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순 고인돌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유엔의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자연유산과 합해 말해지는데 우리나라는 총 12개가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전라도에도 세계문화유산이 있을까요?
먼저 우리나라 세계유산은 맨처음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불국사(1995년),
이어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그리고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로 총 12점이 있습니다.
그중 전라도에 2건이 있습니다.
백제 역사유적지구로서의 익산.
그리고 고인돌 유적인 고창과 화순이 강화고인돌군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화순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화순의 세계유산 - 고인돌이지요.
고인돌은 순수 우리말입니다. 돌을 고인다고 해서 고인돌이라고 그럽니다.
이 고인돌 이라는 명칭 속에는 그 기능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모습을 묘사한게 고인돌이거든요.
한자 이름은 지석묘입니다. 지가 지탱할지, 돌 석에 묘이지요.
종류는 묘, 돌이 지탱되어 있는 묘.
한자어 이름 속에 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의 형태가 크게는 두가지 형태가 보여요.
우리가 머릿속에 그려서 생각되어지는 책상 모양의 고인돌과 그리고 커다란 돌을 그냥 올려놓은 고인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북방식 남방식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냥 탁자식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이라고 구분합니다.
전라도를 고인돌 왕국이라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스톤헨지, 피라미드, 아모이 석상이나 이런 거대한 돌이 인공을 가해 만들어진 형태를 거석문화라고 하는데요. 고인돌도 독특한 형태의 거석문화입니다.
고인돌은 중국의 복건 절강성부터 산동을 거쳐 요동반도 길림성
그리고 우리나라 전역에 그리고 일본의 큐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전세계 고인돌이 6만여기가 있는데 그중 4만여기가 우리나라 그리고 2만정도가 바로 전라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고인돌 왕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요.
선사시대 답사를 가면 해설을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역사이전의 시대를 선사라고 하거든요. 먼저 선을 써서.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뭘까요?
역사와 선사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문자로 된 기록입니다.
문자로 된 기록이 있으면 역사시대, 기록이 없으면 선사시대 이지요.
고인돌을 만들었던 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습니다.
선사시대인 것이죠.
선사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은 유물을 통해 유추합니다.
화순에는 한반도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 있습니다.
고인돌 덮개돌 길이 7.3m, 너비 5m, 높이 4m이며, 무게는 약 280톤으로 추정됩니다.
고창의 것도 200톤 정도의 무게가 있구요.
그런 실험을 했어요.
고인돌에 올려진 돌을 몇사람이 운반할 수 있겠는가.
돌을 떼는 채석장에서 언덕길을 내려와 고인돌을 옮겨오고 다시 제자리를 잡는 과정.
1톤당 장정 열 명의 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0톤이면 100명, 100톤이면 천명, 280톤이면 2천8백명의 힘이 필요하거든요.
2천8백명의 장정이 필요합니다.
아이들 빠지고, 할머니도 빠지고, 병자들 특수근무자들 빠지고 나야 그 인원이거든요.
2천8백이 집으로 돌아가면 가정이 있을것이고 곱하기 4하면 만명이 넘는 공동체가 됩니다.
문자로 된 기록이 없지만, 저 돌덩이를 보고서 여기에 얼마만큼의 사람이 살았다. 라는 걸 알게되잖아요.
사람이 그만큼 살아서 이런 돌을 움직여 무덤을 만든다.
명령체계가 있었다. 곧 계급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무덤은요.
죽은 이의 정치적인 능력보다 그 바톤을 이어받은 이의 힘을 나타내거든요.
그가 야 우리 아버지 죽었다. 무덤 만들자.
많은 사람들이 니가 뭔데 하지 않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만들거든요.
왜 이렇게 거대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기꺼이 이런 노동에 참여를 했을까?
제가 지금부터 얘기하는건 순수하게 제 생각입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의 집터를 조사해보면 90%가 불에 탄 흔적입니다.
불에 탔다는 것은 자연화재일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전쟁. 싸움으로 인한 폐허이거든요.
부족간의 전쟁, 집단간의 전쟁은 먹거리를 빼앗고 노예를 삼는 과정입니다.
지면 끝나요.
이겨야 하거든요. 이길려면 무기도 우수해야하지만 일단은 숫자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A부족이 B부족과 싸움을 하려고 할 때 상대의 숫자를 알고 덤비겠지요.
낯선 부족과의 싸움을 위해선 그곳을 미리 정탐하기도 할거구요.
A 부족이 낯선 곳의 C 부족과 싸움을 하려고 미리 정탐을 보냈어요.
정탐꾼이 가서 보니 C 부족 마을입구에 우리동네의 고인돌보다 열배는 큰 고인돌이 있어요.
침략하겠습니까..
안가지요.
아마 고인돌은 대외적으로 그 부족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고인돌 유적은 선사시대 중에서도 청동기 시대 대표유적입니니다.
우리가 청동기 청동기 하는데. 석기시대는 돌 석 해서 돌로 도구를 만들던 시대 하면서 잘 하는데,
청동에 대한 개념은 잘 안서 있는 듯 합니다.
먼저 동은요. 동 - 동전이지요. 백원짜리는 하얀색이니 백동, 십원은 구리색이니 황동.
만약 500원짜리를 파란색으로 만든다면 그게 청동입니다.
원래는 그 색깔이 아닌데 부식되어 그 색깔이 되었다고 합니다.
국회의사당의 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파란색인데 원래는 노란색이었다고 합니다.
광주박물관 로고가 태극로고로 바뀌기 전에 로고는 팔주령이었습니다.
여덟 개의 방울로 이뤄진 동그란 모양의 청동 의기.
이게 국보거든요.
화순에서 발견됩니다.
1971년에요.
청동기를 고조선 단군시대로 보자면 5천년 전이야기거든요.
5천년 전에 묻힌 유물이 1971년 세상에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1971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발견이라고 하는 무령왕릉이 발견된 그 해거든요.
동아시아 교류사를 새로 정립한도 할 정도의 세기의 발굴이라고 하는 것이니 당시 분위기도 한몫 했을 겁니다.
화순에서 발견된 청동유물도 참 사연이 드라마틱합니다.
문화재연구소 젊은 연구원 - 조유전 선생인데요.
이분이 전남 지표조사를 위해 전남도청을 찾아왔어요.
그때 도청 문화공보실 담당자가 마침 잘왔다며 박스 속에서 청동기 몇점을 꺼내보이며 이게 뭐냐고 묻더라는 겁니다.
깜짝 놀랐지요.
고고학을 전공한 역사학자 앞에 땅속에서나 아니면 박물관에서나 보았던 유물을 도청 공무원이 박스속에서 꺼내놓으니...
청동검, 형태가 다양한 청동방울, 청동거울 모두 합쳐 11개나...
화순에 살던 67세의 노인이 장마철 배수로 작업하다 발견한 유물.
그 노인의 눈에는 유물이라기 보다는 흙묻은 쇠붙이였겠지요. 실생활에 쓸모없는.
엿장수에게 팔아 엿으로 바꿨겠지요.
엿장수는 낯선 쇠붙이를 주물로 만들지 않고 도청에 신고를 했고요.
이게 당시 무령왕릉이 발견된 사회 분위기와 연계되었다 싶어요.
당시 현장을 다시 전문가와 함께 찾아갔고 하룻만에 지표조사 완료하고,
11점이 그 이듬해에 국보 143호 등재됩니다.
이어 2008년에 광주박물관에서 재조사를 하고 청동검 두 자루를 추가로 발굴했구요.
이게 광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2점중 하나인 화순대곡리 청동유물입니다.
선사시대는 기록이 없는 때를 말합니다.
문자 기록이 없으니 그 시대를 아는 것이 힘들어요.
대신 남겨진 유물보고 그 시대를 유추하는 것이죠.
청동검이야 무기류이니 익숙할 터이고
방울이나 거울같은 경우는 지금 시대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렵거든요.
이것을 왜 썼을까?
신과의 교감입니다.
일반 사람들을 지배하려면 나에겐 신이 내린 어떤 영험함이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게 청동거울이고 청동방울이었을 겁니다.
하늘에서 내리 쬐이는 빛이 청동거울에 번쩍하고 비치면 신이 계시를 저 지배자에게 내리는 것이고,
그때 울리는 방울소리는 하늘의 메시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우리부족의 지배자인 것이죠.
조유전 선생이 나중에 기록으로 남긴 글들이 있어요.
“이렇게 훌륭한 국보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하고 신고한 구씨와 엿장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