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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메기의 길 / 최일걸
과메기 붉은 속살 한 점을 쌈 싸먹으면
바닷바람이 서걱거리며 시리게 눈을 찌른다
시큰한 눈물 한 방울이면
껍질이 벗겨진 채 속살만으로
대나무에 눈이 꿰인 꽁치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고광도 서치라이트 불빛에 현혹되어
유압호스에 빨려든 걸 생각하면
굳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은 심정일 게다
해풍에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면서
꽁치가 제 속에 열어놓은 벼랑길은 대체 얼마일까
수천 번 벼랑에서 뛰어내려 산산이 부서졌다
저린 살점을 그러모아
벼랑 끝에 다시 서기를 거듭하면서
꽁치는 애통하여 눈물보다 맑고 끈끈한 기름을
뚝뚝 떨어뜨린다
소주 한 잔에 곁들여 과메기를 씹으며
북해도에서 밥상에 이르기까지 과메기의 길을
더듬다보니 나 역시 사무친다.
<다시올 문학> 2008년 겨울호
최일걸 시인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97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6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6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 가작 입선
2008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8 춘천인형극제 대본공모 가작 입선
참깨꽃 / 문신
참깨꽃 보면 오래 묵은 범종 같다
당목(撞木)으로 두드리면 부처님 말씀이 서 말 하고도 한 닷 되쯤은 쏟아질 것 같다
저기 저 한 뙈기도 안 되는 비탈밭 가득 참깨꽃 피었다
범종이 무릇 일만 송이는 된다
쳐라, 바람아
부처님 설법을 깨알 같은 필체로 옮겨 적어 마침내 팔만대장경을 일구리라
시집<물가죽 북> 2008. 애지
1973년 전남 여수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학과 졸업. 전북대어문교육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로 등단
2008년 시집 <물 가죽 북 >애지
산수유 / 윤석산
지리산 자락 산수유
뜨거운 폭염의 여름을 지나며
햇살 속 익고 익고 또 익어 가을이 되면
빨간 눈알 같은 열매를 맺는다
가을 햇살 한 뼘이라도 놓칠세라 멍석에 펼쳐 말리고 말려
산수유가 발긋발긋 말 그대로 가을 햇살이 되면
아낙들은 둘러 앉아 산수유를 깐다.
빨간 열매 안에 웅크린 독이 든 씨앗
일일이 “입”으로 까서 발려내고, 빨간 살집만 다시 넣어놓는다.
입으로 깐 산수유
다른 한쪽으로는 빨간 산수유 열매를 받아내는,
입으로 하는 작업.
마을 아낙들의 구수한 입담 같은 가을 햇살멍석
지리산자락 그들먹이 번져갈 때
빨간 산수유, 침이 가득 고인 입, 그 안에서
쌉쌀한 약이 된다
그래서 허리 부실한 사내들의 오줌줄기
지리산 밑둥만큼
시원스레 키우는, 가을 보약이 된다
윤석산 시인
1947년 서울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 1974년 <경향신문>에 시<바다 속의 램프>가 당선.
시집 <적>으로 제1회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바다 속의 램프><온달의 꿈> <처용의 노래><용달 가는 길> <적> <밥 나이, 잠 나이>등이 있음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숭례문 / 강인한
이 나라에는 숭례문을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숭례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소
집을 한 채만 가지고 있거나 집이 한 채도 없는 사람들은
숭례문을 무서워하고
집을 두 채 이상 가지고 있으며 땅이 많은 사람들은
숭례문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소
숭례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숭례문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무섭지만
숭례문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숭례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섭지 않소
제1의 사내가 촛불을 들고 숭례문으로 걸어가고 있소
제2의 사내가 촛불을 들고 숭례문으로 걸어가고 있소
제3의 사내가 촛불을 들고 숭례문으로 걸어가고 있소
제4의 사내가 촛불을 들고 숭례문으로 걸어가고 있소
제5의 사내가 촛불을 들고 숭례문으로 걸어가고 있소
제6의 사내도 촛불을 들고 숭례문에서 걸어오고 있소
제7의 사내도 촛불을 들고 숭례문에서 걸어오고 있소
제8의 사내도 촛불을 들고 숭례문에서 걸어오고 있소
제9의 사내도 촛불을 들고 숭례문에서 걸어오고 있소
제10의 사내도 촛불을 들고 숭례문에서 걸어오고 있소
제11의 사내가 촛불이 되어 숭례문에서 걸어나오고 있소
제12의 사내가 촛불이 되어 숭례문에서 걸어나오고 있소
제13의 사내가 촛불이 되어 숭례문에서 걸어나오고 있소
길은 지금 숭례문으로 뚫려 있고 숭례문은 분신자살을 하고 거기 이제 없소
촛불을 들고 걸어가거나 촛불이 되어 걸어오는 사람들 가슴 속엔
불타서 주저앉은 숭례문 한 채씩이 꺼멓게 들어앉아 있소
<시와상상> 2008년 가을호
강인한(姜寅翰) 시인
전북 정읍 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같은 해 5월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 당선.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가 있음. 37년간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4년 2월 명예퇴직.
허물 / 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문학동네 (2007. 가을호)
1950년 대구출생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당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 시집<슬픔이 기쁨에게><서울의 예수><새벽편지><별들은 따뜻하다><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동화집 <연인><항아리><기차이야기>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편운문학상 수상.
패밀리 /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딸리아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 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은 자신의 패밀리가 누구인가를 목청 높여 알리는 것이다. 그건 또 자신들의 종족번식 방식에 대해 사람 패밀리가 존중해달라는 경고방송이다.
독야청청해서 외로울 것 같은 소나무에게도 전나무, 솔송나무, 가문비나무, 잎갈나무 같은 따뜻한 패밀리가 있다. 키 작은 벼들이 목에 힘주고 서 있는 것은 키 큰 대나무가 자신의 패밀리이기 때문이다.
국화는 코스모스, 과꽃, 해바라기, 민들레, 쑥부쟁이, 도깨비바늘이 제 패밀리다. 놀라지 마라. 국화는 국내에 4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살고 1,0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쉿! 더 무서운 건 그 패밀리 밑으로 20,000이 넘는 국제적인 사조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동 중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국화 패밀리들이 파업을 한다면 지구촌에서 꽃구경하기는 힘들 것이다.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하고 키가 작은 마늘, 양파가 패밀리다. 사람 같으면 창피해서 부정하거나 외면해버리지만 자연의 패밀리는 한번 패밀리는 영원한 패밀리다. 남극의 펭귄 부모는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새끼를 살리기 위해 제 몸 아낌없이 먹이로 내주고 까마귀는 자신을 낳아 기른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먹이를 물어다주며 봉양한다.
자연의 패밀리가 볼 땐 지구에 살고 있는 패밀리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동네북처럼 두들겨 패는 패밀리는, 패밀리끼리 싸우고 고소 고발하고 총질하며 전쟁을 하는 패밀리는, 이름도 고상한 호모 싸피엔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패밀리뿐이다. 문자를 가지고 시를 가지고 있다는.
*동식물을 분류할 때 쓰는 과(科)를 영어로 패밀리(family)라고 한다.
<창비> 2007년 가을호
1958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4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발표 1984 <월간문학>에 시조 <비 오는 날의 변주> 발표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2000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2001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수록 2004 현재 <시힘> 동인, 문화공간 <다운재>운영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1987 창작과비평사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1991 빛남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경주남산> <바다가 보이는 교실> <첫사랑을 덮다> <가족>외 다수
뿔논병아리 / 이영옥
뿔논병아리 어미가
갓 부화한 새끼를 등에 업고 강을 헤엄쳐 가고있다
어미의 마음이 등 쪽으로 온통 쏠려있다
누구를 업는다는 것은 기꺼이 져 주는 일
이기기 위해 지는 게 아니라 몸을 낮춰 깨끗이 지는 일
져 준다는 것은
바닥에 팽개치지 않고 자신보다 높게 올려
떠받들어 전부를 사랑해 주는 일
그 무게에 등이 휜 다해도 눈부시게 감당하는 일
완전무결하게 진 자세로
세상의 물살을 갈퀴로 먼저 살살 헤집어 주는 일
아이 둘을 업어 키웠던 나는
다 커 버린 지금도 가끔 업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바닥이 되었다가 우뚝 일어서주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업는 다는 것은 뒤통수의 느낌만으로
뒤뚱거리며 오는 걸음마의 방향을 알아맞히는 일이며
두 팔을 뒤로 내민 순간 자신은 까맣게 잊는 일이다
뿔논병아리가 지나간 물길이 부드럽게 닫힌다
어린것들을 업어 주려고 강은 저렇게 굽이굽이 휘어지는 것이다
이영옥 시인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2004년 계간 '시작' 신인상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 시집 <사라진 입들> 천년의시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권혁웅 시인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대학원 졸업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으로 등단2000년 제6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저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 <시적 언어의 기하학>
오동나무 열쇠 / 김남수
오동나무 가지에 열쇠가 걸려있다
누군가 길에서 주운 열쇠를 나무에게 맡겨놓고 갔다
얼마나 열고 닫았는지 구부러진 열쇠를 가지가 휘도록 들고 서있다
건너편 천주봉 세탁소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주봉씨는 오동나무 가지를 끌어당겨 뽕짝 풍으로
구겨진 나뭇잎만 다림질한다
겨울이 깊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녹슬어 가는 열쇠를 오며가며 들여다본다
나무 속에는 누가 있어
저물도록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까
눈발 흩어지는 골목에 서있는 그를 찾아가
식어가는 몸을 여기저기 만져본다
가느다란 선율 한 줄 새어 나온다
궁금증이 노크를 하자 기억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발을 헛디뎠을까
툭. 끊어지는 가야금소리
손에 잡히는 건 뭉툭뭉툭한 옹이들
내 몸의 온기 나누고 싶어 등을 맞대자
뿌리 쪽에서 물오르는 소리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골목이 따뜻하다
올려다본 하늘엔 겨울에도 얼지 않은 잠언 알갱이들
늙은 오동나무 꼭대기에서 노랗게 익어가고
지나가던 바람이 쩔렁, 녹슨 열쇠를 흔들고 간다
'다층' 2008. 봄
김남수 시인
충남 부여 출생
2008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사회복지법인 '함께하는 사랑밭' 근무
연필의 간 / 김경주
연필 속에서 간이 흘러나온다
간 속의 노란 돌가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란 돌가루
연필 속에서 탄광이 쏟아져나온다 탄광을 파내어 간을 찾는 자, 시를 쓴다
해골이 어조를 남기고 거울 속에서 웃는다
연필은 잡념의 생식기
푸른 먼지 하나 허리를 흔들며 사라져가고
헐리고 있는 촛불
그 안에 번식 중인 빨간 간들
문어처럼 미궁을 많이 알지도 못해서
연필은 대가리를 디밀며 해저를 뒤집고 다닌다
연필을 두 쪽으로 쫙 갈라내어
간을 본다
이끼가 자라고 있는 해, 보도블록에 떨어진 귀들, 입속으로 퇴근하는 머리칼, 어항 속으로 들어가 웃는 쥐, 구름과 구름 사이 희미한 돌가루들, 아픈 배, 죽어서 일어나 강낭콩을 먹는 비둘기, 저녁을 빗방울 속으로 밀어올리는 맥박들, 구슬, 구슬 속을 흘러다니는 허공
그건 간의 색인데
그믐을 그리는 건 간의 색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간의 색을 전부 지우는 일이었다구
더 천해져야 한다. 이것저것 간을 보면서
김경주 시인
1976년 전남 광주출생
혼불 주최 최명희 문학상 당선
2003년 대한 매일 신춘문예 당선
2006년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중앙
복사꽃 지고 / 염창권
복사꽃 지고 새가 울더라
이제 곧 지나가버릴 사십 줄이니
하냥 짧은 봄날이 지나면
열매 맺히겠네 새 울겠네
열매 맺혀도 새가 울어도
해 지고 바람 불었다 그친 뒤
뭉게뭉게 여름 오면 뭘 하나
분홍빛 연등 달면 뭘 하나
달랑달랑 내걸기만 하면 뭘 하나
고와도 너무 고운 복사꽃 지는데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뭘 하나
땡감처럼 후두둑 떨어져버리는
떫디떫은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복사꽃 지고 새가 울더니
이제 사십줄도 하냥 지나갔네
열매 따서 동생 줄까 누이 줄까
꽃은 꽃대로 열매는 열매대로인 걸
내 꽃 지고 누이 열매 맺히겠네
복사꽃 지고 열매 맺히니
동생이 먼저 오십 줄에 들어섰네
동생도 아니고 누이도 아니고
풋것들이 아주 떨어져 내리는
길 위에서 날 봐라 형아야 오빠야 하네
열매 떨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장마 지겠네 장마 지겠네
물 불어 강 따라 흘러가면 뭘 하나
육십이고 칠십이고 구십이고
구만리장천이 다 한 길인데
다만 연분홍 복사꽃 지고 있으니
복사꽃 지면 열매 맺히겠네
열매 맺히면 뭘 하나 뭘 하나
복사꽃은 지고 있는데
복사꽃은 지고 있는데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강가에서 2>가 당선되어 등단1992년 <겨레시조> 가을호 평론 부문에 <재생적 상상력의 구조>가 당선되었고,
시조 관련 논문으로 <이호우 시조 연구> 등이 있다.1991년 <소년중앙> 문학상 동시 부문 <갈대 이야기>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운천리 길>이 당선2001년 시집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시와시학사 2007년 <햇살의 길> 고요아침 비평집 <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도끼 / 안도현
도끼 한 자루를 샀다
눈썹이 잘 생긴 놈이다
이 놈을 마루 밑에 밀어 넣어두고 누웠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도끼를 가졌노라,
세상을 명쾌하게 두 쪽으로 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살아가다 내 정수리에 번갯불 같은 도끼 날이 내려온다 해도 이제는 피하
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내 눈썹이 아프도록 행복하였다
장작을 패보겠다고
이튿날 새벽, 잠을 깨자마자 도끼를 찾았다
나무의 중심을 향해 내리치면 나무는 장작이 되고 장작은 불꽃이 되고 불꽃은 혀가 되고
혀는 뜨거움이 되고 뜨거움은 애욕이 되고 애욕은 고독이 되고
그리하여 고독하게 나는 장작을 패다가 가리라 싶었다
도끼를 다를 줄 모르는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옛적 아버지처럼 손바닥에 침을 한 입 뱉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양발을 벌린 다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도끼를 치켜들고는
(허공으로 치켜올려진 도끼는 구름의 안부와 별들의 소풍 날짜를 잠깐 물어보았을 것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고요한 세상의 한가운데로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내 도끼는
나무의 중심을 가르지 못하였다
장작을 패는 일은 번번이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과 같아서
독기 없는 도끼는 나처럼 비틀거렸다
안도현 시인
1961년 경상북도 예천 출생
단국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낙동강' 등단
2007년 제2회 윤동주문학상 문학부문
2004년 9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 교수
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누렁이가 새끼 낳으러 들어가기도 하고
쥐약 먹은 누렁이 거품 물고 뻘건 눈 부라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마루 밑,
햇살이 닿지 않아 더 어둡고 서늘하고
왼손잡이 할아버지 꾸불꾸불한 지팡이와
고집 센 검정 소 목덜미에 얹었던 멍에
삐딱하게 떠받고 있는
마루 밑,
허물 같은 생의 거처는 남아있는가
뭉툭한 호미 날이나 부러지고 이 빠진 낫 모질뱅이 숟가락 깨진 대접 볼펜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 눈알 같은 유리구슬 국어 책 겉장으로 접은 딱지 몸통뿐인 기타 무궁화 꽃이 선명한 1원짜리 하얀 동전 어머니한테 대들다가 떨어진 것 같은 단추 빠져 들어간
마루 밑,
먹구렁이 울음
웅숭깊은 어떤 기억
시집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2008 황금알시인선)
196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강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1992년 『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한국 작가회의와 A4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그림자가 지나간다』를 냈고, 2007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을 받았다. 현재 홍천을 떠돌며 글을 쓰고 있다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 양애경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요구르트에 우유에 퍼런 오이 간 것에…
초라한 동네 목욕탕에서 몸에 범벅을 하고 있는 여자가
대저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제 나도 나이가 먹었나
때밀이 아줌마에게 신경이 쓰인다
집집마다 샤워 시설이 되어 목욕탕 손님이 줄어서 그런지
때를 밀고 있을 때보다는
느릿느릿 손님들이 쓰다 놓고 간 대야를 걷고 있거나
대기실 체중계 앞에 앉아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목욕을 늘 혼자 가는 내가
아이들을 둘 달고 와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등 밀어 드려요?" 하니
그녀 등을 돌려대며 혼잣말처럼
"아줌마한테 등만 밀어달라고 할려고 했는데…" 하는데,
마음이 뜨끔하여 때밀이 아줌마를 힐끔 봤다
'오늘도 난 저 아줌마 일을 빼앗은 게 되었네', 하고.
1956년 서울 출생충남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시집「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사랑의 예감」「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내가 암늑대라면」이 있다. 현재 공주영상대 교수로 재직중 '시힘' 동인
염소 / 박성우
염소를 얻어다 풀길에 맨다
염소는 종일 풀길을 먹는다
음매에헤 음매에헤
고삐가 내주는 길이만큼 풀길을 먹는다
야금야금 뜯어먹힌 풀길이
불룩불룩 울룩불룩 뱃속으로 들어간다
뒹굴뒹굴 둥글둥글
뜯어 먹힌 풀길이 똥글똥글 쏟아진다
까마득 뜯어 먹힌 풀길이 까맣게 쏟아진다
하루 이틀 사을 나흘
예닐곱 발짝씩 옮겨 뜯긴 풀길이
우리 집 나드는 흙길에 까막까막 뒹군다
깜냥깜냥 걷는 어린 딸애랑,
풀길 깡그리 먹어 준 염소 돌려주러 간다
염소 뱃속에 풀길을 넣고 간다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거미」당선 2002년 시집 <거미>(창비) 발행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7년 <가뜬한 잠 >창비
아욱국 / 김선우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언제부터 아욱을 시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핀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그 손이 짚어준 저녁의 이마에가난과 슬픔의 신열이 있었다면그보다 더 멀리 간 뻘밭까지를 들쳐 업고저벅저벅 걸어가는 푸르른 관능의 힘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 문학과지성사)
거꾸로 가는 생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 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김선우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10편의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시집으로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가 있다.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있다. 2008 제1회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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