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李光洙 - 계몽적 혁명성과 ‘임’의 거리
이재창
春園 이광수(1892, 2, 1~?)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광동리에서 태어나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칠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때엔 동리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1905년 도일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귀국, 그 이듬해 메이지학원을 편입해 졸업했다. 홍명희, 문일평 등과 교류하면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했다. 1910년 메이지학원 중학을 졸업하고 귀국 오산학교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1916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했고, 계몽적인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1917년 한국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무정』을 연재하였다. 《청춘》지에「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들 발표했다.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논문「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을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18년 도일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해 안창호를 만나 보좌하면서《독립신문》사장겸 편집국장에 취임하여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썼다. 1921년 귀국 선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개벽》에「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문학관은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 한 것처럼 어느 한 쪽에 휩쓸리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무정」「개척자」「재생」「군상」등의 작품은 사실주의 문학을 지향하였다. 흔히 이광수를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고, 신교육문제와 과학사상,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광복후에는 일제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6․25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시조작품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오도답파여행기」와 1935년「시조4수」등 많은 작품을 발표해 육당 가람 노산 등과 함께 시조부흥운동에 노력했다. 1928년 시조부흥운동의 초석이 된 논문「시조의 자연율」「시조의 의적 구성」등 다수의 이론을 발표했다. 주요저서로『금강산유기』『춘원단편집』『3인시가집』『춘원시가집』『춘원문장독본』『시조50수』『수필과 시가』『문학과 평론』등이 있다. 그의 시조 한편을 음미해 보자.
임 여기 계시다네. 내 앞에 늘 계시지만
내사 눈 어두어 곁에 둔 임 못뵌다네.
첩첩에 흐렸던 눈이 한번 밝고 싶어라.
이 눈 뜨량이면 고우신 임 뵈올것이
귀마자 열릴질댄 그 음성도 들을 것이
번연히 곁에 뵈옵고 보도 듣도 못하고녀.
번뜻 보이는양 그 모양이 입이신가
소리 들리는 듯 그이 임의 음성인가
몸스쳐 지나시는 듯 잡혀지지 않아라.
-「임 여기 계시다네」전문
벼르와 벼르와서 임뵈오러 가던날엔
고개 소굿하고 길만 보고 걷삽다가
네드냐 하신 음성에 소스라쳐 놀라니라.
두 손 모두옵고 임의 앞에 섰노라면
두려워 반가워서 가슴만 설레다가
사뢸 말 하나 못삷고 하직하고 오니라.
뵈옵고 돌아서면 기쁜 듯도 서글퍼서
걷다가 섰다가 지향없는 맘을 안고
못 믿을 내일을 믿고 타박타박 옵니다.
-「뵈오러 갔던 길」전문
춘원 이광수는 육당과 더불어 어린 소년시절부터 한국근대 문화운동의 선봉에서 한국문학을 이끌고 활약했다. 육당이 언문일치를 주장했으나 그것을 발전시킨 사람은 이광수였다. 또한 그는 신문학운동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최초의 신체시인, 최초의 근대소설작가로 한국근대문학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특히 그의 문학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적인 혁명성을 시나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서 젊은이들을 계도해 나라의 미래를 그들에게 의탁해 보려는 의도는 당대의 문학운동의 주요 경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리고 당시 봉건적인 전통제도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그의 시조에 나타나는임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절대자로서의 역할일 수 있고, 그가 문학에 투철한 만큼 그 시대에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향의 세계일수도 있다. 그의임은 진정한 마음의 의미로 추구하고, 사랑하는 대상이며 절대자이다. 그래서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그의 작품「임 여기 계시다네」와「뵈오러 갔던 길」은 그가 남긴 임께 드리는 노래 30편중에서 고른 것이다. 누구에게든임은 우리의 마음 속에 간직한 어느 한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에 따라 원근은 달라진다. 대부분의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임의 원근이 정신적 차원의 대상이며 거리감이다.「임 여기 계시다네」는 항상 목전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없고,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임으로 표현해 노래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임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절대자로 인식할 수 있는 의미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뵈오러 갔던 길」또한 사랑하는 임에 대한 떨어져 있을 때와 만나고 났을 때의 거리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못 믿을 내일을 믿고 타박 타박 오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허전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