군 사령관인 소오마웅(Saw Maung) 장군의 지휘 아래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9년 5월 민주적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했다. 야당의 연정이 재빨리 만들어졌고, 민주주의 국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달부터 지칠줄 모르는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오랫 동안 억압을 받았던 미얀마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가진 NLD의 대변인 아웅산수지(51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녀는 민족의 영웅인 아웅산의 딸이었다. 이에 신경이 쓰인 SLORC는 양곤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시를 꾸미는 등 대중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의 행정구역을 바꾸어 선거과정을 방해했다. 그리고 선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아웅산수지를 가택연금했다.
이런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국민연합당은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투표인단의 85%를 획득한 NLD에 대패했다. 그렇지만 군부는 그들의 국회의원 자리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고, 대부분 정당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후에 대부분이 풀려났다. 아웅산수지는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 7월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여전히 양곤 이외의 미얀마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녀는 미얀마를 떠나면 반대급부로 주어질 자유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녀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군부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간주되어 조심스러운 낙관설이 대두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진전도 없었으며 양자 간에 서먹함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가 보여주는 모든 행동을 감안할 때 평화적 정권교체는 절대 없을 것이다. 다수의 미얀마 국민들이 군사정부에 대해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있든지 말든지 간에 통치자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내부 관찰자의 말에 의하면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인도네시아 스타일의 체계로 움직였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오간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군부가 안정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정치권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US$ 310억 1인당 국내총생산: US$ 676 연 성장률: 6.4% 인플레이션: 25% 주요 생산품: 티크, 쌀, 황마, 불법 아편 주요 교역국: 싱가포르, 태국, 중국, 일본, 인도
미얀마는 사원의 나라이기 때문에 여행자는 마치 절들을 순례하는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장소를 방문할 때는 반드시 말끔한 옷을 입어야한다(반바지나 나시티는 착용금지). 미얀마 인들은 여행자들에게 사원 경내에서 신발을 벗기를 요구하는데, 만달레이 언덕에서는 계단의 아주 아래쪽부터, 스웨다곤 빠야에서는 가게들이 형성되어 있는 시장터부터, 그리고 심지어 바간의 유적지에서도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과 양말을 벗은 다음에는 함께 들고 다니도록 한다.아시아 어느 곳에든지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한다(어떤 문제에 화를 내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놀라는 이들이 있다.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얀마 인들은 지나친 애정 표현 뿐만 아니라 단순히 화를 내는 것에 대해서도 눈살을 찌푸린다.다른 불교 국가에서처럼 머리는 신체에 있어서 가장 높은 부분이다(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도).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만진다던가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발은 신체에서 가장 낮은 부분이므로, 발로 다른 사람을 지적하면 안된다.불상은 성상이므로 사진을 찍기 위해 불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지 않도록하며, 절대 불상에 기어올라가면 안된다.스님은 여자들과 신체적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만약 여성이 스님에게 뭔가를 건내주려면 손으로 직접 전달하지 말고, 스님의 손이 닿는 곳에 물건을 놓아 두어야 한다.
미얀마 국민의 약 87%가 테라바다 불교도이다. 하지만 지신에 대한 정령신앙인 낫(nat)에 대한 믿음도 강하며, 고원에 사는 많은 부족들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통용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영어가 그 중 하나에 속한다. 미얀마 문자는 상당히 기묘하며, 대부분 폐곡선처럼 보인다. 만약 미얀마 어(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를 배우고 싶으면, 론리플래닛의 포켓용 Burmese phrasebook를 참고하기 바란다.
미얀마 음식에는 미얀마, 몬, 인도, 중국 음식의 각 종 요소들이 영향력을 미쳤다. 쌀(흐따민; htamin)은 미얀마의 주식으로 다양한 종류(생선, 닭고기, 새우, 양고기)의 카레(hin; 힌) 중 하나와 함께 먹는다. 미얀마 인들은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거의 먹지 않는데, 쇠고기는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는 민속 신앙인 낫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카레는 아시아의 고추 영향력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순한 편이다. 사실 대부분 요리사들은 조리할 때 고추를 사용하지 않고 생강, 마늘, 소금, 양파를 섞어서 만든 카레용 가루인 마살라(masala)에 많은 양의 콩기름과 새우 으깬 것을 첨가하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한다.
매운 맛은 고추, 타마린드, 마른새우 가루 등을 섞은 발라차웅(balachaung)을 카레 먹을 때 쳐서 먹거나, 새우 으깬 것을 고추, 마늘, 양파와 함께 콩기름에 튀긴 매우 매운 응아삐초오(ngapi kyaw)를 함께 먹음으로써 추가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미얀마는 음력을 따른다(1년 12달). 그래서 전통 공휴일과 축제일의 양력 날짜는 매년 변한다. 그리고 미얀마에는 근래에 생긴 공휴일도 많은데, 이는 모두 양력을 따르므로 매년 날짜가 고정되어 있다. 미얀마에서 축제는 매우 인기가 있고 모두가 즐기는 큰 행사이다. 축제는 대부분 음력 보름에 절정을 이루지만, 며칠 동안 계속될 수도 있다.
독립 기념일 1월 4일─중요한 공휴일의 하나로 양곤에 있는 간도오치(Kandawgyi) 호수에서 7일 동안 축제가 열리며,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역시 축제가 열린다.
통일 기념일(Union Day) 2월 12일─보초께 아웅산이 미얀마의 다양한 부족들을 통일한 업적을 기념하는 날이다. 통일 기념일 전 2주 동안 전국의 각 마을을 돌며 깃발 퍼레이드가 펼쳐지며, 깃발이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축제가 벌어진다.
스웨다곤(Shwedagon) 축제 2월/3월─미얀마에 있는 가장 큰 파고다에서 벌어지는 축제
농부의 날 3월 2일
국군의 날 3월 27일─퍼레이드와 불꽃놀이로 축하한다. 1989년 이래로 땃마도오는 국군의 날에 죄수들 을 사면하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었다.
석가 탄신일 4월/5월─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날과 열반에 든 날도 동시에 기념한다. 그래서 ‘三祝日’로 알려져 있다. 석가탄신일 축제를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은 양곤에 있는 스웨다곤빠야이다. 사원의 서쪽에 있는 보리수에 물을 주기위해 소녀들이 줄을 지어 오지 항아리를 운반한다.
노동절 5월 1일─비록 정부가 1989년 사회주의 포기를 선언했지만, 미얀마에서는 여전히 노동절을 축하하고 있다.
불교도 고행기간 6월/7월─3개월 동안 계속되는 고행기간 동안 스님들은 수도원을 떠날 수 없으므로, 신도들이 수도원에 사는 스님들을 위해 몇 벌의 법복을 갖다 준다. 일반인들도 역시 이 기간 중에는 좀 더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지내야하며, 결혼이나 이사도 하지 않는다.
순교자의 날 7월 19일─1947년 보초께 아웅산과 그의 동료들이 암살당한 것을 추모하는 날이다. 양곤의 스웨다곤빠야 북쪽에 있는 아웅산 국립 묘지에서 헌화 행사를 가진다(1983년 10월 19일 낮 12시 58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방문 중 이곳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한국의 외교사절 및 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축제 7월/8월─스님에게 기부금을 내야하는 사람을 제비로 뽑는다. 만약 만달레이에 체류하게 된다면, 낫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떠들석한 축제가 7일 동안 계속되는 북쪽으로 30km 떨어진 따웅비온(Taungbyone)에 가보기 바란다.
보트 경주 9월/10월─우기가 절정에 이르면, 미얀마 전역의 강, 호수, 심지어 연못에서도 보트 경주가 펼쳐진다. 이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인레 호수이다. 불상이 있는 파웅도오우차웅(Phaung Daw U Kyaung)에서 거대한 왕실 바지선인 까라웨익(Karaweik)을 타고 호수를 도는 의식이 진행된다.
빛의 축제 9월/10월─부다가 설법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미얀마 전역에서 3일 동안 축제가 지속되며 석유 램프, 연등, 촛불, 심지어는 평범한 전등까지 빛을 밝힌다. 모든 가정에서 집 밖에 종이등을 걸며, 전체 미얀마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들뜨게 된다.딴자웅다잉(Tazaungdaing)
10월/11월─또다른 종류의 `빛의 축제'로 특히 산 주에서 축하하며, 따웅치에서는 불풍선(fire balloon) 대회가 벌어진다. 그리고 몇몇 지역에서는 밤 동안 천 빨리 짜기 대회가 열린다. 미얀마 처녀들은 해거름에서 새벽까지 부처의 모습이 들어가는 법복을 만들면서 그들의 천 짜는 솜씨를 뵤여준다. 완성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법복은 스님에게 기부한다. 가장 규모가 큰 대회는 양곤에 있는 스웨다곤빠야에서 열린다.
까테인(Kathein) 10월/11월 - 불교도 고행기간의 마지막 한 달 동안 사용할 법복과 생필품들이 수련자에게 전달된다. 많은 이들은 간단히 현금으로 이를 대신하는데 빠데타(padetha)라고 불리는 꽃 모양으로 만든 나무통에 돈을 접어서 넣은 후 수도원에 기부한다.
National Day 11월 말/12월 초
혼령 축제 11월/12월
크리스마스 12월 25일─미얀마가 불교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 카렌 족을 위해 공휴일로 정해 져 있다.
카렌족 신년 12월/1월─국가 공휴일로 여겨지고 있다. 미얀마 전역에 사는 카렌 족들이 스스로 만든 전 통 웃옷을 사롱 스타일의 붉은색 아랫도리인 론치스(longyis) 위에 입고, 민속춤을 부르거나 노래 공연을 하며 축하한다. 가장 큰 축제는 양곤 바로 북쪽에 있는 카렌족 교외주택지구인 인세인(Insein)과 까인 주의 수도인 빠-안(Pa-an)에서 벌어진다.
아난다(Ananda) 축제
12월/1월─바간에 있는 아난다빠또에서 벌어진다.
비자: 비자가 있어야지 입국할 수 있다. 주한 미얀마 대사관: 용산구 한남동 723-1(전화 792-3341), 근무시간 09:00-12:00 & 13:00-17:00, 토요일 휴무 시간대: 미얀마가 한국보다 2시간 30분 느리다. 태국에서 아침 9시면 한국은 11시 30분이다. 전 압: 220V, 50 Hz(정전될 때가 자주 있음) 도량형: 영국식 도량형을 쓰고 있다. 도량형 환산표(영문) 외래관광객: 1994년 6만 5천명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경비 및 환전
통화: 찻(Kyat) 환율: US$1 = K6.25 (공식 환율), K125 (암시장) 일반 경비:
- 저렴한 현지 식사 : US$2~3
- 레스토랑에서 식사: US$5~7
- 최고급 식당 : US$10 이상
- 저렴한 숙박지: US$5~7
- 중급 호텔 : US$8-12
- 최고급 호텔 : US$30 이상
현재 미얀마를 여행하는 것은 1988~1989년 사이 발생한 반정부 소요 이전에 여행하는 것보다 싸다. 여행 경비는 어느 지역을 방문하는가, 그리고 어떤 호텔에서 자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말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을 벗어나면 더 싸게 여행할 수 있다.
상품이나 서비스는 찻이나 미국달러/FEC로 가격이 매겨진다. 호텔방, 몇몇 기차표, 비행기표, 자동차 렌트, 가이드 비용 등은 일반적으로 달러/FEC로 받는다(그리고 이들 중 몇몇은 오직 달러/FEC만 사용할 수 있다). 식사, 택시, 버스 등 기타 일상생활에 필요한 돈은 찻으로 지불한다. 이러한 이중 통화체재 때문에 책에서 다루는 가격도 상황에 따라 미국달러와 찻을 모두 표기했다; 달러로 표기한 모든 가격은 역시 FEC로 지불할 수 있다.
일일 경비/ 현재 호텔업이 민영화 되었기 때문에 미얀마의 여행자 지역에서 1인당 최저 US$5에 방을 구할 수 있다. 배낭족 여행자들에게 이 요금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 비교해 볼 때 비싸다. 하지만 라오스나 베트남과 비교해 보면 거의 같은 수준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은 전액을 찻으로 지불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숙박비는 1인당 K75~K200까지 내려간다.
MTT에 의해서 운영되는 독점 서비스(양곤-만달레이 사이의 고속기차와 만달레이-바간 사이의 고속보트)를 제외하고 일반 대중교통수단은 비싸지 않다. 하지만 너무 느려 장거리 이동에서 하루에 차비로 US$5 이상을 치르는 거리를 가기는 힘들다.
워낙 선택권이 많기 때문에 정확한 일일 경비를 책정하기는 힘들지만(특히 여행 허가가 필요한 지역에 가느냐 마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이난다) 바닥 생활을 한다면 하루에 US$10 정도를 쓰면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가장 싼 방과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고속기차나 고속보트는 이용하지 않는), 호텔 식당이나 외국인들을 위해 마련된 식당보다는 로컬 식당이나 찻집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물가 상승/ 미얀마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25~30%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가격들은 여행할 때 아마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은 전형적인 미얀마 찻집에서 파는 차 한 잔값의 상승률을 따져보는 것이다. 찻값은 미얀마 전역에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4년 차 한잔에 K6이었으며; 그 다음해에는 K8이었다.
이러한 추세라면 1997년 중반에는 아마 K11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트라이쇼의 1회 승차 가격은 K200이지만, 아마 여행할 즈음에는 K260 정도로 인상되어 있을 것이다.
통화 찻(kyat)은 100 파(pya)로 나뉘어지는데 자난 수년 동안 찻의 가치 폭락으로 이제 파 동전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환전하기에 좋은 곳은 MTT 사무실로 은행보다 영업을 더 오래한다.정부는 때때로 큰 단위의 화폐를 유통금지 시키는 일을 반복한다.
이 이론에 따라 큰 돈을 가진 사람이 잘 못 돈을 가지고 있다간 돈이 법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적은 값어치밖에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정부는 특정한 금액의 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간단히 선언해 버린다.현재 사용되는 찻 지폐는 다음과 같다: K1, K5, K10, K15, K20, K45, K50, K90, K100, K200, K500. K50 또는 K100 짜리 돈을 받을 때 ‘Central Bank of Myanmar’라고 짝힌 것만 받고 ‘Union of Burma Bank’라고 찍힌 돈은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암시장을 약화시키기 위해 1960년대 K50와 K100가 유통금지 되었으며, 1987년 K25, K35, K75짜리 지폐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질이 나쁜 환전상들은 종종 이러한 사용할 수 없는 옛 지폐를 의심을 하지 않는 여행자에게 환전할 때 끼어 넣는다. ‘버마’라고 찍힌 돈 보다는 ‘미얀마’라고 찍힌 돈들이 대부분 문제의 소지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도록 한다.
FECs(외환 증서)/ 양곤 국제공항의 이민국을 통과하자마자 여행자는 한 창구에서 300 미국달러를 미얀마의 두 번째 법적 통화인 300 FECs로 바꾸어야 한다. 중국에서 인쇄된 이 전매품 같은 지폐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미얀마 중앙은행에서 US$1, US$5, US$10, US$20에 상응하는 돈을 발행한 것이다.
FECs는 오직 미국달러나 영국파운드 현금, 여행자수표, 신용카드로만 구입이 가능하다(글을 쓰는 시점에 공항에서는 신용카드로 구입이 불가능했다). 1 미국달러는 언제나 1 FEC와 그 값어치가 같으며, 파운드의 경우는 파운드와 미국달러의 환율에 따라 결정된다.
찻을 달러나 파운드로 재환전은 오직 금액이 US$300를 넘어야지만 가능하고, 그리고 FEC 구입 영수증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FEC는 어디에서나 사용이 가능하다. 미얀마 국민은 아무런 증명서나 허가증 없이 FEC를 받을 수 있는데, 달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공식적으로 숙박비, 비행기, 미얀마 철도(몇 개 역에서), 그리고 큰 가게에서는 달러나 FEC 아무 것으로나 지불이 가능하다.
그래서 US$300의 FEC 구입 요구를 굳이 피할 필요가 없는데, 호텔 비용을 지불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FEC는 또한 법적으로 자유시장 환율에 따라 찻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가게나 환전소에서도 FEC를 취급한다. 한편 미얀마 여행을 위해서 FEC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FEC를 구입하지 않고 공항을 빠져나오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여행이 가능하다.
양곤 공항의 FEC 창구에 있는 직원들은 새로 도착하는 모든 사람들을 창구 앞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크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은 FEC를 구입하지 않고 쉽게 청사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 부탁하면 커플은 각각 US$300을 구입하지 않고, 둘이 합쳐서 US$300만 바꾸어도 된다.
정말 복잡한 이 시스템은 경화인 ‘FE’(외국 통화를 뜻하며 한 단어처럼 에페로 발음)를 쥐어보려는 꿈을 가진 보통 미얀마 사람들(정부도 마찬가지)의 머리 속을 사실상 맴돌고 있다.
미국달러/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에페’는 미국달러로, 미얀마 제 3의 통화로 유통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미얀마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통화이다. 달러 현금은 법적으로는 오직 허가증을 가진 장소에서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모든 상인들은 달러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달러는 암시장에서 찻으로 환전할 수도 있다.
환전 FEC 시스템이 있는 상황에서 아주 낮은 공식 환율로 환전을 하려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환전을 하는 사람은 바보다). 어떤 허가증도 없이 미얀마 사람들이 FEC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더 이상 공식환율과 그 대신에 암시장에서 바꾸면 얼마나 이득을 볼까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과거에 방콕 공항의 면세점에서 조니워커나 담배를 사서 암시장에 내다 팔아 이윤을 챙기던 일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현재 이렇게 하면 손해를 보게된다. 이 두 가지 상품은 현재 양곤이 방콕보다 싸다.
미얀마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비가 가장 적게오고 상대적으로 조금 덜 더운 11~2월 사이이다. 반대로 산악지역이나 라킨 해안은 3~5월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 이 시기에 바간이나 만달레이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끈끈한 날씨가 이어진다. 미얀마에 여행자가 가장 적은 시기는 5월, 6월, 9월이다.
태국과의 국경지대에서는 밀수업자, 반군, 난민, 정부군 등을 모두 조심해야한다. 특히 만달레이 북동쪽에 위치한 골든트라이앵글은 여행하지 않을 것을 권한다. 양곤, 만달레이, 바간, 인레호수 이외의 지역에서 가이드를 동반하라거나 혹은 통과증의 제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각 지방의 여행 허가는 끊임없이 변하고 누가 검사하는냐에 따라서도 여행 여부가 결정된다. 미리 정보를 구해 알아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만, 운이 크게 좌우한다. 남들이 많은 가지 않는 곳을 여행한다면 통과증과 관련하여 곤욕을 치를 작정을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주요 여행지
양곤(Yangon; Rangoon)
이전에 랭군(Rangoon)으로 불렸던 양곤이 미얀마의 수도가 된지는 채 100년도 안된다. 바다에서 강을 따라 30 km 올라온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진짜 볼거리 중 하나인 거대한 파고다가 있지만 도시 전체는 다소 초라하고 쇠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황폐해 보이는 넓은 도로와 건물들은 비록 SLORC의 명령에 의해 새로 단장을 했지만 여전히 낡고 볼품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약간 넉넉하고 호의적이라는 첫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밤에 거리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과 커다란 시거와 여행자들이 곧 구입하게 될 서구 담배를 파는 가판대 등으로 가득차 활기를 띄게 된다.
양곤의 미얀마 수도로서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영국이 고지 미얀마를 정복하고 마지막 미얀마인 왕국의 중심지였던 만달레이가 무너진 1885년에야 수도가 되었다. 영국이 정복하기 전에 양곤은 바고, 삐예, 타똔(Thaton) 등의 도시와 비교할 때 매우 작은 타운이었다. 1755년 알라웅빠야(Alaungpaya) 왕이 저지 미얀마를 정복하고 당시 다곤(Dagon)으로 알려진 자리에 양곤을 세웠다. 양곤은 ‘투쟁의 종식'을 뜻하는데, 왕은 다소 허황되지만 그의 저지 미얀마 정복과 더불어 그의 투쟁이 끝나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영국인들은 양곤에 도착해서 현재 보이고 있는 상태로 도시계획을 다시 했으며, 이름도 랭군으로 바꾸었다.
스웨다곤 빠야(Shwedagon Paya) 언덕에서 전체 시가지를 압도하고 있는 스웨다곤 빠야는 미얀마에서 가장 성스러운 절이다. 높이가 거의 100미터나 되어 비행기를 타고 양곤을 드나들 때 하늘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미얀마를 통과해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황금점으로 보인다
(얼마나 신기한가!). 금탑이 미광을 발하고 날씨도 조금 선선한 이른 아침이나 초저녁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밤에 깐도오치(Kandawgyi) 호수 건너편에서 탑의 반사된 빛을 바라보는 것도 인상적이다. 1587년 한 유럽인은 탑의 ‘경이로운 거대함’에 대해 쓰면서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금도배를 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스웨다곤은 주변은 어둠을 배경으로 금빛을 발하는 밤에도 낮만큼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비록 그 이전에도 분명히 탑이 있었지만 현재 탑은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8천개 이상의 금판이 탑을 덮고 있으며, 꼭대기는 5천개 이상의 다이아몬드와 2천개가 넘는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파고다 주변에는 82개의 다른 건물들이 있어 탑의 장엄함을 더해주고 있다.
경내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거대한 종이 있는데, 일이 서투른 영국인들이 반출하려다가 양곤 강에 빠트린 것이다. 영국인들은 종을 꺼낼 수 없자 미얀마 인들에게 소유권을 돌려 주었으며, 미얀마 인들은 아주 많은 양의 대나무를 이용하여 종을 뜨게 만들었다.
스웨다곤의 공식 입장료는 US$5이며, 여기에는 스뚜빠 내 승강기를 이용하는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승강기는 외국인용과 내국인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만약 아침 7시 이전에 가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술레빠야(Sule Paya) 도심의 한복판에 서있는 2천년이 넘은 46미터의 술레빠야는 밤에 아주 멋있는 곳으로 콤플렉스 내부를 밤에 네온 불빛으로 밝힌다.
국립 박물관 Strand 호텔의 모퉁이 Pansodan (Phayre) St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지만 양곤에서 시간이 남는다면 한 번 볼 만한 곳이다. 3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윗층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제일 아래층에는 보석과 왕실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위의 두 층에는 미술품과 고고학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는 US$5이며, 월~금 10:00~15:00에 문을 연다. 사진을 찍으려면 K5를 내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재 정부가 새로운 국립박물관을 인도네시아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에서 가까운 외무부 근처에 있는 Pyay Rd에 짓고 있다. 언제 완공될 것인지에 대한 발표는 없지만, 새 박물관이 문을 열면 Pansodan St에 있는 박물관은 문을 닫고 모든 전시물을 옮겨갈 것만은 분명하다.
기타 볼거리 보따따웅 빠야(Botataung Paya)의 탑에 거울 미로가 있다. 양곤에는 노천 시장이 있으며, 넓은 보초께아웅산 시장은 언제 가봐도 흥미진한 곳이다. 깐도오치 호수 주변을 걷는 것도 아주 쾌적하며, 호수에 있는 떠다니지 않는 거대한 까라웨익(원래는 왕실 바지선) 식당을 방문할 수도 있다. 현지인들의 주목을 받는 까라웨익(Karaweik)은 왕실 바지선의 철근콘크리트 복제품이다. 또한 양곤에는 영국인들이 미얀마에 사는 동물들을 모아서 만든 동물원이 있다. 일요일이면 뱀을 부리는 사람과 코끼리가 공연을 한다.
마하위자야 빠야(Maha Wizaya (Vijaya) Paya)는 스웨다곤 빠야의 남문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균형이 잘 잡힌 체디 모습을 하고 있다. 1980년 미얀마에서 테라바다 불교가 통일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네팔의 왕이 체디의 유물 방을 위해 성유물을 기증했으며, 미얀마의 실권자인 네윈이 11층의 띠(hti; 파고다의 꼭대기에 있는 우산 모양의 장식)를 얹었는데, 이는 스웨다곤에 있는 띠보다 2층 높은 것이다.
까바아예 빠야(Kaba Aye Paya; 세계평화 파고다)는 시내에서 북쪽으로 11 km 떨어져 있는데, 1950년대 중반 불교 창시 2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진 것이다. 거대한 와불상이 있는 차욱땃치 빠야(Chaukhtatgyi Paya)도 근처에 있다.
양군에서 당일치기로 갔다오기 좋은 곳은 작은섬 파고다가 있는 차욱딴(Kyauktan)이다. 좀 더 먼 곳으로는 2~3시간 보트를 타고 강과 운하를 따라 가야하는 도자기 마을인 뜨완떼(Twante)가 있다.
삼륜자전거/ 사이-까아(sai-kaa)로 불리는 미얀마식 삼륜자전거는 킬로미터당 1인 용금이 K15 정도한다. 현재 자정에서 10:00 사이에 큰 길에서 삼륜자전거는 다닐 수 없다. 실질적으로도 골목길이나 교통량이 적은 곳에서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차와 트럭의 범람으로 시내 전역에서 운행이 금지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달레이(Mandalay)
만달레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미얀마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문화 중심지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약 50만명이다. 비교적 최근인 1857년에 세워졌다. 건기에 덥고 먼지투성이인 만달레이는 더러운 도로, 삼륜자전거, 마차가 어우러져 아주 흉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다.비록 만달레이에도 몇 가지 볼거리가 있지만, 이 ‘삭막한 도시’ 주변에 훨씬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만달레이의 지역전화번호는 02번이다.
만달에이요세
달레이 요새민돈민(Mindon Min) 왕은 1857년에 성으로 둘러싼 인상적인 궁전의 건설을 명령했다. 그리고 만달레이 농수로에서 물을 끌어와 해자를 채웠다. 1945년 3월 20일 1942년부터 만달레이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군과 진격해 오는 영국과 인도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나는 전투 중에 요새 안에 있던 궁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었다.
몇 년 전에 아주 큰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현재 모습으로 완공을 보았다(대부분 콘크리트로 건물을 짓고 알루미늄 지붕을 올렸기 때문에 멋있지는 않다). 복원 공사는 차출한 노동력을 이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대부분 기결수들이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몇몇 현지 시민들도 강제로 노동을 했다. 그래서인지 방문자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새로운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만달레이 언덕 걷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지붕이 있는 계단을 통해 맨발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왕궁, 시가지, 그리고 탑들이 산재해 있는 농촌경관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다.
꾸톤도오 빠야(Kuthodaw Paya) 불경이 새겨진 대리석 석판이 안치된 작은 사원이 729개 있는 파고다로 중앙탑을 합치면 그 수가 730개가 된다. 1860년 민돈 왕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책으로 여겨진다. 역시 많은 석판이 안치되어 있는 바로 앞에 있는 산다무니 빠야(Sandamuni Paya)와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아뚜마시차웅(Atumashi Kyaung)도 역시 만달레이 언덕 발치에 있다.
스웨난도오 차웅(Shwenandaw Kyaung) 한 때 민돈 왕의 궁전의 일부였던 목조 건물로, 왕이 죽은 후에 현재 장소로 옮겨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왕궁에 있던 건물들이 2차 대전 중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만달레이에 남아 있는 전통 미얀마 건축의 아주 훌륭한 본보기로 꼽히고 있다. 차욱또오치 빠야(Kyauktawgyi Paya) 만달레이 언덕 밑에 있는 파고다로 민돈 왕이 지은 또다른 건축물이다. 대리석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1만명의 남자들이 13일 동안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하무니 빠야(Mahamuni Paya) 아라깐 파고다라고도 불리는 마하무니 탑은 타운의 남쪽에 서 있다. 거대하고 많은 이들이 숭배하는 라킨 스타일의 불상으로 유명한데, 두꺼운 금박이 불상에 입혀져 있다. 중앙 파고다 주변에 있는 방들에는 5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징(gong) 하나와 크메르 스타일의 동으로 만든 인물상들이 있다. 파고다 바깥의 길에는 불상 제조자들이 잔뜩 자리잡고 있다.
아시아의 진짜 볼거리 중의 하나인 바간(이전에는 Pagan으로 표기)은 믿기지 않는 파고다와 사원들이 있는 도시로 황폐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만달레이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아예야와디의 강둑에 자리잡고 있다. 바간의 전성기는 아노라따왕이 타똔(Thaton)을 점령하고 미술가, 장인, 스님, 코끼리 30마리분의 불경을 뺏아온 1057년에 시작되었다.그 후 200년 동안 많은 수의 장엄한 건물들이 세워졌지만, 1287년 원나라의 쿠빌라이가 도시를 파괴한 후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1975년에 있은 지진이 큰 피해를 입혔지만, 모든 중요한 건물은 현재 모두 복원된 상태이다.
불행하게도 서구의 골동품 수집가들을 찾기 위해 바간 같은 곳에 오는 도굴꾼들이 유적지를 계속 훼손시켜왔다. 하지만 분명히 바간은 미얀마에서 꼭 들려봐야 할 곳이다.
타라바(Tharaba; 사라바-Sarabha)門/ 동쪽 성벽에 있는 정문의 잔해로 9세기에 있었던 성벽의 일부분 이었던 곳이다. 오래된 치장 벽토의 자국이 여전히 문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은 크게 숭배되고 있는 남매 낫(nat)이 수호하고 있는데, 남자(Lord Handsome)는 오른쪽에, 여자(Lady Golden Face)는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아난다 빠또(Ananda Pahto)/ 1091년에 세워진 것으로 바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길고,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또한 가장 숭배받는 절이다. 4개의 입불상과 두 개의 성스러운 부처 발자국이 안치되어 있다. 입방체의 중심에서 밖을 보고 있는 9.5미터나 되는 네 개의 입불상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네 명의 부처를 나타낸다. 삐아토(Pyatho; 12월 중순~1월 중 순) 보름에 거대한 파고다 축제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을 아난다로 끌어 들인다. 탓비인뉴 빠또(Thatbyinnyu Pahto)/ 바간에서 가장 높은 절로, 거대한 건물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아래층과 윗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위에 있는 방은 부분적인 층에 해당하는 세 개의 시카라(sikhara)가 있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세 개의 테라스가 그곳에 만들어져 있다.
고오도오빨린 빠또(Gawdawpalin Pahto/ 역시 바간 마을에 가까이 있는 고오도오빨린은 탓비인뉴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1171~1211년 사이에 지어진 이 절은 1975년 지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있다. 밍갈라체디(Mingalazedi)/ 축복의 스뚜빠로 알려진 밍갈라체디는 1277년에 지어졌다. 왕국이 망하기 전 거의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탑으로 바간 건축술의 마지막 영화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각형을 이루는 테라스에 만들어 놓은 부처의 전생을 그려놓은 광택이 나는 타일조각과 균형미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망갈라체디는 오후에 동쪽에 있는 모든 유적지들을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스웨산도오 빠야(Shwesandaw Paya)/ 원통형 스뚜빠로 경사가 아주 급한 5층의 테라스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주변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스뚜빠에 붙어 있는 건물에 20미터짜리 와불이 있다. 스웨산도오 빠야와 망갈라체디 두 곳이 현재 고고학지대에서 올라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이다.
스웨지곤 빠야(Shwezigon Paya)/ 웨ㅅ치-인(Wetkyi-in) 마을과 니야웅우 사이에 있는 전통적으로 금박을 입힌 파고다로 아노라따 왕 때부터 있어온 것이다. 스뚜빠에 있는 우아한 종은 이후에 미얀마에 있는 모든 스뚜빠에 만들어진 종의 모델이 된 것이다.
마누하 빠야(Manuha Paya)/ ‘포로가 된(captive) 왕’으로 알려진 마누하 왕이 지은 절로 미인까바(Myinkaba) 마을에 있다. 불상들이 들어가기 힘든 곳에 동봉된 채 안치되어 있으 며, 왕이 자신이 겪었던 불편했던 포로 생활을 우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인까바에서는 우수한 칠기공방들을 방문할 수 있다.
바고는 양곤에서 만달레이행 철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80 km 떨어져 있다. 몬 족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로 강이 하로를 바꾸기 전까지 아주 중요한 하항이었다. 강의 유로 변경과 더불어 1757년 라이벌인 미얀마 왕의 침략으로 도시는 몰락했다. 스웨모오도오 빠야(Shwemawdaw Paya) 大金佛塔(The Great Golden God Pagoda)은 1930년 지진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양곤에 있는 스웨다곤 빠야보다 14미터 높다. 벽에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슬픈 이야기들을 그려 놓았다. 탑의 북동쪽 모서리에 있는 띠(hti; 탑의 꼭대기에 있는 우산 모양의 장식물)도 주목할 만한데, 1917년 지진 때 떨어진 것이다. 외국인 입장료는 US$3이다.
스웨타늘야웅(Shwethalyaung) 거대한 와불로 방콕에 있는 것보다 9미터나 길다. 게시판에 엄지 발가락을 비록한 각 부분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다. 외국인 입장료는 US$3이지만, 방문해 볼만하다.
공식적인 규칙이나 여행지로써의 감흥을 생각해 볼 때 미얀마에서 여행자 루트를 벗어나 다른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현지 교통편도 그렇게 매끄럽게 운행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모험을 위해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다면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여행이다.
빠테인은 아예야와디 삼각주에 있는 빠테인 강의 동쪽 둑에 있으며, 양곤에서 서쪽으로 190 km 떨어져 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곤을 제외하곤 삼각주에 있는 가장 중요한 항구이다.아름다운 강변, 시장, 우산 공장, 화려한 빠야 등이 있어 하룻밤이나 이틀 정도 머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또한 차웅타에 있는 작은 해변 리조트나 북쪽 라킨 주에 있는 탄드웨 등으로 가는 입구 역할도 한다.강변에서 가까운 빠테인의 다운타운 중앙에 있는 스웨목또오 빠야(Shwemokhtaw Paya)는 거대한 종 모양의 스뚜빠이다. 띠(우산 모양의 장식)의 꼭대기층은 6.3 kg의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중간 층은 순은, 아래층은 동으로 만들어졌다. 3개층 모두 도금이 되어있으며, 소문에 의하면 전체 띠에 843개의 다이아몬드 조각, 843개의 루비 그리고 1588개의 기타 보석들이 박혀있다고 한다.
셋떼오 빠야(Settayaw Paya)는 빠테인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몇 개의 빠야 중 가장 아름 다운 탑이다. 탑은 부처님이 동남아시아의 내륙을 돌면서 전설적인 설법을 전하던 중에 해 탈을 하고서 남긴 신비한 발자국에 헌정된 것이다. 빠야 경내에는 잘 만들어진 사당인 따자 웅(tazaungs)들이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낮은 산이 있다. 약 25개의 우산 공방이 시의 북쪽 Mahabandoola Rd 주변에 흩어져 자리잡고 있다. 우산의 색은 매우 다양한데, 꽃, 새, 기타 자연물을 주제로 한 밝은색의 우산도 있다. 비가 올 때 사 용할 수 있는 우산 중 하나는 샛노란색의 스님용 우산으로 이틀 동안 송진을 입혀 방수를 한 것이다.
타톤(Thaton)
바간이 형성되기 이전 몬 왕국이 이곳에서 번성했으며, 멀리 캄보디아까지 교역을 했다. 현재 고대도시의 성벽과 파고다 일부분이 남아있다. 그리고 시내 중심가에는 콜로니얼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관개수로를 따라 형성된 운하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타톤은 바고와 모올라민 사이에 있어 두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편들이 모두 통과한다. 근처에 있는 타익칼라(Taikkala)에는 폐허가된 요새의 성벽이 남아있으며, 파고다 유적도 있다.
식민지 후기의 쇠퇴한 분위기가, 빨리 발전하는 양곤이나 만달레이보다 모올라민에서 훨씬 잘 느껴진다. 또한 모올라민은 한쪽은 바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스뚜빠가 서 있는 언덕의 능선이 이어지는 매혹적이고 푸르름을 간직한 열대 도시이기도 하다. 몬(Mon) 문화 박물관은 이 지역 몬 족의 역사를 위해 헌정된 박물관이다. 시의 동쪽, 북에 서 남으로 뻗은 언덕에 다섯 개의 수도원과 사당이 있다. 제일 북쪽에 있는 마하무니 빠야 는 모올라민에서 가장 큰 절이다. 전형적인 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벽돌로 포장된 보도는 다양한 광장과 사당들을 연결하고 있다. 능선을 따라 좀 더 남쪽으로 오면, 시에서 가장 높 고 눈에 가장 잘 띄는 차익타늘란 빠야(Kyaikthanlan Paya)가 있다. Rudyard Kipling이 그 의 시 ‘미얀마 소녀(Burma girl)’ Mandalay 부분 첫 행에서 지칭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 다; ‘By the old Moulmein Pagoda, lookin' lazy at the sea’.차익타늘란 아래에는 100년이나 된 세인돈미바야 차웅(Seindon Mibaya Kyaung)이 있는데, 미얀마 최후의 왕인 티보오민(Thibaw Min)이 군력을 잡은 후, 민돈민(Mindon Min) 왕의 부인이었던 새인돈 왕비가 은신처로 사용했던 수도원이다. 그 다음 남쪽에는 은박과 금박을 입힌 채 외롭게 서 있는 아웅테익디 체디(Aung Theikdi Zedi)가 있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능선의 서쪽으로 난 전망대에서는 시내 전체가 보이며, 일몰 구경이나 저녁에 시원한 바람을 쐬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다. 모올라민의 중앙시장인 제이치(Zeigyi)는 못따마(Mottama)행 부두 바로 북쪽에 있는 Lower Main Rd의 서쪽면에 있으며, 아주 산만한 곳이다. 강웅세끼운(Gaungse Kyun)은 일반적으로 영어로는 ‘샴푸 섬’으로 알려진 곳으로 모올라 민의 북서쪽 끝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이다. K150에 보트를 전세내서 섬에 갈 수가 있다.
삐예(Pyay; Prome)
도로를 따라 양곤의 북쪽으로 7시간 가거나 혹은 하항보트를 타고 밤을 새워 가면 나타나는 삐예는 아예야와디가 급하게 굽어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근처에 테에킷따야(스리끄세뜨라)의 수도였던 고대 삐유(Pyu)의 유적지가 있다. 비록 19세 기에 미얀마에서 가장 집중적인 고고학 발굴이 행해진 곳이지만, 현재 아주 소수의 여행자 만 외진 곳에 자리잡은 이 유적지를 방문하고 있다. 작은 타운인 삐예의 중심부에는 여행객의 흥미를 끄는 스웨산도오 빠야(Shwesandaw Paya) 가 있다. 언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양곤의 스웨다곤 빠야처럼 언덕 아래의 길에서 스뚜 빠가 있는 곳까지 승강기가 운행되고 있다(K1). 미얀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체디 중 하나이 며, 특히 언덕에 자리잡은 것이 상당히 두드러져 보인다.
므라욱유(Mrauk U; Myohaung)
한 때 미안마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의 중심지였던 므라욱유는 깔라단 강의 지류인 아웅닷차웅(Aungdat Chaung)의 양안에 걸쳐있으며, 해안에서는 내륙으로 72 km 들어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왕국의 역사가 3천년이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라키네 왕인 민조오문(Minzawmun)이 므라욱유(미얀마 발음으로는 ‘Myauk U’이다)를 세운 것은 1433년이다. 운하망을 발달시켜 심지어 대양을 항해하는 큰 배들도 도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원래 도시는 황폐화되어 있으며, 벽돌, 나무, 짚 등으로 지은 간단한 건물들이 있는 작고 형편없는 타운이 옛 도시 바로 옆에 붙어있다.므라욱유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는(취향에 따라서는 가장 나쁜 때가 될 수도 있다) 5월 중순 대규모의 빠야쁘웨(Paya Pwe; 파고다 축제)가 벌어질 때이다.
산 주의 동쪽 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차잉똥은 와, 산, 아카, 라후 족의 마을로 둘러싸여 있다. 아주 조용한 타운이지만 산 주에서 퀸 문화의 역사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작은 호수 주변에 지어져 있으며, 오래된 절들과 페허가 된 영국식 콜로니얼 건물들이 산재 해 있는 차잉똥은 산 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운이다. 차잉똥을 여행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오직 태국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1996년 외국인들이 사이(Sai) 강에 있는 다리를 건넌 다음 따칠렉(Tachilek)을 경유해서 북쪽의 차 잉똥에 가는 것이 다시 허가되었다. 3박 4일 투어를 매사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나 여행사를 통해서 예약할 수 있다. 혹은 국경 에서 US$18를 치르고 FEC를 US$100 바꾸면 혼자서도 3박 4일을 여행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이 FEC는 호텔에 방값을 낼 때나 암시장에서 찻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껭뚱에 있는 이민국에서 US$ 36을 지불하면, 세 달까지 허가증을 연장할 수 있다. 국경에서 차잉똥까지 가는 동안 산, 아카, 와, 라후 마을을 지나면서 그들의 생활을 잠깐 볼 수 있다. 미얀마의 현재 정치나 경제적 사정이 극복된다면, 차잉똥과 따웅치 사이의 도로도 곧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개방될 것이다. 현재는 미얀마 국민들만 오직 이 도로를 오갈 수 있다. 양곤 정부와 여러 갈래로 찢어진 산 주의 몽따이(Mong Tai) 군대 사이의 전투 때문 에 껭뚱-따웅치 간의 여행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웅치에서 차잉똥까지는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이틀이 소요된다(우기에는
종종 4~5 일이 걸리기도 한다). 밤을 새는 곳은 로일렘(Loilem), 꾼힝(Kunhing), 몽삥(Mong Ping)이 며, 각각의 장소에 초라한 게스트하우스와 아주 기본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들이 있다.
미얀마는 레저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하이킹은 몇 군데서 즐길 수 있지만, 대부분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전거는 만달레이에서 인도제나 중국제를 경우 빌릴 수 있는 수준이다.
다이빙: 다이빙 투어는 거의 없다. 유일하게 다이빙 투어가 있는 지역은 미엑(Myeik) 제도이지만, 투어는 보통 태국의 푸켓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몇 군데 다이빙 포인트가 확인되었고, 차후 몇 년 안에 다이빙이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태국에서 Three Payas Pass로 일일투어를 다녀오는 것이나 태국의 매사이에서 미얀마의 껭뚱으로 5일투어, 그리고 중국에서 단체 여행을 오는 것을 제외하고, 육지나 바다를 통해 미얀마로 입국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비행기로 미얀마를 출입국하며, 그나마 양곤에 취항하고 있는 항공사의 수도 아주 적다.
비행기 미얀마에 가는 항공편엔 몇 개의 중요 노선이 있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일 반적인 태국의 방콕에서 왕복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태국에서 방글라데시, 인디아 또는 네팔을 가는 길에 미얀마에 들리는 것이다─많은 여행자들이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대 륙으로 넘어갈 때 미얀마를 몇 주 정도 여행한다. 세 번째 가능성 캘커타에서 미얀마를 왕 복으로 다녀오는 것이다.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쿤밍도 순환식으로 여행할 때 출국 목적 지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방콕은 미얀마행 비행기표를 구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방콕쯂양곤 왕복 요금은 보통 타 이항공 US$230, MAI(Myanma Airways International) US$220한다. 그리고 비만방글라데시 항공의 경우는 US$144까지 요금이 떨어진다. MAI의 경우 방콕-양곤-캘커타를 비슷한 가격 에 연결하며, 방콕-양곤-카트만두 코스는 약 US$200 정도한다.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쿤 밍에서 왕복 요금은 각각 US$250 정도한다. 방콕항공(Bangkok Airways)은 1990년대 초반 치앙마이와 만달레이 사이에 정기적으로 잠 깐 취항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전세 비행기만 운항하고 있다. 미얀마의 새로운 민영 항공사 인 만달레이항공(Air Mandalay)은 조만간에 치앙마이, 치앙라이에 취항할 계획을 가지고 있 다. 현재 만달레이항공은 태국에 있는 이들 도시로 전세 비행기만 운항하고 있다.
한국 현재 직항편은 없으며, 타이항공을 이용해서 방콕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빠르다. 다른 방법으로는 오사카를 경유하는 ANA을 이용할 수 있다.
태국 타이항공이 현재 방콕쯂양곤 사이를 매일 오가고 있다. 비록 같은 노선의 MAI보다 약간 비 싸지만, 타이항공의 출발시각이나 서비스가 훨씬 낫다. MAI는 매일 양곤쯂방콕 사이를 오가며, 홍콩에는 주 3회, 싱가포르에 주 4회, 쿠알라룸푸르 주 2회, 다카 주 1회 취항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비만방글라데시항공(Biman Bangladesh)이 방콕-양곤-다카(치타공 경유) 사이를 주 1회 취 항하고 있다. 연착과 결항이 잦지만 가장 싼 비행기이다. 만약 다카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 라면, 양곤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비만방글라데시의 창구에서 바우처를 받도록 한다; 사실 이 바우처는 방콕에서 받는 것이 가장 좋다(또는 비행기표를 구입할 때). 중국 에어차이나(Air China)가 쿤밍과 양곤 사이에 주 1회 737을 취항하고 있다. 만약 중국을 여 행한 후 동남아시아로 간다면 이 노선은 아주 경제적인데, 중국 서부에서 동쪽에 있는 홍콩 까지 갔다가 다시 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쪽의 방콕으로 오는 번거러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싱가포르 싱가포르항공의 자회사인 실크에어가 주 4회 양곤과 싱가포르 사이를 오간다.
리컨펌(예약 확인) 만약 예약해 놓은 날에 양곤을 떠나고 싶다면, 공항에 있는 항공사 창구나 타운에 있는 항 공사 사무실 중 한 곳에 가서 반드시 리컨펌을 해야된다. 가지고 있는 티켓에 공식적으로 컨펌(ok 상태)이 되어 있어도 반드시 리컨펌을 다시 해야된다. 공항의 대기실에 반드시 리 컨펌을 하라는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다. 만약 리컨펌을 하지 않으면(양곤을 드나드는 모든 항공사의 비행기에 해당됨) 출국하는 비행기 좌석의 확보를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성수기 (11~2월)에는 양곤을 떠나는 모든 비행기가 의도적으로 예약초과 상태를 만들때도 있다.
출국세 출국세는 US$10이며, 달러나 FEC로 지불할 수 있다. 첵인하기 바로전에 출국세를 걷는다.
미얀마 내를 돌아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든지 간에 확실성이 없으며 편안하지도 않다).
미얀마에는 활주로가 66 군데 있으며, 그 중 23 군데에 정규 국내선이 취항하고 있다. 대부분 짧은 단일 활주로로 한 번에 오직 한 대의 비행기만 이착륙할 수 있다. 착륙 유도장치를 사용하는 곳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비록 23개 비행장이 모두 전천후 비행장으로 여겨지고 있어도, 우기인 5~11월 사이에는 착륙이 상당히 까다로울 수도 있다.
양곤 외곽 바고에 건설하고 있는 새로운 국제공항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B-29 폭격기가 사용했던 비행장이다. 만달레이와 헤호(Heho)에 있는 공항에는 곧 활주로들이 추가 건설될 것이며, 승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확충될 것이다.
공항 1994년부터 특별한 허가증이나 가이드 증명서가 없는 미얀마 인은 공항에 출입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현재는 공항을 떠날 때까지 택시 운전사들이 접근하지 않는다. 입국장 바로 바깥에 있는 호텔 창구에서 양곤까지 버스는 1인당 US$3, 택시는 US$5(4명까지)에 주선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 주선하는 버스나 택시는 승객들을 Bogyoke Aung San St에 있는 기차역 앞에 내려준다. 몇몇 호텔들은 공항에 있는 창구에서 예약한 투숙객들에 한해 무료로 교통편을 제공한다. 공항 밖에 있는 주차장에서 거의 폐차에 가까운 일반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원하는 곳까지 US$4에 데려다 준다.
양곤에서 공항으로 갈 때는 찻을 내고 택시를 탈 수 있지만, 가격은 암달러 시세 환율의 달러로 지불하는 것과 거의 같다. MAI의 아침 비행기를 이용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하는 것을 제외하곤 미얀마를 떠나는 것은 입국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MAI의 셔틀버스는 비행기 출발시각에 비해 너무 일찍 픽업하러 오기 때문에 승객들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든다. 셔틀버스는 Strand Hotel에서 출발하여 시내 대부분 지역을 거친 다음 민갈라돈(Mingaladon)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간다.
MAI를 타기 위해 택시를 타면 한 시간 정도는 더 잠을 잘 수 있다. 양곤의 다운타운에서 공항까지는 작은 마즈다로 K250 (자유시장 시세로 US$2.50 정도), 그리고 편안한 대형차로는 K300~350 정도한다.만약 통일기념일(2월 12일)에 양곤을 떠난다면 공항에 무조건 정오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 이후로는 퍼레이드에 참가하지 않는 모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된다.
버스·트럭 일반적으로 국영 도로교통공사(Road Transport Enterprise)에서 운영하는 버스는 복잡하고, 낡았으며, 운행 시각도 믿을 수가 없다. 현재 외국인들은 양곤-만달레이-바간-따웅치를 잇는 도로 안이나 그 주변에 있는 어떤 목적지에 대해서도 찻을 이용하여 모든 등급의 버스표를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태국 국경에 가까운 ‘갈색 지역’을 제외하곤 이외의 지역으로 가는 버스도 역시 쉼게 이용할 수 있다.
최근 2년 동안 교통산업의 민영화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새로운 민영회사의 에어컨 고속버스들이 양곤에서 메잇띨라(Meiktila), 페, 만달레이, 따웅치에 운행을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고속버스들은 스피드와 가격 양쪽에서 미얀마 철도청의 고속기차에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버스는 운행 중에 식사를 위해 정차도 한다. 버스와 기차의 또다른 큰 차이는 버스표는 찻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달러/FEC로 가격이 고시되어 있다면, 이는 자유시장 환율을 적용한 찻요금과 대개 같다. 버스 요금은 외국인과 미얀마 인이 같다.
보통 20명의 승객과 추가로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일제 픽업트럭을 개조하여 짐칸에 나무 좌석을 만든(태국의 송태우와 비슷) 차도 많다. 기차 양곤과 만달레이 사이을 오가는 특별 급행기차를 제외한 일반 기차는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더럽고, 느리며, 시각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며, 전압이 약하여 밤에는 상당히 어둡다. 특실(1등석과 같은 의미)이나 1등석(2등석과 같은 의미)으로 여행하면 좀 더 편하다.주요 여행 루트를 제외하고, MTT를 통하여 기차표를 구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기차역에서는 MTT에서 반드시 표를 구입해야 하는 외국인에게 표를 팔지 않는다. 해결 책은 기차역에 있는 현지인에게 표를 사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MTT가 감시하지 않는 몇몇 기차역에서 별 어려움 없이 창구에서 기차표를 구입했다.
하항보트(Riverboat) 舊Irrawaddy Flotilla Company가 남긴 많은 수의 하항보트들이 여전히 미얀마의 주요 강에서 운항하고 있다. 이들 보트들의 가장 큰 결점은 스피드인데, 같은 목적지인 경우 도로로 갈 때보다 3~4배나 더 오래 걸린다. 미얀마에는 8000 km에 이르는 가항 하천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강은 아예야와디 강이다. 건기에도 삼각주에서 북쪽의 브하모까지 운항이 가능하며, 우기에는 미잇키나까지 갈 수 있다. 다른 중요한 강으로는 양곤을 아예야와디와 이어주는 뜨완떼 운하(Twante Canal)와 바간의 약간 위쪽에서 역시 아예야와디 강과 합쳐지는 친드윈(Chindwinn) 강이 있다.
여행자들이 정규적으로 이용하는 하항보트 노선은 별로 많지 않다. 가장 잘 알려진 노선은 만달레이-바간 사이로 일주일에 두 번 아침 일찍 만달레이를 출발하여 바간의 바로 북쪽에 있는 니야웅우(Nyaung U)에 도착한다. 만약 느린 로컬보트를 타면 바간에서 페나 양곤까지 가는 것도 가능하다. 바간에서 페까지 내려가는데 이틀이 소요되며, 거기서 보트를 갈아타고 다시 이틀을 가면 양곤에 도착한다.
배 비록 장애물들이 힘을 빠지게 만들지만, 국영 Myanma Five Star Line(MFSL)의 배를 이용하여 미얀마 해안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MFSL는 21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으며 한 달에 두 번씩 양곤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운항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8척의 배만 승객을 태우고 있다. 배의 출발시각은 달 단위로 변경되며, 양곤에 있는 MFSL 본점의 게시판에 그 일정이 게시되어 있다.
남행 배는 양곤에서 이틀 걸리는 꼬오토웅(Kawthoung)까지 정기적으로 운행하고 있으며, 종종 다웨이(Dawei)와 미예익에도 간다. 북행 배는 탄드웨(양곤에서 꼬박 하루 걸림), 차욱삐유(Kyaukpyu; 1박)을 거쳐 싯뜨웨(5시간 더 걸림)에 간다. 종착지인 싯뜨웨에서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오는 화물선과 만난다.
MFSL의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배로 여행할 수 있다는 허가증을 반드시 MHT에서 받아야하며, 최대 2주까지 배의 운행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서 미얀마를 여행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로컬교통수단 미얀마의 대도시에는 시내버스인 까아(kaa), 삼륜 자전거 사이-까아(sai-kaa), 마차인 미인뜨흘레이(myint hlei), 성능 좋은 택시(taxi), 오토릭샤와 비슷한 ‘세 바퀴’라는 뜻을 가진 최신의 작은 삼륜 오토바이인 토운베인(thoun bein), 그리고 '네 바퀴'라는 뜻을 가진 소형 마즈다 레이베인(lei bein), 인도네시아의 베모나 태국의 송태우처럼 이용되는 최신 일제 픽업(역시 까아라고 부른다)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다.
하지만 작은 타운에서는 주교통수단이 마차와 삼륜자전거이다. 5대 도시(양곤, 만달레이, 빠테인, 모올라민, 따웅치)에서는 주요도로를 따라 거리에 관계없이 1인당 K2 정도를 받는 정규 시내버스들이 운행되고 있다. 택시, 마차, 삼륜자전거의 경우 종종 외국인에 대해 바가지를 씌운다. 하지만 흥정을 통해 에누리도 가능하므로 미리 현지인들에게 요금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도록 한다. 운전사와 차량의 공급이 수요를 앞서고 있기 때문에 요금을 깎는 것 은 어렵지 않다. 만달레이, 바간, 삐인우르윈, 니야웅스웨에서는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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