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파바로티,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3 Tenors 공연
Sing Nessun Dorma
La donna e mobile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정말 행운아였다. 그는 집에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굽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훌륭한 목소리와 예술가적 기질을 가득 지닌 사람이었다. 다만 성악가로서 꼭 필요한 한가지 중요한 것이 부족했는데 그것은 용기였다.청중 앞에만 서면 시작부터 떨기 시작하여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목이 죄어 오며, 두다리로 서 있기도 힘들정도였다. 당연히 이러한 초조함과 긴장감은 그의 훌륭한 성대에 손상을 주기 시작했고 성악가로 성장하고 싶은 희망도 빨리 사라져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성악에 대한 열정은 매우 강해서 청중앞에서는 하지 못하는 것을 가족들을 향해서는 모두 쏟아놓았다. 아마도 어린 파바로티가 감동에 가득찬 동그란 눈을 하고 아버지의 노래를 열중해서 듣고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자태(spirotogentil)> <그대의 찬손> <그녀가 나를 믿는다(ch' ella mi creda)> <잠못이루고>등등,,,,,,,
또 그역시 어릴적부터 조아키노 로시(GioacchiniRossini)란 이름의 합창단(모데나의 음악광들로 구성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단체)에서노래를 했는데 마치경기장에서100M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는 길고도 정연한 고음을 내곤 하였다.
그 무렵 긴긴 전쟁후 모데나 극장이 다시 문을 열고 당대의 빼어난 성악가들을 앞다퉈 초대해서 성악에로의 귀한 잔치를 벌이기 시작 하였다. 카를로알베르토 카펠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악가들을 가 극장에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마그다 올리베로, 마리오 델 모나코,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줄리에타 시미오나토, 마리오 필리페치...... 그리고 젊은 성악가로 주세페 디 스테파노, 레타나 테발디, 프랑코 코렐리, 주세페 타데이 등이 있었다.
로시니 합창단은 그들의 모임에서 이런 공연들을 신랄하게 평가하였는데 어떤때는 지극히 세부적인 부분에까지 이르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 즉 올리베로의 목소리를, 그이 좁고 불쾌한 바이브레이션을 들어 만돌린 악기 용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시미오나토의 카르멘(Carmen)을 비천한 농민에 비유 하고, 델 모나코의 옽텔로(Otello)를 너무 밝은 소리라고 평가했으니 오늘 날에 비추어 볼땐 거의 시간 낭비나 다름없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어린 파바로티는 이런 대화들을 신중하게 듣긴 했으나 그들의 광적인 대화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위대한 성악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날로날로 자라나서 그의 내면은 음악과 노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채워졌다.
어느 날은 모데나에 두 명의 유명한 성악가가 방문 하였는데. 이들은 니나 팔리우기(Nina Pagliudgi)와 베니 아미노 질리(BeniaminoGigli)로<<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를 공연하러 온 것이었다.두 사람 모두 성악가로서의 전성기를 조금 넘긴 시기로 어쨌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던 때를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성공적인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하는 자들의 구두 뒷발굽소리가 높아져 특히 두가수의 신체적인 특징인 풍만한 몸집 때문에 그 장면은 정말로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아직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을 대표하는 위대한 테너도 아닌 12살의 어린 파바로티는 그들을 용감하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그는 대가들과 한번 사귀어 보고자, 또 그들의 손을 잡는 영광을 맛보고자 오랬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질리는 60세를 훨씬 넘긴 나이였지만, 매일같이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않았다. 극장 안의 한 작은 방에서 문을 잠그고는 몇가지나 되는 긴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파바로티는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달렸고 마침내 그가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정작대가 앞에 섰을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그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몇 년이나 공부를 하셨는지요?그러자 질리는 아버지와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5분전까지 이친구야"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질리와 파바로티와의 짧은 만남이었는데 그의 간결하고도 결정적인 대답은 어린 파바로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뒤 파바로티는 오늘날에 이르러 카루소이후에 최고의 성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모친상을 치르면서도 영국에서 토스카를 공연하는등 그의 성악에의 눈물겨운 사랑에 무한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바이며 그의 목소리에 반할 수 있는 우리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쟁의 상흔은 파바로티의 가슴에 60년 세월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고 이 기억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뒤돌아보게 하였고 전쟁에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하게 하였다.
수차례 열렸던 팝과 클래식의 만남으로 모데나에서 개최되었던 '파바로티와 친구들'공연 수익금이 전쟁고아재단 (War Child)을 위한 사업에 기탁되었고,"파바로티 음악원(Pavarotti Music Center)도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 목적을 위해 1997년 설립되어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인터내셔널 "국제콩쿨"을 설립하고 우승자에게 자신과 함께 무대에서는 기회를 주고 있는데 그첫 번째 시도로 우리나라의 소프라노 김영미가 무대에섯다.그뒤 파바로티의 93년 1월 내한공연에서 그 둘은 감격의 재회를 하였고 TV에 출연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의 굴지의 바리톤 최현수또한 그뒤를 이어서 1700:1의경쟁률을 뚫고 파바로티 와 루이자밀러등을 공연하였으며 또한 재 4대테너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로베르토 알라냐 또한 이콩쿨에서 두곽을 드러내었다.
그의 나이가 점점 더해가면서 그의 건강과 삶에 한 사람의 팬으로써 염려와 걱정이 앞선다. 옆의 사진에 나와 있는 알프레도 크라우스도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 파바로티와 아주 친했으며 그는 진정한 신사였으며 세기의 테너였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가 부르는 칼라프의 아리아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전율이 몰아치는 감동을 받게된다. 파바로티는이세상의 어떤 테너들보다도 축복받은 테너중의한사람이며앞서 말했듯이 그의 노래를 마음껏 접하는 우리들또한 축복받은 한사람임을 잊어서는 않되겠다.
12살의 어린 파바로티와 질리(BeniaminoGigli)와의만남에서부터 위대한 테너의 탄생은 이루어 졌으며 그가 아리고 폴라앞에서 보여준 "E"음의 가능성은 그가 하이 C음의 재왕이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는 듯 거침없이뿜어져나왔다.
실로 파바로티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는누구도해내지 못한 수많은 오페라 배역을 소화해 내었으며 그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수많은 관중이 운집하였다. 젊을적 카라얀과는 각별한 관계였으며 지금도 함께하는 마제라와 프레니와는 최고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파바로티와 미렐라 프레니, 레오네 마제라 등으로 구성되는 이 광기어린 성악 집단은 젊을적 가끔 엉뚱한 일을 저지르곤 했는데 그런 일들은 항상 오페라극장의 극성스런 팬들을 자극 시켜 위대한 지휘자인 카라얀 마저도 군중들의 돌격을 피해 극장의 군용 트럭에 매달려 도망쳐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ㅡㅡ;;
우리의 영원한 영웅... 그는 2007년.. 9월 6일... 우리의 곁을 떠났다...!! 영원히 그가 우리곁을 떠나지 않을꺼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타계소식을 접하고서.. 한동안 머리 속이 텅빈 것같고 가슴 깊은 곳이 아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가 떠난 날... 내가 몸담고 있는 한양대학교 음대교정에는 구슬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그를 떠나보내며...!!!
잘가요..!! 나의 친구여... .. 천상의 목소리여.. 천상에서도 영원히 행복하길... ... !! . 기도합니다... !!!
자료인용/루치아노 파바로티/마제라/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