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앗간 다녀오던 날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추억을 반추(反芻)할 때마다 아련히 떠오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많이 생각나는 게 물방앗간이다.어렸을적 물레방아를 보면 커다란 물레바퀴가 수차에 의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여간 신기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 고장에는 물레방아가 세 군데나 있었다. 지역적 특성이기도 한데, 다른 지역에 비해 표고가 거의 백 미터가 나서 떨어지는 낙폭이 그만큼 컷다. 그중 하나는 봉화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받아 세워졌다. 그리고 다른 곳은 기러기재 아래에 있는데 그것은 당초에 간척지에 물을 대기 위해 산줄기를 뚫어 도수터널이 만들어 지면서 많은 물이 유입된 것이다. 물레방아는 알고 보면 얼마나 자연 친화적인 지혜의 산물인지 모른다. 시설자체가 하나도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 이로음을 주는 것이다. 이런 물레방아는 연암 박지원선생이 청나라를 방문했다가 맨 처음 배워온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함양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실용화했다. 며칠 전이다. TV를 통해서 오랫만에 물레방아를 보게 되었다. 채널을 돌리니 화면 가득 실물 크기의 물레방아가 클로즈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런 만큼 실제처럼 회전축(回轉軸)을 지지대로 삼아 돌아가기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찌나 빨리 돌아가던지 바큇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형태가 비슷해서인지 보노라니 옛 추억을 자극하였다. 일찍이 내가 의성어를 접하면서 절묘한 표현으로 기억해 둔 것이 몇 가지 있다. 바로 이효석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에 보이는 “말이 후투루 입을 떨었다”라는 것과 김억이 쓴 노랫말 물레방아가 “실실이 시르렁 돈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한데, 정말 고향의 물레방아는 그렇게 바쁠 것 없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느릿느릿 돌았다. 고향에서 규모가 가장 큰 물레방앗간은 군두(軍頭)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집으로부터는 대략 시오리쯤 떨어진 곳이다. 그 물방앗간은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돌았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농사지은 벼를 찧거나 밀가루를 빻았다. 나는 그 방앗간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드나들었다. 어머니를 따라 나서서 밀가루를 빻거나 솜을 탔다. 당시 오고 갈 때면 어머니는 자루를 머리에 이고 나는 멜빵짐을 메고 뒤를 따랐다. 방앗간 내부는 피대들이 이리저리 얽혀서 정신이 없었다. 어찌나 무질서한지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만약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피대에 감겨 다칠 우려가 많았다. 게다가 물방앗간 안은 공기가 최악이었다. 혼탁하여 숨쉬기조차도 어려웠다. 그런 곳에서 방앗간 주인은 온종일 우주복처럼 생긴 복장을 하고서 눈만 빠끔히 내놓고 일했다. 그러기는 일을 맡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머리와 목에 수건으로 감싸고서 대비를 했다. 공장안은 여기저기에 묵은 거미줄이 수도없이 엉켜 있었다. 그런 거미줄은 환풍구가 나있는 빛기둥을 통해서 일차로 걸렸다가 바닥에 와 닿았다. 이때는 미세한 장애물에 광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마치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 만들어낸 비행운이 차차로 이지러지듯이 그렇게 흐려졌다. 그런 기억을 가진 나는 소설 속에서 곧잘 연애 장소로 방앗간이 설정된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호젓하다는 것과 물가라는 것과 사람이 모여드는 장소라는 것 외에는 어떤 무드로써의 정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작품들이 그런 먼지 나는 곳에서의 정사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곳이 적격이 아닐까' 하여 막연히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것만 빼고 보면 물방앗간은 들려오는 소리도 어디까지나 기계음이 아닌 자연음이어서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런 까닭에 물방앗간의 풍경은 도회 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목가적이다. 그래서 물방앗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는 소설 속 동이 부자가 함께 걷던 발걸음처럼 낭만이 느껴지기도 했다. 밤이 이슥할 무렵 , 솜을 타거나 밀가루를 빻아 포대에 담아 동바에 묶어 돌아오는 날을 어찌 잊을까. 그런 날은 야산 솔수펑이에서 부엉이가 큰 소리를 내며 울어서 약간 무섭기도 했으나 어머니와 함께 걷는 길이어서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런 어느 날 밤이다 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걸으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었다. “엄니 오늘은 다른 때보다 달이 훨씬 밝네, 잉.” “그렇구나. 그래도 넘어 진디, 조심해서 걸어라 와.” “걱정 말어, 이 정도면 괜찮구만.” 앞장선 어머니가 걱정스러워하시며 물어서 뒤따르던 나는 그렇게 안심을 시켜 드렸다. 그러면서, “이 솜은 다 어디다 쓸란가.” “응, 그야 니 작은누나 혼수 이불솜으로 써야지야.” “이렇게나 많이 필요한가.” “이것도 부족 할란가 몰것다.” 한데, 그렇게 힘들어 만든 이불은 누나가 단 한 번도 덮어보지 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는 바람에 없어지고 말았다. 옷가지와 함께 무덤가에서 몽땅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연을 안고 살기에 나는 마냥 물방앗간이 그리워지는 장소는 아니지만 잊지를 못한다.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해서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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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이 '후투루' 입을 떨었다' 물레방아가 '실실이 시르렁 돈다'
안성맞춤한 의성어로군요.
저는 오랜동안 꽹과리 소리를 '땅수 땅수 따당땅'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소설가가
'갠지 갠지 갱갱갱'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는데 과연 제격이라 여기게 되었지요.
어린시절 저희 집 헛간에는 커다란 디딜방아가 있어 사람들이 더러 곡식을 빻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도 어설픈 도정공장이 있어 5마력 짜리 발동기를 힘좋은 어른들이 몇 번이고 돌리며 시커먼 기계의 코를 눌러댔지요. 겨우 발동이 걸린 기계는 '시공 탱, 시공탱, 시공시공 탱탱탱'하며 돌아갔었지요.
선생님의 한이 서린 물레방앗간 추억을 그려봅니다.
옛날 발동기, 코를 눌러서 시동을 걸던 일을 말씀하시니 새삼 생각이 나서 미소가 지어집니다. 위에서 물을 채워놓는데, 공연히 그곳에도 지푸리가를 담그곤 했지요. 저도 깽과리가 '갠지갠지 '소리가 난다고 표현한 작품이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우종 글평 2007 에세이21 별표
우리나라처럼 의성어가 발달한 나라도 없지 싶어요. 어느 TV에서 각 나라사람들이 출연해서 닭우는 소리를 표현하는데 우리나라가 리얼하게 닭우는 소리를 표현하더라구요. 그 익숙한 '꼬끼오~꼬꼬꼬' 의성어에 얽힌 소재로 글을 써봐도 좋을 듯합니다.
저도 그 방송을 시청했는데 우리말의 우수성을 새삼 느꼈습니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발달은 다른 나라 언어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죽었다는 표현도 20가지 가까이 되니까요.
물방앗간 다녀오는 길의 서정이 아름답네요. 또 읽으니 느낌이 다릅니다.
묿방앗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