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도 가는지 잔뜩 짐을 지고 요령 좋게 걸어가는 아낙들.
어느 공공 기관 앞에서 경찰관이 가마니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경계를 서고 있다.
손에 든 총은 일제의 잔재로서 99식 단발 소총에 창을 꽂은 일본식 무기이다.
나무를 둘러친 마차의 모습이 특이하다.
아마도 당시의 택시 역할을 대신하던 운송 수단이었을 것이다.
흰 두건을 쓰고 겨울 복장으로 잡화를 파는 노점상의 모습.
나무 상자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흰 수염을 한 노인이 가판을 펴고 잡화를 팔고 있다.
노인의 뒤로 삼평 여관과 한원 여관의 손글씨 간판이 보인다.
5사단 본부는 팻말이 보인다.
현 우리은행의 전신인 조선상호은행 종로 지점의 모습
시계를 파는 시계포 모습.
당시는 손목 시계보다 팬던트형 줄 시계가 유행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줄 시계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리에서 담배를 파는 노점상.
당시는 우리 나라에 담배 제조 기술이 없는 탓에 양담배만을 팔았다.
이 사진이 찍히고부터 1년 뒤, 1950년의 6.25 전쟁 중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는 옛 중앙 우체국 모습.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우체국이라고 불렸다.
붉은 벽돌의 청동 지붕이 있는 19세기 풍의 르네상스식 건물로,
건축사에 그 미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으나, 6.25 중 애석하게도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화신 그룹의 박흥식 씨에 의해 세워진 이 백화점은 장안의 명소였고
광복과 전쟁, 혁명과 경제 발전을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증인과도 같은 백화점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헐려져 이 곳에는 밀레니엄 빌딩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 전 남대문 모습.
이 곳에는 전차역이 있었다. 사진 좌측의 건물은 남대문을 전담하여 지키던 파출소.
UN위원회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입간판
청계천으로 추정되는 도심천의 모습.
삼각지 근처의 미 8군 기지 주변 모습.
미군은 이후 49년에 한국에서 철군하고 만다.
서울역 앞에 있던 대동 예식장과 사진관의 모습.
건물을 등지고 상인들이 물건을 수리하고 있다.
신발을 고쳐주는 갖파치와 엿을 파는 엿장수의 수레가 보인다.
분수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
이들에게 불과 1년 후 6.25의 참화가 닥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당시는 많은 지게꾼이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물건의 양으로 추측하건대,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옮기는 중으로 생각된다.
32사단 앞.
제일연합본부라고 쓰인 간판 앞에서 교통 정리를 하는 경찰관의 모습.
벽 뒤로 보이는 산 역시 남산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목도리로 머리 끝까지 감싸고 물건을 파는 상인과 행인의 모습.
서울역 앞에서 남대문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당시 명소였던 대동 예식장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당시 간판은 대부분 한문 위주로 쓰여 졌다.
이발소와 양복점의 간판도 한문으로 쓰여 있다.
어느 공공 기관의 용산 지점.
당시 상점의 모습.
당시 서울 시가지를 누비던 109호 전차의 모습.
짐꾼 노릇을 하는 남루한 청년의 얼굴에서 당시의 고난이 역력히 드러난다.
당시의 포장마차의 모습.
예나 지금이나 포장마차는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애환을 녹여주는 저렴한 주점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자본이 부족한 이들의 손 쉬운 창업 아이템이었다.
시장에 나와 곰팡대를 물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아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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