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무더위를 짐작케 하는 2010년 예고성 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리고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던
12일과 13일 양일간으로 만세교를 건너고 문혜리를 지나 와수리 아리랑 고개를 넘어 작년 총회때
태풍으로 인하여 계획이 취소되었던 우리들의 젊은 기억과 뜨거운 피가 멈춰있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15사단 전차중대 옛터와 다목리에 위치한 지금의 전차중대를 임은재 회장님 그리고 아직까지 패턴장군의
정열을 담고계시는 박영하중대장님과 여러 회원님(모두 13분) 이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나선길이니 잘다녀 오란뜻이었는지 가는길은 더위를 씻겨주는 빗줄기가 시원하게 내렸지만
다음날은 날씨가 화창하게 개여 옛추억을 더듬고 지금의 전차중대를 방문하기 적당한 날씨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전 아쉬운 휴가를 마치고 시외버스에 몸을 실고 수많은 검문소를 지나
와수리로 향하던 그런 기억의 2차선 도로는 그어디에도 없었고 문혜리를 지나면서 울퉁불퉁 전방냄새나던 그런
비포장도 없었으며 어깨에 잔뜩힘주고 잠시 검문하겠다던 헌병의 바짓가랭이 링소리도 들어볼수가 없었습니다.
와수리까지는 시원한 4차선, 와수리서 육단리는 2차선으로 깨끗이 포장되어 오랜시간이 흘렀음을 세삼 느끼게했습니다.
와수리는 예전에 비하면 다소 확장되고 재래시장도 현대화 되었으므로 약간의 발전상은 느낄수 있었지만
예전만큼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군인들의 모습은 볼수가 없었고 휴일이었지만 적은수의 외출장병만
볼수있었습니다.
반면 육단리도 많이는 변했지만 예전의 거리를 오가는 많은수의 군인들의 모습은 그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고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육단리 주민조차도 보기힘들었으며 저녁식사 할수있는 식당하나 없을 정도로 적막감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떠나고 직업군인들은 관사생활로 들어갔으며 면회장병들은 육단리에 머물지 않으니
당연히 경제활동은 멈춰버렸겠지요 모든 상업시설이 폐업상태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습니다
이부분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도착한후 숙소는 현재 전차중대의 도움으로 2대대앞 필승회관이라는 깨끗이 지어진 군휴양시설을 이용하였고
저녁식사는 결국 육단리서 해결을 못하고 와수리를 오가며 해결을 해야만 했습니다.
마침 그날이 월드컵 그리스전이 있는날이라 기분좋은 승전보를 전해들으며 축구경기 이후에 기분좋은
몇분의 회원님들은 그옛날처럼 와수리 원정길에 나서 와수리 노래방을 점령했다는 소리는 다음날 아침에야
전해들을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비는그치고 다시 와수리로 향하여 아침을 해결한후 옛전차중대터를 시작으로 옛기억을
더듬는 여정에 올랐습니다.
여기 계시는분들에게는 약 30년의 시간이 흘렀겠지요 그러한 시간들은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자리에는 그때의 흔적은 그어디에도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단한잠을 청했던 내무반.
개울건너 돌로지어진 작은 취사반.
코틀어 막고 푸던 푸세식화장실
땡크로 밀어버린 401호를 밤새도록 망치로 두들겨 판금하던 정비고.
따쿵따쿵 소리나던 축사포 사격장
근무중 이상무를 외치던 위병소.
필자가 운좋게 살아나왔던 화재현장의 201호 진지.
이모든것들이 아련한 기억속에만 맴돌뿐 나 여기있어 하고 모습은 끝내 보여주지 않더군요.
그렇게 한동안 돌아보노라니 무성한 잡초에 스며있던 어제 내린 빗방울에 바짓가랭이만 흥건히 젖었습니다.
그때 옛위병소로 한무리의 군인이 나타나 여기는 군사시설 보호 구역이니 나가주시랍니다.
그럴때 녹음테이프 처럼 흘러나오는 말있죠? 우리가 여기 30년전에 살았던 주인들이다 하고 얘기한들
그때 이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초병들은 무슨생각을 할까요 나는 이곳이 지겨워 죽겠는데
이분들은 여기를 뭐땜에 다시 찾아 왔을까 아님 나도 제대하면 여기한번 와야지하고 생각할까요.
그건 그초병이 제대후 30년이 지나봐야 아니까 현재는 그자신도 모르고 우리 자신들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지금은 빨리 떠나고 싶지만 세월이 흐른후에는 이곳은 청하지 않는데
내마음이 이곳을 짝사랑하리라는것은 먼저 이자리를 떠난 선배들의 경험 이겠지요.
그럴때 한 선배님이 한마디하더군요 "중대장님 사단들어가면 저 유류고 뒤편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짤짤이
많이 했는데" 그때 다른 선배님왈 " 아이 선배님은 어디 유류고 뒤어서만 했나요 여기 중대 구석구석
짤짤이 안한자리가 어디있어요" 그렇게 한참 떠들고 기념촬영한후 TCPC 사격장과 전방소대가
있었던 마현리를 향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예전 흙먼지 날리던 좁디좁은 비포장길에서 이차선 포장도로로 바뀐 도로를 따라 13초소에 다다랐습니다.
예전엔 여기까지가 민간인 출입이 가능했지만 세월따라 이곳도 민간인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북한과의 관계로 인하여 출입이 엄격히 통제중이라 잠시 시간을 보낸후 절차를 거쳐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전 13초소는 헌병들이 근무를 했는데 현재는 수색대가 근무하는것같았습니다.
근무중인 초소장이 삼사 44기인가 그렇다길래 뒤차에 계시는분이 삼사 7기라 그랬더니 아이고 왕고참님
오셨다고 박영하중대장님차로 가서 "필승"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하더군요.
그렇게 재건촌 민촌을 지나 휴양소와 전방소대 자리를 멀리서 보고 전차포 사격장이 내려다 보이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앞으론 전차포사격장 뒤로는 김태문소령과 중대장님이 통제하던 전망대가 폐허로 남아있었습니다.
지금은 TCPC 사격장이 화천으로 옮겨져 여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더군요 기억을 더듬어 저기가
90미리 이동표적, 저기가 동축이동 표적 그리고 저기는 90미리 표적만들려고 미루나무 엔터베(훔치던)하던 자리 하고
기억을 더듬었지만 여기도 역시 잡초숲만 무성하였습니다 다만 동축기관총 고정표적자리는
얼마나 많은 총알을 맞았는지 아직도 풀이 돋아 나지않고 붉은 황톻흙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흙먼지를 날리는 캐터필드의 굉음과
포수!
철갑탄!
이동전차!
쏴! 라는 소리와 함께와 고막을 때리고 포구를 떠나는 포탄의 탄력적인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것 같았고 야간사격때 무표정한 얼굴의 삼청교육대도 넋을 잃게만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탐조등 조명과 이리저리 휘날리던 예광탄의 현란한 불빛들은 눈에 잡힐듯 선하더군요.
그리고 이제니까 모든걸 털어놓고 이실직고 하지만 그당시 군단 사격대회서 내리 3년을 일등한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포탄이 지나가는 이동표적 활차에 목숨을 걸고 몸을 실고는 포탄이 빗나가면
가려놓았던 가림막을 꼬챙이로 떼어내어 올백으로 만들었고 다른사단이 사격할시에는 일부로
활차를 불규칙하게 움직여 빗나가게했으며 다른 감적호에는 소주병지참해 들어가 다른사단
동기병 취하게 만들어서 실탄 손에쥐고 표적지 구멍뚫어서 점수올려 1등만든 비밀을 털어놓으니
박영하 중대장님이 금시초문이더구만요 그렇게 군단 표창받아 소령진급에 보탬되었으니
이사실이 지금와서 밝혀지면 소령진급 취소될지모르겠네요.
하여간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보면 무식하고 어떻게 보면 의리있는 무지막지한 행동이었습니다.
필자야 쫄병하사때 10발중 1발을 놓치는 바람에 포상휴가못가고 일주일동안 변소펐습니다.
근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제실력이 부족한게 아니었고 오래된 재고성 교육용탄이라 명중율이 떨어진걸
그런 형벌은 좀심했었었죠.
그자리를 떠나기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진 고조영현 선배님의 사고현장에 막걸리한잔 부어주고
말고개를 올라 정상에 전시된 우리들이 타던 M47 전차를 배경으로 사진촬영뒤 중고개를 지나고
삼거리를 지나 다목리 옛 전투지원중대에 위치한 현15사단 전차중대로 향했습니다.
오전 11시 방문약속이 되어있어 수피령 정상에 들러 잠시휴식을 취하고 전차중대위병소에
다달았습니다.
전날 육단리도착시에도 필승회관에서 현 전차대장님이하 여러 간부님들이 열렬히 환영해주었습니다만
부대도착시에도 너무나 고마웁게 저희들을 환영해주었습니다.
위병과 조장의 우렁찬 경례를 받고 연병장에 다달았을땐 전부대원이 도열하여 옛선배들을 대한 예우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방문기념촬영후 행정반에서 부대현황과 발전한15사단의 모습을 설명듣고 현제 운용중인 장비들 소개받았습니다.
물론 짐작은 했지만 예전의 M47전차는 이미 퇴역하였고 필자로서는 처음대하는 M48A5W라는 전차로 무장중이었습니다.
외형은 M48A2C와 비슷하였으나 105미리 주포에 디젤엔진 그리고 레이져사격통제 장치가 탑재 되었다더군요
그외 편제는 예전과 비슷하며 전차대장님은 소령님이 지휘관으로 계셨습니다.
이후 취사반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간단한 간담회를 끝으로 부대방문을 마쳤습니다.
어느 회원님이 출발전 화장실을 다녀와 야! 진짜 많이 변했네 우리집에는 없는 비데가 여기는 있네 라는 탄성을
지르더군요 이한가지 짧은 비유로 참석하지 못하셨던 회원님들은 부대 발전상을 짐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렁찬 부대원들의 경례소리를 뒤로하고 위병소를 나서는데 언듯 그옛날 전역신고를 하고 부대를 떠날때의
느낌이들더군요 그렇게 돌아서 올때 주용호 선배님의 한마디가 담에 또오고싶네 그한마디였습니다.
그날의 우리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은 전차병이었다면 오늘날의 우리 후배전차병은 지,덕.체.를
겸비한 온화한가운데 날카로움을 지닌 외유내강형의 믿음직한 전차병이었습니다.
준비기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많은 선물을 준비해서 가는건데 초졸하게 방문한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하루였습니다.
열렬히 환영해주신 삼국지의 유비현덕을 떠올리게하는 부대장님과 간부님들 그리고 중대원들에게 고개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항상 15사단 전차중대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슴속깊이 새기며 건강한 군생활
영위하시고 싸우면 반듯이 이길수있는 전투력을 갈고 딱으시기 바랍니다.
후배 여러분 너무 고마웠습니다.
건승하십시요.
그리고 공사다망하신 가운데 멀리 부산과 군산에서 참석해주신 두분 고참님과 여러 선배님 그리고 어려운
자리지만 참석해주신 유진선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에필로그 -
오래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곳을 이렇게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방문기를 써야지하고 마음은 먹었습니다만 대성산정기를 받고와서인지 장사가 너무잘되서
글쓸시간이 나지안아 이렇게 늦은시간에 두서없이 적어 올립니다.
역시 그곳을 떠난것은 우리들이었고 말고개 중고개 수피령을 간직한 대성산은 그자리를 묵묵히 지키고있었습니다
한적해진 육단리와 잡초만 무성한 부대자리가 좀 허무하긴 했지만 역시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었던것 같습니다.
그언젠가 그사고병만 아니었으면 지금의 전차중대가 육단리 그자리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하나의
바램뿐이겠죠 15사단에서 작계상 전차중대가 있을 자리는 육단리인데 지금이라도 원래자리로 옮겨달라고
사단장님께 건의라도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니면 박영하 중대장님 어떻게 그땅을 매입해 옛부대모양으로 복원해 병영체험관으로 사업한번해보시죠
중대막사도 짖고 취사반도 만들고 연병장 터도고르고 족구도하고 점호도 취하고 꽤괜찮은 사업이될것도 같은데요
잘만돼면 육단리 경제도 살고 누이좋고 매부좋고죠 제가 여행업계 오래있어서 그런 감각은 좀있습니다.
요즘 템플스테이 농촌체험 그런것 많이 하잖습니까?
그리고 우리모임이 활성화돼고 회원이 많이 들어오면 정기적으로 김주석 사모님 밴드를 앞세워
위문공연도 가고하면 좋을텐데 하여간 여러회원님들 많이 협조해주시기 바라고 이카페에 들어와
눈팅만하고 나가시는 분들도 많은 동참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하 회원님들 고생많았습니다.
특히 박영하 중대장님 부대방문에 힘써주신거 전체회원님들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바라마지않습니다.
그리고 사용되어진 회비는 조금 남았습니다.
정산서 만들기 보담 제가 조금더 보태서 건사한 모자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보내들릴테니 회비정산은 이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