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의 폭압 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선다. 특히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마른 들에 불길이 치솟듯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간다. 누구는 "자연발생적으로 민주화욕구가 분출되는 분위기여서 나서서 행동을 하느냐, 지켜 보느냐 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12.12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는, 국민이 염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길에 나선다. 이후 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이 기간에 대학에서 학생운동은 점차 조직화하고 그 투쟁의 강도를 더해 간다.
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80년 봄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학원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해 간다. 79년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 명은 '민주학생선언'을 뿌리며 유신잔당 퇴진과 통대선거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여 이철주, 한해수, 이인기 등 3명이 붙잡히고(각각 구류 7일) 김 선호, 고남곤, 문현수 등 여러 학생이 도피한다.
한편, 군대에 끌려갔다가 78년 기청대회 사건으로 투옥된 박종훈은 79년 12월 5일 출소한다. 돌아 와 보니 대학 내의 모임이 와해되다시피 한 상태다. 이미 77학번 윤성모, 김운주는 퇴학당하고 김남규는 무기정학을 당해 정상적인 학내 활동을 못하고 있으며, 78학번 최순희(사망)가 주축이 되어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박종훈은 "탈춤반을 비롯해 연계가능한 동아리가 6개 정도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79년 겨울방학 동안 이들은 은석골의 수양원 등에서 모임을 가지며, 정국 상황과 활동방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논점은 대강 다음의 내용으로 모아진다. 먼저 선배 그룹은 복학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학교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당시 활동 중인 동아리를 중심으로 연합조직(서클연합회)을 먼저 꾸리는 게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으게 된다. 다음으로는, 대학 내에 일반 학생조직이 꾸려지면 그 활동의 폭을 어떻게 조정해 갈 것인가 하는 것과 학원 민주화운동과 정치 민주화운동의 구호를 내세우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또한 학내시위 뿐 아니라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과 계엄령에 대한 대응도 고민거리이지만, 시위는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한다.
80년 민주화의 봄, 유신 치하에서 학교에서 쫓겨났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학교로 돌아오며, 학생운동의 불길이 다시 살아 오른다. 모두 복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북대만 해도 복교 대상자가 29명이다. 병역대책위 사건으로 투옥됐던 최인규가 2월 출소한 뒤, 박종훈, 최인규, 최갑선 등 선배그룹은 대학 내 후배들의 활동에 논의를 같이 하며, 전북대에서 서클연합회와 학자추를 구성하고 민주화 운동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관여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활동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관련 인물 몇 사람의 구증을 토대로 한 줄거리임을 감안하기 바란다.)
80년 신학기 대학가는 여러 형태의 동아리가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 가지 대자보가 등장한다. 대자보는 연일 신군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질타한다. 학기초부터 전북대의 서클(동아리)들은 연합조직을 논의, 구성 준비를 마친다. 70여개 서클 가운데 16개 서클 회장단이 전주시 다가동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모임을 갖고 김남규를 써클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한다. 김남규는 "축구서클 '일레븐 싸카' 회장으로서 서클연합회 회장이 된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이끌던 이광철은 서클연합회 고문을 맡고, 김형근(현 교사), 김희수(현 변호사)등이 서클연합회 활동에 참여한다. 이들은 이후 학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을 형성한다.
서클연합회는 구성했으나, 각 학과는 신학기 들어 과대표를 새로 뽑는 시점이라서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전북대는 법대, 상대 등을 중심으로 호국단 체제에 반발하는 과대표들이 3월부터 논의를 거듭하다, 먼저 조직된 서클연합회와 연합해 3월 28일 드디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회장 78학번 이명호)'를 발족한다. 원광대에서도 80년 1월 중순부터 동아리(당시에는 서클로 불림)회장들의 모임이 준비돼 2월 5일 성사되고, 이것이 학원자율화위원회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로 탈바꿈하면서 학생들의 의사를 수렴하는 기구로 만들어진다. 3월말 학자추가 구성된다. 전북대 학자추는 곧바로 총학생회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 선거를 준비한다. 학내에서는 고교 동문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선거운동이 펼쳐지고 4월 15일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김희수(당시 경영 3, 현 전북도의회 부회장)가 회장으로 당선된다.
박종훈은 "그러나 대학의 학칙규정은 여전히 학도호국단을 인정하고 있어서, 기존 학칙이 유지된 채로 학생들에 의해 구성된 총학생회는 아직 학생들만의 총학생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고,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요새로 변해간다. 학생들은 어용교수 퇴진, 학내 비민주적 요소 척결을 내세우며 본격적인 학원자율화투쟁을 벌여 간다. 4월 중순 들어 병영집체훈련이 학원민주화투쟁의 구호로 전면에 등장한다.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언론매체들은 대학의 시위, 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소식은,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려 대학가에 운동의 진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과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5월 1일, 서울대 학생들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2일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학생운동이 학내민주화운동에서 전국적인 민주화요구운동으로 돌입하는 계기가 된다. 5월 2일 전북대생 6천여 명이 가두로 진출, 전북도청 앞까지 시위를 벌인다. 당시 전북대 총 학생 수가 1만여 명이다. 학생 대부분이 참여했다고 할 수 있는 시위대열은 당시 전북대 앞 팔달로에서 금암동 남도주유소까지 이어진다.
학생들은 전북도청 앞까지 밀고 나가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페퍼포그를 쏘며 진압에 나선 경찰은 수십 명의 학생을 구타, 부상하게 한다.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희수, 부회장 황덕구, 배현식, 김병태 등은 부상학생을 위문하러 병원에 갔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5월 2일부터 13일까지 열흘 남짓은,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5월 6일 전북대생 3천여 명은 계엄 해제와 연행학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인다. 이중 2백여 명은 계엄해제, 어용교수 퇴진, 미복직교수 복직 등을 요구하며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고 총학생회 간부 10명은 단식에 들어간다.
5월 10일 고려대에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이 모여 '비상계엄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요구하기로 결의다. 이들은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을 염려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자는 의도다. 그러나 5월 12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2003.5.15. 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