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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한(北漢山)과 삼각산(三角山)
백두대간이 동해연안지대를 따라 남하하다가 강원도 평강군 분수령에서 서남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일으켰다.
한북정맥은 끝자락 도봉산(道峰山)에서 우이령(牛耳嶺)을 타고 가다가 마지막 한
산에서 마무리되었는데 이 산이 바로 서울의 진산 삼각산(三角山)이다.
그러니까, 삼각산의 모산(母山) 역시 조종(祖宗)인 백두산(白頭山)이다.
내 거주지를 기준으로 하면 시계방향으로 서울의 강북구, 성북구, 종로구, 서대문구,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에 걸쳐 있는 산.
백제의 개국연대부터 부아악(負兒嶽)으로 불렸다.
암봉이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횡악(橫岳),화산(華山)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으나 통일신라를 거쳐(비봉진흥왕순
수비) 고려의 한 때까지 주로 부아산으로 불렸다.
이후로는 백운봉, 인수봉, 국망봉 등 3개의 뿔 같은 봉이 있다 하여 1천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쳐서 삼각산으로 굳혀진 이름이다.
백제 초기에 한강 유역 일대를 한산(漢山)이라 불렀다.
그리고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북한산과 남한산으로 구분했다.
백제는 한강 이북에 토성을 쌓고 북한산성이라 했는데 그 의미는 오늘날 같은 고유
명사가 아니고 한강 이북의 성이라는 보통명사적 의미였다.
북한산 또한 그런 의미로 불리었으며 삼각산의 일명이었다.
일명 북한산이 본명 삼각산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일본인 이마니시류(今西龍) 때문이었다.
한국사를 왜곡 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의 대표적 식민사학자인 그의
"북한산은 . . .조선의 명산으로 일명 삼각산" 운운한 보고서에서 비롯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광복 후다.
대한민국 건국 35년의 세월이 지난 1983년 4월 2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까지
바로잡지 않은채 도봉산을 포함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확정해버렸으니까.
하긴, 주봉 백운대를 비롯해 한데 모여있는 삼봉이 우뚝하기는 해도 이름 삼각산이
광대한 산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협소한 것이 사실이다.
각설하고, 삼각봉과 가장 밀접한 지역에서 본명(삼각산) 되찾기 운동을 한 때 전개
하는 듯 했는데 이즈음에는 잠잠한 것 같다.
구청장실에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CCTV를 설치하였을
정도로 구청장이 삼각산 마니아(mania)였던가.
당위성이 있음에도 어설픈 추진으로 그르쳤을 것이다.
그는 일제가 개명했기 때문에 본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정해도 일제가 사용하기는 30년에 불과했으며(1915년 이후니까) 광복 후 40여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음은 물론 되레 북한산으로 확정지었다.
추진 과정도 서툴었다.
서울의 5개구(區)와 경기도의 2시(市)에 관계된 이름을 특정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될 일인가.
강북구 외의 지자체들은 역사적 본명임을 인정해도 한정적인 삼각산 보다 포괄성이
있는 북한산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진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면
이 북한산에 둘레길이 조성되었다.
2010년과 2011년 사이에 만든 71.8km의 저지대 수평 산책로다.
"기존의 샛길들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한.
일부 자연파괴라는 유감스런 점이 있기는 해도 바람직한 길이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갖가지 이름의 산책로 조성에 경쟁적이지만 내가 걸어본 무수한
길들 중에 가장 권할 만한 길이다.
웰빙과 결부된 등산인구의 증가는 도농을 불문하고 폭발적이다.
이 대열에는 노약자와 장애인도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산(자연)이 신체적 건강인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고속 고령화에 장애인을 양산하는 세계 제일의 사고공화국이기 때문에 더욱.
북한산을 비롯하여 유명 산들에도 케이블 카를 가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경미한 장애인과 웬만한 체력이면 노약자들도 걸을 수 있는(일부 구간 제외) 북한산
둘레길이기에 늙은 아내와 나들이에 나섰다.
건강관리에 소홀하지 않은 80세 전, 70대 후반이라면 북한산 정도는 어렵잖게 오르
내릴 수 있으련만 체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산, 도봉산에 지금처럼 안전시설이 구비되지 않았는데도
함께 가벼이 오르내렸던 아내가 그리 된 것이 내 탓인 듯 하여.
내 어머니는 시동생들 치다꺼리에 심신이 편할 날이 없으셨는데 고부간이 대물림할
숙명이었던가.
아내는 무작정 몰려드는 시동생들은 물론 인척들까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이에 더해 내 집은 도움이 필요한 팔도인연들의 사랑방이었고 그들에게도 소홀할 수
없는 안주인은 더욱 고달퍼 갔다.
산 대신 병원 출입이 잦아졌고 급기야 암과 생사를 건 투쟁까지 한 아내는 그 사이에
웬만한 산에도 오를 수 없는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아내와 함께 마지막 오른 산은 설악산 대청봉이다.
암을 극복한지 오래지 않은 아내지만 그녀의 환갑(1998년)을 맞아 강행했으며 그 후
어느 산에도 함께 오른 적이 없다.
힘에 부친 아내의 고통이 극점을 오르내렸지만 내 인내심도 한계선을 넘나들었으며
이 행사를 계획한 것이 후회 막급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늙어가면서는 일정과 거리가 길어진 국내외 산과 길을 홀로 걷는데 길들여
졌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세월을 각기 홀로 보내야만 했다.
여정에서 만나는 이들은 부부 동행을 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 왔다.
이 때 마다 아내에게 진 빚이 더욱 과중해가고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빚이 탕감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긴 동행을 하게 된 까닭이다.
아내의 제의에 기꺼이 동의했으며 각오도 비장(?)했다.
그러나 미리 말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사이비 순례길이다.
북한산둘레길은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총 21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내 집에서 5분 안에 진입되는 둘레길은 제2구간인 순례길이다.
항일 독립유공자들과 4.19 민주혁명의 영령들이 영면하고 있는 지역이다.
솔빝근린공원(강북구 우이동) 상단~이준 열사 묘역 입구의 2.3km인데 우리는 워밍
업(warming-up)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2014년 3월 20일(목) 오후에.
1시간 남짓이면 족하며 선열들의 묘지들을 빠뜨리지 않고 다 참배한다 해도 2시간
반쯤이면 너끈한 구간이다.
그러나 전체 둘레길에서 가장 평이한 구간임에도 아내는 힘들어 했다.
진행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리는 신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순례길 주변에는(진행 방향으로)
강재 신숙(剛齋申肅/1885~1967)
상산 김도연(常山金度演/1894~1967)
동암 서상일(東菴徐相日/1887~1962)
심산 김창숙(心山金昌淑/1879~1962)
현곡 양일동(玄谷梁一東/1912~1980)
단주 유림(旦洲柳林/1894~1961)
성재 이시영(省齋李始榮/1869~1953)과 17위의 독립군
가인 김병로(街人金炳魯/1887~1964)
해공 신익희(海公申翼熙/1892~1956)와 아들 평산 신하균(平山申河均/1915~1975)
일성 이준(一醒李儁/1859~1907) 등의
묘역과 국립4.19 민주묘지가 있다.
순례란 찾아가서 참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북한산 순례길은 선열들 묘지를 일일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름뿐인 황당한 순례길이다.
산재한 묘지들을 멀리 한 길이기 때문이다.
신숙~김도연~서상일~김창숙~양일동 묘역들을 연결하는 길이 이미 조성되어 있음
에도 왜 그 길을 외면하고 묘역과 무관한 산책로를 순례길이라 하는가.
이시영~김병로~신하균~신익희 묘지를 연결하는 길도 같은 경우다.
그러므로 이 길이야 말로 순례와 무관한 사이비 순례길이거나 순례를 가로막는 반
(反)순례길이다.
첫댓글 8순에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노부부가 저희의 롤모델임을 잘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